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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7,31-37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 연중 23주일 말씀은 어떤 내용인지 혹시 기억나십니까?
누구 고쳐주는 얘기 나왔습니까?
귀만 먹었어요? 귀먹은 반벙어리.
그분들은 손으로 하는 수화로 소통하죠.
TV 뉴스라든지 할 때 보면 옆에 수화로 통역하시는 분들이 있죠.
그런데 수화할 때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손으로 하는 것은 다 정해져 있는데, 이것으로 전달되는 것은 50%밖에 안 된대요.
나머지 50%는 뭐냐? 얼굴 표정.
손으로는 기쁘다고 하면서 인상을 쓰고 그래 봐요.
기쁘다는 걸 표시하면 웃으면서, 그리고 놀라면 놀라는 표정 하면서, 자세히 보면 수화하시는 분들 보면 정말 연극 배우 같아요.
그것이 힘들대요.
‘사랑합니다.’ 할 때도 정말 얼굴에 사랑이 묻어나는 표정을 해야만 알아듣는다고 하죠.
여러분들 한국에 유명한 돌아가신 김기창 화백이라고 아시죠?
그분 그림도 제가 받은 게 꽤 많은데 14처 그림도 제게 주셨죠.
그분은 여기서 가까운 증평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초정 쪽에서 기와집을 짓고 사셨어요.
딸은 수녀죠. 봉쇄 수도원 수도자일 거예요.
가끔 그분 댁에도 올라가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그분이랑 나랑은 뭐로 대화했을까요?
그 양반은 귀는 안 들리는데 사람 입 모양을 보고 뭔 말인지는 알아들으셨어요.
본인은 수화와 좀 긴 것은 종이에다 써서 보여주셨죠.
나도 같이 종이에 썼더니 신부님은 안 쓰셔도 된대, 말만 천천히 하면 입을 보고 알겠대요.
귀도 안 들리는데 어떻게 이렇게 반쪽 말이라도 배웠냐 물으니 정말 피나는 노력을 하셨대요.
그렇지만 역시 의사소통은 아주 어눌하죠.
그래서 항상 손에 메모장을 늘 가지고 다니셨어요.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이분은 원래 천주교 신자는 아니었어요.
딸이 먼저 천주교에 귀의하면 수녀가 되겠다고 하니, 아버지도 오케이 하신 거죠.
그 양반은 돌아가실 때까지도 목에 묵주를 걸고 다니셨고,
또 그 양반 볼 때마다 ‘화가는 화가다.’ 하는 게 늘 새빨간 양말을 신고 있었어요.
내가 한 번은 우스갯소리로 혹시 속옷도 빨갛냐 물으니, 속옷은 빨갛지 않대요.
우리는 못 듣는 사람을 귀머거리, 못 보는 사람을 장님, 또 말 못 하는 사람은 농아라 하죠.
지금 이 자리에는 농아도 안 계신 것 같고 소경도 없으시고, 귀머거리도 없으신 것 같네요.
연세에 따라서 조금 청력은 좀 떨어지는 사람은 있어요, 아주 안 들리시는 분 손 들어보세요.
손 들면, 그 사람은 들리는 거죠. 아무도 없네.
그러니까 귀 안 들리는 사람도 없어.
이것 세 가지만 갖고 있어도 얼마나 감사할 게 많은데. 우리는 감사할 줄 모르죠.
당연히 듣는 줄 당연히 보는 줄, 당연히 내 입으로 말하는 줄 알고 살아요.
여러분이 듣고, 말하고, 그리고 보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묵상하셨습니까?
가슴 절절히 주님께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는 거 정말 감사합니다.’ 하셨나요?
여기 오시면 ‘아 이쁘다.’라는 생각은 모두 들죠.
하지만 ‘이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신 주님, 찬미합니다.’ 거기까지 가야 치유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여러분들 제 피정 녹음 강론 듣잖아요?
여러분이 그 피정 못 갔어도, 제가 피정에서 녹음해 온 강론 유튜브 방송에 올려주잖아요.
신자들이 그것 들을 때마다 재밌다면서 은혜받았다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신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영광 드려야죠.
