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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찬제
Ⅰ.4 ·19세대 문학주의자의 90년대식 사유 방식
비평에 대한 의혹의 눈초리가 요즘 심상치 않다. 불만도 여기저기서 많은 모양이다. 게다가 비평의 위기라는 말도 적잖이 나돌고 있다. 사정은 여럿일 터이다. 일반 독자들이 비평가의 글을 외면하려는 경향도 경향이지만, 창작자들 또한 비평 풍토를 퍽 걱정하는 모양이다. 최근 한 문예지의 설문에 의하면, 우리 창작자들은, 편중성과 정실비평, 편파성, 논리적 일관성의 결여, 불필요한 전문용어의 남용이나 평론 문체의 현학성 고답성, 난삽한 논리, 불성실한 독서와 미숙한 해석, 특정한 주제나 소재만을 선호, 비평가의 개성과 독자적 문체 빈곤, 엘리트적 폐쇄성에 의한 대중에 대한 영향력 상실, 계몽주의적 태도로 작가와 독자에게 군림하려는 경향 등등을 현행 비평의 문제점으로 들고 있다.1) 물론 이런 의혹이나 불만은 비단 어제 오늘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의혹 중 비평가의 개인적인 역량과 관련되는 문제들, 이를테면 불성실한 독서나 미숙한 해석, 독자적 문체 빈곤 등 일련의 문제들은 어쩌면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것은 비평 문학 이전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정작 문제는 새로운 상황 변화에 대응하는 성찰과 전망의 노력 내지 능력의 부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른바 문학의 위기라는 좀 더 큰 범주 안에서의 비평의 위기 문제일 터이다. 다른 글에서도 논의한 바 있지만, 90년대 들어 자본주의 성장 법칙에 따른 상업주의의 팽배와 신문화대중의 등장과 관련한 소비사회의 징후, 정보화 시대, 뉴미디어 시대에 따른 문화 변동 내지 문화 권력의 이동, 다시 말해 코드 전환 및 정보전달양식의 변화와 그와 관련된 문학의 상대적 위상 약화 등 문학외적인 문제와, 이와 관련된 문학 내적인 문제로 재현 대상의 성격 변화와 그에 따른 재현의 곤혹성 내지 불가능성, 역사의 소멸과 서사적 의미사슬의 해체, 심미적 대상과 주체 사이의 미학적 자동조절 추의 훼손, 혹은 작가의 왜소화 현상과 예술적 전위적 충동의 고갈 경향 등은 문학의 위기 담론의 중요한 논의거리였다. 이것과 관련하여 '비평의 위기' 담론이 거론되었거니와, 그것은 주로 이와 같이 급변하는 흐름 속의 문화와 문학 상황에 대처할만한 비평적 지혜와 감각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의혹으로 압축된다. 2)
현행 비평의 상황은 분명 그 역량의 부족을 자인해야 하는 처지임에 틀림없어 보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비평적 호기일 수도 있다. 그것이 호기일 수 있다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원론적으로 보더라도 비평이란 위기를 딛고 일어서는 담론이거니와,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보더라도 현행 문학과 비평의 상황이야말로 성찰하고 궁리하기에 따라서는 새로운 문학적 지성의 탄생을 견인하고 문학 논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도출해내도록 유인하는 바 크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는 비평가들에게 난세의 도전적 인식을 요청하는 것인데, 그 구체적 양상은 비평가의 개성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 여러 가능성 있는 개성 가운데 최근 김병익 비평의 특징을 간략히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이 글은 쓰여진다.
김병익 비평은 한마디로, 그의 비평집 제목이기도 한, '전망을 위한 성찰'3)의 나날의 인식론적 궤적을 보여준다. 그것은 작게는 한 비평가 개인의 궤적이면서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 문학의 구체적인 동향과 문학적 지성의 궤적 내지 지식사회학의 흐름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역사이기도 하다. 이른바 1960년대 4·19세대 비평가의 중요한 일원으로서 그는 지성·지식인·문화·장인정신·인식 지평의 확대·전망을 위한 성찰·문화적 초월·다원주의 등등의 여러 중요한 비평적 화두를 저작하며 우리 비평사의 뚜렷한 한 줄기를 살아왔고 또 살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4) 여기서 내가 특별히 '전망을 위한 성찰'을 주목하는 것은 거기에 그의 비평적 개성의 많은 것들이 망라되어 있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즉 그는 '현실-문화-문학의 복잡한 연결 회로'5)를 다양한 시각과 관점으로 '성찰'하고 구체적으로 분석하면서도, 구체성의 맹목과 가치의 상대성의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망' 추구의 정념을 버리지 않았으며, 아울러 현실성을 결여한 독아론이나 문학적 지성에서 일탈한 단독자성에 빠지지 않고 진정한 '전망'의 지평을 열기 위해 부단히 그 복잡한 연결 회로의 구체를 '성찰'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깊이 있는 성찰을 통한 새로운 현실과 문학의 전망 열어가기, 바로 그것이 김병익 비평의 고유한 개성이요, 특징이랄 수 있겠다.
