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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부천개혁교회에서 2024년 겨울사경회를 부천개혁성경신학교의 '종교개혁사' 강의를 병행하여 '종교개혁시대의 신학과 신앙 : 종교개혁 이야기' 주제로 1월 13일(토요일)-14일(주일)에 가지며 강의한 내용입니다. 강사는 고경태 목사님(주님의 교회, 조직신학 교수)입니다. 여덟 번째 시간인 8강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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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시대의 신학과 신앙
- 종교개혁 이야기 -
목 차
1.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개혁 진영이란
2.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
3. 종교개혁 대략
4. 때가 찬 종교개혁
5. 루터의 종교개혁
6. 칼빈의 종교개혁
7. 잉글랜드의 종교개혁
8.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9. 재세례파와 신령주의(신비주의)
10. 로마 카톨릭주의와 세르베투스주의(소시니안)
11. 도르트 총회(1618-1619: the Synod of Dordrecht (Dort) in 1618-1619)
12.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1649)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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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사경회 첫째 날 : 여덟 번째 시간 -
8강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1560년, 스코틀랜드 의회의 승인을 통해 본격적으로 돌입한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1520년대 루터교회 설교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스코틀랜드에도 잉글랜드의 위클리프의 후예인 로라드파(Lollards)의 영향이 있었다. 루터의 저서는 특별히 스코틀랜드 동부 해안에서 애독되었다. 강력한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친선관계를 맺고 있던 스코틀랜드 의회는 1525년 종교개혁 사상을 “추하고 악한 교훈”이라고 비난하며 그 전파와 확산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또한 대륙으로부터 프로테스탄트 서적 반입을 금지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26년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이 영역한 신약성경이 글라스고 지방에 유포되었다.
개혁 사상에 의한 최초의 순교자는 패트릭 헤밀톤(Patrick Hamilton, 1504?-28)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의 계명성이라고 호칭되는 첫 순교자이다. 종교개혁의 시작에는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공통적인 모습이다. 아쉽게도 종교개혁의 순교자들은 타 종교나 독재정권이 아닌 교회에 의해서 발생했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스코틀랜드 왕가의 후손이요 상위 귀족의 아들인 해밀턴은 프랑스의 파리와 루뱅에 유학했고 1520년에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유학 시절에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사상에 접했다. 그리고 귀국하여 세인트앤드류에서 대학의 교수로 조용히 활동했다. 그는 음악 분야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개혁신앙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1527년 해밀턴은 대주교 제임스 비튼(James Beaton)1)으로부터 이단 혐의로 출두 명령을 받았다.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할 것을 예측한 해밀턴은 마르부르크(Marburg)로 탈출하여 프랑수아 랑베르(Francois Lambert) 등과 교제하면서 루터파 신앙에 몰입했다. 그는 “루터파의 신앙에 관한 짤막한 논문”(Loci Communes Theologici: 신학의 일반적 장소, 1526년)을 작성했다. 이것은 틴데일의 친구인 존 프리스(John Frith)에 의해 <패트릭의 처소들>(Patrick’s Places)로 번역되었다. 그는 루터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패트릭 해밀턴은 종교개혁의 열정에 순교를 각오하고 스코틀랜드로 다시 귀국하여 설교 사역을 수행했다. 킨카벨(Kincavel)에서 세인트앤드류로 오라는 대주교 비튼의 출두 명령을 받고 그곳에 가자마자 체포되어 1528년 2월 27일 화형에 처해졌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24세였다. 해밀턴은 스코틀랜드에서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이해한 최초의 사람이었고, 그 복음으로 스코틀랜드를 개혁하려다가 순교되었다. 해밀턴의 순교 이후에도 종교개혁이 성취되기까지 30여 년간 20여 명에 달하는 개혁파들이 화형당했다.
조지 위샤트(George Wishart, 1513-1546)는 1538년 고전어에서 헬라어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소환되자 잉글랜드에서 스위스로 망명했다. 스위스에서 츠빙글리와 하인리히 불링거의 영향을 받은 위샤트는 스위스의 첫 신앙고백서인 〈제1 헬베틱 신앙고백서〉를 영역했다. 이후 1544년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개혁신앙을 전하는 한편, 로마 카톨릭교회 당국의 교권 남용을 비판했다. 1545년 고향에서 공증인과 가정교사 일을 하고 있던 존 낙스가 조지 위샤트를 만나, 회심하고 개혁파가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시민들 사이에 개혁신앙을 수호하고 왕실과 교회 당국에 항거하려는 움직임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위샤트는 이러한 개혁운동의 주동으로 지목되어 1546년 1월 대주교의 조카인 추기경 데이비드 비튼의 명령으로 체포되었으며 1546년 3월 1일 세인트앤드류에서 33세에 화형에 처해졌다. 존 낙스는 패트릭 해밀턴에 대해서는 그저 풍문으로만 들었지만, 조지 위샤트는 직접 만났고 그의 호위무사를 자처했다고 전해진다. 패트릭 해밀턴과 조지 위샤트의 순교는 존 낙스(John Knox, 1514-1572년)의 인생에서 진리를 향한 열망을 더 키워주었고, 결국 그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로 살아가도록 그의 삶을 이끌었다.
위샤트의 화형에 반기를 들은 시민들이 봉기했다. 억울하게 죽은 위샤트를 위한 피의 보복을 해야 한다거나 생명은 생명으로 갚자는 맹세들이 공공연히 행해졌다. 결국 1546년 5월 29일 봉기한 시위대는 위샤트의 화형을 명령한 비튼 추기경의 관저를 급습해 살해했다. 비튼 추기경을 살해한 시위대는 세인트앤드류 성을 점령하고 동지들을 규합했다. 이후 세인트앤드류는 개혁파 신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1547년 4월 10일 존 낙스 또한 박해를 피해 그가 가르치던 세 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세인트엔드류로 들어갔다. 낙스는 그곳 사람들의 요청으로 목회자로 부름을 받아 설교자로 봉사하며 이후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왕정에서 프랑스의 원병을 요청했고, 프랑스 군의 공격에 1547년 7월 말에 함락되었다. 체포된 수비대원 전부는 프랑스로 잡혀가 갤리선의 노예생활을 해야 했고, 존 낙스로 거기에 포함되었다.
