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관촉사에 새로지은 건물들의 현판을 다쓰셨는데 해가 가기 전에 전해 주셨으면 한다는 말씀이셨다. 지난번 그일로 사부님 모시고 관촉사에 다녀 왔으니 이번에도 다녀 와야지...
제가 모시고 가겠다고 말씀드리고 인취사 들려 사부님 모시고 관촉사에 들렸다.
민족의 대이동의 설날 전날이라 서둘러 다녀와야 한다는 생각에 발거름이 되다....
관촉사에 이르니 주지스님이 반가이 맞아 주신다. 다 쓰러져 가던 이름만 남은 영광 뿐이던 이곳을 그래도 멋지게 다듬어 놓았으니 중창주 소리를 들으실 만한 분이다. 학승이며 선승이신 사부님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막걸리 타입스님이랄까... 그래도 꿈임없고 정겹다.
투박한 멋을 지닌 관촉사관음이 계신 이곳과는 참 잘어울리는 스님이란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난다. 사부님께서 말씀을 나누는 동안 얼릉 뛰어나와 관촉사 관음을 보러갔다.
따사로운 겨울햇살이 내리비추는 봄날같은 늦겨울 아침... 유난히 흰빛의 관음보살의 얼굴이 더욱 맑고 희게 빛난다.
국민학교 5학년때던가 .... 여행광 이시던 부친의 손을 잡고 이곳에 처음 찾아왔던 때가 눈에 선하다. 처음으로 이 부처님 앞에 섰을 때 오금이 저려 얼어붙고 말았다.
얼굴만 무지 큰 가분수의 부처님은 그 특유의 부리부리한 눈을 뜨고 안광을 발하는 흰빛얼굴로 자그마한 꼬마를 내려보고 계셨다.
그때 내가 느낀 느낌은 위압이엇을 것이다
뭔가 커다란 힘에 압도 되어 버린.... 그리고 무서움....
그 뒤에 여러차래 이곳에 들렀지만 은진미륵 하면 으레이 떠오르는 그 부리부리한 눈과 몸에 비해 엄청큰 가분수의 흰빛 얼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철이들고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며 우리 유산을 아름다음으로 보고자 했던 그때에도 역시 은진 미륵은 균형이 잘 맞지 않는 가분수의, 좀 못미치는 그런 부처님으로 언제나 나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런 나의 서양적 미의식에 기초한 우리 유물 보기에 임제의 할을가한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 미륵불 앞에 서 있는 석등의 발견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미륵의 거대함에 압도되어 그 앞에 있는 석등은 그냥 지나치기 일수 이다. 나 자신도 여러번 관촉사에 갔었지만 그 앞에 석등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날인가 무심히 지나치던 석등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 석등의 아름다움에 훔뻑 빠져 들고 말았다.
이 관음이 만들어진것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석등으로 그 규모가 자못 크고 웅장하며 힘이 넘쳐 흐른다. 잘 다듬어진 복련위에 중대석이 놓이고 그 위에 앙련, 그위에 잘 다듬어진 판석을 놓고 사면에 기등을 놓아 등을 넣을수 있도록 하고 옥개석을 얹고 그위에 다시기둥과 옥개석을 다시 올려 이층의 멋들어진 모양을 만들었다.
옥개석 위에는 보주만을 올려 아주 깔끔하게 마무리를 하였다. 전체적인 균형이 잘 맞고 힘이 넘치는 고려시대 대표적인 석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힘의 아름다움 안에는 섬세함을 잃지 않아 중대석의 몸체에 세줄의 띠를 두르고 각각의 면에 연화문을 앙징스럽게 조각해 넣었으니 참으로 웃음이 절로난다.
또한 앙련을 깍은 솜씨를 보면 마치 찰흙으로 빚어 놓은 듯하며 뚜렷한 윤곽과을 가지며 그 부드러운 곡선의 앙련 위에 직선의 사각 판석을 올려놓는 균형미는 가이 일품이다. 그 판석의 미는 마치정림사지 오층탑을 연상 시킨다...
