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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³о★ 좋은글.스크랩글窓 스크랩 되새기는 518 민중항쟁
상록수 추천 0 조회 32 12.05.19 15:0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총탄으로 18년간 장기집권을 누려오던 군사독재자

박정희가 사망함으로써 유신체제가 붕괴됩니다. 1980년 서울의 봄은 다가올듯

아지랑이로 피어오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나회라는 군사조직을 이용하여 전두환은

그해 12월 12일 군사쿠테타를 성공, 이듬해 계엄사령관 중앙정보부장

서리의 자리를 차지하며 정권쟁탈의 마수를 뻗치게 됩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광장에20만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결집합니다.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서게 됩니다.

여기서 그 통탄할 서울역 회군 사건이 일어납니다.

 

 현장의 중심에는매파라고 불리던 대의원회 회장 유시민과

비둘기파라고 불리던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있었습니다. 

 

두사람의 연설을 보면...

 

"솔직히 처음 예상보다 너무나 많은 수의 인원이 군집하였다.

이 많은 인원수를 통제할 방법은 사실상 전무하다. 이대로

계속 청와대까지 진군하다간 사분오열되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볼지모른다. 일단 학교로 해산한 뒤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다시 진군하자" - 심재철

 

"지금 이상태에서 해산을 명하는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여기서

물러나면 모든게 끝난다. 이 많은 인원이 현재 여기서 복귀한다면

신군부는 어떤 보복행위를 할지 모른다. 결단코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걸 끝내야 한다." - 유시민 

 

 

 

그날 20만 군중은 각 학교로 일터로 돌아갑니다. 이틀후 5월 17일

계엄령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지도부와 주요 민주 인사들이 체포

또는 수배됩니다. 1980년 '민주화의 봄'은 이렇게 무산되고 맙니다.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부대는 17일 저녁 10시경 광주에

투입되어 전남대, 조선대, 교육대 등에 진주합니다.

 

 

1980년 5월 18일 전국이 침묵하던 그날 아침 등교를 하던

전남대생들은통제를 하던 진압군에서 항의하며

'계엄군은 물러가라'를 외치며 항의를 하게됩니다.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시작하자 오후 3시 계엄군은 무차별 진압을

시작합니다. 만류하는 노인과 여성들에게도 곤봉세례를 가합니다.

계엄군의 진압작전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은 금남로로 몰려듭니다.

 

5월 19일 오전, 2~3천명으로 불어난 시민들은 군경의 저지선과 대치하게

됩니다. 그리고 11공수여단 천여명이 트럭 30여대로 도청 앞과 금남로에

진출하여 작전명 '화려한 휴가'를 전개합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서너명이

한조가 되어 시위현장의 주변 건물까지 샅샅이 뒤지며 진압합니다.

 

 

이러한 만행을 목격하고 전해들은 광주시민들은 맨주먹에 몽둥이를 들고

나옵니다. 이날 최초의 사망자가 발생합니다. 고 김경철님은 농아였습니다.

 

간략한 당시 상황을 보자면...

1980년 5월 18일 딸의 돌을 지낸지 20여일만에 서울에서 영암으로 가는

처남을 배웅한후 금남로 제일극장앞에서 그만 계엄군에게 걸렸고

"하나, 둘, 셋"이라는 구호를 듣지 못하고 장갑차에 올라가지 않자

2명의 계엄군이 철로 만든 특수 살상용 곤봉으로 마구 구타했다.

결국 그는 국군 광주 통합병원으로 이송 치료를 받았으나 19일 새벽 갓

돌지난 딸과 아내를 두고 전신 타박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5월 20일 항쟁 3일째... 시장의 상인들까지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기 시작하여 그 인파는 10만여명이 되었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격분한 택시기사들도 차량시위를 감행한다.

 

 

밤 11시경 광주역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와 시위대의 공방전중

최초발포가 시작됩니다. 이 발포로 2명의 시민이 사망합니다.

 

 

 시민들 앞에서 어린 여학생들의 옷을 찢고 발가벗기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전남대 교내에서 학생들에게사격을 가하여

시신을 암매장합니다. 연행되어온 시민들을 교도소 안에서

구타 사망케 하여 암매장합니다.

 

 

58월 21일 석가탄신일...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사망한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에 등장합니다. 오전 10시 15분 도청앞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을 맨 앞으로 배치합니다. 오후 1시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됩니다.

 

시민 수십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집니다. 오후 3시 48분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가합니다.