1548년(19개월 후)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6세, 토마스 크랜머의 도움으로 노예선에서 풀려났고, 낙스 일행은 잉글랜드 개혁 운동에 참여했다. 1949년 잉글랜드 추밀원(樞密院, Privy Council)은 낙스의 종교개혁 정신을 높이 사서 그를 스코틀랜드와의 국경 도시인 버위크의 설교자로 임명했다. 그곳에서 낙스는 예배 개혁과 복음적인 설교를 하며 저명한 설교자로 명성을 보였다. 1551년 잉글랜드 에드워드 6세의 궁정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553년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고 로마 카톨릭 신자였던 메리 여왕이 즉위한 직후 잉글랜드는 로마 카톨릭으로 복귀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낙스는 1554년 잉글랜드를 떠나 프랑크푸르트에 잠시 머문 후 스위스 제네바로 옮겨갔다. 제네바에는 영어사용자 피난민들이 있었고, 낙스는 피난민 교회에서 목회했다.
제네바에 있는 낙스는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류, 스터링, 에딘버러, 퍼스 등지에서 개혁교회가 비밀리에 형성돼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1555년 은밀히 귀국해 전국을 순회하며 로마 카톨릭의 교직 제도와 미사 등을 비판하며 종교개혁 사상을 고취했다. 이에 스코틀랜드 교회 당국은 낙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를 체포하려 했다. 낙스는 1556년 제네바로 돌아갔다. 기즈의 메리 여왕(Mary of Guise)을 반대하며 종교개혁 추진 동맹인 “Lord of the Congregation”(1557-1560)이라 불리는 스코틀랜드 귀족과 개혁파 지도자들이 1557년 12월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회중을 위하여” 모든 권력, 재산, 생명을 바치겠다고 엄숙하게 선언하는 한편, 낙스의 편에 서서 스코틀랜드 교회의 개혁을 이루겠다고 다짐하는 〈제1 스코틀랜드 언약〉(The First Scottish Covenant)을 맺었다. 그리고 그들은 낙스의 귀국을 강력히 촉구했다. 메리 여왕과 갈등관계에 있는 귀족들이 점차 개혁파 신앙으로 합류하게 되어 세력이 강화되었다.
1560년 1월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여왕이 배와 군대를 보내 프랑스 군이 주둔하는 리스를 공격해 함락시키면서 스코틀랜드는 종교개혁자들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해 8월 낙스 일행은 스코틀랜드 의회를 소집해 로마 가톨릭주의의 모든 집회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프랑스와의 외교 단절을 선언하는 등 종교개혁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교회는 교황의 관할권을 폐기하고, 미사를 금지했다. 이를 세 번 이상 위반할 시 사형에 처하기로 했다. 로마 카톨릭주의의 오류는 비판하며 개혁했고, 교육 개혁과 빈민 구제를 결의했다. 이에 대해, 권징서와 신앙고백서를 마련하기 위해 낙스를 비롯해 윌록(John Willock), 스포티스우드(John Spottiswood), 더글라스(John Douglas), 로우(John Row) 등 6명(Six John)으로 구성된 신조작성위원회를 구성했다. 신조작성위원회는 4일 만에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Scot Confession)을 작성했다. 25개 조항으로 구성된 신앙고백서는 의회의 승인을 얻어 스코틀랜드의 신앙고백으로 채택되었다. 작성된 신앙고백서 위에 1561년 12월 5일 낙스와 5명의 목사그리고 36명의 장로와 함께 스코틀랜드 교회(The Church of Scotland, Kirk)를 조직했다.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도인 에딘버러(Edinburgh)에 있는 로얄 마일(Royal Mile)에 위치한 세인트 자일스 교회((St. Giles Cathedral))는 당시 종교개혁의 구심점이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1560년에 교황권을 부정했고, 세인트자일스 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로 내려오던 400년의 역사를 공식적으로 종결했다. 그리고 세계 장로교회의 모교회(the Mother Church of World Presbyterianism)가 되었다.
낙스의 종교개혁은 완전한 장로교회 체계는 아니었다. 감독 정치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장로교의 아버지(the father of Presbyterianism)라고 불리는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이 낙스의 제1치리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 1560년)를 1578년 개정하여 제2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를 만들면서, 장로 정치 제도가 정착되었다.
앤드류 멜빌이 19세 되던 해인 1564년 프랑스 파리대학교에서 셈어 연구에 힘을 쏟아 탁월한 동양어 학자로 인정받았다. 아드리아누스 투르네부스(Adrianus Turnebus)에게서 헬라어를 더 배우고, 피터 라무스(Petrus Ramus)의 강의를 듣고, 푸아티에(Poitiers)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1566), 21살의 나이에 성마르세온학교(the college of St Marceon)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3년을 가르친 후에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개신교 지역인 스위스의 제네바로 가서 데오드르 베자의 제네바아카데미의 인문학부 교수가 되었다. 교수로 가르치면서도 그는 동양어 연구의 힘을 써서 동료 교수인 코넬리우스 베트람 교수(Cornelius Bertram)에게서 시리아어를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1574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멜빌은 글래스고우 대학교 학장(Principal)으로 사역했다. 그리고 1575년에는 애버딘 대학교를 새롭게 하는 일도 돕게 된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교회의 <제2치리서>를 작성하고, 1578년 총회장으로 섬기던 때에 <제2치리서>가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채택되었다.2)
앤드류 멜빌과 제임스 6세(1세): 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1581년 제임스 6세가 성년이 되자, 1560년에 채택한 신앙고백서 지지를 선언하는 왕의 언약(King's Covenant)에 서명했다. 제임스 6세의 유년 가정교사는 조지 뷰캐넌(George Buchanan, 1506-1582)이었지만, 합당한 기독교적 가치가 아닌 세속 왕의 권위를 앞세웠다.
앤드류 멜빌은 두 왕국 체계를 확립했다. 두 왕국 이론이 무엇인지는 1582년 멜빌 목사가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후에 잉글랜드 제임스 1세)에게 주장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를 간섭하는 왕을 향해서 멜빌이 한 말이다.
