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한국 군종제도의 설립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캐롤(George Carroll) 신부와 미 북감리교 쇼우(W. E. Shaw) 목사는 미8군과 교섭,
6월 27일 일본에 건너가 맥아더 장군의 극동사령부 군종과장 이반 베넷(Ivan L. Bennet) 군목과 죤 단(John
Dahn) 신부를 만나 한국에 진주하는 미군에 종군할 것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8월 1일 미8군 군종부의 문관으
로 부산에 도착, 종군하였다. 이어 미8군 예하 1?2?24?25사단의 군종참모를 소집하여 한국군의 군종제도 설립
에 관해 논의하였다.
1950년 8월 중순 부산 범일동성당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던 김동한(金東漢)?허창덕(許昌德) 등 10여 명의 신
부들은 젊은 신부들과 신학생, 신자청년 3천 명을 모아 1개 연대 규모의 ‘가톨릭청년결사대’를 조직하고자
계획하였다. 낙동강 전선에서 공산군과 대치하고 있고, 대구와 부산도 언제 점령당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
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은 결사대가 편성되면 육군본부 작전국장 이한림(李翰林) 준
장을 대장으로 추대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가톨릭청년결사대의 조직 안건은 육군본부 인사국장 황헌친 준장의 지지를 얻어 국방부장관을 경유,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그런데 대통령은 재가를 거절하였다. 나라를 위해 천주교측에서 결사대를 조직한다는
뜻은 좋지만 현역군인에게도 충분한 무기를 공급할 수 없는 형편인데 3천 명을 무장시키기는 어렵다는 이유였
다. 결국 천주교측의 결사대 조직 계획은 정부에서 무기를 제공받을 수 없어 무산되었다. 그러자 천주교측에서
는 무기를 들고 전선에 나가 싸우는 대신 후방에서 봉사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전쟁에 협력하자는 데 의견을 모
았다. 그리하여 가톨릭청년결사대는 활동방향을 전환, 봉사활동에 주력하였다.
캐롤(Carroll) 신부와 쇼우 목사는 국방부장관 신성모(申聖模)를 방문하여 한국군 군종제도에 대하여 논의하였
는데 결론은 얻지 못하였다. 이에 9월 2일 국무총리를 방문하였고, 국무총리로부터 “한국군 군종제도 창설에
적극 협력하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9월 5일 캐롤 신부와 쇼우 목사는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여 한국군 군
종제도에 대하여 설명하였고, 9월 13일 미 고문단을 방문하여 고문단장 프란시스 화전 준장과 인사 고문관 피
터 스코트(Peter Scott) 중령에게 “만일 한국군이 군종제도를 가진다면 군목의 책임과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
록 미국 군목처럼 계급을 주어야 할 것이다”라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미 고문단의 협조를 얻어내기 하루 전인 9월 12일 30여 명의 천주교 신학생들이 자원 입대하였다. 신학교의
휴교로 일부 신학생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렇지 못한 신학생들은 부산에 모여 전세가 나아지기를 기다렸다.
교회 책임자들도 신학생들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부산 중앙성당에서 서울교구의 피난 신부들과 신학생들을
위해 성당과 부대시설을 개방하고 숙식을 제공하였지만 보다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였다. 그러던 중 피
난 신부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였던 정원진(鄭元鎭) 신부를 중심으로 중앙성당 제의방(祭衣房)에서 서울교구
신부들의 긴급회의가 열렸다. 그 결과 신학생들과 신부들을 위한 방을 각각 따로 마련하여 중앙성당에서 나간
다는 의견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그것은 신부들이 희생되더라도 뒤를 이을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당시 충청남도 문교사회국장(文敎社會局長) 조중선과 교섭, 그가 살고 있던 영주동의 저택을 신학생
들의 숙소로 마련하였다. 신학생들은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하기로 결정하여 상급생 지학순(池學淳)?김창렬(金
昌烈)?이응현(李應鉉) 등이 미군부대식당에 취직하여 생활을 꾸려갔다. 한편 20여 명의 서울교구 신부들은 부
산 부평동의 신자집 2층을 임대하여 1층은 식당, 2층은 숙소와 응접실,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나날의 생활을 꾸리기에도 버거워하고 있던 피난 신부들에게 또 다른 문제가 부각되었다. 병역문제였
다. 한밤중에도 헌병들이 부평동의 합숙소에 들이닥쳐 징집 연령에 해당하는 젊은 신부들을 연행해 가곤 하였
다. 이에 원로 신부들이 관계당국에 진정, 1950년 9월부터는 천주교신부 모두가 연령에 관계없이 징병을 면제
받았다.
징병 면제 증명서
천주교 신부 오십삼 명(현 국내 신부 전원)에 대하여서는 육본고부내발 제120호(단기 4283년 9월 21일자)로
징병을 면제키로 되었사오니 오인되어 징병되었을 시는 면제할 것을 시인함.
단기 4283년 9월 22일
육군본부 고급부관 육군대령 최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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