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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론
현미경으로 보는 미시적 세계의 아름다움
― 최영랑, 김기형, 윤은성의 시적 비전
황치복
1. 존재로서의 시
시는 말하지 않고, 의미하지도 않고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좋은 시는 웅변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할 뿐이라는 테제는 스스로 자족적이 형태로 존재하면서도 의미의 파장과 정서적 효과, 그리고 심미적 효과를 발산하는 시가 좋은 시라는 함의를 담고 있다. 시는 존재하는 것이라는 이러한 시에 대한 테제는 사란 사물과 진리를 반영해야 한다는 계몽주의적, 모방론적 시론과 시는 시적 자아의 분출하는 정서적 내용을 담아내는 그릇이라는 낭만주의적 시론을 거부한다. 시는 세계의 자아화라는 근대적 서정시의 개념 또한 그것은 거부한다. 시적 자아가 지닌 정서적 유출의 통로라는 시학에 대한 거부에서 그러한 서정시의 개념에 대한 부정은 이미 함축되어 있다.
세계에 존재하는 객관적 대상에 대한 모방도 아니고, 대상과 맞서 있는 주관의 내면적 정서의 표현도 아니라면 시는 과연 무엇일 수 있는가? 그것은 곧 진리의 폭로로서 존재의 실현이며, 미지의 것에 대한 도달로서 새로운 세계의 창출이 된다. 존재로서의 시란 존재자들이 지닌 개성과 유일무이성에 이름을 붙여서 존재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명증한 표현을 받지 못해서 어둠의 그늘에 묻혀 있을 때, 그것을 명명하여 존재의 빛으로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존재로서의 시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로서의 시는 이러한 점에서 하나의 세계의 창조이며, 한 소우주의 창조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존재로서의 시는 어떻게 씌여지는가? 그것은 아르튀르 랭보가 주장했던 바 타자로서의 시 쓰기에서 가능할 것이다. 경험적 자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세계의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 즉 직관의 힘에 의해 사물의 내밀한 존재의 빛을 드러내는 것에 의해서 존재의 시는 쓰여진다. 타자되기로서의 시쓰기란 타자의 삶을 대신 살아보는 것, 타자의 꿈을 대신 꾸어보는 것,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치환하여 투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한 점에서 존재의 시 쓰기는 현실을 넘어서서 초현실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사물과 대상을 분자 수준으로 쪼개서 관찰하거나 관조하는 태도로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 육안으로 볼 때는 평범하게 보이던 대상이 현미경으로 볼 때는 매우 특별한 존재가 되는데, 이 때 중요한 것은 대상이 우리의 시선에 의해 자의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체를 고스란히 들어낸다는 점이다. 우리의 육안과 독립하여 사물이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되는 현미경적 세계의 탐구, 이 경지를 타자로서 시 쓰기라고 하면 안 될까?
물론 주관의 자의적 해석과 관점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테지만, 적어도 해석 주관이 대상에 대해서 독재적인 전횡을 일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수사적으로 보면 매제(vehicle)가 취의(tenor)의 도구나 수단으로 종속되어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주체로 독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조관념으로서 원관념에 종속되어 원관념이 실현하고자 하는 어떤 의미나 정서의 보조수단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형성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기제에서 벗어나 자족적인 주체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존재의 시는 지배와 종속에 의해 의미형성이라는 권력관계의 청산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계몽적 기획에 파탄을 선언한다.
새롭게 조명하고자 하는 최근 등단한 최영랑, 김기형, 윤은성 등의 신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존재로서의 시라는 이러한 테제에 대해 공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경험적 주체로서 자신의 삶의 체험을 시화하거나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 주목하면서 그것들의 존재의 본질을 명명하고자 하는 충동들을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모방론도 아니고 표현론도 아닌, 제 3의 지대라고 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시는 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확대하여 시의 영역을 확장해줄 중요한 시도처럼 보인다. 그들의 시 속으로 들어가 본다.
