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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panic님의 플래닛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dalcom
우리나라 야사(역사)를 몇몇 알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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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사대부와 절개 지킨 여인들 「선조 실록」에는 임진 왜란으로 전 국토가 유린되던 당시의 참상을 그린 한 폭의 그림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당시 사람 중에 「유민도(流民圖)」를 그려 올린 자가 있었다. 그 그림에는 죽은 어미의 젖을 물고 있는 아이도 있었고,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는 자도 있었고, 구걸하는 사람도 있었고, 자식을 버려 나무 뿌리에 묶어 놓은 어미도 있었고, 말을 할 수 없어서 손으로 입을 가리키는 자도 있었고, 나뭇잎을 따서 배를 채우는 자도 있었고, 남의 하인이 되기를 구걸하는 사대부도 있었고, 마른 해골을 씹어 먹는 자도 있었고, 부자 간에 함께 누워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아이를 업고 비틀거리는 어미도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전쟁이 벌어지면 가장 참혹한 처지에 놓이는 것은 여자와 아이였다. 선조 31년(1598) 3월 1일의 「선조 실록」은 그 무렵 수없이 벌어졌을 사건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도승지 신식의 딸 신씨는 왜적에게 시부모가 살해당하고 신씨는 남편의 첩과 함께 사로잡히게 되었다. 왜적이 그의 나이가 어린 것을 보고 끈으로 묶어 함께 끌고 가려고 했다. 신씨는 빠져나가지 못할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첩에게 “나의 뜻은 본디 정해졌다. 죽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너는 꼭 죽을 필요가 없으니 우선은 그대로 따라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도모하라”고 말했다. 그러고나서 칼을 빼어 들고 소리를 높여 왜적을 꾸짖기를 “내가 어찌 감히 너를 따라가 살겠는가. 빨리 나를 죽여라” 하며, 오른손으로는 칼을 잡고 왼손으로는 나무를 휘어잡고는 소리를 더욱 매섭게 질렀다. 왜적이 노해 그의 오른쪽 어깨를 치자 땅에 쓰러져 절명했다. 그의 여종이 주인 아기를 업고서 곁에 숨어 있다가 주인이 해를 당하는 것을 보고, 나와 끌어 안자 적이 아울러 살해했다. 그 첩이 끝내 적중으로부터 도망쳐 돌아와 그 전말을 이야기했는데, 그 절개에 탄복해 흐느낌을 멈추지 못했다.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지키기 어려운 위기 상황에서는 인간의 동물적인 생존 본능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됨됨이는 오히려 위기 상황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임진 왜란이 시작된 이듬해인 선조 26년(1593) 5월 26일의 「선조 실록」은 살기 위해 직무를 방기한 한 사대부를 고발하고 있다. 사헌부가 올린 글을 보자. 왜적이 서울에 들어와 점거하던 때 전에 정랑(육조의 정5품 벼슬)이었던 유덕종은 “성안에 몰래 들어가 내통(內通)하겠다”고 하고 무지한 주민들과 태연하게 거처하면서 조사해 보고하는 일은 하지 않고 단지 살기를 꾀하려는 계책을 했으니, 사대부의 도리를 더럽힘이 심합니다. 그를 사판(관리의 명부)에서 삭제시키소서. 당시 참혹한 위기 상황에서 본분과 직무를 유기한 사대부들이 많아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여인들과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위 사건을 기록한 사관의 평가와 관점이 재미있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목숨을 버려 의리를 지킨 사대부들은 아주 적었지만, 죽기를 맹세하고 정조를 지킨 여자들은 곳곳마다 있었다. 