그냥 은혜받았다, 내 귀로 내가 들었다, 거기서 끝나버리고 말아요,
또 말할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큰 은혜예요.
볼 수 있다는 것, 들을 수 있다는 것, 말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평소에는 절절히 감사하지 못하고 살다가,
나중에 청력이 망가지면 그때부터 잘 들렸을 때가 얼마나 그리운지.
또 눈도 나이 들면 병이 생기죠.
하다못해 나 같은 경우에도 백내장, 녹내장, 황반변성까지 있죠.
진행을 막으려 계속 약을 먹고 있어요.
황반변성에 녹내장이 생기니까 그렇게 좋아하는 책을 볼 수가 없는 거예요.
두세 줄 읽으면 글자가 다 깨져 아무리 눈에 힘주고 안약을 넣어도 책 한 페이지도 못 봐요.
그래서 책 보는 건 포기를 했어요.
그러면서 예전에 밤새워 책을 읽던 시절, 그때 한 번도 내가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한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눈이 약해지고 나니까는 그 시절이 그리운 거죠.
우리는 있을 때 감사하질 않고 잃어버릴 때 감사하는 마음을 찾아요.
그래도 저는 감사하게 황반변성으로 실명까지는 안 갈 것 같대요.
신부님 살아생전에는 실명까지 안 갈 것 같아요. 황반변성이 건식이 있고 습식이 있대요.
김대군 신부님이라고 서울교구의 유명한 신부님인데,
그분도 황반변성 때문에 점점 시야가 좁아지다가 나중에 소경된 채로 한 5년 살다 돌아가셨죠.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부축해 주지 않으면 한 발짝도 못 움직이고 아무것도 못 하는 거야.
내가 사석에서 ‘신부님 답답하시죠?’ 하니, ‘그래도 영의 눈이 있지 않습니까?’ 하세요.
신부님은 카리스마가 있으셨는데, 눈이 안 보이시니 기도할 시간이 많대.
캄캄하니까 기도밖에 할 게 없대.
눈에 보이면 저것도 분심 덩어리, 저것도 분심 덩어리, 미운 놈 이쁜 놈 다 보여서 기도할 시간을 뺏기는데
앞이 안 보이니까 오로지 기도만 할 수밖에 없대.
감사하세요, 볼 수 있다는 것, 들을 수 있다는 것, 말할 수 있는 것에.
사실은 이 셋만이 아니죠.
손가락 움직이는 것조차도 다 감사 덩어리예요.
내가 내 손으로 발톱을 깎을 수만 있어도 주님의 축복이죠.
물론 배가 나오신 분들은 발톱 깎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겠지만, 아무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감사하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어요.
내가 늘 하는 얘기하지만, 여기 오늘 여러분들이 찾아온 것 같죠?
천만에! 아까 강원방도 온다고 그러다 못 온 사람들 있잖아요.
겉으로 보면 여러분들이 방장한테 신청하고 차 끌고 온 것처럼 보이죠.
오로지 여기 온 모든 주체가 여러분이 같지만, 하느님이 ‘너 때가 안 됐다’ 막으면 못 와요.
하느님이 허락하시고 선택했으니까 오는 것이고. 불러주셨으니까 온 것입니다.
불러주셨으면 하실 말이 있겠죠.
그 할 말은 사제의 입을 통해서 또 수많은 성인 성녀의 전구를 통해서 하실 겁니다.
또 주실 게 있을 거예요.
치유의 은혜 내려갈 것이고 마음속에 어둠이 있다면 마귀를 쫓아내겠죠.
하여튼 성경에 보면 항상 예수님 쪽에서 먼저 다가가셨어요.
나병 환자들 오는 것을 보고 예수님 먼저 쫓아갔잖아요.
겉으로 보면 우리가 뭘 한 것 같죠.
우리가 기도한 것 같고 우리가 피정 갔다 온 것 같지만, 아니에요.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빌어주신 거죠.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한 것보다는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 거죠.
인간의 기본적인 축복은 첫 번째가 빛의 축복입니다.
두 번째가 소리의 축복이고, 세 번째가 말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런 장애인들은 그 축복을 못 누리고 삽니다.