“전하, 이 말을 꼭 해야 하겠습니다. 이 스코틀랜드에는 두 왕과 두 왕국이 있습니다. 하나는 제임스 왕과 국가이며, 다른 하나는 왕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교회입니다. 스코틀랜드 국왕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왕도, 주도, 머리도 아니며 단지 한 구성원에 불과합니다” (Melville: 2010, 371)1)
스코틀랜드 언약도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주(主)이심을 실현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되는 사회를 추구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1583년 제임스 6세가 루스벤 성에서 탈출하면서 반격이 시작되었다. 제임스 6세는 반장로교주의자인 아란(Arran) 백작을 중심으로 언약도에 대한 거부를 진행했다. 1584년 통일령(the Black Act)와 의회 결의를 통해서, 집회 자유를 빼앗고 주교제도로 회귀했다(Moore: 2018, 63, 김중락: 2017, 190).
그런데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Armada)가 엘리자베스 1세에게 패배하자 다시 장로교를 지지하는 세력이 증가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왕이 제정한 통일령을 폐지하고 장로교 질서로 회복했다(Moore: 2018, 63). 1592년 황금법(김중락: 2017, 193)으로 암흑법을 무효화시켜 장로교 제도의 근간을 확립했다.
그런데 1596년 제임스 6세는 린리스코우 법령(Act of Linlithgow)으로 교회 통제를 강화시켰다(Moore: 2018, 64). 무어(Moore)는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분리주의자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 1550-1633)을 네덜란드로 도주하도록 만들었다고 제시했다. 그리고 분리주의자, 브라운주의자(Separatists, Brownist)을 “경건한 작은 그룹의 교제는 강조했으나, 교회의 중요성에 대해서 경시했다”고 정의했다(Moore: 2018, 64).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망하고, 1606년에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VI가 잉글랜드 왕 제임스 I가 되었다. 제임스 I세는 스코틀랜드 왕과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제임스 I세가 스코틀랜드 왕이었기 때문에, 장로 제도에 호의적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는데, 그는 스코틀랜드에서부터 장로파에 대해서 명확하게 거부하고 저항했다.
그런데 제임스의 아내가 교황주의 교도였기 때문에 박해를 피해 이주한 150여명의 교황주의 사제들이 잉글랜드로 귀환했다. 제임스는 주교를 임명하고, 귀족을 매수하면서, 장로교 지도자를 투옥시키고 추방시키며 장로파를 박해했다. 1610년 글래스고우 총회에서 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선언했다. 이에 반대하는 멜빌, 존 웰쉬(John Welsh, 1558-1622), 낙스의 조카 등을 투옥시키거나 추방시켰다. 제임스의 행보는 피 흘리며 제거했던 로마 교회를 복구하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결국 스코틀랜드 장로파들은 왕의 법에 불복종을 선언했다. 1621년 퍼스 5개 조항(Five Articles of Perth)을 스코틀랜드 의회가 비준했다. 5 조항은 성찬에 무릎 꿇기, 개인 성찬수행, 비공식 세례 거행가능, 견진성사, 축일(부활절, 성탄절)준수 등이었다. 왕이 작성한 5개 조항은 멜빌이 작성한 ‘스코틀랜드 제2 치리서’를 거부하는 내용이다. 제임스 1세의 강력한 절대군주(국교회) 강화는 스코틀랜드 장로파를 압박하고, 분리주의자들은 네덜란드로 신대륙으로 이주하는 결과가 되었다.
제임스 1세가 흠정(欽定)으로 성경(KJV)을 번역해서 상당히 유명하지만, 청교도를 박해한 유력한 군주 순위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다. 사무엘 루더포드(Samuel Rutherford, 1600-1661)는 국교회를 “매춘부 엄마”로 불렀다(Moore: 2018, 68). 김중락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에서 가장 큰 문제를 “제임스 6세의 장로교 혐오”로 제시했다(김중락: 2017, 194).
교회 이해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 모두 펼쳐진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헨리 8세 때에 로마 교회(교황주의)에서 국교회주의(성공회)로 전환했다. 로마 교회에서 완전 개혁을 추구하던 개혁파는 국교회주의에 대항해서 분리파(적극분리파와 내부분리파)가 있다. 내부분리파는 아직도 국교회에서 낮은 교회(low church)로 유지되고 있다. 적극분리파는 미국으로 이주해서 회중파 교회를 이루었다. 스코틀랜드는 장로 제도이다. 그 이외에 침례파, 감리교, 구세군 등 무수한 교단이 잉글랜드에서 발생했다.
17세기에 영국에서 발생한 교파를 구분하면, 장로 제도와 로마 교회, 국교회, 분리주의(회중파), 침례파이다. 감리교는 국교회 사제였던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사후에 형성되었다. 여러 종파가 발생된 주요 원인은 교회의 주권(주인)에 대한 이해와 주인임을 고백하는 방식이다. 로마 교회는 교황(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이겠지만), 국교회는 국왕이다.
그리고 다른 종파들은 교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데, 장로파는 하향식이고 회중파는 상향식으로 이해했다. 그 이해는 교회 사역자에 세움에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장로파와 회중파는 교회의 구성원이 거룩을 증진하는 방법, 분별하는 방법에 대한 매뉴얼에서 차이를 보였다. 크게 장로파와 회중파로 구분할 수 있다. 회중파 계열은 침례교, 구세군, 감리교 등이다. 감리교, 침례교, 구세군 등은 교회의 주인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신앙 이룸(혹은 완성) 부분에서 분리된 분파로 분류할 수 있다. 큰 범주로는 분리주의(회중파)로 분류할 수 있다. 장로파는 “구원 이룸” 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함”에 관심을 두었다고 평가한다.
장로파들은 교회를 주 예수께서 세우시고 다스리는 주님으로 고백하기 위해서 생명을 바쳤다. 국왕은 자신이 교회의 수장임을 유지하기 위해서 생명을 앗는 것을 감행했다. 우리는 치열한 교리 논쟁 이전에 교회의 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여 일치를 이룸이 선결되어야 한다. 고대 교회 논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이해에 관한 것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실체(homoouison)을 고백하면서 신성 이해를 확증하면서 삼위일체를 고백했다.
그런데 16세기 종교개혁은 구원 이룸에 대한 논의였다. 루터는 교회와 교황이 주도하는 구원 방식을 거부하고, 구주 예수께 귀결시켰다. 칼빈은 성경 해석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 이룸을 체계화시켰다. 그런데 구원 이룸 도식에 토론을 하면서 다양한 논의를 가져왔고, 그 혼란은 정리하지 못하고 후대로 넘겨 버렸다. 필자는 구원 이룸 도식에 대한 이해도 좋지만 합의에 이룰 수 없음을 인지했다. 그럼으로 합의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도록 협력할 것을 제언한다. 칼빈파는 스위스에서 불링거와 협력했고, 잉글랜드에서 회중파와 협력했다. 다만 회중파가 자체로 사보이선언(The Savoy Declaration, 1658년)을 작성한 것은 그 협력을 깬 것으로 볼 수 있다.
