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 주: 본 고는 참고문헌의 출처 註記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단평형식으로 논문형식을 지양하며 출처는 내부적으로만 관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해시 착오나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새벽노을
타오르는 게
어디 너뿐이랴
나의 다비식을 내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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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디카시는 풍경(=自然)을 내면의식(=自我)의 존재로 형상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서정시보다 회화와 상통할 수 있는 우월성을 지닌다. 시문학 비평계의 일부 견해이기도 하다. 그 논거는 무엇일까? 시적 대상으로써 그 감흥이 뇌리를 스치는 풍경에 대한 순간 포착의 힘! 그것은 시인으로 하여금 내면의식을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유기적인 촉매제’로 작용하는 힘이 어느 문학 장르보다도 강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번호의 주제로써 인용된 김애경 시인의 「새벽 노을」에서 그 진면목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 내가 그리고자하는 것은 존재의 뿌리 그 자체에 휘감겨 있다.” 소위 ‘근원(根源)의 목격자’라 불리우는 세잔느의 말을 주제에 접근하는 화두로 인용해 본다. 말년에 이르러서야 생 빅투아르산을 풍경으로 언덕위 한 그루 소나무 밑에 10년간 이젤을 세운 끝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그가 시인 가스케에게 한 말이다. 풍경에 대한 감각이 꽉 들어차면 그것은 실재가 된다는 인식이다. 즉, 풍경(=自然)은 표면보다는 깊이에 참된 진리가 있음을 간파한 깨달음이다. 순간포착 된 풍경(=自然)은 ‘표면(단순한 외형)’보다는 ‘깊이(내면의 인식)’로 감각이 전이 되어 ‘존재의 근원’을 깨닫게 하는 유기적인 촉매제가 되었던 것이다. 디카시는 풍경의 존재론적 인식이며 이미 김애경 시인은 그 맥을 쥐고 있다.
3.
이러한 디카시의 우월성을 형이상학의 파괴자이자 인식론의 거두인 퐁티의 《세잔느의 의혹》이란 에세이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지각의 현상학』,1945) 그는 “색이란 우리들의 뇌와 우주가 만나는 장소”라고 썼다. 색은 사물자체가 아니라 인식이라는 것이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詩도 회화와 마찬가지로 線(= 관념)에서 色 (=감각)으로의 패라다임이 전환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말하자면 세잔느는 풍경(=自然)을 인식하고 깊이에 참된 진리가 있음을 화폭으로 담아내고자 했다. 자연의 본질(=내면의식화 된 自我)을 회화의 수단으로 탐구하려 했던 화가에게 당시 '인식론'을 주창하던 철학계에서 관심을 쏟아 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디카시가 철학적 견지에서도 회화와 융합할 수 있는 탄탄한 힘을 지니고 있음을 예견하였던 것이다.
4. 이러한 디카시와 회화의 견고한 융합으로써의 '존재론적' 인식은 릴케 사후 발간 된 『세잔느 편지』의 페이지 속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세잔느의 독특한 “풍경의식”을 언어로써 詩에서 구축하려고 몸부림 쳤다. 세잔느의 ‘내면적인 변혁의 힘과 질박하고 허세를 거부하는 진실성’ 은 릴케의 시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5
이상과 같은 디카시가 지니는 ‘풍경(=自然)의 내면의식(=自我)’이라는 본질을 상기하면서 「새벽 노을」의 행간 속으로 들어가 본다. 디카시를 통해 내면의식의 실존을 채굴하고 이를 통해 自我를 발견하는 비법을 터득하고 있는 김애경 시인의 디카시 쓰기의 멋스러움이 번득인다. 우선 제목이 흥미롭다. 역설(paradox)은 언어의 유희를 바탕으로 하지만 신선한 긍정으로 민낯을 드러내며 감동을 준다. 저 붉게 노을 지는 새벽은 벌써 우리의 내면으로 지는 저녘 노을이 되었으며 이는 다시 숭고한 '다비식'으로 인식의 확산이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線(= 관념)에서 色 (=감각)으로의 시적 패라다임의 전환에 성공한 것이다. 환언하면 ‘표면(단순한 외형)’보다는 ‘깊이(내면의 인식)’로 시적 감흥이 시인의 디지털 카메라 포커스를 붙들어 맸다는 것이다.
6.
이 디카시의 지향점을 찾아보자. 저 붉게 타오르는 새벽노을은 화자의 ‘다비식’을 통해 ‘표면(단순한 외형)’보다는 ‘깊이(내면의 인식)’로 전환되어 여명과 힘께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삼귀의례의 다비식의 색상은 푸르고 냄새는 상큼하다. 어쩌면 화자에게 내면의식(=自我)의 부활을 가능케 하는 어떤 이상향에 대한 그리움의 결정체이기도 할 것이다. 인생 천로역정을 탈속한 스님들도 결국 자신을 불태워 영원세계 내면의식(=自我)’의 부활을 꿈꾸고 있으므로.
7. 이 시의 화자도 인생 천로역정에 지친 중생이겠다. 그는 「새벽 노을」이 주는 영감을 지치고 굴곡진 육신으로 다비식을 치루고 있다.
화자는 다비식을 통해 잘 살아가야 할 이유들이 빼곡한 푸른 봄, 상큼함 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붉게 타오른 불에 ‘풍경(=自然)을 던져 내면의식(=自我)’을 채굴하고 있는 이 시가 우리에게 주는 삶의 지혜로서의 알레고리가 촉촉한 감동의 여운을 주는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된다. 필자도 그 다비식을 찾아 새롭게 부활하는 축원의 꽃을 바치고 싶어진다. 새벽노을 다비식을 소망하면서 <悳泉>
첫댓글 시와 시평 모두 절창입니다.
두 작품이 만나 상승곡선을 긋는 듯 싶습니다.
머물다 갑니다.
시인이 보여주려 한 부분보다
시인이 의도하지 않았고 인지하지도 못한 부분에 욕심을 내다보니
장황해지고 글의 탄력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숨어버리고, 적당히 물러서면 스물거리는것
그것이 비평의 어려움인 것 같습니다.
졸평문에 대한 선배님의 격려가 부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