중복 장애인들은 더더욱 답답하겠죠.
여러분들 헬렌 켈러라고 들어보셨죠?
그 양반은 모든 장애를 다 가지고 있는 중복 장애인인데도 위대한 스승이 됐잖아요.
물론 그분 뒤에는 어릴 때부터 교육했던 설리번이라는 위대한 선생님이 있었어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은 중복 장애인을 치유하십니다.
귀도 먹고 말도 못 해서 말도 어어어어 하는 반벙어리를 치유하시죠.
예수님이 오늘 얼마나 아름답게 사람을 다루시느냐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제가 피정 때 귀에 못이 박히게 얘기한 얘기 중 하나 뭐냐?
‘예수님의 치유하는 방법을 우리들이 배워야 한다. 예수님의 치유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있다.’
혹시 기억나시는 분 있으세요?
예수님을 늘 그 세 가지 원칙을 가지고 치유하셨어요.
그분이 그 원칙을 가지고 치유하셨듯 우리도 다른 사람 치유할 때도 그 원칙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아무도 대답 못 하면 내가 기운이 쭉쭉 빠져.
유튜브 강론 들으시는 분들 대답해 보세요.
하느님이 우리를 치유하는 것은 수직적인 치유, 우리끼리 치유하는 것을 수평적 치유라 하죠.
그리고 그 두 개가 합치면 십자가가 만들어지죠.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치유하실 때 보면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첫 번째 ‘조건을 붙이지 않으셨다.’ 기억나세요?
열심히 한 놈만 치유시킨 것이 아니죠.
솔직히 예수님 따라다녔던 사람들이 믿음 갖고 따라다니는 사람 별로 없어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예수님이 왕 되면 한자리에 하려고 쫓아다녔던 거지, ‘
저분이 메시아건 상관없어. 저 사람만 쫓아다니면 병 낫는데.’ 100% 기복적인 마음으로 쫓아다녔던 거예요.
그래도 예수님은 치유하실 때 하나하나 불러서 네가 과연 치유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느냐 하고 심사하지 않으셨잖아요.
기복의 마음으로 쫓아다녔더라도 그 사람의 상처를 치유시켰잖아요.
성경에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얘기해서 치유받은 사람은 딱 세 사람밖에 안 돼요.
나머지는 그 사람이 믿음이 깊어서 치유시켜 준 게 아니에요.
그냥 내리사랑, 내리사랑이 뭔지 알죠?
자식이 미워도 사랑하잖아요. 부모들은 그렇죠.
그 사랑이에요. 부모가 자식 사랑할 때 조건 안 붙이잖아요.
속는 거 알면서도 또 속아주잖아요. 그게 부모 마음이잖아요.
‘조건 없이 치유시켰다.’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뭐냐? ‘섬세하게 치유시켰다.’
오늘 성경에 보면 군중들 사이에서 귀먹은 반벙어리를 따로 끄집어내서 딴 곳으로 데려가요.
그 바쁜 분이 손만 얹고 말만 ‘귀 열려라.’ 해도 될 능력자잖아요.
그런데 유난히 오늘 복음에 보면 뭘 디테일하게 바르고 하시죠.
사가가 어떻게 서술했느냐?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왜 그랬을까요?
만일 그 사람이 군중들 사이에서 귀가 열렸다면 아마 인간들 떠드는 소리가 대포 소리처럼 들렸을 거예요.
태어나서 처음 듣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름다운 목소리가 아니라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그것은 공포 그 자체였을 겁니다.
예수님은 그것까지도 아시고 따로 불러서 단둘이만 나가시죠.
침을 바르는 것은 그 당시 풍습이에요.
침 없이도 예수님은 귀 얼리게 하고 말하게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그때 풍습대로 침을 발라서 귀에다가 묻히고 그다음 혀에 대셨죠.
그랬더니 귀가 열렸어.
귀가 열리면서 제일 처음 축복의 말을 들었죠. ‘어때 들리니?’
누구 말을 들은 거예요? 메시아의 말.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귀가 열리면서 처음 들은 거야.
