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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성巴城 설창수薛昌洙 시인 탄신 1백주년 추모의 마음.
김연호
이글은 2016년9월27일 제천예총 아카데미의 특강원고임
파성巴城 설창수薛昌洙 시인 탄신 1백주년 추모의 마음
저는 이 시간 올해로 탄신 1백년을 맞으신 진주의 고 파성 설창수 시인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좀하고자 합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근래 들어 전국에서 열리고 있는 각종 지방예술제의 그 효시는 지금부터 67년 전인 1949년 진주에서 시작한“개천예술제”입니다.
이를 발상하고 창제한 분이 진주의 大人 파성 설창수 시인 이란 사실입니다.
파성 선생님은 개천예술제추진위원장을 비롯한 경남일보 사장, 해인대학 교수, 서정주 시인에 이은 제2대 문교부예술과장, 국회의원 등을 지낸 분으로 경남지방에선 전설 같은 큰 바위 얼굴 이었습니다.
오늘날 진주가 역사의 고장으로서 근세문예부흥의 발상지로서 자리 매김하기 까지는 설창수 시인의 노력을 빼놓고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저의 고향은 진주의 서편 70키로 거리에 있는 경남 하동군 진교면의 작은 산골 마을입니다. 한 30여 호가 사는 전형적인 산골마을이라 어린 시절 장래의 꿈에 대한 자극이 비교적 적었던 그런 주변 환경이었습니다.
그래선지 전 초등학교 시절 장래희망의 설문조사에서 “고물장수” 라고 적어 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를 본 담임선생님은 저를 참 솔직하고 실현 가능성이 높은 희망을 썼다며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모아놓은 고물들 중에 우연찮게 돈이 되는 게 들어있어 횡재하는 참 소박한 꿈의 고물장사지요. (그런 잠재의식에서인지 전 사회로 나온 이후 골동품 수집에 인생을 걸다 시피 하며 살아왔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 할 무렵, 앞으로 한문이나 배워서 동네사람들 토정비결과 결혼하는 사람들 사성, 시제 때 제문 등을 보고 써주면서 고물장사나 하며 살지 뭐 했었습니다.
그런데 순 농부였던 우리 부친의 말씀이 세상이 자꾸 변해 가는데 그래도 중학교 공부는 마쳐야 안 되겠느냐고 하여 진학이 그저 이루어 졌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입니다. 해발 5백 미터나 되는 재를 넘어야하는 산길 20여리를 걸어서, 소설 “지리산” 작가 이병주 선생의 고향인 하동군 북천에서 버스를 받아 타고 2박 3일간 진주 개천예술제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 모친은 34세에 중풍을 얻어 출입이 부자연스러워 돈도 청춘도 잃어버리고 살 때입니다.
그때 부친은 십리 떨어진 진교면의 아침시장에 고구마 한가마니를 져다 판돈으로 밤과 박하사탕을 사고 찰떡을 하여 어깨에 메는 가방에 넣어 여행을 보내 준 것입니다.
생각사록 그 시절 부모님의 포근한 자식사랑의 행복이 가방 가득했던 참 그리운 여행이었습니다.
전 그때 처음으로 가본 진주는 문화와 교육 예술의 향취가 그윽한 환상 적인 도시로 여린 가슴에 와 닿은 것이 지금도 진주하면 그 시절 그이미지입니다.
개천예술제에서 본 연극과 민속경연대회, 전국고등학교 악대부 경연, 특히 제주 오현 고등학교 악대부의 맑은 아침 진주시내거리 풍악행진은 참 신선하고도 경쾌했습니다. 또한 저의 가슴엔 그림과 서예 사진 전시회 관람 등에서 무언가의 영감이 스쳐왔었습니다.