2. 살아 있는 언어, 꿈틀거리는 존재
활성도가 높은 밤
내 머리를 떠난 생각들이 백야 속에 서성인다 엉킨 머리칼처럼 와글와글거린다 장막을 열어젖히고 배고픈 골목이 어둠을 할키며 건너온다 그 순간 팜므파탈은 시작된다
한참동안 나는 그 골목에서 출출해진 허공의 귓속말을 깨문다
내안의 발톱들이 자리를 옮겨 다니며 생각의 반경을 넓힌다
어떤 뒷모습에선 낯선 남자의 끈적이는 등과 허리가 무너지기도 한다
눈을 감아도 도발적인 어둠은 어디론가 밀려가고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잔재들이 소용돌이 치고 있다 곧 탄성을 얻을 것처럼 탱탱해질 것이다
통증처럼 백야는 아가리를 벌린다 노골적인 생각이 흩어진 감각들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다
몸속 가득 팽창되는 중력
발끝마다 서성이는 얼룩의 세계
프릴의 주름처럼 난해해지는 심장의 소란과
정수리에 흐르는 역류성의 감정
남자의 뒷모습을 세워놓고 불협이 증폭된다 지금은 파열의 시간 그리고 무성해지는 날 것의 시간, 내안에 자라는 파멸을 위해 손톱들이 활성화 되고 있다
― 「카페인」 전문
201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 「어머니의 계절」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최영랑 시인의 신작이다. 감각적인 언어와 섬세한 마음의 무늬를 통해서 ‘카페인’이라는 시적 대상이 존재하는 양상과 그 존재의 효과를 역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매력적이고 매혹적인 이 한 편의 시를 통해서도 시인의 시적 역량을 파악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적절하고 절묘하게 선택되어 배치된 시적 언어들의 질감과 음영에 의해서 ‘카페인’이라는 식물성 유기화학물의 존재가 선명히 부각된다. 카페인이란 모르핀, 코카인, 니코틴과 함께 식물계에 존재하는 질소를 함유한 염기성 화합물로서 동물의 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알카로이드를 지칭한다. 식물에 함유된 카페인은 식물을 먹고 사는 해충을 마비시켜 죽이는 일종의 살충제 역할을 한다고 한다. 쓴 맛이 나는 흰색의 결정인화합물의 존재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법 중에서 그것의 모양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묘사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그것이 지닌 고유한 속성과 존재 이유를 드러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것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과 효과를 선택하여 그 양상을 그림을 그리듯이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둘째 연의 시어들을 뽑아보면, “엉킨”, “머리칼”, “배고픈”, “할키며”, “팜프파탈” 등의 시어들이 주목되는데, 이러한 시어들은 그 기표가 의미하는 기의도 문제이기는 하지만, 기표 자체로서도 카페인의 어떤 속성들을 드러내고 있다. 파열음과 격음들의 나열에 의해서 예민하게 곤두선 신경의 날카로움과 뭐하고 형언하기 어려운 초조함과 불안함의 심적 동요와 파동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시적 전개에서는 “깨문다”, “발톱”, “통증”, “불협”, “파열”, “파멸”, “손톱” 등의 시어들이 바둑판의 바둑돌처럼 놓여 있어 카페인이 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그 동선과 궤적, 그리고 그 궤적이 발생시킨 파동과 효과를 극명하게 부각시킨다.
이러한 모든 카페인의 활동과 작용을 수렴시키는 것은 “생각”이다. 카페인은 생각을 활성화하고 그것이 증식하고 운동하고 들끓도록 하는데, 생각의 파열과 파동이 곧 카페인의 지나가고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카페인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각의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가면서 그것을 각성시키고 교란하며, 불특정하고 부정형의 감각과 정서를 분출하고 있는 셈인데, 그러한 과정에 대한 묘사 또한 압권이다. “몸속 가득 팽창되는 중력”은 카페인이 몸속에서 작용하는 원심력과 구심력의 모순적인 작용을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발끝마다 서성이는 얼룩의 세계”라는 구절은 몸의 모든 감각을 활성화시켜서 접촉하는 외부의 모든 대상에 감각의 잔영을 남기고 있는 카페인의 탐욕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프릴의 주름처럼 난해해지는 심장의 소란”이란 표현은 카페인에 중독된 심장이 물결무늬로 파동치면서 주름을 형성하는 활동의 양상을 눈에 보이듯 그려내고 있고, “정수리에 흐르는 역류성의 감정”은 폭포처럼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수처럼 솟구치는 감정의 제어하기 어려운 분출과 흥분의 소용돌이를살려내고 있다. 모두 카페인이 지진의 진앙으로 존재하면서 발산하는 파괴적이고 통제하기 어려운 역능에 대한 묘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묘사를 통해서 부재하면서 존재하는 카페인의 본질이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다.
결국 카페인의 이러한 모습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재현한 것도, 그것에 대한 시적 주체의 정서를 표출한 것도 아니다. 그것이 몸에서 활동하는 효과를 통해서 그것의 본질을 드러낸 것이라는 점에서 카페인이 지닌 특개성(singularity)에 대한 명명이라 할 수 있는데, 카페인은 이러한 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실현하게 된다. 그것은 미몽과 부재의 어둠 속에 있다가 최영랑의 시를 통해서 그 존재성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최영랑의 「카페인」은 존재의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발표된 「화분이 있는 옥탑」 또한 세상의 한 “구석”이며 “그늘”인 옥탑의 존재성을 드러내고 있지만, 더욱 주목되는 작품은 존재의 심연을 건드리고 있는 「두더지」라는 작품이다.