‘들리니? 이게 바람 소리야, 저 나뭇가지도 흔들리잖아. 저 새도 이쁘게 노래하네.’
하나하나 소리에 적응시킨 다음에 다시 군중들 사이로 돌려보냈어요, 그 바쁘신 분이!
그래서 사랑은 섬세해야 해요. 도매금으로 하면 안 돼.
자식이 여럿이라 하더라도 큰아들한테 치유하는 방법이 달라야 하고, 딸한테 치유하는 방법이 달라야 하고 다 달라야 해.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치유한다고 그러다가 더 상처 주는 일도 있죠.
오늘 예수님의 이 섬세한 치유 장면을 보면 아주 그냥 그야말로 깜짝 놀라죠.
또 어떤 경우에 또 섬세했을까요?
아까 내가 나병 환자 보면 예수님을 먼저 쫓아가서 예수님 손을 어디다 댔다고요?
나병 환자 그 상처에다 손을 댔어.
손 안 대도 ‘나아라.’ 해도 나을 거예요.
그리고 사실 의학적으로 보면 되게 어리석은 거예요.
전염되는 거예요. 의학적으로 보면 제정신 아닌 거예요.
그런데 상처에 손을 댔어. 그리고 병이 나았죠.
왜 상처에 손을 대셨을까? 안 대고 낫게 할 수 있었을 텐데.
나병 환자한테 제일 큰 상처는 뭐냐?
버림받았다고 하는 거예요.
이 저주받을 몸뚱아리, 문둥병 걸리고 난 다음부턴 아무도 만진 사람이 없어.
마누라도 나 싫다고 도망쳤고 자식새끼도 나 묶어 산속에다 버렸고.
그 사람의 고통은 썩어들어가는 몸뚱아리보다 배신감, 상실감, 절망감이 더 컸죠.
그래서 예수님은 그 누구도 만지기 싫었던 피고름이 줄줄 흘러내리는 상처에 손을 댔어요.
그 순간에 상처가 치유되면서 마음의 병도 같이 치유됐겠죠.
‘이분이 내 몸에 손을 댔어.’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위대한 심리학자이셨죠.
‘터치 요법, 터치 테라피’를 그분은 아셨던 거예요.
여러분들 본당 신부님들이 미사 끝나고 나면 다 악수해 줍니까?
하시는 분도 있겠죠.
저도 항상 본당 신부할 때 제의 벗자마자 앞에 나와서 기다려요.
삼종 기도 끝나고 나오면 양손으로 앞으로 뒤로 악수하죠.
어떨 때는 자기들이 끌어다가 악수하고 셀프 안수래.
그런데 어떤 할머니는 성당 밖에 한 100m가 다시 되돌아 와.
서재 들어가려다 왜 또 오셨냐 물으니, 아까는 사람이 많아 악수하려다 포기했는데, 안 되겠대요.
신부님 손 잡아야 일주일이 편한데, 그냥 가려니까 속이 상해서 다시 왔대요.
‘아이고, 그러셔’ 하면 꽉 끌어안아 주었죠.
이 사제의 손이 닿는 순간에 그냥 피부 두 개가 만나는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렇죠?
예수님이 나병 환자 상처에 손댈 때는 그 마음의 병까지 같이 치유되는 거야.
얼마나 이분이 섬세하신 분이에요.
원래 통이 큰 사람들은 산은 보지만, 나무는 못 봐요.
등산하면서 통이 큰 사람들은 내가 무슨 나무를 지나왔다는 것은 기억 못 해요.
그냥 산 전체를 다 봐.
하지만 아주 세밀한 사람은 올라가면서 참나무가 12그루, 소나무 죽은 게 2개 있었고,
올라가다 구부러지는데 바위가 튀어나온 것 여섯 군데를 돌았고, 등등 그것만 기억해.
그런데 예수님, 그분의 스케일은 바다보다도 크잖아요.
그런 그분이 섬세한 것을 보면 아주 소름이 끼칠 정도죠.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들의 롤모델이에요.
사제들이 예수님처럼 살아야 해요.
저는 그렇게 살려고 애를 썼어요.