첫날 새벽에 밖에서 웬 이상한 소리가 들려 여관담장에 매달려 내다보니 남여청년들이 줄을 서서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하고 지나가는 참 신기한 전설 같은 풍경도 보았습니다. 그 한참 뒤에 알고 보니 진주불교청년회원들의 시내거리 새벽 도량석 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진주로 향한 동경심과 이상은 싹이 트기 시작 했습니다. 진주에 가서 공부 하며 살아보는 현실적인 새로운 꿈이었지요.
그 꿈은 고등학교 시절 자칫 건강 때문에 좌절 될 뻔 했었던 위기를 넘어 대학시절이 진주에서 찬연하게 열린 것입니다.
단지 부모님 덕에 중학교를 거쳐 국립경상대학 수의과 20명에 영광스럽게 들어가게 된 것 입니다.
대학 2학년 때 어느 봄날 이었습니다.
통영에 사는 누님 집을 다녀오던 길 중간지점 고성읍 버스정류장에서입니다.
어느 노신사가 한 중년의 아주 정중한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올라 저의 옆 빈자리를 물어 확인하고서 앉는 것이었습니다.
곧 차는 출발 비포장도로 위로 1시간 30분 거리의 진주로 향했습니다.
전 옆에 앉은 곱슬머리장발에 두 눈과 입가에 위엄의 기운이 가득서린 이 노신사가 은근히 궁금해 졌습니다.
한 3분 정도의 시간의 흘렀을 때에 전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 용감하게 물었습니다. (용감한 곳에 역사가 있고, 준비된 자에게 스승은 나타난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저는 경상대학 2학년에 다니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무래도 범상치를 않으신 분 같으시고 또 어디서 많이 뵌 듯도 한데 누구신지요. 라고 묻게 됩니다.
그 선생님 왈, 저를 많이 봤다고요? 그럼 고향이 어디며 중 고등학교는? 지난날 개천예술제에 자주 와보았느냐고 함께 물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여행을 다녀갔었노라고 답했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못 보았을 것인데 하며 머리를 갸우뚱 여운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운도 잠시, 대화가 단절되기 전에 한 말씀을 더 붙였습니다.
그럼 혹시 학생이 다닌 초중고등과 대학의 교가는 누가 지었는지를 아시는 가? 고 물었습니다. (당시 경남과 부산에 있는 많은 학교의 교가를 작곡은 윤이상, 작사는 설창수 이었다.)
전 그 순간 버스좌석에서 자동적으로 반쯤 일어서며 아! 선생님이 파성 설창수 선생님이시지요? 라며 인사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전 이때의 행운을 저 생애의 아주 극적인 순간으로서 잊지를 못합니다.
사실 옆에 앉으실 때부터 이분 정도의 모습이면 진주의 전설 파성 설창수 선생님이 아닐까 하는 뭐가 스쳐 그래서 여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 간에 확인이 되자 비포장 길을 요동치며 달리는 버스 간에서 한 시간 반을 저 혼자를 대상으로 파성 선생님의 특강이 시작 된 것입니다.
주제는 “의랑 논개 시 비문”에 대한 저의 질문에서 입니다.
당시 저는 문학에 대한 정서가 거의 없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설창수 시인의 “논개”시가 훌륭하다는 것은 이미 들은 바가 있었고, 또 대학1년 때 무주구천동에서 열린 대학생불교연합회 제1회 화랑대회의 장기자랑에서 김상현(전 동국대 교수)형이 무릎을 꿇고서 암기한 논개 시의 낭송은 전국에서 모인 150여 명의 가슴에 전율적인 감동을 주어 더욱 충격이었지요. 그래서 좀 당돌하지만 어떻게 그 훌륭한 시를 쓰시게 되었느냐는 저의 물음에서 버스 칸에서의 파성 대시인의 홀로 대상 특강은 출발 한 것입니다.
아무리 명성이 있는 분이라도 자기를 인정해주는 진정한 칭찬의 자리 앞에서는 자신을 솔직하게 들어내 보이는 순수와 평화만이 존재하는 법입니다.