어느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가 흔들리는 버스의 뒷좌석에서 덜컹거리는 생각으로 덜컹거리다가 나는 두더지가 되어갔다 바람 부는 풍경 속에서 보푸라기 같은 바람을 털어내다가
골방에 골을 파고 들어가 컴퓨터 속 표정과 언어를 습득하며 어둠을 옹호하다가 어둠과 함께 어둠이 되어갔다
어둠의 안쪽은 창문을 흉내 내는 늪지대만 있어서 푹푹 빠지는 불안을 어루만지며 달팽이의 느린 걸음을 답습하다가 개구리의 뒷다리에서나 빛의 냄새를 맡는 두더지의 습성을 닮아갔다
빛은 머리 위 계단에서 빛나고 골방의 세계는 굳건하고 컴퓨터 화면은 나를 교란시키기에 충분해서 점점 시력詩力을 잃어갔다
빛을 삼켜버린 언어들이 어둠에 대한 식욕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어둠을 또 다른 빛이라 부르는 종족들과 함께 더 진한 어둠을 파먹었다
계단은 여전히 가파르고 무덤처럼 내내 나는 지층 아래로 아래로 자꾸 가라앉았다
골방의 창문은 언제쯤 열릴 수 있을까
나는 어둠보다 더 어두워져 갔다
― 「두더지」 전문
이 시는 물론 시적 주체의 일상생활의 모습과 거기에서 파생하는 다양한 서정을 표출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두더지라는 설치류에 의탁해서 자신의 시적 갈등과 고뇌를 은유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가 단순히 시적 주체가 처한 질곡의 상황과 그에 따른 정서의 토로를 목적으로 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단순히 시적 대상인 “두더지”를 은유의 매제로 보기도 어렵다. “두더지”는 시적 주체가 처한 상황과 그에 따른 정서적 효과를 대변해주고 있는 대상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그러한 취의를 재현(representation)해주는 매제로서의 역할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이 시는 집쥐 다음으로 우리 주변에서 많이 서식하는 짐승으로 진동에 지극히 민감하고, 야간에만 가끔 땅위에 나타날 뿐 대부분의 생활을 지하에서 영위하고 있는 “두더지”라는 두더지과의 동물을 명명하고 있는 것인가? 물론 이 시에서 진동에 민감하고 야행성이며, 땅 밑의 어둡고 축축한 환경을 좋아하는 두더지라는 동물의 속성이 활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두더지라는 동물에 대한 묘사로서 그것의 성향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두더지라는 독특한 생태적 특징을 지닌 동물을 자신의 내면 풍경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도 아니고, 두더지라는 동물 그 자체의 성향과 모습을 모방한 것도 아니라면 결국 이 시는 어떤 특징을 지닌 시라고 할 수 있을까? 바로 존재로서의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두더지”는 시적 주체의 사유를 대변해주는 기표이다. 그것은 땅속 어둠속에서 동물로서의 살아가는 동물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단순히 시적 주체의 사유에 대한 매제로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적 주체의 독특한 생각과 사유과정, 그리고 그 결과 등을 함축하는 기표로서 시인이 새로이 창출한 기표라고 할 있다. 그것은 현실적 세계에 존재하는 두더지와 다른 독특한 속성과 생태를 지닌 기표로서 탄생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는가? 우선 파고드는 성향을 지니고 있어서 그것은 “골방에 골을 파고 들어가”기도 하고 또 그 속에 있는 “컴퓨터 속”으로 파고들기도 한다. 또한 그것은 “무덤처럼 내내 나는 지층 아래로 아래로 자꾸 가라앉았다”는 진술처럼 한 없이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가라않기도 한다. “두더지”라는 기표는 안쪽으로 한 없이 파고들어가고, 낮은 곳으로 한 없이 가라앉는 몰입과 침강의 운동적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어둠의 심연에 도달하게 되고, 어둠의 질감을 어루만지는 속성을 지니게 된다. “두더지”라는 기표는 ‘어둠의 핵’라는 기의가 적절할 정도로 어둠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어둠을 옹호하다가 어둠과 함께 어둠이 되어갔다”, “어둠을 또 다른 빛이라 부르는 종족들과 함께 더 진한 어둠을 파먹었다”, “나는 어둠보다 더 어두워져 갔다”는 구절들이 모두 “두더지”와 관련하여 그것의 어둠의 속성이 함축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두더지라는 기표가 내포하는 어둠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어둠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둠, 어둠보다 더 어두운 어둠, 또 다른 빛으로서의 어둠, 어둠으로 동화시키는 어둠 등 다양한 어둠의 질적 형태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어둠은 컴퓨터라는 기표와 결합하여 현실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와 같은 속성을 부여받기도 한다.