사실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 남자는 통이 크면서도 자상해야 한다는 걸 난 누구한테 배웠냐?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가 그러셨죠.
정말 남자 중의 남자고 통이 큰 분이었지만,
그분이 자식들한테 또 교우들한테 또 어려운 사람들한테 대하시는 거 보면서 저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보다.
신학교 들어가서 예수님을 배우니까 우리 아버지 산 거랑 똑같아.
그래서 나는 예수님 따라서 사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어릴 때부터 늘 아버지한테 그걸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왔어.
어릴 때부터 누구 배려하고 정리 정돈 잘하고.
이런 것도 참 축복인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일을 밀고 나갈 때는 무섭게 밀고 나가거든요.
그러니까 큰일들을 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하나하나 디테일하게 신경 써야 할 것은 내 눈에 보이거든요.
정리를 어떻게 해야겠다.
그런 두 가지를 아버지를 통해서 받았건 하느님에게서 받았건 간에,
우리들의 롤 모델은 예수님처럼 담대하고 통이 크면서도 한편으로는 섬세해야 한다.
예수님의 세 번째 치유 방법은 뭘까요?
치유 원칙 하나 이제 하나 남았어. 기억 안 나죠?
예수님은 치유하시기 전에 기도하셨고 치유가 끝나고 난 다음에 반드시 감사 기도로 끝을 맺으셨죠.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그 벌 떼처럼 몰려드는 환자들한테 종일 둘러싸여 있었을 거 아니에요.
얼마나 몸이 파김치가 됐겠어요.
제자들은 도우미 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그냥 쿨쿨 잠에 떨어졌다고 나와 있죠.
그런데 예수님은 홀로 일어나서 어디 가셨어?
산 위에 올라가셨어요. 올라가서 감사 기도한 거예요.
감사 기도하면서 ‘오늘 주님 성부여, 저를 통해서 이룬 역사 성부께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또 어떤 기도 했겠어요?
‘내일 아침에 만날 수많은 사람 웃으면서 만나게 해주십시오. 절대로 짜증 내는 얼굴로 안 만나게 해주십시오.’
성부로부터 그 힘을 받았잖아요.
그리고 아침에 동이 트자마자 또 새카맣게 환자들이 들것에 실려 오고, 제자들은 그거 정리하느라고 스트레스받죠.
‘아유 저 아줌마 새치기하는 거 봐.’
예수님은 ‘내버려 둬, 내버려 둬.’
짜증 한 번 안 부리고 다 하셨거든요.
그 힘이 뭐예요? 기도야.
치유의 역사를 하시기 전에 기도로 시작하시면서 기도로 준비하셨고,
끝나고 난 다음에는 ‘아이고 오늘 힘들어. 얘들아, 우리 삼겹살 구워 먹자.’가 아니라 감사 기도하셨죠.
해외에서 성령대회를 하면, 미국 전역에서 거의 2만 명이 모여 큰 운동장에서 해요.
그리고 그 대회를 봉사자들은 1년 동안 준비를 해요.
난 행사 바로 전날 1시간이라도 봉사자들 피정을 따로 시켰어요.
‘내일 분명 하느님의 역사는 이루어질 것이고 여러분이 고생한 것만큼 많은 분이 올 거다.
사람 많이 올까, 헌금 많이 들어 올까, 그 걱정하지 말아라.
그리고 내일 끝나고 난 다음에 다시 구일기도 감사 기도 들어가야 한다. ‘
아이고 오늘 성공했어. 역시 신부님이 와야 사람들이 모여, 헌금도 많이 들어오고. 오늘 저녁에 실컷 먹어야지’
그러면 마귀가 들어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항상 하느님의 일을 하고 난 다음에 감사 기도로 끝을 맺어야 합니다.
그걸 누가 그렇게 가르쳐 주셨다고요? 예수님.
예수님은 조건 없이 치유하셨고, 섬세하게 치유하셨고, 늘 감사 기도로 끝을 맺으셨다.
이것이 예수님이 사람들을 치유하고 구마하는 방법이었어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다른 사람을 치유할 때 이 원칙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내가 저 사람한테 조건을 걸면 안 됩니다.
