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50주년 기념일>/ 구연식
올해가 어느덧 그날이 반세기가 되었다. 서른 살을 넘기지 말아야 하겠고, 농번기 시작 전에 치러야겠다고 나름의 계획 속에 실시된 행사였다. 집안에서도 처음 있는 행사였기에 많은 친지들이 와서 축하해 주었다. 특히 모교 교장선생님이 직접 집전(執典)하여 삶의 좋은 말씀과 격려 속에 마무리해 주었다. 그래서 그 은사님을 평생의 멘토로 모시며 살아왔다.
올해 6월 1일 주말은 나에게는 한 획을 긋는 50주년이기에 나름의 계획을 세워 가깝고 조용한 곳에서 그 옛날을 음미하며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전남 곡성의 장미공원과 지리산 일대나, 충남 부여의 고적지와 서해안 여러 곳을 둘러보기로 일정을 계획했다. 아내한테는 조금도 낌새를 보이지 않고 극비리에 추진했다. 그런데 6월 1일이 코앞에 다가오자, 아내는 나의 거동 살피기에 여념이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능청스럽게 시치미를 뗐다.
별 준비도 없고 부산만 떠는 것 같아서 D day 하루 전날 발표하여 깜짝쇼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내는 50주년도 모르는 무심한 남편에게 원망스러운지 힐끗힐끗 나의 태도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볼멘소리로 “당신 내일 무슨 계획 없어?”라고 한다. 나는 결국 올 것이 왔구나하면서 꾹 참고 퉁명스럽게 “없어”라고 했다. 잠깐 밖에 나갔다 오니 아내가 내일 오빠 집 식구들과 점심 예약했다고 한다. 아뿔싸? 순간 수습이 안 된다. 처남은 조카들 때문에 객지에 있다가 정리하고 최근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진즉에 식사 한 번하자고 했던 말이 있었다. 이제 와서 내일은 50주년이니 다음에 하자고 하면 지금까지 나의 행동이 아내한테는 뒤죽박죽일 것 같아서 그렇게 하자고 했다.
다음 날 오전에 20여 년 만에 처남 내외를 만났다. 만남의 장소에서 기다리니 처남이 다가온다. 나는 반가워서 빙그레 웃으면서 아는 체를 하려니 처남은 나를 놔두고 아내 쪽으로 그냥 지나간다. 바로 뒤에 오던 처남의 댁이 “수영이 아빠? 고모부잖아”라고 조금 큰 소리로 말하니 가던 걸음 멈추고 다시 내게로 온다. 이젠 노안이 되어서 사람을 잘 못 알아본다고 한다.
나는 웃으면서 “형님 나는 안 보이고 여동생만 보이는가 봐” 하면서 어색함을 지워버렸다.
식당에 들어가기도 전에 처남은 오늘 식사대는 자기가 낼 터이니 그리 알라면서 미리 선언한다. 20여 년간 객지에서 자식들 뒷바라지 이야기부터 50여 년 전 행사 이야기도 찔끔 내비친다. 순간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속으로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고 식사 제의를 한 것으로 짐작된다. 다음 말 수습에 준비하려 했는데, 그냥 지나가 버려 다행이다.
오랜만에 고급 육류 구이로 너도나도 목구멍 청소에 여념이 없다. 이렇게 포식하고 나니 어느 상감 부럽지 않다. 자리를 옮겨 군산의 명소 은파 호수 유원지 전망 좋은 카페에서 햇빛에 춤을 추고 있는 물결을 바라보며 아라비안나이트의 천일야화처럼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벌써 하루해가 저물어 50주년 기념은 땅거미 등에 업혀 호수가 숲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모임의 가족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군산으로, 전주로 헤어졌다.
이젠 차 속에는 오붓하게 부부만 남았다. 겸연쩍은 침묵의 시간만 흐른다. 아내의 손을 살며시 잡아본다. “당신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지?” 하고 말 운을 띠니 아내도 알고 있었다는 대꾸 표정을 짓는다. 말을 안 하면 아내가 서운할까 봐 며칠 전부터의 실행계획을 말했다. 아내는 그러면 사전에 말했어야 오늘 같은 해프닝을 막을 수 있지 않았겠냐고 어린애 다루듯 나무란다.
50여 년 전 솜털이 가시지 않은 앳된 복숭아 볼 얼굴에 수줍게 웃던 아내가 떠오른다. 친구들이 시골집 마당 차일 아래서 주방의 돼지 수육을 훔쳐 오고, 바닥난 술 항아리를 박박 긁어서 막걸리를 마시던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평소 성격이 숫된 아버지는 친구들 분위기를 생각했는지 슬며시 자리를 떠나 동네 마실을 나가신다. 어머니는 친구들 술안주 전 부침에 매운 연기에도 웃음 주체를 못한다.
며칠 후 장모님을 뵈었다. ‘어린 동생처럼 아끼면서 잘 데리고 살아’라고 잡은 손을 꼬옥 쥐어주며 말하신다. “예!”하고 장모님과의 약속을 지금도 아내와 다투거나 속이 상할 때면 손거울 꺼내어 보듯 다짐하면서 살아 왔다.
다음 해 51주년에는 마음속에만 담지 않고 아내와 미리 상의하여, 무대가 초라하고 팡파르가 없어도 나의 진심어린 들꽃 목걸이와 꽃반지를 만들어 끼워주며, 이제는 하늘에서 지켜볼 처모님과 은사님의 말씀 되새기며 검은 머리 파 뿌리가 되고 그 파 뿌리가 대머리가 될 때까지 해로동혈(偕老同穴)하고 싶다.
(2024, 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