우리 나라 사대부 집안의 여자들은 평생 동안 한 남편만을 섬기는 것이 그들의 관습이라서 난리를 만난 때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대부들은 평소의 소양이 의리는 알지 못하고 이익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생사가 걸려 있는 즈음에 마음이 흔들렸던 것이다. 풍속이 국가적 문제에 이러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첩을 둘 수 있는데 웬 이혼? 조선 시대는 기본적으로 일부 다처가 허용되는 남성의 천국이었다. 물론 당시 조선 시대의 남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 시대에는 고려 시대와 달리 처와 첩의 구분이 아주 엄격했기 때문이다. 첩을 여러 명 둘 수는 있었지만 처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수많은 후궁을 두고도 왕비는 한 사람뿐이듯이 본처는 단 한 사람만 둘 수 있었기 때문에, 첩을 몇 사람씩 두고도 일부 일처라는 관념 속에 살았다. 첩은 대체로 양인이나 노비의 딸인 경우가 많았다. 양반집 딸로 첩이 되는 경우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처와 첩의 처지는 달랐다. 후궁의 소생도 왕이 될 수 있던 왕실과는 달리, 본처의 자식과 첩의 소생 사이에는 신분의 차이가 엄격했다. 이른바 서얼 차별이라 해, 첩의 자식은 과거의 문과에 응시할 자격도 주지 않아 양반이 될 가능성조차 봉쇄되어 있었다. 한편 첩은 경제력과 체력이 뒷받침되는 한 무제한으로 둘 수 있었고 첩을 들이거나 내쫓을 때 별다른 격식도 없었다. 그러나 한 명만 둘 수 있는 처는, 본처가 죽거나 이혼해서 내쫓는 경우에만 교체가 가능했다. 본처가 죽지 않는 한 이혼을 해야만 첩을 후처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이혼조차 쉽지 않았던 이 시절, 처첩 제도의 모순 속에서 좌충 우돌하는 한 편의 코미디 같은 이야기가 성종 12년(1481) 7월 22일의 「성종 실록」에 소개되고 있다. 황효원은 본디 행실이 경박한 한낱 소인입니다. 그는 부인 신씨에게서 아들이 없자 아들을 얻겠다는 욕심으로 임씨 여자를 첩으로 얻어서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자식을 벼슬길로 나서게 하기 위해 신씨를 버렸다고 거짓말하고 임씨 여자를 후처로 삼았으나, 사실은 신씨를 버리지 않고 여전히 대우했습니다. 그 뒤에 두 아들이 적자(처에게서 낳은 아들)가 된 뒤 신씨의 재산을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임씨 여자를 버렸다고 거짓말하고 다시 신씨와 합했으니, 그 삼강 오륜을 어지럽힌 것이 심합니다. 그 뒤에 또 자기의 노비 소근소사와 간통해 아들을 낳고는 벼슬길에 나서게 하려고 “예를 갖추어 혼인했다”고 거짓말을 꾸며 글을 올려 임금을 속였습니다. 이것은 물론 양반들이 자신들만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서얼 차별을 엄격하게 했던 시절이 만든 사건이었다. 오늘날 비록 서얼 차별 제도는 없어졌지만 이 사건을 코미디로만 여길 수 없는 사람들은 우리의 주변에도 여전히 있다. 예컨대 재혼한 어머니가 데리고 들어온 자식은 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의붓 아버지의 호적에 오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이 자식들은 성을 갈거나(그것도 법적으론 불가능하다) 자신의 생모와 다른 호적에 실려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제도가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현실이 고쳐지기까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가?