그렇지 이곳이 백제땅이지... 정림사지 오층탑을 만든 백제의 장인들의 후예가 아니던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이번엔 고개를 돌려 관음을 다시 올려다 보았다.
이전까지 왜 '저렇게 만들었을까...'라고 생각했던 느낌이 일순에 걷치고 관음은 웅장하고 거대한 감동으로 내게 다가왔다. 저렇게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균형미 넘치는 석등을 만든 석공의 솜씨로 만든 불상이 우리가 생각하는 부조화 또는 못미침...으로 남는 그런 불상을 만들었을리 만무한 것이다. 그러한 분석은 후일의 점수에 의한 것이고 관음의 감동은 돈오처럼 일순에 다가온 느낌이다.
이 관음은 고려 광종대왕의 명에 의하여 만들어진 국가적 사업이다. 입상으로 전무후움한 18m의 거대한 석불을 만든 것이고 또한 이 돌은 이 자리에 있던 것이 아니라 원처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돌을 옮기는데에만 얼만나 많은 인력과 시간이 들었을까 하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할 문제이다.
광종이 누구인가? 피비린내 나는 삼한의 통일의 위업을 완성한 고려태조 왕건의 아드님 아니신가? 그리고 그 대 고려를 강력한 반석위에 올려 놓으신 분 아니신가? 그런 광종 대왕이 왜 하필 이곳 놀뫼(논산의 옛이름)에 이같은 거대한 불사를 일으켰는가?
이는 바로 이 관세음 보살이 바라보고 계신 놀뫼들을 먼저 생각해야할 것이다. 놀뫼의 탁트인 너른 벌판이 바로 황산벌이다. 금강의 하구로서 삼국시대부터 이곳을 찾이 하려는 접전이 끊이지 않던 곳이다.
그만큼 경제적 요충지 였다는 말이다. 백제이후 이곳은 백제의 젖줄이요. 백제사람들의 기반과 같은곳이다. 그러기에 이곳은 백제인의 기상이 살아 숨쉬는 곳이요, 백제인은 이곳에 마지막 사활을 걸었다...
사랑하는 가족의 목을 치고 달려나가 쓰러져 가는 백제의 배수진을 쳤던 계백장군이 최후의 보루로 삼은 곳도 이곳 황산벌이요. 백제의 후예임을 자칭한 후백제의 신검이 최후를 마지한 곳도 바로 이곳 황산벌이다. 자신의 아들에게 비참하게 밀려나 자신의 손으로 그 제국을 닫아야했던 견훤왕도 끝내 무치고 싶어하던 곳도 다름아닌 바로 이곳 황산벌이다.
이렇듯 황산벌은 백제의 젖줄이요, 최후의 보루이다. 고려가 이땅을 찾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했던가? 광종은 그러한 백제의 피비린내를 앃어버리고 이곳을 고려의 품에 안아야할 절대의 당위성이 있엇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로 광종은 이곳 황산벌이 내려다 보이는 놀뫼에 위로의 화신인 관세음 보살을 세워야 했으리라.
그러나 나라가 바뀌었다고 하루아침에 백제인이 고려인이 될수 있으랴....
이곳 놀뫼사람들은 자신들이 백제의 후예이고 언젠가는 잃어버린 제국의 영화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리라.... 그러기에 위로의 화신인 관세음 보살의 모습에 강력한 힘의 상징 또한 함께 새겨 넣은 것이 아닐는지.... 위로는 하되 이러한 거대한 힘앞에서 스스로 무릅을 꿇을수 있도록 한편으론 힘을 과시하는 듯한 모습이다.
그러기에 관촉사 관음은 관세음 보살의 부드러움과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위압적인 모습이 동시에 들어있다. 부처님의 얼굴은 크고 우락 부락하며 또한 일부러 얼굴부분에 흰돌을 사용하여 안광이 비추도록 만들어 졌다. 일전에도 강조하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 부처님은 감상의 부처가 아니요 경배의 대상이다.
부처님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부처님이 아니라 늘 업드려 위로 바라보는 부처님이다. 그러니 우리나라 부처님들 특히 입상은 두상이 클 수밖에 없다. 한번이라도 부처님전에 업드려 절을 올리고 부처님을 올려다본 사람이라면 그 절묘한 비례의 균형미를 알수 있다. 이것을 늘 서양미학적 시각으로 칠등신 팔등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관촉사 관음 또한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면 그 얼굴이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늘신하다.
