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93호 미디어 칼럼 [시청자 미디어센터는 ‘역사보관소’]김 성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
작성자 미디어센터 등록일 2013-07-12 17:20:57
시청자미디어센터는 ‘역사보관소’
김성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
20년 전 단체로 유럽여행을 간 적이 있다. 파리에서 마침 지하 하수시설을 관광하게 됐다.
높이가 3~4m가 넘는 거대한 하수관로가 도시 곳곳에 뻗혀 있었는데 100년 전에
이를 건설하였다는 설명을 듣고 깜짝 놀랐었다. 관광자원화 할 만 했다.
때마침 필자는 아날로그 캠코더를 가지고 있어서 열심히 파인더에 담아두었다.
1991년 이스라엘에서 걸프전 취재를 하면서 달랑 카메라 하나 가지고 가
미사일이 떨어진 피폭지점을 촬영하면서 아쉬움을 많이 느꼈기 때문에 그 직후 구입했던 것이었다.
이후 국내외 여행이나 취재를 다닐 때면 항상 챙겨가는 필수장비 1호가 됐다.
국내외 여행때 챙겨가는 필수장비 1호는 ‘캠코더’
2~3년이 지난 뒤 파리에 함께 동행했었던 당시 KBS 주 원 기자(현재 광남일보 주필)가
하수시설 사업 관련 보도를 하겠다며 그 영상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필자는 편집을 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필름 채 넘겨주었는데, 그것이 편집되어 뉴스에 나가게 됐다.
뿌듯한 생각이 들었다. 이후 디지털 캠코더로 장비를 바꾸고, 편집능력을 갖추기 위해 오려붙이기,
문자와 음악삽입 등을 비롯하여 코덱 교육까지 받았으나 자꾸 까먹는 바람에 마스터하지 못하고 말았다.
최근에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다보니 편리한 이걸로 촬영하는 기회가 늘어나는 대신
캠코더를 휴대하는 기회가 줄어들었지만 4계절마다 한 차례씩 특정 지역에 대한 영상을 담아두는 일은 계속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배경이나 생태계의 변화, 수목의 크기 등이 바뀌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배승수 센터장이 취임한다고 하여 시청자미디어센터를 방문했다가 과거 광주시청에서 국장을 역임했던 김병원 선생을 만났다.
김 선생이 정년퇴직 후 동영상 촬영을 취미로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가 직접 촬영해 편집한 ‘하서 김인후 필암서원(장성) 제향(祭享)’ 동영상도 보게 됐다.
전통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요즈음 그가 제작한 이 제향의 모습은 수백년이 지난 뒤,
그 형식이 바뀌어진다고 하더라도 21세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록문화 자료로는 최근 유네스코에 등재된 5·18기록 자료로부터
조선왕조실록, 삼국유사, 삼국사기, 미암일기 등과 수많은 목판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공공기관의 기록보관은 예전처럼 치밀하지를 못했다.
5·18 당시의 군사기록은 있었지만 정부의 회의기록은 발견되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국무회의나 중요회의의 속기록이 작성되지 않기도 했다.
투명성의 기초가 될 기록문화가 조선시대보다 뒤떨어진 것이다.
격동기 거치면서 기록관리 의식 낮아져
필자의 경우도 우리나라의 낮은 기록관리 의식 때문에 곤혹을 치룬 경험이 있다.
전남대병원이 개원 100주년을 맞는 2010년에 ‘전남대병원 100년사’를 출간하기로 했는데
필자가 그 책임을 맡았다. 전남대병원은 이제는 특수법인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과거에는
전남대 의과대학 부속병원이었다. 따라서 모든 기록은 의과대학으로 넘어갔다.
의과대학은 중요한 기록을 다시 전남대 본부로 보냈다. 그러나 의대와 병원 기록은 한 창고에 박혀
찬밥신세로 지세다가 이 창고가 다른 용도로 사용되면서 하나둘 사라지고 말았다.
뒤늦게 기록물관리에 관한 법이 제정되어 자료들이 체계적으로 보관되기 시작했으나
1945년부터 1980년대까지의 병원자료는 개인이 보관한 것 외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하여 문서자료와 영상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대전의 국가기록원, 대한뉴스 자료를 보관한
서울의 영상기록원, 일제시대 신문을 소장하고 있는 국사편찬위원회·국립도서관·국회도서관 등을 헤맬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1940년 전남대병원의 전신인 도립 광주의원이 ‘광주의원연보 제 1호’를 발간한 사실을 확인하고
수소문한 끝에 당시 병원장이이었던 일본인의 손자(일본 나가사끼대 교수)로부터
그 원본을 기증받을 수 있게 돼 1910년 개원 당시부터 1939년까지의 병원의 업무, 의사들의 광주생활 등을
소상히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45년 해방 후 좌우익 갈등시대, 6·25 전후의 병원활동 등은
자료 확보부족으로 부족한 수준에서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도 기록의 보관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실감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개인의 기록들도 충분하지가 않다.
그런 가운데서도 2000년에 국가기록원이 발굴한 한 할머니의 기록물은
다섯명의 자녀 한명씩의 이름이 새겨진 육아일기와, 6·25 직후 종이 구하기 힘든 시절,
버려진 악보의 뒷면을 이용해 글과 그림을 그린 동화책이었다.
서울대 환경대학원의 김안제 교수는 평생동안 136항목의 내용을 기록한 ‘한 한국인의 삶과 발자취’라는 문집을 냈다.
그는 평소에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와도 꼭 시간을 내어 하루의 일을 기록했는데
이 문집에는 '45년 11월1일 처음으로 만화책 봄(홍길동), 57년 6월30일 첫 중국음식(원효로 중국집),
69년 4월10일 텔레비전 구입(창신대 집에 흑백용).' 같은 생애일지와 업적 등 기록을 빼곡이 정리했다.
최근에는 외상장부, 각종 공연·전시 팸플릿이나 영수증만 수십년간 모아온 사람도 소개되기도 했다.
일본의 경우는 워낙 기록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개인들의 기록을 모은 자료들을
지방문화관에 진열하고 어린이들에게 열람시키고 있다고 한다.
다양한 기록장비 대중화 – 대중참여 용이해져
기록은 미래의 역사자료이다. 자신의 생애를 완전히 기록한다는 건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개인들의 불완전하나마 작은 기록들을 모으다 보면 사회를 재구성해볼 수 있다.
통상적인 정부의 기록보다 이것에 신뢰성을 더 주는 것은 사심없는 개인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다양한 기록장비가 대중화하면서 문자에만 의지했던 과거와 달리 훨씬 다양한 기록이 가능해졌다.
사진이 그러하고 동영상은 더욱 생동감을 준다.
그리고 그 영상의 배경 또는 구석에서 과거 시대의 한 모습을 찾아보는 재미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내가 만들어 놓은 기록물은 또 원천 소스로의 가치를 갖는다.
현대는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Use)’시대이다.
한가지 소재를 가지고 다양한 장르에서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먼 미래에는 이것이 단순한 영상에만 머무르지 않고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시나 소설의 소재로 발전할 수 있다는 뜻이다.
‘100년 앞을 보려면 100년 뒤를 보라’는 말이 있다.
지난 역사를 보면서 미래를 설계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동영상은 그래서 기록으로서 특별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시청자미디어센터는 전문 역사가가 아닌 대중이 기록작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중요한 ‘역사보관소’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