열린 마음으로 '전망을 위한 성찰'을 계속해오며 '인식 지평의 확대'를 다양하게 도모해온 김병익이지만, 그 비평적 자아의 심층에서 4·19세대의 자기 인식이 언제나 구조적 핵으로 기능했던 것은 새삼 지적할 필요도 없는 말일 터이다. 최근 급변하는 현실과 문학의 와중에서 그가 퍽 곤혹스러워하는 것도 4·19세대의 비평적 자아와 90년대적 정황 사이의 심각한 충돌 때문이다. 지난 80년대에 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진보주의적 이념 체계와 거기서 도출된 문학들"로 인해 때때로 당혹감에 빠졌지만, 비평적 열린 대화성으로 그 당혹감을 넘어서 "우리의 문학과 인식에 대한 관념의 확산" 6)이라는 새로운 지평에 이르렀던 그였다. 그러나 9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변화상은 매우 근본적인 것임을 그는 직감한다. 하여 그는 "60년대적 사유가 90년대적 정황에 부닥쳐 생겨난 곤혹 속에서, 나 스스로 판단하여 확정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게 만드는, 내적 가늠자의 혼란 탓"(p. 6)임을 승인하고 자기 반성을 전제한 다음, 그 반성을 딛고 일어서, "환경과 매체가 달라지면서 글쓰기의 실제로부터 문학의 관념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도 함께 바뀌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 그 바뀌어감을 열린 마음으로 껴안으면서 우리의 문학사 속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p. 6)을 수긍한다. 그야말로 열린 마음이요 탄력적인 비평 감각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새로운 글쓰기를 수용하는 척도로, "시간과 자리의 다름에도 결코 달라져서는 안 될 문학적 진정성"(p. 6)을 강조할 때, 거듭 4·19세대 비평적 자아의 구조핵을 확인하게 된다. 혼란과 반성, 변화에 대한 열린 수용 태도와 문학적 진정성에 대한 지속적 신뢰, 바로 이 지점에서 4·19세대 문학주의자의 90년대식 사유 방식과 비평적 내면 정경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최근 비평집 『새로운 글쓰기와 문학의 진정성』과 「자본-과학 복합체 시대에서의 문학의 운명」에서 보이는 90년대식 성찰과 전망의 노력을 리뷰하는 가운데, 이 세기말의 터널을 잘 헤쳐나갈 수 있는 의미있는 문학적 지혜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1) 『내일을 여는 작가』(1977년 1·2월호, 민족문학작가회의)의 「특집/ 문학평론, 무엇이 문제인가」, pp.,158-159 참조.
2) 졸고, 「'비평의 위기'론을 넘어서는 비평을 위하여」, 『타자의 목소리 : 세기말 시간의식과 타자성의 문학』(문학동네, 1996), pp., 140-141 참조.
3) 문학과지성사에서 1987년에 긴행된 평론집 제목임.
4) 김병익의 비평적 사유의 지평을 전반적으로 조감하는데 참조할만한 자료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정과리, 「깊어져 열리기」, 『존재의 변증법 2』(청하, 1986)· 박혜경, 「자유와 문화적 초월, 혹은 열린 전망」, 『비평 속에서의 꿈꾸기』(문학과지성사, 1991)· 이광호, 「비평의 이타성과 초월적 전망」, 『환멸의 신화』(민음사, 1995)
5) 김병익, 「나의 세대, 그리고 우리 세대의 문화」, 『두 열림을 향하여』(솔, 1991), p. 21.
6) 김병익, 『새로운 글쓰기와 문학의 진정성』(문학과지성사, 1997), p. 5.(이 비평집이 이 글의 주된 텍스트이다. 앞으로 이 텍스트를 인용할 경우는 본문의 괄호 안에 그 쪽수만 표기하기로 한다.)
Ⅱ. '자본-과학 복합체 시대'의 새로운 글쓰기
김병익은 현단계를 성찰하고 21세기를 전망하는 자리에서 '자본-과학 복합체 시대'의 논리를 제출한다. 비평집 『새로운 글쓰기와 문학의 진정성』에서 우리 시대의 현실과 문학을 다각적으로 검토한 바 있는 그는 그 출간 직후 발표된 글에서 '자본-과학 복합체 시대'라는 용어를 채택한다. 「자본-과학 복합체 시대에서의 문학의 운명」이란 글에서 김병익은 이 세기말 현실을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두 요소로 자본과 과학을 지목하고, "한계를 모르는 자체 증식력" 7)을 공통점으로 하는 "그 둘이 유착하여 하나의 거대한 복합체로 결합하면서 그 속도와 규모는 기하급수적인 누진률로 빨라지고 커질 것"이라고 예단한다. 이 자-과 복합체는 자본의 증대와 과학 기술의 발전을 상승적으로 증진시키면서 21세기에는 독특한 양상을 묘출하게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전망이다. 구체적으로는 "자-과 복합체 자체의 논리로 자기 증식을 폭발적으로 실현시킴으로써 거기에 어떤 한계나 견제가 힘들어질 것이라는 점", "그 복합체의 주도적인 결정과 수행에 인간의 모습은 보이지 않거나 숨어 있으며 익명들의 집단이 그것을 이끌어 갈 것이라는 점," "인간의 소외가 극대화되고 그의 존재는 더할 수 없이 왜소해지며 그들의 생활은 더욱 가난해진다" 8)는 점 등이 그 전망의 세목들이다. 아울러 문화와 예술이라는 독창적인 인간 행위 역시 문화 산업이라는 자본주의 구조에 편입되어 전래의 인간성·진지성·진정성을 바탕으로 했던 예술성이 희석되거나 약화될 것이라고 본다. 그동안 문화와 예술이 지녀왔던 위의를 박탈당한 채 한갓 엔터테인먼트의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며, 사이버 공간의 혁명적 약진은 기존의 문화 예술 지도를 완전히 전복시킬 것이라고 예상한다. 물론 이것은 머잖은 장래에 대한 예상이고, 그런 까닭에 상당 부분 큰 이야기의 성격을 띠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런 예상의 배경부터 살펴보는 것이 좀더 타당하다. 그 배경이 되는 논의가, 그러나 사실은 더욱 구체적이고 핵심적인 이야기가 그의 비평집 『새로운 글쓰기와 문학의 진정성』의 1부 내용이다.