육순의 파성 대시인께서 풋내기 청년 한사람을 옆에 두고 그것도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의 버스 칸에서 “의랑 논개 시 비문”을 쓰게 된 배경을 마치 누에가 비단 실을 줄줄이 토해내듯 이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버스 칸 안에서의 열정의 파성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자주 어리고 그립습니다.
인생은 점점이 그리움인데 더구나 자기에게 영감을 주었다면 더하지요.
불후의 명시 “의랑 논개 비문”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1593년 진주남강 義岩 위에서 임진왜란의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를 꼭 껴안고서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6甲 360년을 맞는 1953년, 진주시민은 그 충절을 기리 새기고자 촉석루의 논개 사당 水月門 앞뜰에 시 비문을 세우기로 했었답니다.
애당초 그 원고는 노산 이은상 시인에게 청탁되었으나 노산은 젊은 파성이 써는 것이 좋겠다며 당시 37세인 자기에게로 되돌아왔었답니다.
이미 논개에 대한 시를 쓴 만해 한용운은 논개를 자기의 애인으로 승화시켰고, 수주 변영로는 절개와 지조의 상징으로 노래했었는데, 나는 어디에 포인트를 줄 것인지 그 詩想을 찾아 근1년을 방황 했었다고 합니다.
무슨 일을 해도 제대로 손에 잡히지를 않고서 머릿속엔 논개, 논개, 논개 만으로 가득 했었다고 합니다.
원고의 마감은 점점 압박되어오고 무언가의 연상은 되지를 않아 가슴에 열이 차오르던 즈음 만해와 인연이 있었던 사천 다솔사를 찾아 그곳에서 일주일을 머무르며 마지막 용맹정진을 하듯 고뇌를 거듭했었다고 합니다.
그 일주일의 마지막 날 새벽3시 무렵, 만뢰가 깊이 잠든 적막을 깨는 아침예불 도량석의 목탁소리가 쓸고 간 산사는 다시 고요로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그 시각 봉명산 중턱에서 발원한 샘물이 나무 홈을 타고서 졸졸 내려온 것이 돌확의 물과 합해지는 자연의 아려한 소리에 1년을 방황하며 찾아온 “논개‘ 화두가 홀연히 열린 맑은 기운이 가슴에 와 닿았다고 합니다.
곧 바로 촛불을 켜 잡고서 1시간 만에 완성한 문장, 애오라지 민족(8번)의 처녀로서, 여왕으로 승화시킨 의랑논개 시 비문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런 생생한 증언을 직접 듣고서 기억하는 이는 제천의 이사람 밖에 없을 지도 모릅니다. )
의랑논개비 건립 6년 후인 1959년 파성 시인의 국회의원 시절, 미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주최 측에 자기를 시인(a poet)으로 소개하자 그럼 하버드대학 델몬트 도서관에 자작시를 낭송 음반화 하여 줄 수가 있겠느냐고 그 자리에서 단번에 동의를 구해왔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여 암송하고 있던 시중에서 12수를 골라 낭송을 했었다고 합니다.
이후 파성은 자기의 모든 프로필에 “하버드대학 델몬트 도서관에 국내시인으로선 처음으로 자작시 낭송 음반 영구보관”이라고 반드시 올려놓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 확인은 뒤로 남겨놓은 채 1998년 83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후 10년쯤이 지난 즈음 진주 김보성 사모님(소설가)으로부터 시디 한 장이 우송되어 왔었습니다.
바로 하버드대학의 델몬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영구보관의 파성 설창수 자작시 낭송 복각판이었습니다.
