세상아래 둘 그리고 병태
'여보세요?'
미연은 수화기를 내려놓고서는 눈을 크게 끔벅거렸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나흘동안이나 소식이 없던 오빠였다. 미연은 갑자기 목이 메어오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미연아, 미안해. 오빠 일이 있어서 잠깐 지방엘 좀 다녀온다는 게 너한테 연락한다는 걸 깜빡했네. 오빠가 미안하다. 무슨 일은 없었지?
'정말 그러기야?!'
미연이 '빽' 소리를 질렀다.
'난 오빠가, 오빠가…… 또 싸우다가 다친 줄 알았잖아. 오늘 들어올 거야?'
그래, 이따가 저녁 때 집에 가서 맛있는 거 사줄 게. 그런데…… 울어?
'내가 울긴 왜 울어. 감기 걸려서……'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미연의 발치에 와서 머리를 부벼대는 건 병태였다. 미연의 얼굴은 마치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 내릴 것처럼 어둑어둑했다. 그녀는 거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가만히 병태의 보송보송한 털을 쓰다듬어주었다.
다행이야, 정말. 난 또 괜한 걱정을……. 오빠는 매일같이 나를 위해서 열
심히 사는데, 난 또 오빠한테 짜증만 냈어.
그런데, 오빠도 알어? 나도 날 위해서 공부하는 게 아니라, 오빠 위해 공부하고 있는 거……. 아빠도, 엄마도 아냐. 엄마 아빠는 이미 이 세상에 없으니까.
어쩌면 이건 서로가 자신을 위한 것일지도 몰라. 오빠는 내가 성공해서 자
신처럼 살지 않는 것을 보고 행복해할 거고…… 난 그런 오빠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더 행복해할 거야.
하지만 오빠. 자꾸 벗어나려 하지 마. 나 요즘 불안해져. 살얼음 위를 걸어다니는 것 같아. 오빠 먼저 벗어나면…… 단순히 말해서 죽던지 인생 포기하던지 하면 나도 그 자리에서 주저앉게 돼. 오빠도 행복할 수 없고, 나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러니까 내가 성공하는 모습보고 행복해 하고 싶다면 오빠도 오빠 인생에 신경 쓰면서 살아. 조금 덜 다치고 많이 안 싸울 수는 없는거야? 꼭 일선에 서서 각목이나 빠따같은 거 몸으로 다 받아내야 하는 거야? 그 회장인가 뭔가가 그러라고 그래? 그리고 오빠 머릿속에는 사랑하는 여자도 없어?
미련퉁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더니 두 뺨에 궤적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병태를 꼭 껴안았다. 병태는 주인의 품속에서 약간 버둥거리더니 연약한 숨결만 쌔근쌔근 몰아쉬었다.
잠시 흐느끼던 미연이 별안간 병태의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넣어 번쩍 안아들었다.
'흠, 오늘 오빠가 맛있는 거 사준다고 했는데 뭐 먹자고 말해 볼까? 갈비? 삼겹살? 생선회? 양식? 흐훗, 그런데 양식은 어째 울 오빠하구 매치가 잘 안된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래, 생선회 먹자고 해야겠다. 얼큰한 매운탕에 소주를 그냥…… 엇, 미안. 아직 강아지인 너한테는 등급보류 심사가 필요한 듯한 문장인데…… 어쨌든 생선회가 좋겠다. 회 먹어본 지도 오래되었으니까…… '
왈왈!
'뭐, 뭐라고? 네 것도 남겨 와야 된다구? 개인 너가 과연 생선회를 먹을 수 있을까?'
왈왈!
'뭐? 흐훗, 한 사라도 더 먹을 수 있다구? 흠, 이 누나가 오늘 인심 쓴다.올 때 주인 아줌마한테서 생선 대가리 얻어와 가지고 맛나게 죽 끓여줄께.'
왈왈왈!
'뭐시라고라? 사양한다고라? 내가 끓여주는 죽 먹는 것보다는 개사료 먹는 게 낫겟다고라? 흐으음, 그래봤어. 그럼 우리 오빠한테 끓여달라고 할까? 오빠 요리솜씨하나는 일품이잖아.'