21세기 교회에는 두 에큐메니칼이 있다. 믿음과 직제의 일치로 교회 연합을 이루는 에큐메니칼이 있고, 천상의 주 예수의 다스림을 받은 에큐메니칼이 있다. 17세기 잉글랜드에서 심각하게 교파가 형성되었다. 그것은 유럽의 모든 사상들이(교황주의, 루터파, 칼빈파, 신비주의, 재세례파, 소시니안...) 급속하게 잉글랜드에 유입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총화는 18세기 스코틀랜드 흄(David Hume, 1711-1776)의 회의론(懷疑論, skepticism)으로 종결시켰고, 독일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에 의해서 계몽시대의 대여명을 밝혔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 1781년)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Kopernikanische Wendung; Copernican revolution)을 이루었다. 유럽은 1차 대전이 발발하기 까지 예수를 탐구하면서 상상하지 못한 풍요 시대를 경험했다. 칸트 이후에 하이데거와 칼 바르트 이후에 있는 우리시대에, 16-19세기 유럽 사상을 정립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은 지금 유럽 지성인들에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주를 예수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칼빈, 스코틀랜드 장로파, 네덜란드 개혁파, 미국 장로파와 개혁파, 대한민국 장로파에서 동일한 것이며, 1-4세기 예루살렘과 교부들의 교회와 동일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21세기나 1세기 동일한 주님을 믿기 때문에, 동일한 가치를 생산해야 하고 전파해야 한다. 참고로 은사주의 교회들도 사도적 교회를 주장하는데, 그들은 능력 나타남으로 사도적 교회를 주장한다. 장로파는 교회의 주인을 주 예수로 고백함에서 사도적 교회를 지향한다. 사도의 가르침을 전파함에 힘쓴다. 장로파에서 사도의 가르침을 소홀하거나 망각하면 즉각 능력 나타남으로 변환될 것이다.
멜빌과 제임스 6세의 관계는 많은 갈등이 있었다.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국왕의 요청을 받고 런던으로 이주해서 잉글랜드 제임스 1세가 되어, 스코틀랜드의 강력한 개혁 세력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결국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종교적 갈등의 요인이 되었다.
제임스 1세의 뒤를 이는 찰스 1세는 매우 강력한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국교회주의를 수행했다. 잉글랜드 찰스 1세(스튜어트 왕조)와 스코틀랜드 찰스 1세가 동일인으로 역사의 중첩이 발생한다.
언약도’(Covenanters), 명칭은 자칭과 타칭이 있는데, 그리스도인, 칼빈파, 청교도 등은 타칭이다. 그러나 루터란(Lutheran Church), 언약도는 자칭이다. 언약도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많이 사라졌는데, 스코틀랜드 교회가 강력한 개혁 의식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스코틀랜드 자유 교회(Free Church of Scotland)가 개혁 사상을 보수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언약도는 찰스 1세가 켄터베리 대주교 라우드가 만든 <기도 예식서>와 <교회 예식서>를 스코틀랜드 교회에 강압적으로 사용하도록 한 것에 대한 항거에서 시작되었다. 에딘버러의 성 자일스 교회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1세대인 존 낙스와의 인연과 함께,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불리게 된 언약도 혁명의 발원지이다. 찰스 1세의 정책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있던 스코틀랜드 전체에, 1637년 7월 23일은 도화선이 불이 붙었다. 그 도화선에 불을 붙힌 사람은 제니 게데스(Jenny Geddes. 1600-1660)라는 여성도였다. 제니는 로얄 마일 길거리에서 소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평범한 여인이었다. 로마 카톨릭적으로 예전을 집전하던 찰스 1세의 파견자를 향해 “거짓으로 가득찬 도둑이여, 악마의 시험을 받아서 구교 성향의 의식 소리를 내 귀에 들리도록 하다니!”라고 외치며 자신이 깔고 앉았던 ‘스툴’(stool, 의자)을 단상으로 던졌다. 제니 게데스의 행동에 예배당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스툴을 단상으로 투척하면서 예배당 안은 물론 밖에서도 큰 소동이 벌어졌다. 스코틀랜드는 1638년 2월 28일 에딘버러에 있는 그레이프라이어(Greyfriars) 교회에서 ‘국가 언약’(The National Covenant)을 체결한다. 이 언약은 개인 언약과 동시에 국민 상호간의 언약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스코틀랜드 국가와의 언약 즉 “하나님과의 언약”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의 교회는 언약도의 교회가 되었다.
이 문서는 알렉산더 헨더슨(Alexander Henderson, 1583–1646)과 아키발드 존스톤(Archibald Johnston, Lord Wariston, 1611–1663)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이 시기를 언약도 시기라고 할 수 있고,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개혁의 세력이었다. 찰스 1세는 왕권에 반역한 스코틀랜드를 정벌하기 위해서 군사를 파견했다. 그것은 정벌이 아닌 주교전쟁(Bishop's Wars)이 되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주교정책(잉글랜드 국교회주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잉글랜드 찰스 1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승리하며, 자력으로 개혁신앙을 고수했다. 당시 스코틀랜드에는 유수한 신학자들과 다수의 전투 경험이 있는 전쟁전문가들이 있었다. 사무엘 루더포드(Samuel Rutherford, 1600-1661), 로버트 베일리(Robert Baillie; 1602-1662), 조지 길레스피(George Gillespie, 1613-1648), 알렉산더 헨더슨, 로버트 더글라스(Robert Douglas, 1594-1674), 제임스 거스리(James Guthrie, 1612-1661)등이다.
다만 언약도들이 1643년 “엄숙한 동맹과 언약”의 불이행된 상황에 대한 대처에서 분열된 것이 문제이다. 언약도들은 엄숙한 동맹과 언약에 있는 왕으로 개혁된 신앙으로 한 왕국을 구축한다는 내용에 충실했다. 그런데 잉글랜드 독립파(올리버 크롬웰)은 찰스 1세를 처형한 뒤에 왕 없는 세상, 공화제(commenwelth)를 추진했다. 이에 대해서 의견이 나뉜 것이다. 그리고 찰스 1세가 처형된 뒤에 그의 아들 찰스 2세를 옹위하는 문제를 놓고 다시 분열되었다. 스코틀랜드인으로서 왕이 되면 ‘국가언약’을 신실하게 지키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그 약속에 대한 신뢰의 문제였다. 결국 스코틀랜드는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서 무력으로 정복되었다. 스코틀랜드 대학에는 잉글랜드 독립파 계열의 교수들이 포진했다. 청교도혁명이 미완성으로 종결되었다.