칠거지악에도 예외가 있었다 남성 중심의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남자들은 부인을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 있었는가? 세종 21년(1439) 11월 10일의 「세종 실록」은 부당하게 부인을 버린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전에 감목관이었던 이중정이 정실 아내를 소박해 버리어 농장에 두고 노비 첩을 사랑해 대접하기를 정실 아내와 같이 해 집안에서 행해야 할 도덕을 그르쳤습니다. 그런데 이중정은 뭇사람의 증거가 명백하건만 버티고 승복하지 않는 데다가 간사하고 모질어 염치를 모르오니, 법에 따라 곤장 90대에 해당하옵니다. 위와 같은 사헌부의 보고에 왕은 그대로 따랐다. 남편이 아내를 내쫓기 위해선 칠거지악(七去之惡)의 죄에 해당해야 했다. 시부모 봉양을 제대로 못하거나, 아들을 낳지 못하거나, 바람을 피우거나, 질투가 심하거나, 나쁜 병이 있거나, 말이 많거나, 도둑질하는 경우를 일컬어 칠거지악이라 불렀다. 칠거지악에 해당되지 않을 때 함부로 여자를 내칠 수 없었기 때문에 칠거지악은 여성을 보호하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합법적’으로 부인을 내쫓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일곱 가지 죄라는 것이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칠거지악의 남용에 따른 폐해를 막기 위해 나온 것이 삼불거(三不去)였다. 곧 삼불거란 부인이 쫓겨나면 돌아갈 곳이 없거나, 부모의 3년 상을 같이 치렀거나, 가난할 때 시집 와서 부유하게 되었거나 할 때에는 부인을 내쫓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불거도 칠거지악 가운데 시부모에게 불효하거나, 나쁜 병에 걸렸거나, 바람을 피운 경우의 3개 조항을 어겼을 때는 적용되지 않았다. 칠거지악도 조선 말기에 와서는 변화를 겪는데 질투가 심하거나 아들이 없는 경우가 제외되어 오거지악으로 일컬어졌다. 그리고 삼불거도 자식이 있을 땐 부인을 내쫓을 수 없게 해 사불거로 확대되기도 했다. 칠거지악은 이제 사라진 옛말이 되었다. 시집올 때 호화 혼수를 해오지 못했다고 부인을 구타하고 내쫓는 ‘야만인’도 있지만 그 수가 많지는 않다. 그러나 칠거지악이 없어졌다고 남성 우위의 가부장적 가족 제도와 문화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비민주적인 남성 위주의 가부장 문화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여전히 튼튼한 뿌리를 자랑하고 있다.
나이 든 사람을 공경하는 일은 유교의 덕목이기도 했지만, 특히 우리 나라에서 예로부터 전해 내려 온 좋은 관습이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도 나이 든 사람을 모시는 아들이나 손자에게는 부역을 면제해 공양에 전념토록 했다. 그러나 세종은 이러한 제도만으로는 미흡하다고 여기면서 파격적인 노인 공경책을 내렸다. 나이 90살 이상으로서, 벼슬을 한 바 없는 이에게는 8품의 벼슬을 내리고 원직이 9품 이상인 사람에게는 각각 1급을 올려 준다. 1백 살 이상은, 원직이 8품인 사람에게는 6품을 주고 원직이 7품인 사람에게는 각각 1급씩을 올려 주되 모두 3품을 한계로 해 그친다. 부인의 봉작은 여기에 준한다. 천민은 90살 이상의 남녀는 각각 쌀 2섬을 내려 주고, 1백 살 이상인 남녀는 모두 천인을 면해 주어 늙은이를 늙은이로 여기는 어짊을 베푸노라. 왕의 평균 수명이 46살이던 조선 시대에 나이 90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써 축복받을 일이었다. 그러나 놀고 먹는 양반이 아닐 경우 노동력을 상실한 90살 노인이 좋은 대접을 받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만큼 이들에게 베푸는 나라의 시혜도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잘 나가는 기생이 1천 명 ―― 흥청 망청의 어원 자신의 생모인 폐비 윤씨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생각한 연산군이 무수한 사람들을 죽이면서 벌인 복수극이 바로 갑자 사화다. 이 일이 있은 뒤 연산의 광폭한 행동은 더욱 심해졌으니, 특히 사람 죽이는 일과 마시고 노는 일에서 더욱 그러했다. 갑자 사화 이듬해인 1505년 10월 2일의 「연산군 일기」에도 이렇게 적고 있다. 갑자년 이후의 하교가, 흥청·운평에 관한 일이 아니면 반드시 사람을 벌하고 죽이는 일이라, 인심이 날로 떠났다. 그러면 흥청과 운평은 어떤 사람들인가? 연산은 대신들을 전국 각지에 채홍사로 보내 사대부의 첩과 양인의 아내와 딸, 노비, 창기 들을 가리지 않고 징발했는데 그 수가 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을 운평·계평·채홍·속홍·부화·흡려 따위의 호칭으로 불렀으며 이들 가운데 나은 자를 골라 흥청이라 했다.