이처럼 안으로 안으로 파고드는 두더지, 혹은 가파른 계단 아래로 추락해서 낮은 곳으로 가라앉는 두더지라는 속성과 함께 다양한 어둠들이 달라붙어 두더지는 다양한 기의를 산출하게 되는데, 그것은 현실과 다른 세계로서의 비실재적 세계, 혹은 인간의 의식 아래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의 세계 등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미지의 어떤 것과 연관되게 되고, 무정형과 무개념, 무명과 혼돈의 블랙홀을 형성하게 된다. “두더지”는 이처럼 인간의 의식 지평에서 포착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세계로서 모든 명증하고 명료한 것들을 무화시켜버리는 어떤 벡터로서의 현상을 지칭하게 되는데, 이러한 점에서 “두더지”는 새롭게 창출된 비실재적 대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새롭게 존재하게 된 존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미시적 순간의 떨림과 사건이 일으키는 파동
몸의 추가 아래를 친다
모든 창이 열려 있었고
아무도 안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계단이 있었을 뿐이다
눈앞으로 손이 다가온다
손바닥이 넓히는 뜰을 다닌다
이렇게 계속 나타나도 되는 거야?
어디쯤을 함께 가도 되는 거야?
생각나는 것을 그린다
다른 한조각의 몫
애도의 시간이다
우리는 소리를 만들지 않았다
소리를 듣지 않는다
달빛에 손을 녹인다
한 장 한 장 별들이 쌓여있다
자꾸 밝아지는 몸을 구부린다
가끔 흰색은 인간의 색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짐승과 그 사이에 불을 만든다
바닥에 엎어진 것들이 튀어오르기 시작한다
죽은 것들이
함께 바람을 맞고
수풀이 나타난다
사람처럼 옷을 펼쳐든다
― 「나비가 날개를 말리고 있다 1」 전문
201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손의 에세이」를 통해서 등단한 김기형의 신작이다. 부분 대상이 처한 미묘한 국면과 관계의 신비로움을 포착하여 시화함으로써 신선함을 선사하고 있는 신인인데, 이번 신작에서도 이러한 그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이 시는 “나비가 날개를 말리고 있”는 그 찰나의 순간이 지니는 미묘한 의미와 그 파장, 그리고 주변의 사물과의 관계를 미시적 관찰과 통찰의 방법을 통해서 포착해주고 있다.
나비가 날개를 말리고 있는 순간은 변태의 과정이 완성된 순간을 의미한다. 변태(變態, metamorphosis)란 동물이 짧은 순간에 크게 형태를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데, 대체로 생존과 성장에 적합한 형태를 지닌 유생에서 세대 번식을 위한 생식 기능을 갖춘 성체가 되는 과정에 해당된다. 따라서 변태란 한 개체에게 혁명적 변화의 순간을 의미한다. 나비가 날개를 말리고 있다는 것은 막 그러한 변태의 순간을 거쳤으며, 성충으로서 새로운 삶을 전개하고자 준비하고 있는 순간에 처해 있음을 암시한다. 변태를 마친 나비는 생존과 성장이라는 삶의 목표와 과정을 끝마치고 이제 새로운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하기 위한 새로운 삶의 여정을 향해 떠날 것이다.