치유라는 말 대신에 용서할 때도 조건을 붙이면 안 돼.
봉헌할 때도 조건을 붙이면 안 돼요.
순명할 때도 조건을 붙이면 안 돼요.
어떤 사람은 ‘엄마가 오늘 너 한 짓 보면 속이 상하지만 내가 용서할게.
그런데 만일에 다음번에 또 비슷한 짓거리 하면 죽을 줄 알아.’ 한다면, 용서가 아니죠.
조건을 붙인 만큼 ‘나 아직 너 못 믿어.’ 그 뜻입니다.
용서는 그냥 용서죠.
예수님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게 조건 안 붙였잖아요.
딱 한 가지, ‘가서 이제 죄짓지 말아라.’
그러면서 ‘너 오늘 내 덕에 산 줄 알아. 내가 지켜준 거 알지? 내가 내일 또 여기 나와 본다.
그런데 네가 또 사람 꼬시려고 얼굴에다 처바르고 야하게 하고 그랬다가 죽을 줄 알아!’
그 말 했어요, 안 했어요? 안 하셨죠.
그 여인이 누구죠? 막달라 마리아.
그러니까 그 은혜를 받고 제일 먼저 부활한 예수님 만났잖아요.
그리고 제일 먼저 다락방으로 쫓아갔잖아요.
그렇게 예수님을 정말 온전히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거기에 대한 축복으로
당신의 부활을 제일 먼저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막달라 마리아한테 보여준 거예요.
우리 죄가 아무리 진홍색처럼 깊고 짙어도 주님의 사랑을 믿고 다시 같은 죄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정말 노력을 한다면
그분은 우리 앞에 나타나시죠.
오늘 예수님은 어떤 말로 치유시켰죠?
‘에파타’ 에파타 뜻이 뭐라고 나와 있죠?
‘열려라. 참깨’가 아니야,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열려라’ 그랬어요.
돈주머니가 열려라가 아니라, ‘에파타’
성체 받을 때 우리는 열려야 해요.
말씀을 들을 때 열려야 해요.
성체께서 말씀께서 미사 때마다 나에게 오시면서 ‘마리아야, 에파타’ ‘토마스야, 에파타’ ‘루시아야, 에파타’
‘열려라’라는 말은 다른 말로 ‘포기하거라’ 그 뜻이야.
‘너 지금 행복하지 않니? 네가 지금 그것만 포기하면 행복해.’
어둠의 문을 열어라, 그 뜻이에요.
교만의 문을 열어라. 미움의 문을 열어라. 욕심의 문을 열어라.
그래서 마귀로부터 해방되거라 그 뜻이에요.
육신의 병이 있든 마음의 병이 있든 기본적으로 그 영의 마음속에 깔려있는 것은 분노예요.
깊은 슬픔이에요.
그거를 가지고 있으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죠, 행복하질 않아요.
다행히 우리에게는 성체가 있잖아요.
이 세상 사람 아무나 성체 영하지 못하잖아요.
목사님들이 수백 명 모였다고 해도 그분들 성체 영 할 수 없잖아요.
그리고 말씀 통해서도 얼마나 우리를 열어주시려고 애쓰시는지 몰라.
당신의 몸을 주면서까지도 우리를 어둠으로부터 교만으로부터, 미움으로부터, 욕심으로부터, 또 마귀로부터
우리를 열어주려고 애를 쓰고 계십니다.
‘열려라. 에파타.’
제가 늘 그리죠. 성체 영한 후 자리에 앉아 예수님의 손으로 여러분이 치유기도 할 수 있다.
육신의 치유, 마음의 치유 하실 수 있다.
‘주님, 주님의 손이 2천 년 전 나병 환자의 상처를 만지듯 제 상처를 지금 만지고 있음을 압니다.
주님, 저 좀 치유시켜 주십시오. 제 역사 안에 들어오셔서 이 어둠을 좀 없애주십시오.’
믿는 그대로 되리라는 것을 우리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오늘 귀먹은 반벙어리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처럼
조건 붙이지 말고, 또 섬세하게, 그리고 또 늘 감사하면서 내 주변에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한테 다가서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