서울 한성대학의 국문과교수인 자제분이 미국 교환교수로 있을 때 하버드대학 델몬트를 찾아가 확인하고서 복각해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아련했던 전설 같은 이야기가 뜻밖에도 현실로 확인해준 신선함이지요. 하버드대학 관계자, 가족임을 확인하고서 어제일 같이 깔끔하게 보관 정리해온 근 60년 전의 것을 찾아내 준 것입니다. 그 시디엔 설창수시인의 40대 시절 맑고도 자신에 찬 묵직한 목소리로의 시낭송을 아무조건 없이 본래 그대로 담아 내줄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50년 전의 그 소중한 국산 제작한 영화 필름도 남아 있는 게 거의 없답니다. (밀짚모자 동여매는데 써 도록 다주어 버린 듯.)
전 대학 3학년 시절 책임지고 있던 대학생불교연합회 경남지부에서 신입생환영 강연회에 파성 선생님을 “논개의 정신”이란 주제로 모셨습니다.
전화상으로 1년 전 버스 간에서 만났던 학생이라고 소개하자 쾌히 강연회에 응해주신 것입니다. 하얀 한복차림으로 강단에 서셨지요.
강연 말미에 서녘해가 황홀한 노을로 남강물길을 채색하며 기울 무렵이었습니다. 창가로 비치는 노을물빛을 안고서 “논개 시를”정열적으로 낭송하시던 파성의 모습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습니다.
그때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외우게 된 이 시를 한번 낭송해 드리겠습니다.
의랑 논개비문. 설창수
하나인 것이 동시에 둘일 수 없는 것이면서
민족의 가슴팍에 살아있는 논개의 이름은
백도 천도만도 넘는다.
마지막 그 시간까지 원수와 더불어 노래하며 춤추었고
그를 껴안고 죽어간 입술이 앵도 보담 붉고 서리 맺힌 눈썹이 반달보다 고왔던 것은
한갓 기생으로서가 아니라 민족의 가슴에 영원토록 남을 처녀의 자태였으며
만 사람의 노래와 춤으로 보답 받을 위대한 여왕으로 서다.
민족역사의 산과 들에 높고 낮은 권세의 왕들 무덤이
오늘날 우리와 상관없으면서
한줄기 푸른 물과 한 덩이 하얀 바위가 삼백 여순 해를 지날수록
민족의 가슴 깊이 한결 푸르고 고운 까닭이란
그를 사랑하고 숭모하는 뜻이라.
썩은 벼슬아치들이 외람되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민족을 고달피고
나라를 망친 허물과 표독한 오랑캐의 무리가 어진 민족을 노략하므로
식어진 어미의 젖꼭지에 매달려 애기들을 울린 저주를 넘어
죽어서 오히려 사는 이치와
하나를 바쳐 모두를 얻는 도리를 증명한
그를 보면 그만이다.
피란 매양 물보다 진한 것이 아니어
무고히 흘려진 그 옛날 민족의 피는 어즈버 진주성터의 풀 거름이 되고 말아도
불로한 처녀 논개의 푸른 머리카락을 빗겨
남가람이 천추로 푸르러 굽이치며 흐름을 보라.
애오라지 민족의 처녀에게 드리고픈 민족의 사랑만은
강물 따라 흐르는 것이 아니기에
아 아
어느 날 조국의 다사로운 금잔디 밭으로 물옷 벗어들고 거닐어 오실
당신을 위하여
여기에 돌 하나 세운다.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을 포근하게 대하여주고 투자하는 사회, 이는 온화하고 편안하여 미래가 있는 선진사회입니다.
파성 설창수시인.
그분의 두 눈에는 항시 불기운이 뚝뚝 떨어지는 듯 깨어있는 의식인 이라 접근하기에 부담이 되셨던 분입니다.
하지만 물어오고 찾아오는 사람을 내치지 않으면서 항시 당한 사람 편에 서서 짓밟힌 잡초 앞 에서도 눈물지을 수 있는 그런 가슴의 시인이었습니다.
1949년 파성 시인의 33세란 푸른 청춘의 나이! 그는 대한민국 지방예술제의 효시인 개천예술제를 창시 했습니다.
