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쌍봉사에서 예약해 둔 목포의 숙소로 갔다. 다음날 진도에 가기 위해서다.
퇴근 시간에 대불공단을 지나는 것은 인내가 필요하다.
무안과 영암을 잇는 무영대교가 완공되어도,
고하도를 지나는 목포대교가 새로 생겨도,
퇴근시간의 삼호대교는 여전히 붐빈다.
네비게이션은 죽으나 사나 이쪽으로 안내한다.
고지식하게도 돌아갈 줄도 모르고, 시골길에서도 중앙선은 절대 넘어서는 안되고,
2km가 되든, 3km가 되든 교차로까지 가야 되는 맹충이다.
예전에는 네비가 없어도 잘만 다니던 길을 네비를 끄고 다니다가도,
조금만 변했다 싶으면 네비를 사용하게 되니 나도 똑같이 맹충이가 되어간다.
지난 봄에도 진도에 들어 가려고 똑 같은 시간에 목포로 와서 하룻밤을 묵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복부 부위에 통증이 심해진 것 같다. 살펴보니 지난밤에 2곳이었던 피부발진이 5곳으로 늘어 났다.
풀숲이 우거진 길을 다녀 벌레에 물린 자국인 줄 알았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다.
검색해보니 아무래도 대상포진인 것 같아
남은 여행일정을 포기하고 서둘러 서울로 올라왔다.
집에 가기 전에 병원에 먼저 들렀더니 역시 대상포진이라고 한다.
꽤나 힘든 병이라 하던데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가게문은 닫아 둔 상태라 안내문만 바꾸어 붙여놓았다.
"5일간 쉽니다."에서
"당분간 쉽니다"
다행히 상태가 심하지 않아 10일만에 일상생활을 할 수 있었다.
진통제 덕분에
통증은 있었으나 아주 힘들지는 않았다.
지난 겨울부터 집안일로 몇 달을 힘들게 보냈는데 몸에 무리가 와서 몹쓸 병이 왔나 보다.
덕분에 가게문을 15일 동안이나 닫아 놓고 정말 오랜만에 푹 쉬었다.
하루 진종일 먹고, 자고, TV 보고, 책 읽고.
그것도 나쁘진 않았다.
아침을 콩나물 국밥으로 때우고 일찍 진도로 용장산성을 찿아 갔다.
고려 고종18년(1231) 몽고의 1차 침입 이후
강화도로 천도하여 40년 동안 대몽항쟁을 해왔었는데,
최씨 무신정권의 몰락 이후 1270년에 문신들의 주도로 항복하고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이에 무신정권을 뒷받침해왔던
삼별초 부대가 항복에 반대하여
1000여척의 배에 권속과 재물을 싣고
70일 동안 항해하여 도착해 자리잡은 곳이 진도 동북쪽에 있는 용장산성이다.
이곳은 그 이전부터 외곽에 산성을 쌓고 외침을 방비했던 곳이다.
삼별초의 지도자 배중손은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여 산성을 개축하여 궁궐을 짓고 고려조정과 몽고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그 기간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9개월만에 여몽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왕은 잡혀죽고
배중손은 남도석성으로 후퇴하여 싸웠으나
그 역시 전투 중 전사하였다.
그의 부장 김통정이 살아남은 삼별초를 이끌고 제주도로 가서 항쟁하였으나 2년 후 그 마저 진압되어 대몽항쟁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800년전의 역사적 애환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용장산성이 함락된 후 1만명의 남녀 진도사람들이 포로로 몽고에 끌려갔다고 한다.
현재 진도군 인구가 3만명 남짓하니 당시 진도에 살고 있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죽거나 끌려갔다고 보면 된다.
전쟁은 극히 적은 숫자의 사람들에 의해,
피해에 비하면 지극히 하찮은 이유에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도
언제 전쟁의 광란 속에 빠져들지 모를 일이다.
이침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옛터에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감내하다
사라져간 옛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들 역시 우리와 똑같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을텐데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용장산성 유적지.
이른 아침이라 풀밭이 이슬을 잔뜩 머금고 있다.