오후 4시 인근 화순, 나주 지역에서 무기를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앞에서 시가전을 전개합니다.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은 

교도소로 퇴각합니다. 

 

 

최미애(당시 23세)님은 전남대 앞에서 M16 총알을 머리에 정통으로 맞고 사망했다고

기록되 있으며 당시 임신 8개월이었습니다. 최씨의 어머니 김현녀(58세)님의 증언입니다.

 

"전남고 영어교사와 중매결혼한 딸은 내가 살고있는 집 가까이에 신방을 차렸다.

80년 5월에는 임신 8개월의 몸이었다. 나중에 목격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애가 평화시장으로 들어오는 골목 맨홀 뚜껑위에 서서 남편을 찾고 있는데

인근 전봇대 뒤에 서있던 공수부대원 한사람이 미애에게 총을 겨누고 이어 

총소리가 났다고 했다.미애는 임신복을 입고 있어서 눈에 잘뛸수 밖에 없었다

총소리와 함께 미애가 쓰러지자 사람들은 미애가 기절한줄 알았단다.

일으켜 세우려고 보니 머리 뒷부분이 없었다. 땅바닥에는 보리밥 같은

덩어리가 흩어져 있었다."

  

 

 

5월 22일 해방구...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하고 질서를 회복해가기

시작합니다. 시장과 상점들도 열고 공무원의 지원으로 전기 수도등도

해결됩니다.치안력 부재의 상황에서도 단 한건의 금융기관 사고가

없는 유래없는 질서를 만들어 냅니다.

 

 

518 수습대책위원회가 꾸려지고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

분소 방문, 7개항의 수습안을 전달합니다. 도청관장으로

수십구의 시체가 도착합니다.

 

 

 

5월 23일 금요일 시민 5만여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를 갖습니다.

학생 수습위 자체 특공대를 조직하여 총기 회수 작업을 시작합니다.

지원동 주남 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을 가해

17명이 사망합니다. 제 1차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되고,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이 시내 전역에 살포됩니다.

 

 

 

5월 24일 토요일 공수부대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을 가합니다.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전투교육사령부 부대 사이에

오인 총격전이 발생하고 그 분풀이로 인근 마을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청년들을 끌어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5월 26일 월요일 계엄군은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합니다.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를

위해 농성동에서 죽음의 행진을 감행합니다.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발표후

어린학생과 여성들은 귀가조치 시킵니다.

24시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

 

 

 

5월 27일 화요일 총정작전 개시

오전 3시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의 메아리가 도시를 울립니다.

 

오전 4시 총성과 수류탄 소리를 시작으로 진압작전이 시작됩니다.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에서 시가전 전개

작전개시 1시간 30분 만에 도청진압이 완료되면서 열흘간에

걸친 1980년 5월의 민중항쟁도 참담한 최후의 막을 내립니다.

 

 

박금희님은 당시 전남여상 3학년 학생이다. 당시 시내를 돌며

헌혈을 호소하는  방송차량을 보고 기독병원에서 헌혈하고

나오다가 계엄군에게 하복부관통상을 입고 사망.

 

 

사망자 중 30명은 만 18세 이하였다고 합니다.

(고등학생 11명 중학생 6명 초등학생 2명)

 

 

 

31년이 지난 현재 409명은 여전히 행방불명자로 등록되어 있으며

최초 발포 명령자와 암매장 장소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1996년 1심에서 전두환 사형, 노태우 22년 6개월 선고

항소심에서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17년으로 최종선고

추징금 각각 약 2.205억, 2.629억원 

 

김영삼은 1997년 12월 22일 국민화합이라는 명목으로 이들을

사면복권시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두 살인마의 당당한

모습을 지금도 봐야만 합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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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5.21 07:32

    첫댓글 화아~ 결국 우리 시대에 이뤄진 잔학상입니다,
    당시 본인은 서소문 대법원앞 동화빌딍16층에서 내려다 보고있었는데 서강대 이화여대 진영에서 서울시청 으로 진입하는 광경을 내려다 본것이 어제의 일
    같아보입니다,비는 제법 많이내리는 상황이였는데 여대생조차 치럭치럭 홈빡 젖은 모습으로 대형태극기를 받쳐들고 한손에는 책을 거머쥐고 대오를 갖춰 행군해 나오는데
    "전두환" 이름 조차 당시에 처음으로 접하던 대부분의 우리 시민들이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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