남자면서 여자였던 사방지
1548년 11월 18일 함경도 감사가 조정에 “길주 사람 임성구지는 남자와 여자의 성이 모두 갖추어져 지아비에게 시집도 가고 아내에게 장가도 들었다”는 색다른 보고를 올렸다. 그러자 명종은 “이 일은 법조문에도 없는 일이니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라. 세조 때에 사방지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아울러 문의하라”고 명한다. 그 뒤 영의정 홍언필의 보고에 따라 임성구지는 사방지의 예처럼 외진 곳에 따로 두고 왕래를 금지해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지 못하게 했다.
사방지는 노비 출신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 어미가 여자 아이의 의복을 입히고 연지와 분을 발라 주고 바느질을 가르쳤다. 장성해서는 벼슬한 선비의 집안에 꽤나 드나들며 많은 여종들과 정을 통했다. 선비 김구석의 아내 이씨는 판원사 이순지의 딸인데, 과부로 있으면서 사방지를 끌어다 수놓는다고 핑계를 대고 밤낮으로 함께 있은 지 거의 십 년이 되었다. 이 소문이 이웃에 퍼졌으나 이씨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헌부에서 이 사실을 알고 잡아다 심문했다. 사방지와 평소에 정을 통했던 여승에게 묻자, 여승이 말하기를 “그것이 아주 장대하다” 하므로 여자 아이 반덕에게 만져 보게 했더니 정말이었다. 왕이 승정원 및 영순군의 스승 하성위·정현조에게 여러 가지로 시험해 보게 했다. 정현조 역시 혀를 내두르며 “어쩌면 그렇게 장대하냐”고 했다. 임금은 웃으시고 특별히 심문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순지의 가문을 더럽힐까 염려된다”고 하시며 사방지를 이순지에게 주어 처리하게 했다. 이순지는 단지 곤장 십여 대를 쳐서 경기도에 있는 노비의 집으로 보냈다. 얼마 뒤 이순지의 딸 이씨는 몰래 사방지를 불러들였고 이순지가 죽은 뒤에 더욱 방자하게 굴어 그침이 없었다. 그 뒤에 신하들이 한가한 이야기 끝에 아뢰니, 왕이 사방지를 곤장을 쳐 신창현으로 유배 보냈다.
세조 때 사방지 사건이 한동안 조정을 소란스럽게 한 것은 사방지와 관계한 이순지의 딸 이씨 때문이었다. 이씨의 아버지 이순지는 세종이 아끼던 공신으로서 판원사라는 종2품 벼슬까지 지냈다. 또 이씨에게는 김유악이라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김유악의 아내가 바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도와 영의정이 된 정인지의 딸이었다. 이씨와 정인지는 사돈 사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세조는 사방지와 이씨를 처벌해야 한다는 탄원이 잇따랐는데도 이순지에게 맡겨 집안 일로 처리하도록 한 것이다.
조선에는 왜 역마차가 없었을까
1961년 강대진이 감독하고 김승호가 주연한 「마부」라는 영화가 베를린 영화제에서 상을 받아 한국 영화 예술의 수준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마부」는 서울역에서 마차로 짐을 실어 나르며 생활하는 가난한 홀아비의 삶을 감동적으로 그린 영화로, 한국 영화사에 빛나는 작품이었다. 승용차 한 대를 주차하는 데도 애먹는 지금으로선 상상하기조차 힘들지만 서울역 앞의 마부와 마차는 70년대 초까지도 명맥이 유지되었다.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 대략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도로가 험악하다는 것이고 하나는 소와 말의 수가 적다는 것입니다. 신이 하나하나 검토하겠습니다. 무릇 하늘 아래 험악한 길은 촉나라의 길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도, 사마상여가 붉은 사두 마차로 일찍이 성도를 지나갔고, 또한 제갈양은 목우 유마로 검각의 절벽 사이 다리를 통행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신이 지나가 본 바를 가지고 말하건대, 청석령과 마천령의 험준함은 자못 우리 나라의 동선령보다도 더했지만, 수레가 거리낌없이 다녔으니, 이 하나만 들어도 다른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로가 험악한 것은 근심할 일이 아닙니다.