석성이 높은 곳은 4m 가까이 되었다.
저 아래 주차장에서 꽤 많이 걸어 왔다.
아침은 진도 군청 앞에서 뜸북국을 먹었다.
잘 곤 사골 국물에
뜸북이란 해초를 넣고 끓인 국인데 별미다.
뜸북이란 해초는 양식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제법 비싸다.
한 그릇에 2만원이다.
진도 특산물인 뜸북국을 하는 집이 몇 곳 있는데
이 집은 TV에 한 번 나온 적 있는 집이다.
뜸북(표준어 : 불등풀가사리).
아침 일찍 채취해 왔다면서 주인 할아버지가 다듬고 계셨다. 처음에는 톳인 줄 알았다.
반찬으로 나온 톳 무침.
진도에서 제일 높은 첨찰산 아래 쌍계사란 사찰이 있다.
유명한 운림산방과 담 하나 사이에 두고 있다.
지리산 아래 하동 쌍계사와 마찬가지로
절 양쪽으로 계곡물이 흐른다고
'쌍계'라 하였다는데
한 쪽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세월은 물길도 돌리니 세월 따라 사라졌는가.
150년 전 그림인
소치 허련의 운림각도를 보면 쌍계사와의 사이에 제법 큰 개천을 볼 수 있다.
첨찰산(尖察山) 쌍계사.
뽀쪽할 첨
살필 찰
봉수대가 있어서 그리 이름을 지었는가.
발음하기 힘들다.
사천왕문을 불이문으로 함께 쓰고 있다.
불이(不二)이란 말은, 삼라만상의 모든 것은 그 본질의 실상이 구분되는 둘이 아니라는 뜻이라는데
나에게는 짙은 안개 속이다.
절에 들어가는 3개의 문(일주문, 사천왕문, 불이문)
중 마지막 문으로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불국토를 지키는 사천왕의 모습.
비파, 칼, 용과 여의주, 탑을 들고 있다.
진설당(陳說堂).
원래 스님들의 수행공간으로 선종사찰에서는 무척 중요한 공간이다.
템플스테이 장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진설당 현판에 운보 김기창 화백의 낙관글씨가 보인다.
친일행위만 아니었으면 우리나라 국보급 화가로 대우받았을텐데.....
장애로 인해 그림만이 그의 삶 모든 것이었을 뿐.
그때도 틀림없이 떡고물 얻어 먹으려고 친일로 내몰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대웅전 보수공사가 거의 마무리되어 간다.
상량문에 의하면 최소한 300년 이상 오래된 건물이다.
가운데 사분합 빗살문과 양쪽 삼분합 띠살문을 새로 해 달았다. 이전 사진과 비교해 보면 똑 같다.
이처럼 보수공사는 원형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방풍판, 평방, 부연, 평고대, 공포의 외출목,툇보, 고주 등 많이도 교체했다.
한옥의 결구방식은 장부와 장부(끼우도록 치목한 것)를 연결한 것이기 때문에 각 부재의 교체가 가능하다. 때문에 전체를 해체해 자리를 옮겨 새로
짓는 수가 왕왕 있다.
해남에 있는 고산 윤선도 종택 녹우당의 일부는 수원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수리하기 전의 대웅전.
예전의 것은 옆에 띠살문이 없다.
강화도 고려궁지.
고려 원종 때 몽고에게 항복하고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이때 배중손 휘하 삼별초는 진도로 내려가고 강화도 고려궁은 몽고의 명령에 의해 철저히 파손되었다.
고려궁지를 방어하는 강화성문.
운림산방 전경.
뒤에 첨찰산이 봉곳 솟아있다.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9~1892)은 진도에서 태어났으며 당나라 남종화와 수묵산수화의 효시인 왕유(王維)의 이름을 따라 개명하여 허유(許維)라고
불리었다. 소치라는 호는 원나라의 이름난 화가 황공망의 호 대치도인(大癡道人)에 빗대어 추사가
소치(小癡)라고 지어준 것이다.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선사에게 시,서,화를 배우고
그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갔다.