이러한 힘의 부처를 만드는 데에는 단순함이 필요하다. 힘찬 부처를 만들면서 요리조리 멋을 부린다면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몸통도 과감하게 처리하였다. 또한 이힘의 부처님의 백미는 그 발에 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부처님(특히 입상)을 보면 발에 집착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것은 아마도 일본의 불상들을 공부하며 생긴 버릇인 것 같다. 일본에는 유난히 사천왕이나 십이지신상등의 신장들이 많다. 그들의 발모양이 모두 각양각색이고 또한 매우 힘차면서 섬세한 역작들이 많다) 그 힘과 크기에 알맞는 두툼한 발로 천근의 무게를 지탱하는 그 발의 모습을 보면 실로 입이딱 벌어질 지경이다. 나는 이 부처님의 발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 관음의 발이 힘의 상징이라면 손은 섬세함의 상징이다. 포동포동한 손이 너무나 부드럽게 멋을 부린 듯 부리지 않은 듯 한송이 연꽃을 잡고 있는 수인은 가슴이 시릴만큼 아름답다.
누가 이 부처님을 투박하고 토속적이라 했는가....어깨에서 발끝까지 흘러내린 가사의 선은 멋을 부리지 않았지만 무척 자연스럽다. 쓰고계신 관을 한번 보라..머리윗부분은 마치 자연석을 그대로 쓴것같이 거칠게 깎았으나 관두가 시작되는 부분에서는 팔각으로 미끈하게 깎고 다시 이중으로 턱을 주었는데 그 정도가 무척 자연스럽다. 또한 관의 판석에 새겨넣은 연꽃또한 품위있고 세련되었다. 한마디로 관촉사 관음은 부드러움과 강함 거칠음과 섬세함 투박함과 세련됨의 극치이다..
광종은 나라의 기틀을 다지며 이곳 놀뫼를 품어 안으려는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그러한 과정에서 만들어진 상징물이 이 관촉사 관음 일 것이다.
그러한 관촉사 관음을 이곳사람들은 줄곧 미륵이라 불렀다. 미륵은 모두가 알다시피 불교의 메시아다. 도솔천에 살고계신 미륵이 하생하시는 날 세상은 아마게돈을 마지하고 새로운 불국토가 될것이라는 믿음... 이 미륵신앙은 늘 현세에 억눌리고 억압받고 고통받는 그런 민초들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까꾸어져 왔다.
현세의 어려움을 안고 사는 민초는 늘 미륵이 하생하시어 이 세상을 뒤집어 주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멀리는 궁예의 미륵에서 가깝게는 동학의 후천개벽까지 세상을 바꾸려는 혁명의 노력들은 모두 이 미륵신앙에 기대고 의지하지 않았던가.... 백제의 후예로 쓰러져간 제국의 영화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이곳 놀뫼 사람들에게 관음은 곧 미륵이다. 위로의 관음이나 왕권의 위압의 상징이 아니요. 자신들의 세상을 바꾸어줄 미륵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실예로 이곳 놀뫼는 아기장수 설화가 유난히 많다.
관음앞에서서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어 있는데 사부님께서 나오신다.
"예야 그만 서둘러 가자 길막힐라"
"사부님 근데요 왜 관음을 미륵이라 불렀을까요?"
"글쎄다... 아픔이 많은 땅에서는 관음이 곧 미륵이요 미륵이 곧 관음인게지..."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디 사바하.....
[남원에서 익산으로 가서 화산 붕어찜을 즐기고 들린 나의 관촉사 답사기는 맛있는 세서재님의 글로 대신한다.]
첫댓글 제답사기 보다 더욱 맛나는 동호회 '세서재'님의 답사기 입니다.
한송이 연꽃을 잡고 있는 수인은 가슴이 시릴만큼 아름답다. ....표현에 고개가 끄덕여지는데요?^^* 세서재님의 답사기 찬찬히 읽으며 함게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감사히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