또한 두 번째 이유는, 우리 나라에서 소와 말의 수가 적은 까닭은 번식이 잘 안 되서가 아니라 사육하는 방법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소와 말의 성질대로 부리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주도에서 나는 말은 본래부터 좋은 종자이고 북쪽의 말도 이에 못지 않으며 기를 데도 여기저기 많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소와 말이 모두 등에 짐을 지게 되는데, 소는 그래도 괜찮지만 말은 그러기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강가에서 쌀을 실어 나르는 말은 대부분 반 년에 한 번씩 바꾸어야 합니다. 성안에서 땔나무를 운반하는 말은 겨울이 지나고 나면 힘이 다되어 버려 대체로 죽지 않으면 앉은뱅이가 되기 때문에 도살하게 됩니다. 이것이 어찌 말의 죄이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곧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대개는 일찍이 시행할 방법을 찾지 않는 것이라 여깁니다. 어찌 이것뿐이겠습니까? 군자들은 보통 하던 대로 하는 것만 편안히 여겨 융통성 있게 풀어 가려 하지 않으며, 일반인들은 희귀하고 특이한 일은 하려 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나라에서 법을 만들어 금지하지 않는데도 끝내 한 사람도 처음으로 시작하고 실행하는 일이 없습니다. 비록 더러 떨쳐 일어나 뜻을 가졌다 하더라도 진실로 조정에서 명령하지 않는다면, 힘이 미치지 못한 데가 있어 실행하기에 어려움이 있는 법입니다.
홍양호의 지적은 실험과 도전, 모험과 창조력이 부족한 조선 시대의 경향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지적은 우리 나라의 근대화와 산업화가 늦었던 이유 중의 하나를 설명하는 데도 적용될 수 있다.
사치품 밀수로 사형당한 공무원
영조 22년(1746) 이명직이라는 관리가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무늬 있는 비단을 사 가지고 왔다. 소문을 들은 평안 도사(종 5품, 도지사를 돕는 직책) 임집이 이명직의 집을 수색해 비단을 압수해 불태웠다. 그리고 이명직을 옥에 가두고 자초 지종을 보고했다. 이 일은 곧 ‘사건’이 되어 조정에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금지된 물품을 몰래 사 올 경우 법률에서는 목을 베어 내걸게 했으므로 정해진 법률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 제정한 이 금지령은 성덕을 빛낼 제도로서, 다만 나라 안에서 시행해 굳어진 풍속을 만회할 기회일 뿐만 아니라, 이미 온 세상에 알려져 있는 제도입니다. 대개 무늬 있는 비단은 연경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소주·항주에서 짜다가 우리에게 파는 것입니다. 연경의 상인 정세태는 새로운 금지령이 내려졌다는 소문을 듣고서 깜짝 놀라며 당장 강남에 연락해 직조를 중지시키고 우리 사람들에게 “당신네 국왕으로서는 진실로 성덕의 일이지만 우리들은 이제 살 길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좋은 소문의 영향은 멀리 미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명직을 죽이지 않는다면 진실로 법령이 흐트러져서 먼 곳 사람들의 웃음을 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병조 판서 원경하는 즉각적인 사형 결정에 반대했다. 사람의 목숨은 아주 소중하므로, 사형을 말할 때는 급하게 결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며, 법률을 억지로 끌어 대는 것도 옳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정해진 법률이 없는데도 서둘러 죽인다면 이는 백성을 속이는 것이요, 그의 범행이 아무리 공무가 아니라 하더라도 죽을 죄는 아닙니다. 지금부터 법조문을 분명히 세우고 나서 시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처음에 무늬 있는 비단을 들여오는 것을 금지한 것은 말하건대 사치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이하고 아름다운 물건이라고 해서 멀리서 사다가 이웃 나라의 사치를 돕는 것이 옳은가? 왜인의 상선이 남경을 오간다고 하니 어쩌면 우리의 금지령을 들었을 듯도 하고, 또 실제로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다른 물건으로 대신 주는 데는 우리도 할 말이 있다. 저들이 어찌 까다롭게만 나오겠는가? 지금 이것을 이유로 금지를 풀고 나서 이 사실을 역사책에 쓴다면, 나는 후세의 비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 사람의 웃음을 사지 않을까 두렵다.