이 시를 보면 바로 그러한 순간에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현상과 사건들, 그리고 그러한 사건들에 의해 발생하는 효과들이나 그러한 사건들을 위한 전제 조건들이 포착되고 있다. 날개를 말리고 있는 그 짧은 순간을 미분(微分, differential)해서 바라보면 한 없이 길고 느린 과정의 연속으로 분해될 것인데, 이 시는 바로 그러한 방법으로 그 순간을 포착해서 슬로 모션(slow motion)처럼 펼쳐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 순간의 구체적 속성은 어떠한가? 개방성과 미래지향성 등의 성질들이 그 순간들을 채우고 있다. 그 순간은 “모든 창이 열려 있”는 상태고, “아무도 안에 있을 필요가 없”는 상태다. 번데기에서 탈피한 상태이기에 변태의 순간은 외부 세계와 접해서 외부의 공기를 마음껏 흡입하는 순간이며, 그러한 점에서 숨겨진 것을 폭로하고 묶인 것을 해방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변태의 순간은 갑자기 시간이 밀려들게 되고, 그 시간의 흐름을 통해서 변화와 직면하게 되며, 그리하여 미래의 사건들과 조우하게 된다. 변화와 움직임이란 항상 불안과 공포를 동반하는 것이기에 “이렇게 계속 나타나도 되는 거야?/ 어디쯤을 함께 가도 되는 거야?”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으며, 유충의 시절을 과거로 밀어냈기에 죽어버린 시간을 돌아보는 “애도의 시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비가 날개를 말리고 있는 순간은 찰나에 속하는 것이기에 정적인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이 잠시 정지되어 있는 것이다. 시간이 멈춘 순간을 지배하는 것은 정적과 고요라고 할 수 있는 바, 정적과 고요의 본질은 소리의 소멸일 것이다. “우리는 소리를 만들지 않았다/ 소리를 듣지 않는다”는 시적 진술이나 손을 녹이는 달빛, 그리고 한 장 한 장 쌓이는 별빛 등의 이미지들은 바로 그러한 정적과 고요의 순간이 지니는 성질들을 함축한다. 색으로 표현하면 “흰색”이라고 할 만한 이러한 순백의 순간은 무한한 가능성의 순간이며, 절대적인 찰나이다. 무한성과 절대성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신적 계시의 순간이거나 섭리가 현현되는 순간일 것이다. 거기에 가해진 신의 입김은 부동의 동자로서 운동을 생성하고 생성과 변화의 불을 일으킨다. 그러자 사물들은 “튀어오르기 시작하”고, 날개는 비상을 위해 펼쳐진다.
「나비가 날개를 말리고 있다」는 시가 순간 포착한 미시적 세계는 바로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숨 막히는 긴장과 정적 속에서 전율하고 있다. 이 시에서 주요하게 활용되고 있는 “손”의 상징성을 명료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변태의 순간이 지닌 그 미묘한 순간을 현미경의 눈으로 확대해서 보여주는 세계는 자연의 세계는 아니다. 김기형 시인이 명명하여 창출한 새로운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시인의 다른 작품인 「너의 왼팔로 창문을 열어두고」 또한 잠자는 동안 이루어지는 꿈의 세계가 몽환적인 언어를 통해 개진되고 있지만, 이 작품은 “토마토”와 “새”와 “손”의 상징들이 결합되어 난해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신인이기에 좀더 많은 작품들을 보아야 상호텍스트성에 의해 그 상징적 의미를 풀어서 작품의 구조를 해명할 수 있을 듯하다. 「철로를 지난다는 것」은 “철로”를 둘러싼 다양한 의미 자장들이 긴장감을 형성하면서 유의미한 시적 세계를 창출하고 있다.
불이 하는 일이 있다면
붉은 혀를 접는 일
두드리는 일
동굴이 되는 일
말을 거는 일
벌어지는 일이 있다
불을 지나온 손등은 손바닥과 다르고
칼은 그곳에 어울리고
일으켜 세우면 휘어질 수 있어서
곡선은 강하고 사라진다
떠난 뒤 보내오는 소식은
돌아오고 있다는 것
아침에만 깨어난다는 것
어디선가 잠이 오고
열기는 무뎌지고 있다는 것
밤중에 일어나 볼 수 있는 것을 찾는데
눈부터 빛나는 숲속으로 가려고 하는데
가지런히 놓인 맨살들만 잡혀서
도저히 신을 신길 수가 없는데
틈에 고인 빗물은
스며들고 있을 뿐
아직 날지 않은 새들이 있고
다시 누운 노인들이 나에게도 있어서
오늘도 알아볼 수 있는 집을
저녁에는 찾아가고
철문이나 나무문이나 낙서는 가득해
옆집은 매번 새롭다는 것
납작한 등은 골목에 어울린다는 사실
―「철로를 지난다는 것」 부분
이 시는 “철로를 지나”는 행위에 스며 있는 다양한 계기와 사건들, 그리고 수많은 사물들이 참여하여 형성하는 관계의 망을 역시 미시적인 분석을 통해서 펼쳐내고 있다. 철로는 지난다는 것은 철로가 만들어지는 과정의 시간들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며, 철로를 이루는 레일과 침목 등의 구조물들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추체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 철로는 지난다는 것은 철로가 겪는 수많은 변화의 시간에 동참한다는 것이며, 철로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상징과 메타포를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철로를 지난다는 것의 의미를 분석해 보면, 그것은 철로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유형무형의 모든 사건과 결부되어 있으며, 철로가 형성하는 다양한 분야의 관계망을 해부하는 일이기도 한데, 결국 그러한 작업을 완성하는 것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 작품이 완결된 구조를 지닐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수 있다. 이 작품은 한 없이 길어져도 괜찮고 또한 중간에 끝나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철로는 지나는 사건의 시작은 “불”의 이미지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생명의 시작을 상징하기도 하고, 인생의 출발을 함축하기도 한다. 불은 쇠를 녹이고 굳혀서 레일을 만들고, 철로를 완성해서 세상의 한 통로를 형성한다. 그리하여 세상은 철로로부터 시작하여 사건들을 생성하고 의미들을 파동치게 한다. 모든 새로운 것들은 감각을 날카롭게 하고, 의미를 신선하고 생동감 있게 한다. 하지만 그것들도 곧 익숙함과 관습에 길들어져 진부하게 되고, 진루한 반복이 끝도 없이 이러진 철길처럼 이어지게 된다. 철로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나아가는 통로처럼 보이지만, 끝이 없는 철로는 있을 수 없으며, 그리하여 종점을 맞게 된다. 그리고 그 종점은 다시금 새로운 출발점이 되지만, 기존의 출발점에서 보면 그것은 회귀의 출발점일 뿐이다. 결국 철로는 직선 운동이 아니라 곡선 운동, 혹은 원환 운동의 궤도를 강요하는 기제인 것이다.