90년대 이후 변화된 문학과 문학 환경에 대한 다각적인 검토로 이루어진 있는 이 부분에서 저자가 주목하고 있는 두 가지 핵심은 '컴퓨터' 9)와 '자본주의'이다. 지난 연대까지만 하더라도 문학적인 것과 이념적인 것 사이의 상충을 놓고 갈등하던 문학주의자가 이데올로기가 급하게 뒷걸음질치는 90년대 들어 맞부닥친 것이 바로 그 둘이었던 셈이다. 둘 다 괴물이긴 마찬가지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운명에 아주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괴물이니 대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컴퓨터는 문학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등의 평문에서 컴퓨터를 비롯한 뉴 미디어의 개발과 보급으로 인한 문학 (환경)의 변화상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다음, 그 자신이 이렇게 요약 제시한다.
1) 컴퓨터의 워드 프로세서에 의한 글쓰기는 종래의 육필 작업 시절과 다른 문체를 개발할 것이다; 2) PC 통신 등의 새로운 미디어에 의한 문학 행위는 새로운 다중의 필자와 독자와 유통 회로를 가질 것이며 그것은 문학의 민주화와 혹은 우중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3) 이 PC 통신 문학은 이 통신 가입자들에 의한 쌍방향 집필 혹은 집단의 창작을 가능케 하며 그것은 가령 하이퍼 문학과 같은 새로운 창작 형식을 만들어낼 것이다; 4) 이럴 경우 문학은 작가의 독자적인 창작이며 작품에는 그의 서명이 있어야 한다는 근대 문학의 기초 개념이 전복될 것이고, 인격권과 재산권을 가진 저작권 개념, 다시 말하면 '저자'의 개념도 크게 흔들릴 것이다 등. 10)
컴퓨터는 문학의 중요한 생산 수단이면서 동시에 중요한 소통 수단(미디어)이다.11)PC 통신 문학이 고도화되어 위의 3)항과 같은 하이퍼 텍스트가 창작되고 소통되는 경우라면 그 둘은 온전히 통합될 터이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는 둘은 나뉘어질 수 있으며, 그것이 정교한 논의에 이롭다. 예컨대 컴퓨터를 필기 도구 수준으로 이용하는 1단계, 워드 프로세서로 작성한 문학 작품을 컴퓨터 통신망을 통해 소통시킴으로써 생산 수단이면서 소통 수단으로 컴퓨터를 활용하는 2단계12), 위의 3)항처럼 컴퓨터를 통한 생산과 소통이 동시에 쌍방에서 혹은 다(多)회로에서 진행되는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 앞의 인용문에서 1)항은 1단계, 2)항은 2단계, 3)항은 3단계, 4)항은 2단계 이후의 현상이다. 물론 김병익은 이런 양상을 포괄적으로 논의하면서 컴퓨터가 문학 제도, 내용, 저자의 성격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전망한 것으로, 그 내용은 대체로 합리적인 수긍을 유도한다. 다만 이런 생각들은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2)항의 경우. PC 통신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문자 형태들의 소통 양상을 어디까지 문학의 소통으로 수용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정도가 문제된다. 조선조의 선비들은 생활 속에서 늘상 시회(詩會)를 즐겼다. 그렇다고 그 시절 놀이판에서 읊었던 모든 시들이 문학 작품으로 소통되었던 것은 아니다. PC 통신이 활성화되기 직전 상황만 하더라도 그렇다. 사춘기 젊은이들의 편지나 낙서, 그들의 연습장에 쓰여진 시나 산문 구절들, 혹은 스포츠 신문의 희담(戱談)들…… 이른바 변두리 형식이라 불리워지는 이같은 대중적 '생활 문학'들이 있었던 것이다. 지난 80년대에 문학 장르의 해체와 통합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다른 측면에서 변두리 형식이 크게 존중되었던 적이 있긴 하나, 어쨌든 '생활 문학'과 '전문 문학' 혹은 '순문학'은 구분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런 생활 문학들이 컴퓨터 통신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약진을 보이고 있는 양상은, 그래서 문학의 우중화 경향을 띠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다지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문학을 지향한다고 해서 혹은 흉내낸다고 해서 다 문학인 것은 아니다.
7) 김병익, 「자본-과학 복합체 시대에서의 문학의 운명」, <<문학과 사회>> 1997년 여름호(문학과지성사), p. 500.
8) 앞의 글, pp., 501-502.
9) 여기서의 컴퓨터 환경과 관련된 논의를 확장시켜 「자본-과학 복합체 시대에서의 문학의 운명」에서 과학의 논리로 발전시킨 다음, 예의 '자본-과학 복합체' 논리를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10) 앞의 글, pp., 504-505.