1660년 왕정복고(the Restoration) 이후 언약도의 갈등은 한층 더 심각해졌다. 찰스 2세(Charles Ⅱ, 1660-1685) 정부가 개혁신앙을 거부하고 국교회를 종교개혁 이전으로 되돌리려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스코틀랜드에는 기존의 장로회 정부 대신 주교주의 정부가 세워졌고, 언약도는 배교자가 되었다. 이후 당국과 언약도의 마찰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국왕은 언약도의 세력을 분열시키려고 노력했다. 당시 언약도들은 찰스 2세의 폭정에 대응하지 않고 몸을 피해 위기를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언약도를 향한 탄압에 끝이 보이지 않았다. 찰스 2세를 이는 제임스 2세는 주교주의에서 더 나가 로마 카톨릭주의로 회귀하려고까지 한 것이다. 결국 언약도는 찰스 1세에 맞서 종교적 자유를 지켜냈던 것처럼 다시 국왕의 폭압 정책에 무장항쟁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과거의 저항이론을 보완하여 한층 격화된 저항이론을 주창했다. 존 브라운(John Brown, 1627-1685)의 『변증론』(Apologeticall Relation, 1665),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ewart, 1635-1713)와 제임스 스털링(James Stirling, 1631-1671)의 『납달리』(Naphtal, 1667), 그리고 알렉산더 실즈(Alexander Shields, 1661-1700)의 『놓인 암사슴』(The Hind Let Loose, 1692)은 17세기 후반 언약도 저항이론을 집대성한 저서들이었다.
킬링타임(killing times), 1679년 보스웰(Bothwell)에서 정부군에 크게 패배한 언약도들은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전투에 임했지만 대패했다. 그 전투에서 1,200명이 사로잡혀서 에딘버러로 끌려오고, 그중 400명은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마당에 투옥되었다. 마당에 구덩이 판 감옥이었는데, 지붕없는 감옥이었기 때문에 겨울날을 보내기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언약도들은 그 감옥에서 탈출하지 않고 감옥 안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많은 언약도들이 옥살이를 하고 재판을 받은 후, 교회 아랫길을 따라 내려가 그라스마켓(Grassmarket)이라는 이름의 거리에서 처형되었다. 나머지는 옥에 갇히거나 대부분 노예로 팔려나갔다. 1661년부터 1688년까지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에 의해 순교를 당한 순교자들은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무려 18,000-20,000여명이나 된다. 제임스 2세가 명예혁명으로 실각하며 종교의 자유를 찾았다.
17세기 후반 언약도의 강력한 저항에 대한 태도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불의와 폭정에 대한 자세에 독특한 면을 제공했다. 가장 대표적 위인은 언약도의 사자(Lion of the Covenant) 리처드 카메론(Richard Cameron, 1648-1680)이다. 카메론주의(Cameronian)는 불의한 권력에 대한 무장봉기항거의 전형을 구축했다.
1463-1660년, 엄숙과 동맹 언약에서 명예혁명까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주변 정황
1647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이 주도하는 의회파가 잉글랜드 내전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전후(戰後) 질서 확립에 대해서 청교도 진영에서 일치를 갖지 못했다. 그것은 의회가 스코틀랜드 군대를 용병으로 세우고 크롬웰의 군대에 해산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의회파를 다수 점유한 온건한 개혁파(잉글랜드 장로파 청교도)는 온건한 왕정 존속을 원했지만, 급진적 세력(독립파, 디거파 등)으로 포진된 크롬웰의 진영에서는 왕정 폐지와 공화제를 원했다. 이들의 사유가 급진적인 것은 역사에서 최초로 왕이 없는 국가를 상상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온건한 개혁파를 장로파로 분류하는 학자들이 있는데, 우리는 당시 잉글랜드 온건 개혁파는 에라스트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아직까지 잉글랜드 장로파와 에라스투적 견해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온건파들은 왕(챨스 1세)을 유지하면서 개혁된 종교를 수립하는 것에는 스코틀랜드 언약도와 동일했지만, 교회와 국가 관계에서 국가 주도를 견지하는 차이가 있었다. 안상혁은 사무엘 러더포드와 토마스 후커의 논쟁으로 제시하지만(안상혁, 2015), 잉글랜드 의회파 내부에서 에라스투스주의와 독립파(비분리주의)가 나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내전에서 의회파가 승리했지만 찰스 1세는 생존했고,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의회파의 내부에서 분쟁이 발생했다. 승리한 세력 내부에서 한 목표이지만 다른 목표를 갖고 있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해 오월동주(吳越同舟)로 구성된 청교도였다고 볼 수 있다.
김중락은 1645년 잉글랜드 총회를 개최하도록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로버트 베일리(Robert Baillie) 등의 활약으로 잉글랜드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고 평가했다. 1645년 8월 19일에 잉글랜드 의회는 전역에 장로회 설치를 명령했지만, 세속권력과 결탁되는 에라스투스주의 입장을 견지했다는 것이다(김중락, 2001). 김중락은 앤드류 멜빌과 사무엘 러더포드는 에라스투스주의와 다른 견해를 가졌다고 제시했다(김중락, 2001). 잉글랜드에 있는 장로파는 스코틀랜드 언약도의 압력과 에라스투스주의 자기 이해에서 혼란이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베일리는 잉글랜드 장로제를 “절뚝발이의 에라스투스적 장로제”(a lame Erastian Presbytery)라고 비평했다(Cowan: 2018, 125, 김중락: 2001). 에라스투주의자들의 미숙함으로 크롬웰이 이끄는 독립파가 의회를 장악한 뒤에, 독립파 내부에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수평파(水平派, levellers)를 제압했다. 1648년 12월 6일, 크롬웰은 토마스 프라이드(Thomas Pride) 대령으로 장기의회(Long Parliament)에서 장로파 의원을 축출시키고 잔부의회(Rump Parliament)로 계속했다.