따라서 “돌아오고 있다는 것/ 아침에만 깨어난다는 것/ 어디선가 잠이 오고/ 열기는 무뎌지고 있다는 것”과 같은 시적 구절들은 바로 철로가 지닌 진부하게 하는 파괴적 힘에 대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철로는 새로운 세상을 위한 출발이기도 하지만, 원점으로 회귀하는 귀환의 과정이기도 하며, 이러한 의미들이 결합하여 반복과 퇴락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이다. 사실 일정한 간격을 지니고 가로로 놓여 있는 침목들이나 또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평행선을 이루면서 끝도 없이 이어진 두 개의 레일은 어떠한 일탈도 허용하지 않는 지루한 반복의 일상의 메타포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시적 주체는 아직 실현되지 않는 꿈을 간직한 채, 좌절과 절망을 경험하고 휴식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철로를 통해서 집으로 귀향하고, 다시금 아침이 되면 철로를 향하게 된다. 철로는 항상 정해진 궤도만을 허용하기에 철로가 허용하지 않는 세계는 항상 호기심을 품게 하지만, 그것은 호기심으로 그치고 실현되기 어려운 욕망으로 남는다. “철로를 지난다는 것”으로서의 사건은 이처럼 다양한 의미 자장들을 거느리면서 그 의미를 무한히 증폭해 나간다.
김기형의 장기는 사물과 사건에 대한 미시적인 분석력과 그것에 대한 상상의 확장력일 것이다. 하나의 사건과 사물이 지니고 있는 국면을 잘게 쪼개고, 거기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현미경과 같은 투시력을 부여하면 새로운 세계가 현현한다. 또한 하나의 사물과 사건이 지닌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들을 중첩시키고, 그것들이 주변의 사물들과 맺고 있는 관계망으로 확장하면 관심의 대상이 되는 사물과 사건들이 새로운 의미를 지닌 것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것이 김기형의 손에 의해 새로운 존재의 시가 태어나는 메커니즘이다.
4. 운명, 혹은 우연으로서의 삶의 형식
홍콩에 가서 살 것이라고 했지
물론 또 다른 데서 살고 싶어지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은 없다고 했지
우리는 평생 일상이라곤 가져볼 수 없는
사람들인 것 같으니까
지킬 것 없는 사람이란 늘 그래
그런데 어째서 너는 나를
한심한 눈빛으로 보는 거지?
주머니에 잔돈이 얼마가 남아 있나
아직도 확인이 필요하니?
꿈을 이룬 뒤라야만
서로를 다시 찾아갈
용의가 생기는 것은 아닐 텐데
하나만 더 물어보자
너는 어째서
너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과만
사랑에 빠지게 되는 거니
― 「미드레벨 무빙워크」 전문
2017년 《문학과 사회》에서 「공원의 전개」 등의 작품을 통해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온 윤은성의 신작이다. 미드레벨 무빙워크는 홍콩 미드레벨 지역의 랜드마크인데, 세계 최고 길이를 자랑하는 이 에스컬레이터는 센트럴 중심가로부터 미드레벨 지역까지 하나의 무빙워크로 연결한다. 이 시는 이러한 홍콩의 에스컬레이터를 시적 대상으로 삼아서 그것에 인생의 의미와 운명의 불가피함 등의 사유를 덧붙여 독특한 시적 세계를 창출하고 있다.