수입 자유화 물결 속에 2천만 원이 넘는 밍크 코트가 백화점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우리의 현실과 사뭇 대조된다. 외교 문제에서도 명분과 실질을 대범하게 고려하고 있는 것도 돋보이는 면이다. 무엇보다도 후세의 평가와 역사를 의식하면서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 태도가 감동적이다.
화냥년에 얽힌 애절한 사연
병자 호란은 1637년 1월 30일 조선의 왕이 청나라 태종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함으로써 끝났다. 그러나 더욱 치욕스런 일이 그 다음에 일어났다. 청나라 군사가 철수하면서 50여만 명의 조선 여자를 포로로 끌고 간 것이다. 청나라는 이들 여성 포로들을 나이와 신분에 따라 값을 매겨 이를 갚으면 돌려 보내 주었다. 돈이 없어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거니와 값을 턱없이 높게 불러 생기는 비극도 있었다. 청나라 심양을 다녀온 좌의정 최명길의 말을 들어 보자.
제가 심양의 관사에 있을 때, 한 처녀를 값을 정하고 되찾으려고 했는데, 청나라 사람이 뒤에 약속을 깨고 값을 더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그 처녀가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고 말았습니다. 이에 끝내는 그녀의 시체를 사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값을 치르고 돌아오는 것을 속환이라 했고 속환되어 돌아온 여자를 환향녀라 불렀는데 환향녀의 비극이 속편처럼 잇따랐다. 예조에서는 왕에게 이 문제에 대한 방침을 요청했다. 곧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양반의 부녀자가 한둘이 아니니 조정에서 반드시 충분히 참작해 명백하게 결정해야 피차 난처한 걱정이 없을 것”이라며 두 가지 예를 들었다. 인조 16년(1639) 3월 11일의 「인조 실록」을 보자.
신풍 부원군 장유가 예조에 쪽지를 올리기를 “외아들 장선징이 있는데 강도에 그의 아내가 잡혀 갔다가 속환되어 와 지금은 친정 부모집에 가 있다. 그대로 배필로 삼아 조상의 제사를 함께 받들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로 장가 들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다. 전에 승지였던 한이겸은, 자기 딸이 사로잡혀 갔다가 속환되었는데 사위가 다시 장가를 들려고 한다는 이유로 그의 노복으로 하여금 꽹과리를 쳐서 임금에게 원통함을 호소하게 했다.
인조가 환향의 문제에 대한 의견을 구하자 좌의정 최명길이 나섰다. 제가 전에 심양에 갔을 때 양반 출신으로서 속환하기 위해 따라간 사람들이 아주 많았는데,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만나자 부둥켜안고 통곡하기를 마치 저승에 있는 사람을 만난 듯이 해, 길가다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부모나 남편으로 돈이 부족해 속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차례로 가서 속환할 것입니다.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으면 반드시 속환을 원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수많은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소원을 이루고 백 집에서 원망을 품는다면 어찌 화기를 상하게 하기에 충분치 않다 하겠습니까. 신이 반복해서 생각해 보고 세상 형편이나 인심을 참작해 보아도 끝내 이혼하는 것이 옳은 줄을 모르겠습니다. 최명길은 계속 말한다.