왈왈!
'그럼 사양 않고 먹는다고? 짜식, 너 앞으로 나한텐 국물 한 방울도 바라지 마라. 크크크.'
참으로 사람 마음을 잘 알아주는 강아지였다. 미연은 병태를 껴안으면서 키들키들 거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나는데…… 뿔인가? 어쨌든 기분만 좋으면 됐
지…….
97년 7월 15일 서울 어느 횟집.
싱싱한 생선살이 미연의 도톰하고 주름진 선홍빛 입술로 한 점 한 점 들어가는 것을 우연은 넉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도 좀 먹어. 무지 맛있다.'
'어? 응……, 많이 먹고 있잖아.'
'무슨 소리. 오빠 쪽은 아직 건드려지지도 않았는걸.'
미연이 턱으로 건들지도 않은 생선회들을 가리켰다. 그는 뒷머리를 긁으며 약간 멋쩍은 듯 웃었다.
'너나 많이 먹어. 학교 보충수업 나가려면 힘들잖아.'
'차암 말 많네. '아' 벌려봐.'
미연이 서둘러 생선회 한 점을 깻잎에 싸서 우연의 입 앞에 갖다댔다. 그는 묵묵히 받아먹었다.
'우리오빠 착하네.'
'아주 갖고 놀아라.'
우연이 카운터를 호출했다.
'아줌마 소주 두 병이요.'
'오빠 술 못하잖아?'
'사실, 엊그제 김 회장 묘소에 좀 갔다왔어.'
'…….'
미연은 '산소는 왜?' 하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K호텔 회장이었던 아버지…… 그분이 외도하는 것을 안 친엄마는 미연이 초등학생 때 고혈압으로 쓰러져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고, 그때부터 우연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결국 김 회장과 의절까지 하고 나서 5년쯤 뒤에 김회장마저 죽은 후 따로 독립해서 동생인 미연과 단 둘이서만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오빠가 아버지 산소를 다녀왔다는 것은 뭔가 심경에 중대한 변화가 왔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미연도 잘은 모르지만 원래 부산에 살다가 서울로 올라온 이유는 우연이 속해있는 조직 보스가 근거지를 서울로 옮겼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번져 나오는 슬픔 때문일까? 우연의 반듯하고 서늘한 이마가 휑뎅그레하게 보였다.
미연은 쓰디쓴 술을 가슴속으로 털어 넣고 있는 그녀의 오빠를 초조하고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으흑, 씨팔.'
소주 두 병을 다 비워서 거나하게 취한 우연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미연은 오빠의 입에서 나온 욕설을 처음 듣는 터라 약간 당황했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언제나 강해서 자신에게 끈덕지게 따라붙는 남자들을 깨끗하게 정리해주던 오빠가 아이처럼 흐느끼는 것이었다. 그리고 깡패였지만 웬만해선 욕설을 입에 담지 않던 오빠가 욕지기를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내는 김 회장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씨팔! 아니더라구.
날 위해서…… 강실장 개새끼! 드러븐 년.'
'오빠, 왜 그래? 응?'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새엄마인 강실장을 욕하는 우연과 그 앞에 있는 미연에게로 모아지자 미연은 황급히 우연을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우연은 계속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안되겠다. 일단 나가자.'
미연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식당 밖으로 우연을 부축해서 나갔다.
'오빠 도대체 왜 그래?차는 여기 놓구가자'
우연은 속이 뒤집히는 지 집에 오는 내내 끄응 거리는 신음소리를 냈다.
미연은 집에 오빠를 대충 데려다 놓고는 위장약을 사러 나갔다.
바보……, 술도 못하면서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미연이 약국에 들르던 그 시각 비척대는 걸음걸이로 자신의 방까지 걸어 들어가 아무렇게나 옷을 벗어 던졌다.
웁, 으윽
심한 구토기였다.
원래 술 체질이 아닌데다가 며칠동안 먹어둔 게 없어서 그런지 속이 심하게 울렁였다.