11) 컴퓨터는 워드 프로세서 기능을 담당하는 필기도구라는 점에서 우선 생산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고, 뿐만 아니라 문학 생산 과정에서 다양한 정보 제공을 통한 창작 동기 부여 및 창작 과정의 경제성 제고 등을 도모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생산수단이 될 수 있다. 또 기존의 종이책 중심의 소통 체계를 일거에 혁신시켰다는 점에서 문학 소통의 아주 중요한 미디어가 된다 하겠다.(이에 대해 필자는 「디지털 복제 시대의 문학」이라는 글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논의한 바 있다.)
12) 이 단계까지는 컴퓨터를 통한 문학 생산과 소통의 시차가 분명히 존재한다. 즉 선(先) 생산-후(後) 소통이다. 컴퓨터의 자기 증식 능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만 도구로써만 이용할 따름이다. 필자가 보기에 우리의 현단계 PC 통신 문학은 일부 전위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이 단계에 머물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단 「문학의 제도성은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에서도 거듭 논의되고 있는 것처럼, 문학의 민주화 경향은 문제적이다. 기존 문학 제도의 닫힌 체계가 포착하지 못하고 수용할 수 없었던 새로운 문학적 에너지들이 폭넓게 실험되는 가운데 새로운 문학을 형성할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도 유보 조건이 있는 바 PC 통신 문학의 경우 현재 기성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는 하이텔문학관의 일부 코너를 제외하고는 글쓰기에 대한 경제적 보상이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다 대중화된 혹은 속중화된 70년대식 학원 문단의 오물렛처럼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까닭이다. 하지만 여전히 가능성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찾아야 하리라. 김병익이 "권위주의적 문단 구조를 해체하는 새로운 '시민 문단'이 형성될 수도 있을 것"(p. 61)이라 쓰고 있는 까닭도 대중화된 학원 문단의 상층부가 공동체적 초월을 도모할 때 가능한 양상으로 여긴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새로운 '시민 문단'을 형성하고, 현존의 문학 시장 체제를 전반적으로 재편성할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PC 통신 문학의 내포가 튼실해야 한다. 3)항에서 저자가 그 일부 형식으로서 공동 창작 가능성이나 하이퍼 픽션의 열린 가능성, 또는 "문학이 언어만의 것으로부터 풀려나"(p. 63) "복합 미디어 문학"(p. 64)으로 전개될 수 있는 가능성 등을 지적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은 너그러운 문학주의자인 저자에게 흥미로운 것이기도 하지만 우려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틈이 있을 때마다 "기왕의 문학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흔들리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p. 63)라고 적는 까닭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런데 실상 이 항목은 새로운 형태에 대한 범박한 예상이나 기존의 문학관 해체에 대한 우려에서 그칠 문제가 아니다. 「컴퓨터는 문학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라는 글이 1994년에 쓰여진 것이라서 그렇지만, 「자본-과학 복합체 시대에서의 문학의 운명」을 쓴 1997년 버전이라면 그 내포를 또 달리했으리라 짐작된다. 컴퓨터 관련 모든 사이버리아들의 기본적인 특징이 바로 '버전업'이니까 말이다. 저자는 다른 글(「문학의 제도성은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에서 "전자 미디어를 타고 나올 이런 문학은 말 그대로 '근대 이후' 그러니까 포스트모더니티의 문학이 될 것"(p. 107)이라고 쓴 바 있지만, 포스트모더니티라고 하건 디지털 리얼리티라고 하건 그 새로운 리얼리티의 미학성 내지 세계관의 특성에 대한 조망을 거쳐야 이 새로운 문학 형태들에 대한 문학적 평가가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4)항에서 저자의 문제, 특히 비인격적인 가상 저자를 논의하고 있는 대목은 김병익의 통찰력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다른 자리에서 그는 자본주의 시장 체제와 관련하여 저자의 문제를 다시 상론하고 있는데, 우선 컴퓨터와 관련한 논의만을 보면, 통신 공간에서의 상호작용성을 고려하여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저자의 해체를 인지하고, 또 그 과정은 '복합 줄거리 소설'이나 '하이퍼 픽션' 등에서 현실화될 수 있음을 간파한다. 13)
컴퓨터와 멀티미디어 등의 새로운 디지털 과학과 관련된 관심과 더불어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에 대한 관심도 남다르다. "이념의 붕괴와 체제의 변화, 사회와 문화 및 문학적 풍토의 변모는 창작의 성격을 대중화·상업화의 추세에 얹어 진정성의 문학을 위축시키고 생산과 소비의 시장 경제의 체계로 흡수하고 있으며 따라서 문학 자체는 문화 산업의 한 기능적 부분으로 퇴화될 우려"(p. 120)가 그 관심의 요체라 할 수 있는 바, 이를 변화된 문학의 내용·자본주의·작가정신 등의 논점으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 다음 부분이다.