1647년 내전에서 승리한 크롬웰은 일단 찰스 1세를 구금시키며 향후 방안을 모색했다. 크롬웰은 왕을 존중하며 문제를 논의했다. 그런데 잉글랜드 의회의 수장이 크롬웰에게 군대 해산을 명령했고, 크롬웰이 거부했다. 1647년 수평파 지도자 존 릴번(John Liburne)의 주도 군 폭동 사태가 발생하고, 의회 내부에서는 온건파가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찰스 1세는 구금에서 탈출해서 스코틀랜드로 도주했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서 왕당파와 스코틀랜드 협력 진영으로 군비를 정비했다. 찰스 1세는 크롬웰을 제거하기 위해서 좀 더 와신상담(臥薪嘗膽)을 해야 했다. 1647년 12월 26일, 찰스 1세는 와이트(Wight) 섬을 비밀리에 방문한 라우던(Laudon), 라우더데일(Lauderdale), 라나크(Larnark) 등 세 명의 스코틀랜드 지도자들과 비밀리에 “약정(Engagement)”을 체결했다(서요한: 1994, 249). 온건주의 의회파는 포로로 잡은 존 릴번을 석방하면서 독립파 내부를 교란하려고 했지만, 릴번이 의회파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1648년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군대와 연합해서 런던으로 진격했지만, 크롬웰에게 패배했다. 1648년 크롬웰은 프라이드 대령으로 하원을 무력으로 장악하며(Pride's purse, 1648.12.6-7), 140여명의 온건파들을 추방시키고, 독립파 60여명으로 의회를 구성했다(잔부의회, Rump Parliament). 크롬웰이 무력으로 구성한 잔부의회는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에게 반역죄를 판결하여 처형시켰다. 세계 역사에서 최초로 왕이 사라진 국가가 존재했다. 스코틀랜드는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를 왕으로 옹립했다. 찰스 2세가 생존하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크롬웰의 군대가 스코틀랜드와 던바 전투(1650년)에서, 찰스 2세와 우스터 전투(1651년)에서 승리한 후, 패배한 왕 찰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고 스코틀랜드 진영은 둘로 나뉘었다. 1651년 9월 3일 우스터 전투에서 크롬웰의 군대는 스코틀랜드 군대를 섬멸하고 스코틀랜드를 정복했다. 그리고 잉글랜드 잔부의회는 스코틀랜드를 “자유 공화국 잉글랜드”에 포함시켜 병합시켜 버렸다. 크롬웰에 의해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가 병합되었고, 한 종교(독립파)로 세워지게 되었지만, 왕정은 파괴되었다. 스코틀랜드는 크롬웰이 의회를 장악하면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스코틀랜드 언약도의 사상과 잉글랜드 장로파는 급속하게 약화되었다.
크롬웰은 1653년 잔부의회에서 140명으로 지명하여 의회를 구성했다. “지명의회(Nominated Parliament)”라고 불리기도 하고, “성자들의 총회(Assembly of saints)”라고 불리는데, 성자들은 독립파에게 인정된 위인이었을 것이다. 1653년 통치장전(統治章典, Instrument of Government)을 통해서 크롬웰이 세 왕국의 통치자, 호국경(護國卿, Lord Protector of the Commonwealth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이 된다. 참고로 Lord Protector을 섭정(攝政)과 호국경으로 번역하고 있다. 즉 왕이 아닌 절대권력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섭정은 왕을 옆에 둔 절대권력자이고, 호국경은 왕이 없는 기간에 절대권력자이다.
1650년 스코틀랜드 교회는 급진파와 대항파로 분열했다. 스튜어트 왕가와 타협을 거부한 항의파(Remonstrants) 혹은 저항파(Protesters)와 찰스 2세를 스코틀랜드 왕으로 맞아들일 것을 찬성한 결의파(General Resoulutioners)라는 약정파 가있다. 비록 분열했다하더라도 그들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대한 입장은 확고했다. 항의파는 사무엘 러더포드, 제임스 거스리, 아치발드 존슨이었고, 결의파는 로버트 더글러스, 로버트 베일리였다. 항의파는 찰스 2세가 엄숙 동맹과 언약에 서명했지만 서약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결의파는 서약에 서명한 왕을 존중했다. 즉 두 진영은 모두 엄숙 동맹과 언약, 그리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대한 존중은 일치했다. 그러나 왕의 태도에 대해서 서로 의견이 달랐고, 시대의 격변 때문에 두 진영으로 분열했다. 즉 신학 사상은 동일했지만, 시대를 읽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분리된 한 예이다.
참고로 크롬웰은 스코틀랜드를 공략하기 위해서 스코틀랜드 명문 4 대학(글래스고, 애버딘, 에딘버러, 새인트 앤드류)을 장악했다. 스코틀랜드 대학은 잉글랜드 대학과 견줄 때에 부족함이 없었다. 크롬웰은 스코틀랜드 대학에 독립파의 주요 인물들을 정착시켜 교육계를 장악했다(마금영, 2000, 104-106). 크롬웰은 1654년 의회를 소집해서 80가지가 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그 법들은 청교도주의 교회 확립, 종교적 관용, 교육 진흥, 통치의 분권화 등이었다. 유대인들의 입국을 허가했고, 식민지를 확장시켰다. 크롬웰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의 영향이다. 칼라일은 크롬웰을 전제주의를 종료시킨 헌정개혁가로 평가한 것이다(마금영, 2000, 107-108). 칼라일은 『영웅 숭배론』(1841, On Heroes, Hero-Worship, and the Heroic in History)에서 윌리엄 세익스피어, 존 낙스, 마틴 루터, 올리버 크롬웰, 루소, 나폴레옹 등을 인류의 영웅으로 꼽았다.
1660년 찰스 2세로 왕정이 복고된 이후에는 감독제에 대한 효과적인 저항이 없었고 1661년 무효법(Act Rescissory)에 의해 장기의회와 엄숙 동맹과 언약,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작성된 모든 것이 무효화 되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1643년 8월 17일에 체결된 “엄숙 동맹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에 근거해서 잉글랜드 의회가 1643년 9월 15일부터 1646년 12월 4일까지 개회시킨 종교회의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1643년 7월 1일에 시작되어, 기존에 있는 39개 신조를 수정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이 참여하는 엄숙 동맹과 언약을 체결하면서, 새로운 총회로 돌입했다. 스코틀랜드 사역자들이 언권 외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1646년에 작성된 문서를 스코틀랜드 총회는 1647년 8월 27일 교단의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대체한 신앙고백서로 채택했다. 1647년 가을 터크니(Anthony Tuckney, 1599-1670)를 위원장으로 하여 대소요리문답 초안을 작성했고, 1648년 6월 20일 일부 수정을 거쳐 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1648년 7월 20일 총회가 대요리문답을 승인했다. 그리고 7월 28일 소요리 문답을 채택했으며, 9월 15일 의회가 최종 승인했다. 1649년 8월 총회는 이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서, 그리고 예배모범과 정치편람을 채택했다.