소치 허련이 스승이자 후원자인 추사 김정희가 죽은 후 49세 때인 1857년 고향에 내려 와 지냈던 곳이다.
소치 기념관은 그의 손자 남농 허건이 세운 곳이다.
소치 이후 대를 이어 남종화의 성지가 된 운림산방에는 허씨 집안 3대의 그림이 복제되어 전시되어 있다.
운림각도.
1866년 소치가 59세 되던 해 자신이 은거해 살고 있는 운림산방을 그리고 상변에 안빈낙도의 삶에 대하여 추사체로 빼곡이 적어 놓았다.
부채에 그린 산수화를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라고 한다.
전시장 내부.
아무도 없어서 살짝 한 컷.
팽목항 방파제의 등대.
노란 리본이 추모의 장소임을 말해준다.
2014년 4월 16일 사고가 났으니 이제 2년하고 7개월이 지났으나 인양작업이 여의치않아 언제나 기억의 노트를 덮을 수 있을지 요원하다.
사고 직전 해 2013년 가을에 팽목 수산공판장에서 꽃게를 사온 적이 있어 세월호 사고 때
그 조용하던 항구가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놀랐었다.
이번에는 조도 창유항으로 가기 위해 왔다.
세월호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그림에서 섬 무더기 넘어가 세월호 사고 현장이다.
섬 무더기가 조도(烏島)이다.
새떼가 모여있는 듯 하다고 우리말로 새 섬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품은 이들이
이 몇 글자로 그들의 슬픔을 얼마나 나타내었겠나만 기분이 우울해져 다 읽지 못하고 중간에 되돌아 왔다.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46년 전 우리는 가야 할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여행만 허락되었으니
우리도 몇몇만 걸어갔다온 것으로 기억된다.
덕분에 중학교 때 수학여행 추억은 남아있는데
고등학교 때의 것이 없다.
그해 가을에도 수학여행가는 학생을 태운 버스가
철도 건널목에서 열차와 충돌하여 수십명이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그때만해도 한 버스에 60~70명씩 태웠을 때이니 피해가 더 컸다.
그리고 3~4일 후 원주 인근의 터널에 열차끼리 추돌해 또 수학여행가던 학생들이 수 십 명이 죽었다.
그리고 사건 후 내린 당국의 조치가 전국의 모든 학교에 수학여행 금지 명령을 내렸다.
참 편한 행정이었다.
책임지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문교부나 교통부 장관도 아닌 교육감과 철도국장이
사표내는 선에서 끝났다.
그때는 그랬었다.
그것 말고도 나라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어서 그랬다나.
그때는 그랬었는데.
지금은 세상이 많이 변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 생각난다.
운림산방에서 30분 거리인 팽목항에 지각하여 배를 놓쳤다. 도착하니 뱃머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다음 배는 3시간을 기다려야 되는데 큰일났다 싶었는데, 직원이 마침 농협 화물선이 잠시후 조도에가니 그걸 이용하라고 한다.
덕분에 화물선을 타고 갔다.
조도 창유리 항구.
산아래 용도를 알 수 없는 폐허가 된 창고가 흉물스럽다.
사진에 보이는 것이 모두 다인 조그만 항구다.
조도에는 풍광을 보고자 들어왔는데 날씨가 자꾸만 흐려져 걱정스러윘다.
원래 하룻밤을 묵으면서 일몰과 일출을 보려고 했는데 날씨 때문에 못 볼거라고 한다.
숙소도 마땅하지 않아 마지막 배로 나가기로 결정했다.
날씨는 흐려도 경치는 참 좋다.
날씨 탓만 아닌가 보다.
사진 솜씨도 더해져 같은 경치가 이렇게 많은 차이를 보이다니.
블러그에 올라온 조도사진들.
조도는 인구가 3200명이나 되는 작지 않은 섬이다.
면소재지가 있는 창유리항은 작지만 크고 작은 여러가지 배들로 붐비고 있다.
서둘러 둘러 보느라고 아쉬움을 뒤로 하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