1) 문학적 주제가 역사·현실·변혁 등 '큰 이야기'로부터 개인·욕망·꿈과 작은 미시 권력의 '작은 이야기'로 옮겨간다; 2) 이 경향은 PC 문학의 새로운 개발과 보조를 같이하면서 근대 문학의 기초인 리얼리즘으로부터의 탈피를 유도한다; 3) 풍요한 소비 사회 속에서 문학은 대중의 읽을거리로 자리잡으며 에로소설·추리소설·SF 등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장르가 왕성해질 것이다; 4) 이럴 때 문학은 창작과 수용에서 생산과 소비의 시장 경제적 메커니즘에 종속되고 광고와 유통에 크게 영향받는다; 5) 이래서 문학은 문화 산업의 한 부문으로 내려앉고 작가는 영상 문화를 비롯한 그 문화 산업의 한 창의적 기능인으로 자리매김될 것이다; 6) 이것은 작가가 위대한 정신이라는 전래의 위엄과 영광으로부터의 퇴위를 의미할 것이고 그래서 문학은 문화의 중심으로부터 변두리로 밀려날 것이다 등. 14)
13) 황현산은 '가상 작가'의 문제를 '가상 현실'과 관련하여 생각한다:"가상현실이 문학화하기 이전에 '가상 작가'가 먼저 탄생하리라 본다. 이 가상 작가는 필명이나 익명 작가와 다르다.익명이나 필명 뒤에는 현실 인격의 실체가 있지만, 가상 작가 뒤에는 가상의 경력과 가상의 학력, 가상의 감수성과 가상의 훈련 과정을 지닌, 즉 가상의 경험으로 조합된 가상 인격이 있을 있을 뿐이다. 익명·필명 작가를 비롯한 모든 현실 인격 작가는 항상 자기 이력과 문학적 경력의 제약을 받지만, 가상 작가는 이 제약을 벗어나거나 이 제약을 임의로 선택한다. 이점은 이 가상 작가의 모든 작가적 능력이 진정한 창조력이라기보다는 이제까지 확보되었던 모든 능력의 순열조합에 불과할 것이라는 말이 된다.(흔히 이야기하는 '작가의 죽음'은 아마 이 가상 작가를 통해 완성될 것이다. 작가의 죽음이란 따지고 보면 문학에서의 진정한 창조가 불가능하다는 말과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번의 가상 작가의 탄생은 곧 한 번의 소설의 소비를 뜻하는 셈인데, 이점은 통신 문학이 또 다시 겸손해야 할 필요를 방증한다."(「'컴퓨터 통신 문학'의 권위와 탈권위」,<<pc 통신 문학의 현황과 전망:하이텔 문학관 개설 5주년 심포지엄 자료>>, pp., 37-38.)
14) 김병익, 「자본-과학 복합체 시대에서의 문학의 운명」, p. 505.
「문학은 이제 어떻게 생산·소비되는가」, 「문학적 리얼리즘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문학의 제도성은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오늘의 우리 문학과 장인 정신을 위하여」 등의 글에서 논의한 내용들을 압축해 보인 것이다. 1)에서 3)까지는 논란의 여지가 적은 예상이다. 3)에서 추리소설이나 SF 등을 꼭 엔터테인먼트의 장르로 한정해서 논의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될 수 있을 터이나, 그보다는 「문학은 이제 어떻게 생산·소비되는가」와 관련된 4)항 이후의 논점들을 주목해 보기로 한다. 오랜 문화주의자 김병익이 여기서 문화적 맥락에서의 '창작'과 '수용'이라는 용어 대신, 경제적 맥락에서 '생산'과 '소비'라는 말을 채택한 것은 철저한 내지는 각고의 현실 성찰의 결과로 보인다. 전래의 수공업적 장인 의식을 바탕으로 한 창작 과정과 감동적인 파장을 동반한 그것의 수용 과정 대신에, "시장 조사--소비자 기호 확인--제품 기획--제작--광고--대량 판매--소비자 사용--폐기의 이 일련의 과정"(p. 75)으로 문학이 생산되고 소비될지도 모를 미구의 현실을 그는 퍽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려 보았으리라. 이런 과정에서라면 작가의 이름이 작아질 것은 당연하고, 문학성의 의미가 약화될 뿐만 아니라 문학 자체가 '위락적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라 우려한다. 이 우려의 끝에서 그는 "문학이 생산-소비의 시장 메커니즘에 함몰되어 이제 '진정한 가치 추구'를 포기하고 한낱 소모품으로 스스로를 전락시켜버린다면, 그때도 우리는 여전히 '문학'이란 말을 쓰고 '창조'며 '영원'이며 '보편성'과 같은 의미를 붙이고 고통스런 정신 혹은 초월적 감동이란 내적 환희를 얘기할 수 있을까"(p. 79)라며 우려의 괴로움을 실토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제임스 미치너의 장편 『소설』 생각이 난다. 여기서 작가 루카스 요더는 전통적 작가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시장 메커니즘 속에서 성공하기도 한다. 편집자(이본느 마르멜르)나 비평가(칼 스트라이베르트), 독자(제인 갈런드)의 여러 형태의 개입, 특히 편집자의 시장경제적/문학적 개입 상황에 직면하지만, 그는 그런 상황과 대화하면서도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문학적 소신에 의한 창작을 한다. 즉 시장 경제 메커니즘까지를 긍정적 타자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소설이다. 그렇지만 나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자본주의 경제 원리의 자기증식성은 김병익도 여러 차례 지적하고 있다시피 매우 위력적인 질주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가 가장 관철되기 어려운 갈래가 문학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혹 어린 생각일까.15) 즉 자본주의적 체계의 사고를 거부할 수 있는 나름의 합리적인 내적 근거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 문학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적 체계의 사고와 아울러 문학적 반체계의 사고가 고려되어야 할 터이다. 