무빙워크는 거기에 탑승하는 데까지만 인간의 의지가 작동한다. 거기에 탑승하는 순간 주체의 자유의지는 상실되고, 무빙워크가 움직이는 정해진 궤도에 몸을 맡겨야 한다. 무빙워크는 보행자를 태우고 아기자기한 레스토랑과 카페 등의 다양한 가게들을 지나 목적지까지 정해진 궤도를 운행한다. 무빙워크를 타는 것은 따라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도록 하는 우연성에 몸을 맡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무비워크를 타는 것은 목적지까지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앞에 다가올 신선하고 새로운 경험과 풍경의 기대로 인한 것이며, 그러한 점에서 무빙워크는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전제하고 있다. 정해진 궤도에 특별한 사건들이 틈입할 것을 기대하는 심리는 “지킬 것 없는 사람”들의 몫이며, “평생 일상이라곤 가져볼 수 없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일 것이다.
그러나 우연성에 기댄 삶의 자세는 운명의 불가피함을 용인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운명이란 항상 기대와 어긋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인간이 필연성을 완벽하게 인식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연성에 기댄 삶의 자세는 합목적적 사고를 버리고 순간순간의 사건과 시간에 충실하는 것이다. 계획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버리고, 우연처럼 다가오는 시간들을 축복으로 여기며 수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에서 “꿈을 이룬”다든가 “주머니에 잔돈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을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합목적성을 전제하며, 자신의 의지와 계획으로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삶의 자세에는 “너는 어째서/ 너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과만/ 사랑에 빠지게 되는 거니”에서 알 수 있듯이, 운명의 불가피함을 인정하는 자세가 어울린다. 우연성에 몸을 맡긴 인생은 필요성에 의해 좌우되지 않으며, 자신도 모르는 어떤 힘에 의해서 수많은 인연들을 생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과 운명의 불가피성을 “미드레벨 무빙워크”가 대변해준다. 미드레벨 무빙워크는 따라서 단순히 보행자를 운반하기 위한 운송 수단이 아니라 우연성에 의지한 삶의 방식을 기의로 지닌 기표가 되는 셈이다. 다른 신작인 「연속성」이라는 작품 또한 다양한 시공간의 사건들이 서로 어떤 연속성을 형성하고 있는 그 숨겨진 끈에 대해 주목하고 있지만, 더욱 주목되는 작품은 「물의 뿔」이다.
길고 어두운
복도를 따라서
회색의 도마뱀이 달려간다.
꼬리가 없는 것.
아직 살아있었던 것.
물결에 가깝게 걷는다.
검고 푸른 손바닥들이 있다.
부드럽고 차가운 밤의 뺨과
네 편이라는 말이 주는 잠깐의 불안 같은 것이.
나를 이제는 삼켜주면 좋겠어.
자신의 키보다 큰 것을 볼 때
그렇게 말하게 되곤 한다.
자잘한 자국들은
이제는 웅성거림을 멈추었으면 좋겠어.
물결이 있었다.
다정한
꼬리 없는 도마뱀이
나의 발을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다.
모래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지고
구름들 사이로 천천히
몸을 감추고 있었다.
― 「물의 뿔」 전문
“물의 뿔”이라는 제목은 형용모순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유동적이고 부드러운 물과 단단하고 강고한 뿔이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물은 유연하게 형태를 바꾸며 주로 수평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지만, 뿔은 뾰족하고 불쑥 튀어나온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물의 이미지와 대립되고 충돌하기도 한다. 하지만 굳이 “물의 뿔”의 의미를 세밀히 검토 보면, 뿔이 원래 물건의 표면이나 머리 부분에 불쑥 튀어나온 부분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물의 뿔”은 물의 표면에 생성되는 기포나 물방울을 지칭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뿔이 원래 동물들이 자위(自衛)나 투쟁을 위해 사용되는 무기라는 점에 상기해 보면, “물의 뿔”이란 곧 물의 실체를 보존하기 위한 도구이자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이러한 “물의 뿔”이 도마뱀의 꼬리에 비유되고 있다. 도마뱀은 뱀이나 다른 포식자를 만나면 자신의 꼬리를 자르고, 잘린 꼬리가 몇 분 동안 경련을 일으키며 꿈틀거리며 포식자를 혼란시키는 동안에 몸을 피해 목숨을 구한다. 몸의 일부분을 희생으로 바치고 개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셈이다. 도마뱀의 꼬리는 비록 무르고 연약하지만, 다른 동물들의 뿔이 개체를 보호하는 것과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마뱀에게 꼬리는 유기체의 일부를 훼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다른 동물의 뿔과 같이 자신의 유기체적 생명을 보호하는 방어막으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물의 뿔”의 경우는 어떨까? 