제가 심양으로 갈 때에 들은 이야기인데, 청나라 병사들이 돌아갈 때 자색이 퍽 아름다운 한 처녀가 있어 청나라 사람들이 온갖 방법으로 달래고 협박했지만 끝내 들어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사하보에 이르러 굶어 죽었는데, 청나라 사람들도 감탄해 묻어 주고 떠났다고 했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전쟁의 급박한 상황에서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도 밝히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로잡혀 간 부녀들을 모두 몸을 더럽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인조는 최명길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대로 시행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 날의 일을 기록한 사관은 「인조 실록」에다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놓았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이는 절개가 국가에 관계되고 우주의 동량이 되기 때문이다.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났어도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이미 의리가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다. 예로부터 이르기를 “절의를 잃은 사람과 짝이 되면 이는 자신도 절의를 잃는 것이다”고 했다. 절의를 잃은 부인을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를 받들며 자손을 낳고 가세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 백 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오랑캐로 만든 자는 최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던가. 조선의 여성들을 더욱 괴롭힌 것은 오랑캐보다도 이 사관의 생각과 같은 유교 문화의 관념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최명길 같은 사람보다는 사관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우세하게 많았던 모양이다. 왕의 명령과 지시가 내려졌는데도 이 뒤로 사대부집 자제는 거의 다시 장가를 들고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고 「인조 실록」은 전한다. 홍길동은 실존 인물이었다
『홍길동전』은 허균이 지은 최초의 한글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은 드물지만 소설의 주인공 홍길동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신출 귀몰하는 그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 ‘홍길동’이란 답이 바로 나올 정도로 유명하다. 그래서 홍길동을 만화 영화의 주인공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홍길동은 과연 허균의 상상력이 그려 낸 소설 속의 주인공이기만 할까? 강도 홍길동이 갓 꼭대기에 옥으로 만들어 단 장식을 하고 붉은 허리띠 차림으로 첨지(중추원의 정3품)라 자칭하며 대낮에 떼를 지어 무기를 가지고 관공서에 드나들면서 꺼림 없이 행동을 자행했는데도, 그 지방 말단 관리들이 어찌 이를 몰랐겠습니까. 그런데 체포해 고발하지 아니했으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관리들을 모두 변방으로 유배 보내는 것이 어떠하리까. 또한 중종 18년(1524) 8월 29일의 「중종 실록」에는, 충청도 지역에서 홍길동 토벌 작전의 여파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많아 세금을 예전처럼 거두기 어렵다는 보고가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충청도 공주 땅에는 홍길동의 무리들이 쌓았다는 산성이 남아 있고, 이 지역에선 홍길동에 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많은 편이다.
『홍길동전』을 쓴 풍운아 허균이 능지 처참당한 이유
조선 시대를 통틀어 허균만큼 파란 만장한 생애를 살고 간 인물은 찾기 힘들다. 그리고 허균의 성격만큼 복잡한 경우를 달리 찾기도 힘들다. 그는 일곱 차례나 관직에서 쫓겨났으면서도 ‘거사’를 위해 계획적으로 고위직까지 진출한 유일한 인물이다. 또한 세상을 뒤엎는 혁명 소설을 쓰면서 자신이 직접 ‘혁명’을 계획하고 실천한 세계에서도 몇 안 되는 ‘혁명가’였다. 이 때에 이이첨과 한찬남의 무리들은 허균이 사실대로 말하면 그들의 전후 흉모가 여지없이 드러나 다 같이 사형을 받게 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자기들의 심복을 시켜 몰래 허균에게 말하게 하기를 “잠깐만 참고 지내면 나중에는 반드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고 하고, 또 허균의 딸이 뽑혀서 후궁으로 들어갈 참이므로 다른 근심이 없으리라는 것을 보장한다면서 온갖 수단으로 사주하고 회유했다. 그러나 그 계책은 실로 허균을 빨리 사형에 처해 입을 없애려는 것이었다.
안마를 세게 해 반역자 된 시녀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형제들 사이의 치열한 왕권 쟁탈 싸움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은 그의 나이 51살에 셋째 아들 충녕군에게 왕위를 넘겨 주었으니 그가 바로 세종이다. 그런데 태종은 왜 아직 건장한 나이에 서둘러 왕위를 세종에게 넘겨 준 것일까?
그것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예기치 못한 갑작스런 사고에 대비하려는 뜻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의 자격으로 세종의 왕권을 보강하려는 뜻도 있었다. 이에 따라 현직에서 물러난 상왕 태종은 세종의 집권 초기에 각종 국사에 관여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아직 이빨이 빠지지 않은 이 늙은 호랑이에게 대들었던 사람이 있었으니, 장미라는 예쁜 이름의 시녀였다.