이를테면 아무리 시장 경제 메커니즘이 문학의 생산-소비 과정을 철저하게 관철해 나간다 하더라도 최종적이고 가장 중요한 생산자는 역시 작가이며, 작가의 창조적 상상력일 수밖에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예의 메커니즘이 아무리 철저하게 작동한다 하더라도 그런 시절에도 아무나 작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 독자 측면에서 보더라도 광고 등 시장 메커니즘에 매몰되지 않을 문화적/비판적 교양층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존재할 것이라는 점, 혹은 (소망스러운 생각이지만) 새롭게 형성된 신문화대중들이 교양의 성장을 도모하여(그러기 위해서는, 김병익도 지적하고 있다시피, 문학 교육과 저널리즘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겠지만) 사회의 문화적 밑흐름을 바꾼다면(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계속해서 그레샴의 법칙이 관철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 등등…… 물론 김병익의 에상대로 시장 메커니즘의 '주문 생산자-작가'가 많이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1급의 문학은 그 메커니즘을 넘어선 '창조자-작가'에 의해 쓰여질 것이다. 그리고 그 '창조자-작가'의 창작품이 '주문 생산자-작가'의 문학 상품에 비해 시장에서도 상당 부분 경쟁력을 지닐 수도 있지 않을까.16)
그렇다면 5)항의 우려 역시 반감될 수 있다. 아무리 영상 문화가 약진한다 하더라도, '스크립터-작가'와는 다른 '창조자-작가'의 존재 방식과 그 의의는 뚜렷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뛰어난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문학 작품만이 작곡가에게는 음악적 영감을, 화가에게는 미술적 감수성을, 영화 감독에게는 영상적 상상력을 추동하는 충격을 줄 수 있지 않을까.17) 그리고 아무리 더한 '자본-과학 복합체 시대'라 하더라도 음악이나 미술, 심지어는 영화로 번역되기 어려운, 오직 언어로만 표현될 수 있는 문학의 순금지대를 우리 작가들이 계속 확보해낼 수 있다면 6)항의 우려 역시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한다.
컴퓨터 및 자본주의 시장 메커니즘과 관련한 이상의 10가지 진단과 예상은 대체로 4·19세대 문학주의자인 김병익의 우려를 낳게 하는 것들이다. 그런 우려는 그가 상정한 '자본-과학 복합체 시대'에는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 살펴 보았듯이 그의 우려는 자본주의나 과학을, 다시 말해 새로운 현실과 그 변화상을 성찰하는 체계의 사고에 근거한 것이었다. 말이 허용된다면, 합리적인 우려라고나 할까. 새롭게 예상되는 현상에 근거한 체계의 사고가 자아낸 우려는 그 저편에서 문학적 변이의 체계를 추동시키기도 한다. 그것은 4·19세대 비평가의 비평적 자아의 뿌리를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바로 '문학적 진정성'과 '장인 정신'에 대한 애정어린 강조가 그것이다. 그것은 또한 문학의 실존적 선택과도 관련되는 절박한 문제라고 그는 생각한다. '자본-과학 복합체 시대'의 문학의 운명이 거기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삶의 의미와 세계의 허위성에 대한 각성이 어느 시대에든 있어왔고 기능해왔기 때문에, 그것은 앞으로의 세대에도 여전히 나타나, 의미를 키우기 위해, 허위를 벗기기 위해 자-과의 거대한 세계 체제와 싸움싸울 것이다. 그 싸움이 문학적 진정성이란 이름으로 수행되기를, 수행될 수 있기를 나는 기대하는 것이다. 그 진정성은, 세계 자본과의 싸움이고 신적 존재를 도모하는 과학과의, 골리앗스런 싸움이다. 나는 그것이 알타미라 동굴에 소를 그린 원시 시대로부터 연면히 이어온 예술가들의 장인 정신에서 발현될 것임을 믿는다. 그들은 영상의 시대에도 여전히 문자로, 상업주의 시대에도 꾸준히 가난한 창조의 정신으로, 과학 만능의 시대에도 다름없이 수작업으로 자기만의 세계와 인간을, 그들의 고독과 진실과 품위를 드러낼 것이다. 바로 그들의 존재함 자체가 자본과 과학의 독재에 저항하는 존재성을 발휘할 것이다. 그것이 문학의 종말을 유예시키고 삶의 진의를 밝혀낼 것이다.18)
15)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나는 이같은 '어린 생각' 때문에 경제학도에서 문학도로 전신한 경우에 속한다. 다른 자리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문학은 여러 문화 장르 중에서도 가장 수공업적인 갈래기 때문에, 자본주의화 정도나 과학화 정도 면에서 가장 낙후될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문학의 문학다운 생명이다. 자본-과학 복합체 시대를 가장 더디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문학은, 그것이 진정성을 구유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이미 확보하고 있다고 여기는 편에 속한다, 나는.