그런데 잉글랜드 독립파로 결정권자인 크롬웰은 그 결정을 수용하지 않았다.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은 1648년 크롬웰과 관계를 시작하여, 1649년부터 크롬웰 군대의 종군목사로 사역했다. 스코틀랜드 정복 전쟁에도 오웬은 군종목사로 참가했다. 오웬은 1658년에 크롬웰이 죽자 1658년에 사보이 선언을 작성했다. 현재 사보이 선언을 표준문서로 사용하는 교회는 없다. 그리고 당시 크롬웰과 오웬이 주도했던 독립파 교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로파 교회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표준문서로 채택하고 있다. 장로파의 기본 특징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이다. 몇 교단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서 다른 표준문서로 옮긴 장로파 교단이 있는데,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역사성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국민 언약(National Covenant, 1638년), 엄숙 동맹과 언약(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 1643년)과 관련되어 있다. 1658년 독립파는 자체로 사보이선언(The Savoy Declaration)을 작성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수정하려 했다는 의견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독립파는 국가와 교회를 분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국가의 결정과 교회의 결정을 다르게 생각했을 수 있다.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 1600-1680), 예레미야 버로우(Jeremiah Burroughs, 1600-1646), 필립 나이(Philip Nye, 1595-1672), 시드락 심슨(Sydrach Simpson, 1600-1655), 윌리엄 브릿지(William Bridge, 1600-1670)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작성에 참여했다. 사보이 선언을 주도한 존 오웬과 분리파 회중주의 존 코튼(John Cotton, 1585-1652)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결국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세 왕국에 정착되지 못하고, 왕정이 복고되었다. 왕좌에 앉은 찰스 2세 그 뒤를 이은 제임스 2세는 국교회주의를 확립하기 위해서 스코틀랜드 언약도에 대한 무참한 박해를 진행했다. 이 기간을 Killing Times(살육의 시대)이라고 한다. 그 때에 독립파가 찰스 2세에게 저항한 모습은 볼 수 없고 그 뒤에 독립파의 주도적인 주장은 나타나지 않는다.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는 고교회(High Church)와 저교회(Low Church)로 편성되었다. 1688년 명예혁명이 지난 뒤 1689년 2차 런던신앙고백서(The Second London Confession of Faith, 1차 1644년 1차 런던신앙고백서 작성)를 작성한 특수침례파(Particular Baptists)가 국교회주의를 떠나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참고로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국교회 사제였고, 아버지(Samuel Wesley, 1662-1735)는 고교회 사제였다고 한다.
[참고 1] 에라스투스주의(Erastianism)는 스위스 의사며 신학자 토마스 에라스투스(Thomas Erastus, 1524-1583)에게서 나온 사상이다. 사상의 핵심은 혼란한 교회를 국가가 주도해서 안정시킬 수 있다는 개념이다. 라은성 박사는 감독정치(교황정치, 영국국교회)인데, 두 신학사상을 고올주의(Gallicanism)와 교황지상주의(Ultramontanism)로 분류했다. 고올주의는 다시금 셋으로 나뉘는데, 에라스투스주의(Erastianism), 페부르니우스주의(Febronianism, 주교주의와 국가주의 결합), 요셉주의(Josephinism, 오스트리아의 요셉2세가 제언한 것으로, 교회 세움과 성직자 교육을 국가가 담당하는 형태)이다. 고올주의에서 교황지상주의가 발생했고, 그것에 개혁파로 들어온 것이 에라스투스주의이다. 고올주의는 프랑스에서 발생한 국가교회의 형태로 교회재산, 교회법정, 성직 임명에서 교황의 권리를 제거했지만 왕을 그 자리에 세웠다. 루이 14세는 퐁텐블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 1685)으로 낭트칙령을 폐기하고, 고올주의에 입각해서 위그노 교회와 학교에 철거명령을 내리고 고올주의에 벗어난 모든 의식과 신학을 금지시켰다.
[참고 2] 크롬웰에 대한 최철희(성공회 역사가)는 찰스 1세는 죽음으로 민중의 지지를 회복했고, 크롬웰은 죽음으로 쇠퇴했다고 대조를 제시했다. 크롬웰이 1658년에 죽은 뒤에 그의 아들이 계승했지만, 1660년 찰스 1세의 아들로 왕직이 복원되었다. 그리고 주교제도, 기도서, 국교회주의 성직자 1,000명 등도 모두 복구되었다(최철희, 『세계성공회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6), 140-141). 영국 국교회에서는 찰스 1세가 크롬웰에 맞서 사회와 교회를 지킨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K. D. Holfelder, Factionalism in the Kirk during the Cromwellian Invasion and Occupation of Scotland, 1650 to 1660: The Protester-Resolutioner Controversy(Edinburgh: Univ of Edinburgh, 1998)
칼빈은 에드워드 6세에게 이사야서 주석을 헌정했고, 당시 섭정이었던 서머셋 공작에게 디모데전서 주석을 헌정했다. 칼빈은 유럽 사회에 개혁파 신앙이 정착될 수 있도록 많은 접촉을 시도했다. 그리고 개혁파 신앙의 범주로 한 체계를 만들기를 추구했다.
영국교회 간략하게 살펴보기
토머스 베케트(Thomas Becket, 1118-1170)는 캔터베리 대주교였는데,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와 갈등으로 살해되었다. 그는 로마 카톨릭과 성공회에서 성인으로 추인되었다. 헨리 8세가 1531년 수장령을 선포할 때에, 360년 전(前)의 죄를 기소하여 죽은자를 궐석으로 재판해서 부관참시했다.
백년 전쟁(Hundred Years' War)은 1337년부터 1453년 사이에 잉글랜드 왕국의 플랜태저넷 가와 프랑스 왕국의 발루아 가 사이에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일어난 전쟁이다.