내 나이 오십이 지난 뒤에는 잠을 편케 못 자고, 밤이 삼경이 되면 다시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시녀 장미를 시켜서 무릎을 두드리게 했더니 마음에 맞지 아니해, 내가 조금 꾸짖어 주고 바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장미가 조심 없이 갑자기 두들겨서 놀라 잠을 깨었다. 그 무례함을 미워해 대비에게 보내 그 정상을 물었으나 실상대로 대답하지 아니하므로, 내가 불러서 친히 물으니 말하기를 “꾸지람하심에 분이 나서 조심 없이 두드렸다”고 하니, 그 불경함이 크다.
인명이 중하다 하겠으나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잡아서 물에 넣든지 목을 졸라 죽이든지 해야겠다. 상왕이 격노했으니 세종이 이 일을 수습해야 했다. 변계량을 비롯한 세종의 대신들이 앞을 다투어 준엄하게 충언한다.
장미가 저지른 죄는 반역으로 논해야 될 것이니, 마땅히 세 정승과 함께 국문해 사형에 처해야 할 것입니다. 안마를 세게 했으니 반역이요, 영의정·좌의정·우의정 세 정승이 몸소 심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23살의 세종은 다소 침착한 편이었다.
장미의 일은 말만 해도 오히려 부끄러우니 세 정승까지 번거롭게 할 것이 있겠는가. 영의정이 이미 몸소 국문하기로 되어 있으니 그렇게 하라.
‘반역자’ 장미는 어떻게 되었는가? 꺼낼수록 부끄러운 일인지 「세종 실록」에 그 뒤의 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 영조
소주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1277년 고려 말 충렬왕 때였다고 한다. 소주의 원산지는 페르시아 지역이다. 페르시아의 증류법은 12세기 십자군 전쟁 때 유럽으로 건너갔고 포도주를 증류한 브랜디를 낳았다. 또 이 술은 고려를 침략한 몽고군을 통해 우리 나라로 들어왔다. 페르시아 말로 증류주를 뜻하는 ‘아라키’라는 이 술이 개성에서 ‘아락주’로 일컬어진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였다. 또 일본 침입을 위한 몽고군 병영이 안동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안동은 소주로 유명한 고장이다. 사간 조효동이 아뢰었다.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말을 가만히 들어 보니, 전하께서 술을 끊을 수 없다고들 합니다. 신이 그 거짓과 참을 알지 못하지만 오직 바라건대, 조심하고 염려하며 경계하도록 하소서." 그러자 임금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목이 마를 때에 이따금 오미자차를 마시는데, 남들이 가끔 소주로 의심했나 보다."
임금도 감추고 싶었던 사생활이 있었다
중종 14년(1520) 4월 22일 아침, 왕이 참석해 강의를 듣는 자리에서 재미있는 논쟁이 벌어졌다. 여자 사관을 두어 왕의 사생활까지 기록해야 한다고 신하들이 주장한 것이다. 중종은 갖가지 핑계를 대어 이를 피하려고 했는데 그 모습이 「중종 실록」에 생생하게 기록되었다.
동지사 김안국 : 『속강목』에 태후와 신종이 말한 일이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규문 안의 말이라 사관으로서는 기록할 수 없는 것이니 반드시 여자 사관이 기록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여자 사관은 규문 안에서 임금의 거동과 언행을 모두 다 기록하기 때문에 바깥 사람들이 그 일을 알 수 있는 것이며, 사책(史冊)에 기록해 놓음으로써 후세 사람이 그것을 보고 선악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규문 안의 일을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은 여자 사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규문 안의 일거 일동을 어떻게 자세히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옛 관례에 따라 여자 사관을 두어 그로 하여금 일거 일동과 언행을 기록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중종의 마지막 말은 이청의 말에 대한 답변 같지만, 실은 조광조에 의해 그 전 해부터 실시된 현량과에 관한 것이었다. 현량과는, 과거 제도가 시험 위주로 되어 있어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사람을 가리지 못하는 폐단이 있으므로 과거 시험과는 별도로 추천으로 인재를 등용하는 새 제도를 말한다. 중종은 이 핑계 저 핑계로도 여자 사관을 두자는 논리를 꺽지 못하자 말머리를 돌려 곤란한 처지를 모면하려 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