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날씨가 쌀쌀하다. 늦은 시각, 승강기 안에서 만난 여고생은 얇은 블라우스에 조끼, 치마를 입고 있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나까지 한기를 느끼게 만든다.
겨울 웃옷은 아직 입기에 이르고, 마땅히 걸칠 거리가 없다고 한다. “가디건을 입으면 어떠니?” 하였더니 학교에서도 그러라고 한단다. 하지만 검정색만 허용한다고 한다. 그 학생의 교복은 조끼와 스커트가 어두운 밤색이라서 검정색 가디건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가디건을 걸치지 않고 떨고 다니는 것이다.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길을 걸을 때마다 눈에 띄는 학생들의 교복이 안타깝다. 한창 뛰어다닐 나이인데 신축성도, 흡습성도 없는 합성섬유로 만들어져 있는 교복. 옷 모양은 또 얼마나 요즘 시대의 감각에 뒤떨어져 있는가. 학생들은 교복을 조롱하고 혐오한다. 겨울교복은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비해 품질이 떨어져서, 부직포라느니 펠트라느니 하며 비웃는 이야기를 여러 학생들에게서 들었다.
올해 경기도 평택 ㅎ중학교에서는 교복을 바꾼다고 하여 학생들이 잔뜩 기대를 하고 있는데, 과연 얼마나 학생들의 사랑을 받을지 궁금하다. 서울 목동에 있는 한가람 고교는 여름에 흰색 반소매 웃옷에, 짙은 푸른색 반바지를 교복으로 입는다고 한다. 여학생이 반바지 교복을 입는 학교는 드물다.
웃옷은 공개입찰을 통해 4개 업체가 경쟁하고, 학생들의 선호도조사를 통해 최종 결정하여 학교에서 공동 구매했다. 바지는 각자 색깔만 맞추어 준비한다고 하니, 이 이야기를 듣고서 억울해하고 부러워할 학생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한가람 고교와 다른 중고교의 차이는 무엇일까? 한가람 고교는 교복을 결정할 때 학생들과 학부모의 의견을 수렴했다. 요즘은 이런 방식으로 교복을 결정하는 학교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바로 이러한 절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신과 관련된 일인데도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없고, 의견을 존중 받지 못할 때, 학생들은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경험할 수 없다. 언제까지나 수동적인 주변인이 되어 겉돌 뿐이다. 나아가 서로를 존중하지 않는 관계는 폭력적인 양상으로 변하기 쉽다. 그리하여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수직적이고 일상적인 폭력이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게 되었다.
우리 학생의 현실을 보자. 학생인권운동의 역사는 20년이 넘지만 아직 그 영향력은 미미하다. 자신에게 인권이 있다고 외치는 학생들은 퇴학을 당하거나, 전학을 강요 받기도 한다. 여전히 학생은 인격의 주체가 아니라 통제와 규제의 대상으로, 의사결정 과정에서 발언권이 없다. 학생과 학생, 학생과 교사, 교사와 교사, 교사와 교장 사이의 의사소통의 단절, 부재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민주주의가 각 사회제도 속에 자리잡고 사람들의 생활에 사회화된 규범으로 뿌리내려 개개인의 가치판단과 행동방식에 녹아 들기까지는 역사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일제강점기와 전쟁, 그리고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여전히 봉건적인 문화를 벗어나지 못한 채, 다른 한 편으로는 강력한 성장중심 사고의 틀에 갇혀 있다.
특히 권위주의적인 교육 풍토와 입시 위주의 교육 여건 속에서, 학교는 왜곡된 의사소통이 일어나는 공간의 극단적 사례가 되는 것 같다. 학생들 개별적으로는 인권에 대한 인식과 기대가 날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지만, 대다수 학교 현실에서는 변화되는 학생들의 요구를 수용할 합리적, 실질적 절차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형편이다.
이제는 권위적인 사회에서 유지되었던 규범을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질서로 전환시켜야 할 필요를 많은 이들이 느끼고 있다. 새로운 질서는 나와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문화를 형성하는 과정이 될 것이고,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폭력을 줄이는 데에도 한 몫을 할 것이다. 또한 의사소통 부재의 구조를 이용하여 이익을 챙기는 무리들을 제어할 수 있다.
의사소통의 목적은 분쟁이 아니라 이해와 합의에 있으며, 나와 너를 가르고 나만을 긍정하는 사고에서 벗어나 다원성을 인정하는, 보다 성숙한 민주사회로 진행해나가는 데에 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옷을 입고, 다른 이들과 손잡은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