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6월 20일 YS는 초산테러를 당했다.
김영삼(YS) 초산테러가 발생한 시점은 1969년 6월 20일 이다. 이날은 김영삼 의원이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를 대상으로 대정부질문을 한지 꼭 1주일 만에 발생했다.
1969년 가을 정국은 온통 삼선개헌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던 시기다. 3선개헌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6월 11일 임시국회가 열렸고, 이틀 뒤인 13일 YS는 우리나라는 독재국가이며, 3선개헌은 박정희의 종신집권 음모라고 선언했다.
특히 YS는 “3선개헌 음모는 제2의 쿠데타다. 5․16 쿠데타에 이어 다시 제2의 쿠데타다”며 “쿠데타 중심은 중앙정보부이며 지금 중앙정보부는 국민의 원부”라고 박정희 정권을 공격했다.
당시는 5․16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부르던 시절이었다. 공포의 상대인 박정희와 중앙정보부를 상대로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시절이었다. 하지만 YS는 5․16을 쿠데타로 명명하며 박정희를 직접 겨냥했다.
이 일이 있은 후,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고흥문 신민당 사무총장을 서울컨트리클럽으로 불러냈다.
김형욱은 고 총장의 배를 손가락으로 푹 찌르면서 “김영삼이 배때기에는 칼이 안들어 가나”라며 노골적으로 협박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YS는 청진동에 있던 음식점 장원에서 유진오 양일동과 3선개헌 반대전략을 숙의하고 돌아가던 길, 집 앞에서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집 앞에서 YS의 눈에 들어 온 건 3 명의 사내였다. 이들은 YS 차량이 보이자 그들 중 2명이 싸우면서 차를 막아섰다. 다른 한 명은 YS 차량으로 돌진해 차 뒷문을 열려고 했다. 차 문이 열리지 않자, 오른 손에 든 병을 차량을 향해 내 던졌다.
공업용 초산이었다. 괴한이 던진 초산 병에 자동차 차체의 철판은 녹아 내렸고, 초산이 흘러내린 콘크리트 바닥마저 구멍이 패이며 부글부글 끓었다.
초산테러가 발생하자, 정상천 서울시경 국장은 직접 YS와 만나 “내가 범인 꼭 잡겠다”고 큰소리 쳤지만, 끝내 테러의 진상은 역사 속에 묻혔다.
당시 YS차를 운전했던 김영수(76) 씨는 이와 관련해 "초산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김형욱 정보부장 때 일어났다. 그 때 YS 차를 운전했는데, 그러니까 YS가 차를 타고 상도동 집 방향으로 코너를 돌 때 앞에 사람들 셋이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을 때리고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YS의 호기심을 발동 시켜 차에서 내리게 하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YS는 내리지 않았다. 또 YS는 항상 차 문을 잠그고 다녔다. 그래서 테러범들이 차문을 확 잡아 당겼지만 열리지 않았고 차 뒤에서 초산통을 던졌는데 그 때 초산이 묻은 부분에 구멍이 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1969년 6월 20일 서울 상도동 자택 근처 골목에서 세명의 괴한으로부터 초산테러를 당한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가 초산에 녹아 페인트가 벗겨진 자가용 승용차 뒷부분을 가리키고 있다.
1969년 6월 19일 밤 10시 5분경,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의 승용차가 상도동의 자택 근처 골목길에 이르렀다. 정국이 삼선개헌 문제로 소란해서 여느 때와 같이 밤늦게 귀가하던 참이었다.
길옆에 앉아 있던 작업복 차림의 청년 3명 중 2명이 갑자기 차 앞으로 튀어나오더니 싸우기 시작했다. 앞이 가로막힌 승용차는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나머지 한 명의 괴한이 승용차 뒤로 돌아오더니 김영삼이 앉은 쪽 차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 왠지 모르게 김영삼은 차에 타면 으레 문을 안에서 잠그는 것이 습관화돼 있었다. 야당 의원을 오래 하다 보니 박정희 정권의 폭력성에 대해 방어하는 잠재의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괴한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이 수류탄이라고 여긴 김영삼은 "빨리 속력을 내서 달려라"고 소리쳤다. 운전사가 클랙슨을 누르면서 가속 페달을 힘껏 밟자 싸우던 2명은 엉겁결에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차 옆에 있던 괴한이 손에 든 물건을 차창에다 내던졌다. 그것은 나중에 자동차의 페인트칠이 다 벗겨질 정도의 강초산으로 밝혀졌다. 만일 자동차 문이 열려서 얼굴에라도 투척됐더라면 아찔한 일이었다. 얼굴에 공적 활동을 하기 어려울 정도의 치명적 상처가 났을 것이 뻔했다. 김영삼은 당연히 분노했다.
다음날 국회 본회의장, 김영삼 의원이 신상발언이 있다며 단상에 올랐다. 그는 박정희와 김형욱을 싸잡아 맹렬히 비난했다. 김영삼의 박정희에 대한 정면 대립이 본격화되는 순간이었다.
"… 김형욱이는 제2의 최인규(4·19 때 내무장관으로 사형당함)와 같고, 민족반역자다, 이러한 무리가 이 땅위에 있는 동안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살 길이 없다라는 얘기를 한 사람입니다. 나에 대한 테러는 여기에 대한 보복이라 생각합니다. … 김영삼이를 죽이기 위해서 정보부에서 음모한 것입니다. …
박정희씨는 독재자요. 아무리 권력을 가졌다 해도 권력을 휘두르는 자, 칼로 세운 자는 반드시 칼로 망한다고 하는 성경 말씀이 있어요. 힘을 가졌다 해서 힘을 행사하는 자 반드시 그 힘에 의해서 망할 것입니다."
첫댓글 그..렇긴 한데요...그 후의 행보가 좀 그랬다는 거지요..ㅋ...이정희의 다카키 만큼 꽤나 센세이션 이었겠어요...그렇게 용기있으신 분이 훗날은 왜 그러셨을까..
90년 3당합당에 대해서는 제가 쓴 글이 있으니 참고하세요.
필요하겠죠
그건 참 짜증나는일이지만
근데 노통을 영입한게 영사미고
노통 출마 당시는 아이엠에프 지는지 얼마 안된 뒤라서
영사미의 뻘짓이 크게 안들어 낫었던거 같에요
그래서 노통과 영사미의 만남 성사가 어렵지 않았던거 같은데
이번은 다르죠 문재인 후보는 영삼이랑 관계도 없고
굳이 찾아가서 고개 숙일 필욘 없다고 봐요
문 후보는 안찾아간다고 천명했으니 선거 전까진 안갈듯 싶어요. 하긴 시간도 없어서 못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