윽
그는 화장실로 뛰어들어가서 좌변기에 머리를 쳐 박고 구토를 해 댔다. 허여멀건한 물이었다. 꽤 오랜 시간동안 좌변기에 머리를 박고 있었는데도 구토기가 가시질 않았다.
대강 입을 헹구어 내고 돌아서는 순간 또다시 위에서 뜨겁고 쓰린 것이 울컥울컥 올라오는 것이었다. 다시 좌변기에 대고 토악질을 하는데 누군가 등을 두드려주는 것이었다.
'미연이구나. 이런 모습 보여줘서 미안하다. 오빠가 너무 나쁜 일이 많아서…….'
일어나서 칫솔질을 하는 그에게 미연이 겔포스를 내밀었다.
'마침 믿음약국이 열려있더라고.'
'믿음약국이면 꽤 먼 거리일텐데…… 밤길에 안 무서웠어?'
'내가 애냐? 하나도 안 무서웠다. 혹시 오빠같이 음흉한 아저씨가 너무 예쁜 날 유괴해 가면 어쩌나 걱정은 했지…….'
'우, 우우읍. 흐훗 어디서 그런 궤변을…….'
다시 구토증이 밀려왔지만 헛구역질에 가까운 것이었다.
'겔포스 마셨는데도 속이 화끈거려?'
'응, 기분이 고약하네. 술체질이 아니라 그런가?'
'안되겠다. 침대로 가자. 내가 좀 봐줄게.'
'괘, 괜찮아.'
'내가 이래도 의대지망생이잖아. 언젠가 한번 TV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그, 그런가?'
'잔말말고 누워.'
그녀가 베개를 툭툭 두들겼다. 병태가 다가와서 무슨 일인가 하고 혀를 반쯤 내민 채 바라보고 있었다.
동생에게 미안했지만 그는 군소리 없이 미연이 시키는 대로 다리를 좍 펴고 반듯하게 누웠다.
미연은 양손을 포개어서 늑골 밑에서부터 누르기 시작했다.
'어디가 제일 아퍼?'
'으윽 거기 배꼽 위쪽에 위 있는 데……'
'여기, 여기 말이지?'
그녀가 그곳을 누르자 우연이 단말마 비명을 질렀다.
'여기가 막혀서 그래. 그래서 알코올이 흡수되지 못하고 고여있기 때문에 머리랑 눈이 타는 듯이 아프구…….'
'흐훗, 미연이 의사자격증 줘도 되겠다.'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 속에서도 우연은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은 말하지 마.'
미연의 표정에선 장난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 진지해서 잠시 어색한 분위기였다. 미연은 검지와 엄지 사이의 접합부분을 눌러주기도 하고 뒤통수에 움푹 파인 부분을 손가락으로 여러 번 눌렀다 떼기를 반복했다.
미연이 그에게 응급처치를 하자 두통과 안통은 서서히 그의 몸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고맙다. 이제 안 아픈 것 같다.'
'아냐, 아직 배 쪽에 뭉친 게 덜 풀렸어.'
'힘들잖아. 그만해도 돼.'
하지만 미연은 고집스럽게 배를 손에 힘을 주어 쓸어 내렸다.
'아 잠 온다. 어쩌지, 미안해서…….'
'별 소릴 다 하네. 잠 온다는 건 좋아졌다는 표시야. 푹 자두면 내일은 하나두 아프지 않을 거야.'
'미연아…….'
'응?'
'내일은…….'
'?'
'꼭 아빠 제사지내러 가자.'
'아빠' 라고?? 오빠가 '아빠'라고 불렀어. 의절까지 했는데…… 며칠 전까지만, 아니 아까 전에도 '김 회장' 이라고 불렀는데.
'왜 그렇게 놀라? 오빠는 아빠한테 아빠라고도 못하냐?'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마침 내일이 토요일이니까 부산가자구. 강 실장네.'
'새엄마 집으로?'
'응, 나 졸려 더 이상 얘기 안 할래. 잔다.'
흐으음.
우연은 눈감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코를 드르렁 하고 골았다.
병태만이 철없이 굴었다.
'나 먹을 건 안 갖고 왔냐?' 하는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