랭커스터 가 헨리 5세(Henry V, 1386-1422)는 영화 더 킹(2019년)으로 재현되기도 했다. 요크 가(家)와 랭커스터 가(家)가 교차하면서 왕조를 유지했다. 장미 전쟁(Wars of the Roses, 1455-1485)은 붉은 장미를 표시로 삼은 랭커스터 왕가와 흰 장미를 표시로 삼은 요크 왕가 사이의 왕위 쟁탈전이다.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의 전투에서 플랜테저넷 왕가의 에드워드 3세의 현손인 헨리 7세가 왕권을 찬탈해서 튜더 왕조를 시작했다.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가진 왕조는 튜터 왕조(Tudor dynasty, 1485-1603, 7대 왕)이다. 튜터 왕조의 기원은 웨일즈(Welsh)에서 시작되었다. 헨리 7세(1485-1509), 헨리 8세(1509-1547), 에드워드 6세(1547-1553), 제인 그레이(9일여왕, 1553-1553), 메리1세(피의 여왕, 1553-1558), 펠리페 2세(메리의 남편, 1554-1558), 엘리자베스 1세(1558-1603)이다.
스튜어드 왕조(1603-1649/복고왕조, 1660-1707)는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헨리 7세의 혈통(고손자)로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1603-1625). 스튜어드 왕조는 스코틀랜드 왕가였지만, 잉글랜드 왕의 혈통으로 자연스럽게 삼중왕(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이 되었다. 세 왕국은 “엄숙 동맹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 1643년)”으로 개혁된 종교로 한 왕국을 이루려 했지만, 청교도 혁명을 이끄는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의 강한 군사력에 의해서 세 왕국은 묶어졌다. 크롬웰의 공화정이 중단되고 1660년 찰스 2세로 왕정이 복고되었다. 찰스 2세(Charles II(1630-(재위)1660-1685)는 브레다 선언(Declaration of Breda, 1660년 4월 4일 발표)으로 복귀했지만, 지키지 않고 국교회위주의 종교 정책(주교제도, 성직임명권)을 펼쳤다.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는 국교회를 중심으로 종교 정책을 전개하면서,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을 무참하게 박해했다. 찰스 2세는 1661년에 무효법(The Rescissory Act)을 포고하면서 1633년 에서(1634-1660까지 무효) 연속함을 천명했다. 1662년에 포기법(The Abjuration Act)으로 1638년의 국민언약(the National Covenant)과 1643년의 엄숙 동맹과 언약(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 of 1643)을 파기했다. 당시 찰스 2세의 명령은 그래함(John Graham)이 수행했는데, 언약도들은 그를 “Bluidy Clavers”라고 불렀다. 스코틀랜드 언약도 목사들은 1662년 추방되었고, 1663년에는 무력으로 탄압했다. 1679년에 드럼크록 전투(The Battle of Drumclog)에서 400-500명의 언약도들이 무력으로 항전하여 전사했고, 포로가 된 1,200명은 에딘버러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1638년에 국민 언약을 맺었던 장소의 마당에 지붕 없는 감옥에 투옥되어 겨울을 보내야 했다. 1685년에 찰스 2세가 죽고, 제임스 2세가 계승했다. 1688년 네덜란드 오렌지의 윌리엄(제임스 2세의 딸)으로 명예혁명(the Glorious Revolution)을 통해서 제임스 2세를 폐위시키고,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오렌지 공)에 의해서 통치되었다. 보드로(Robert Wodrow)는 1661-1688년까지 17년을 킬링 타임(The Killing Time)이라고 정의했다. 1689년 권리장전(權利章典, Bill of Rights)으로 왕권신수설은 중단되었고, 인간의 자연권이 천명되었다.
잉글랜드 왕 존은 1215년 대헌장(大憲章, Magna Carta)으로 왕이 법에 의해서 통제되는 것을 귀족과 협정했다. 권리청원(權利請願, Petition of Rights)은 1628년에 잉글랜드 의회가 찰스 1세에게 승인을 요구했지만(단기의회), 왕은 1629년에 의회를 해산하며 거부했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를 정복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왕은 스코틀랜드에 전쟁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11년간 단독정치를 마치고 의회를 소집했다(장기의회). 장기의회(Long Parliament)는 크롬웰이 의회에서 무력으로 반대파를 축출시키고 잔부의회(Rump Parliament)까지 운영하면서, 1653년에 해산시켰다. 1660년에 왕정이 복고되면서 의회도 다시 복구되었다. 대헌장(1215), 권리청원(1628), 권리장전(1689)는 세계사에서 중요한 정보이다.
1689년 관용령(Toleration Act)이 의회를 통과하며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1690년 회복법(The Act of Settlement)으로 총회가 형성되었고, 스코틀랜드 국가교회로 법제화되었다.
1712년에 "성직 임명권(Patronage)"이 스코틀랜드 의회를 통과했고, 이를 거부하는 교회는 분리했다. 스코틀랜드 자유교회(The Free Church of Scotland)는 성직 추천을 거부하면서 지금까지 소수로 유지하고 있다. 유력한 사역자들은 에벤에셀 어스킨(Ebenezer Erskine), 토마스 길레스피(Thomass Gillespie), 토마스 찰머스(thomas Chalmers) 등이다.
교회의 거룩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한 것 같다. 교회의 문제는 세상의 평화와 전쟁과 관계없이 항상 발생하고 증폭된다. 교회는 발생한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한 적이 거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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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 [비튼 추기경]에게는 수도원장 시절에 이미 1남 2녀가 있었으며, 추기경에 임명되기 이전에 아들 셋을 더 낳았고, 임명된 후에 네 아들을 더 가졌다. 다른 스코틀랜드의 고위 성직자들도 이에 못지않은 왕성한 성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종교 개혁 당시 12명의 주교들이 사생아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왕이나 귀족들이 낳은 사생아로 보이는 많은 수도원장들에게 또한 자기들의 사생아들이 많이 있었다.
2) 장대선 역,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제2치리서』(서울: 고백과문답, 2019):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대, 소요리문답의 구조인데, 스코틀랜드신앙고백서는 치리서(Book of Discipline)로 그리스도인을 훈련하도록 배치시켰다. 스코틀랜드 교회 개혁의 특징의 그리스도의 통치가 그리스도의 종, 설교자의 복음 선포로 수행된다는 것이 매우 명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