16) 이 또한 너무 낙관적인 견해일 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있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좀 다른 사례지만, 명 안되는 전통 공예 전문가들에 의해 수공으로 제작된 전통 가구의 희소가치에 따른 현실적인 경제성을 보라. 문외한이 겉으로 보기엔 비슷한 가구인데도 불구하고, 공장에서 생산된 것에 비해 몇 곱절 비싼 값으로 판매되는 것을 보면, 나는 매우 신난다. 비록 내가 구매할 수 없어 속상하기도 하지만. 신나는 이유는 자명하다. 비록 그 높은 가격으로도 다 평가받는다고 보기 어렵긴 하지만, 나름대로 예술적 품격을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혼자의 공상일 수 있겠지만, 작가의 이름이 점점 작아지는 시대일수록 역설적으로 작가의 이름을 크게 할 필요가 있다. 물론 단순히 상업적/대중적으로 키우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가령 이런 크기는 어떤가. 같은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주문 생산자-작가'의 상품이 5천원에 팔리는데 반해, '창작자-작가'의 작품은 5만원에 소통된다면? 과연 만화적 상상력일까? 이 가격 차별화 정책은 화장품이나 고급 외제 소비 상품에서만 통하는 것일까? 혹은 전통 원목 가구 등속에서만 그치는 것일까? 자본주의가 점점 위력을 더해 가는 이 시대의 작가들이라면 응당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견디고 넘어서는 고도의 문학적 전략 수립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터이다.
17) 영화 「장미빛 인생」을 만든 김홍준 감독은 언젠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최근 작가들이 소설의 영화화를 생각하여 충무로의 눈치를 보고, 의도적으로 소설 속에 영화적 장면을 많이 넣기도 한다고 하는데, 이는 그들이 영화는 물론 소설도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는 것이다. 수준 있는 영화 감독일수록 보통은 영화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이는 소설에 의욕을 보인다는 것, 이미 영화적인 요소를 많이 갖춘 소설을 영화화한다면 그것은 영화 제작이 아니라 단순 번역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문학으로 잘된 작품이라야 보다 풍성하고 깊이있는 영화적 상상력을 가져다준다는 것, 이런 것들을 모르는 소치가 아니겠느냐며 우려를 표했다.
18 ) 김병익, 「자본-과학 복합체 시대에서의 문학의 운명」, pp., 508-509.
Ⅲ. 심리적 이중 구조의 대화성과 새로운 인식의 지도 그리기
「오늘의 우리 문학과 장인 정신을 위하여」에서 김병익은 "장인 정신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성을 요구하는 대신 타인에 대해 또는 새로운 세대에 대해 자신이 이루지 못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관대함을 가질 수 있고 또 가져야 한다"(p. 131)고 적고 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그의 견해를 십분 수긍하면서, 바로 그 자신이 그같은 장인 정신을 지닌 비평가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이유를 여럿 댈 수 있을 것이다. 앞서 김병익론을 개진한 논자들도 그랬지만, 실제로 김병익론이란 그가 장인 정신을 구유한 비평가라는 이유 대기 이외에 달리 무엇이겠는가.
나는 앞에서 '전망을 위한 성찰'을 계속 견지해온 비평가라며 그 하나의 이유를 댔다. 또 하나. 자본-과학 복합체 시대, 혹은 정보-자본주의 시대에는 누구나 한결같이 "꿀벌통의 외톨이 벌집 속에 들어 있는 벌과 같은 존재"19)이기 십상이다. 개인은 점점 왜소해지고 상대적으로 점점 더 무지해지며, 판단력 비판의 근거를 확보하기 힘들어진다. 이점 비평가-개인이라고 해서 예외일 리 없다. '전망을 위한 성찰'은 매우 어렵고, 그런 까닭에 미시 담론에 어쩔 수 없이 빠져드는 경우도 많다. 더 나쁘게는 "비평의 중간화, 잡담화, 가십화가 가속"20)화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변화된 현실을 조감하며 새로운 문학적 인식을 보인다는 것은, 그것도 사태를 종합적으로 성찰하여 그 결과를 제출할 수 있다는 것은 여간한 장인 정신의 발로가 아니고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종합의 능력이나 의지는 다름아닌 장인 정신의 소산이다.
하나 더. 비평 과정상에 보이는 심리적 이중 구조 혹은 비평적 반성 기제를 들 수 있다. 「책머리에」를 비롯한 여러 자리에서 그는 그 자신의 "피할 수 없는 심리적 이중 구조"(p. 91)에 대해 토로한다. 아니 어쩌면 그의 근작 비평 전체가 이같은 심리적 이중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변화된 현실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심리와 평가하는 심리 사이의 거리, 현실과 신념 혹은 소망 사이의 심리적 거리, 자본-과학 복합체 상황과 문학적 진정성 사이의 심리적 거리, 신세대적인 양상과 4·19세대 의식 사이의 심리적 거리 등등이 그의 비평적 판단과 진술의 심층에 한결같이 드리워져 있다. 예컨대, 컴퓨터로 인한 문학의 변화 양상을 검토하면서 그가,
문학의 민주화는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한 문학의 저급화는 못마땅하다; 또는, 문학이 열린 텍스트가 되어 수정이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흥미롭다, 그러나 그 결과로 작가의 아우라가 사라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 혹은 문학이 전적으로 문자와 언어에만 종속된다는 것은 보수적인 문학관이며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이 개발될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 문학이 다른 장르, 특히 대중적 예술 장르와 다름으로써 자부할 수 있었던 문학의 독자적인 위엄을 잃어버리는 것은 인간정신을 위해 비극적이다……(「컴퓨터는 문학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p. 64.)