문학과 예술의 창작을 총망라한 5일간의 전국적인 축제행사이었습니다.
당시 별로 볼거리가 없었던 시절이라 인근 시군은 물론 전국에서 모여든 인파로 진주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당시 전국의 내로라하는 문학과 예술대가들은 백일장과 경연대회 심사를 위하여 그 힘든 교통편을 이용 진주라 천리 길을 찾아오곤 했었습니다.
서정주, 조지훈, 구상, 오상순, 김춘수, 유치한 등 의 유명 시인은 물론 수많은 장르의 예술계 거장들이 진주로진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때 추천된 시인이 그 유명한 박재삼과 이형기 교수 같은 분들입니다.
조국해방기의 그 혼란기 정국에서 훌륭한 개천예술제를 초발상하고 총 기획 연출한 파성 설창수시인의 철학은 “관에 의지하지 말고 민의 주도로 이룩해야한다”는 주관의 대인이었습니다.
그는 개천예술제를 창설의 원을 세우고서 거기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마련하고자, 당시 진주시내 의곡사 주지였던 서예대가 오제봉 스님으로 부터 큰 보따리 가득 작품을 받아내서 전국을 돌며 팔아 기금을 마련했었다고 합니다. 이 놀라운 발상과 열정에 두고두고 어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를 계기로 진주는 더욱 역사와 문화예술과 교육의 고장으로 자리매김 하게 된 것입니다.
-한 때 예술이란 권력자를 위하여 궁정속의 비원에 피는 꽃인 줄만 알았으나 온전한 예술이란 사람의 목숨과 같이 영원히 자유롭고 대중적인 것이다. 기름지고 오 오랜 땅위에 커다란 꽃송이가 피어나듯이 힘차고 참다운 마음 위에서만 위대한 예술은 꽃 피는 것이다- (앞뒤 생략)
이렇게 파성이 지은 “개천예술제의 취지문”은 전국에서 열리고 있는 예술제 취지문의 근간이 되어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의 행정편의와 정치적 이용에 저항하며 민의 주도로 이끌어 가던 파성의 문예부흥의 꿈은 중대위기를 맞습니다. 곧 밀어닥친 정치적 소용돌이는 파성의 불같은 열정의 4.5십대 황금기의 영혼 18년을 송두리째 허비하게 하여 수복하기까지의 무모하게 당한 시련기는 너무도 길었습니다.
일정강정기시엔 독립운동으로 고초를 겪었고, 5.16군사정권이 들어서자 민간주도의 개천예술제가 관주도로 이관 되어져 그 본래의 생명가치에 손상을 입자 파성은 18년간이나 개천예술제 기간엔 진주를 떠나 있어야 했었습니다.
아울러 경남일보사장과 소설가인 사모님의 고등학교 교사직도 잃게 됩니다.
졸지에 모든 제도권에서 쫓겨난 파성은 자기의 시를 詩書와 詩畵로 꾸며 이를 짊어지고 전국을 돌며 전시를 열어 탁발로 생활을 영위합니다. 대언론인, 대시인. 문학예술운동의 선구자, 국회 정치인 파성의 수사 어구는 넘쳐납니다. 허나 생활경제 정신자유가 여유롭지 못한 선비로서의 파성은 생활가교는 오로지 250여회가 넘는 시화전으로 전국을 돌아야했었습니다.
이 파성의 시련기에 경향신문의 특집부장으로 진주에 취재차 갔었던 신동문 선생은 파성 같은 훌륭한 업적의 대시인을 촉석루 성안에 유폐처럼 살게 한 현실을 신랄하게 기사화 했다는 사실을 신동문 선생으로부터 직접 들은 바도 있습니다.
저는 1979년11월24일제천문학회 이름으로 파성 시화전을 제천에 유치하여 28점을 팔아드리느라 고생을 엄청 했었습니다. 그때 힘이 되어준 박지견 선생님과 영창목재 김 사장, 제천지검장과 지원장, 최광남 원장, 우리 장인 등 여러분의 고마움을 내내 잊지를 못합니다.