물은 많은 지류들이 모여 본류를 이루고,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어 바다로 간다. 그 과정에서 하나의 흐름이 형성되는데, 그것이 바로 “물결”이다. 물결은수많은 물방울들이 결합되어 있는 것인데, 유기체가 다양한 세포들의 결합이라고 한다면 물결 또한 비유적 의미에서 수많은 물방울들이 결합하여 형성한 유기체라고 할 수 있다. 물결은 꿈틀거리며 “길고 어두운/ 복도를 따라서/ 회색의 도마뱀”처럼 “달려간다.” 그런데 물결은 “꼬리가 없는” 도마뱀처럼 달려간다는 점에서 자신의 일부를 희생으로 바치며 힘겨운 전진을 감행하고 있는 셈이다. 자신의 일부를 희생하며 자신의 행로를 향해 “꼬리 없는 도마뱀”처럼 나아가는 물결은 모든 존재자들의 행로인지 모른다. 자신의 일부를 희생하지 않고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이승에 존재하는 존재자들의 존재 방식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물결의 입장에서 바라본 관점이다. 물의 입장, 혹은 “물의 뿔”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우리가 물결이 아니고 한 방울의 물이라면, 혹은 “물의 뿔”과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면 상황은 어떨까? 우리는 헤겔의 ‘절대정신’과 같은 어떤 힘과 이상의 흐름에 종속되는 변수로서 그것의 실현을 위한 수단과 도구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혹은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절대자의 섭리나 이치를 실현하기 위한 피조물로서 신의 뜻을 대변해주는 은유적 존재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한 존재적 위상을 지닌 존재자로서의 삶의 자세는 어떨까? “나를 이제는 삼켜주면 좋겠어”라는 구절이나 “네 편이라는 말이 주는 잠깐의 불안”과 같은 표현이 암시하듯이, “물의 뿔”로서의 삶은 의존적이고 가변적이며 그로 인해서 파생되는 불안과 “웅성거림”이 주된 삶의 방식으로 작용할 것이다. 부분적 존재, 파편적 존재로서 전체의 의도와 심오한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꼬리도 없는 도마뱀”과 같은 물결이 “나의 발을 스치고” “모래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지고/ 구름들 사이로 천천히/ 몸을 감추”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물결이라는 전체 혹은 유기체가 불가사의한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이 설득력을 지닌다면 “물의 뿔”은 결국 유한한 존재가 불가사의한 우주에서 미로와 같은 삶의 행로를 견지할 수밖에 없는 어떤 운명 같은 것을 상징하는 기표가 될 것이다.
4. 새로운 존재의 시를 위하여
최영랑, 김기형, 윤은성의 새로운 시적 시선들을 조감해 보았다. 어느 신인들보다 패기 넘치고 열정적인 시인들의 발랄하고 역동적인 상상력을 음미하는 작업은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그들의 상상력은 매우 개성적이면서도 정밀하고 정교하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며 신선하고, 탄탄한 시적 저력을 발산하고 있다.
최영랑의 시적 비전은 대상의 심연을 향해 파고들어가는 섬세하고 정교한 투시력과 함께 현란한 언어의 미학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최영랑 시인의 시적 공간에서 언어는 기표들의 충돌과 배열에 의해 어떤 심미적 효과를 산출하고 있는데, 그것이 대상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심오한 투시력에 덧붙여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효과는 배가된다. 김기형 시인의 시적 비전은 사건과 사물에 대한 미시적인 분석력과 해석력이다. 그녀는 어떤 사건과 대상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면모를 미시적인 국면으로 분해하고, 그 미세한 국면에 다시금 현미경을 들이대며 관찰함으로써 자연적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시적 광경을 산출해낸다. 윤은성 시인의 시적 매력은 두 시인에 비해서 삶에 대해서 더욱 밀착해 있다는 점이다. 우리들의 삶이 지니고 있는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국면에 대해서 현미경을 통해 들여다보고, 우연성이라든가 운명과 같은 삶의 형식들을 산출해낸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형식들에 독특한 기표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창출한다.
신인이라고 하기에는 세 시인 모두 시적 행보가 매우 정교하고 안정되어 있다. 우리 시단에서 좋은 시인으로 롱런할 수 있는 자질들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 만하다. 그녀들이 각각의 개성을 발휘하면서 어떻게 새로운 존재로서의 시를 산출하는 지를 지켜보는 것은 한 평론가로서의 즐거움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황치복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 당선.
[출처] 황치복_현미경으로 보는 미시적 세계의 아름다움_작품론|작성자 도서출판 고요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