라고 적을 때, 우리는 그 피할 수 없는 심리적 이중 구조의 한 단면을 잘 알게 된다. 그것은 사태의 실상을 왜곡하지도 않고, 문학적 소신을 버리지도 않는 상태에서 균형잡힌 비평적 진술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준다. 또는 그 이중 구조의 대화 속에서 그의 비평이 생산적인 에너지를 지닌다고 볼 수도 있다.21) 물론 이 이중 구조의 대화성은 비평적 포괄의 지혜를 지닌 이에게만 허용된다. 김병익은 그런 비평가다. 아래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래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갈등"을 거듭하고 있는, 김병익의 심리적/비평적 이중 구조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여러 타자들에게 적극적인 대화를 요청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전래의 문학적 감동과 기능을, 형태는 어떻든 질로써 여전히 살려내기 위해서는 그 순환의 고리가 잘려야 하는데, 그 황금의 칼을 가진 사람은 결국 작가 자신에게 있다는 점을 결론적으로 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자신의 문학을 지켜내기 위해, 한편으로는 문학사적 전통을 지켜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 변화의 도도한 흐름을 담아내면서, 문학을 위협하고 그래서 한갓진 소비품으로 추방하려는 세력과 싸움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문학적 제도의 변화를 예감하면서 그럼에도 그것을 통해 문학의 수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장 오래된 작가의 진정성에 그 미래를 걸어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문학은 아이러니의 산물이며 작가는 그 같은 아이러니를 먹고 문학을 창조한다. 그래서, '그래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갈등은 이렇게 해서 새로운 시대의 문학적 화두가 될지도 모른다. 삶과 사유와 정서의 양식이 변한다는 것, 그래서 문학도 변한다는 것, 그럼에도, 가장 오랜, 문학적 존재 이유에 기대어 그것의 진정성을 여전히 살려내려고 노력한다는 것, 거기에 문학의 미래가 달려 있는 것이며 작가들에 대한 우리의 신뢰가 매여 있는 것이다.(「문학의 제도성은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pp., 118-119.)
줄곧 작가에게 우려될 상황들을 검토하고 작가의 이름이 작아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에게 신뢰를 보낼 수밖에 없는 심리적 이중 구조 혹은 비평적 곤혹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문학적 진성정'을 결론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 나름의 새로운 탐색과 종합, 그리고 대화적 읽기의 소산이라고 보아야 한다. 김병익은 자신의 대화적 읽기의 결과를 여러 타자들과 다시 나누고 대화하고자 한다. 특히 최근에는 진정한 작가들과 더욱 내밀하게 교감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에게 있어 비평은 권력이 아니다. 대화다. 대화를 위한 공공의 마당public sphere이다. 전망을 위한 성찰과 대화를 계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진정한 장인 정신을 지닌 비평가로 불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또 얼마든지 더 댈 수 있다. 이미 인용해 보인대로 그가 생각하는 장인 정신의 내포 중 "새로운 세대에 대해 자신이 이루지 못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관대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그렇다. 앞에서도 구체적인 세목이나 각론의 버전업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고 적은 바 있는데, 적어도 나는 그의 최근 비평을 읽으면서 몇 가지 새로운 비평 글감을 발견했다. 아니 과제를 받은 느낌이었다. 새로운 세대의 가능성에 대한 관대함을 그가 보여준 것이다. 모름지기 새로운 인식의 지도를 그려야 한다고 강조하는 그 과제들을 잊기 전에 간략히 메모해 두는 것으로, 변죽만 울린 형국이 돼버린 김병익의 최근 비평 읽기의 초고를 마치고자 한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① 김병익이 '자본-과학 복합체 시대'라 부르고 있는 그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더 효율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학제간 이론틀은 무엇인가. 불확실성 이론이나 퍼지 이론 등이 혹 그 구성에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② 김병익이 포스트모더니티라고 언급한 그 부분, 어쨌든 새로운 리얼리티에 대한 다각적이고 심층적인 탐색이 필요하다. 김병익의 최근 성찰이 사회문화론의 측면에서 의미 있을 뿐만 아니라, 전문화된 문학론의 지평을 심화하는데 기여하기 위해서라도 요긴한 작업이다. 특히 버추얼 리얼리티를 탐구하다 보면 사이버 문학이 단순한 위락의 문학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③ 자본과 과학이 지배적인 우세종이라면, 가령 정수복의 저작 제목처럼 '녹색 대안을 찾는 생태학적 상상력'이 그 대안 사고로서 아주 중요하지 않을까? 미래의 정보-자본주의 시대는 디지털토피아와 유토피아 사이의 경쟁과 긴장으로 구성되지 않을까? 비록 현실적인 위력은 약하다 할지라도 진정한 인간다운 삶을 소망하는 문학에서는 아주 중요한 명제가 아닐까?; ④ '문학적 진정성'이나 '문학성'에 대한 심화된 논의가 비평 공간을 위해서는 물론 창작 공간을 위해서도 아주 필요하다; ⑤ 장인 정신을 통한 언어 미학의 미래적 가능성에 대한 탐구? 혹은 장인 정신의 실존적 의미 재고? 등.
19) 앞의 글, p.496.
20) 유종호, 「비평 50년」, 『한국현대문학50년』(민음사, 1995), p.273.
21) 김병익 비평의 가장 큰 미덕으로 나는 '대화성'을 들고 싶다. 일차적으로는 비평의 대상(그것이 현실이든, 작품이든 간에)과 충분한 대화를 나누며, 그 다음에는 그 대상과 관련한 여러 타자들과 교감하고 대화를 나누어가며 자기 논리를 펼쳐가고 있는 것이다. 그 비평문에서 여러 타자들의 목소리가 다성적으로 어울리면서 하나의 새로운 비평 논리를 탐색해 들어가는 과정을 발견하는 일이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