전 개천예술제를 창시한 파성 설창수 시인을, 그 행사를 기획연출 하는 진주예총을 참 존경했습니다.
이런 저의 정서 덕분에 지금부터 13년 전 제천예총지부장이란 책임을 맡았을 때입니다.
전 곧 바로 제천에 새로운 르네상스의 꿈을 펼쳐보고자 하는 순수마음으로 “옥소예술제”를 창제하고 그 취지문을 손수 짓게 되었습니다.
이는 어쩌면 청년기에 문학과 예술의 도시 진주에서의 생활과 이의 파수꾼과 같으셨던 파성 설창수 시인을 만난 이후 생을 다할 때까지 존경하며 따랐던 공덕이 아니랴 싶습니다.
파성 시인은 군사독재정권시절 18년간 진주의 민주화투쟁 주요인물에 매번 올라있었습니다.
이때 나온 시가 파성 시인의 자화상과 같은 노응老鷹(늙은 매)이란 시입니다.
전 올 해로 탄신 1백주년을 맞는 파성 설창수 시인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이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그럼 파성 시인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선생의 자화상과도 같아 외우게 된 시 노응을 낭송 해드리는 것으로 이 시간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노응 한라산록에서-
난 본시 사상의 새는 아니다.
도저한 의지와 행동의 새다.
올빼미의 비겁과
까마귀의 작당과
여우의 교간을
천품한 일 없기로서니
기한과 고독에 굴종할 내이랴.
난 慓擢을 傲慢하고 싶진 않다.
귀족주의는 차라리 적.
屍肉을 싫어하는 것은
한갓 결백의所然일 뿐.
지금 나 혼자 바닷가에 와서
서해의 낙조를 망연히 바라본다.
나에겐 이미 天稟을 無爲한 晩年의 悔恨이 있다.
바위와
바람과
하늘과 더불어
내 청춘은 저물었건만
산맥의 번영에 공헌 바 없이
후대에 주는 기원만이 남았다.
나는 또 죽지를 벌려
네게로 돌아가자.
나의 영원한 조국-
산아.
나의 이 기도를 보증하라.
첫댓글 진주 개천예술제가 이렇게 역사가 깊은줄 미처 몰랐습니다.
김원장님 덕분에 파성 설창수 선생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설창수선생의 모필 글씨를 보면 대나무를 쪼개는듯한 파죽지세가 느껴짐니다
글이나 글씨는 곧 그 사람이란 생각을 합니다
67년전에 타도시에선 생각도 못하고 있을때
진주는 개천예술제가 열렸다는 사실만으로도 문화와 예술을 즐기는 고장같고
설창수시인은 知德을 겸비한 대단한분 같습니다.
그날 예총아카데미 특강을 들으면서 김연호선생님의 특유한 언변과 제스쳐로
인하여 그시대를 생생하게 연상케하는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진주 개천 예술제와 설창수 선생의 생애도 감동이었고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알게 된 사실들이 더 큰 기쁨이었습니다.
몰랐던 파성 설창수 선생에 대해 알게 되어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작은 만남 조차 귀히 여기는 김연호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첫 만남인 파성 설창수 선생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지기도 합니다.
지난주 월요일 밤10시 진주에서는 개천예술제를 맞아 케비에스 가요무대가 장장 1시간반을 찬란히 장식했었습니다.
소인은 청성맞게시리 가요무대팬이라 즐겨보았지요. 그러나 그러나 진주를 오늘날에 진주를 만들었던 탄신 1백주년을 맞으신 개천예술제의 창시자 파성 설창수 시인에대한
언급은 단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진주시관계자와 시민은 조상의 뼈만우려먹고 사는 맹충이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유감이지요!
댓글을 주신 제천문학 문인이여 만세! 영원하라! 그대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