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그만 둬? 며칠을 고민했다.
J가 천안에서 일러스트 작품 전시회를 한다고 큰딸이 카톡으로 알려왔다. 서울 같으면 금방 갈 수 있지만 천안이라니 고민이 되었다. 다른 때 같으면 아무 문제가 없지만 인공관절수술 후 회복상태가 날아갈 듯 좋은 편은 아니고, 또 혼자서 먼 길을 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넘어지는 사고 예방을 위해 6개월까지는 꼭 동행자하고 함께 다니라고 의사가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 혼자 먼 길을 가겠다고 하면 딸들이 결사반대할 것이 뻔했다.
J는 베를린 사는 큰딸과 한집에서 방을 나누어 공동생활을 하던 친구였다. 방 세 개가 있는 큰 집을 빌려서 10년 넘게 여러 사람들과 살았던 딸이 가장 신나했던 때는 M까지 한국인들 셋이 살았던 시간이었다. 여성들로 나이도 비슷하고 타국에서 산다는 게 쉽지 않아 모두 힘들 때 그 어려움들을 나누며 한국 음식을 해 먹으며, 서로 위로하며 사는 모습은 일 년에 한 번쯤이나 보는 내게도 좋아 보였다.
셋 다 예술가들. J는 일러스트레이터, M은 영화인(배우 아닌), 내 큰 딸은 음악가. 낯선 땅에서 외국인들이 예술인으로 산다는 것은 생계, 언어, 거주 문제 등 생존과 연결되었다. 그래도 서로 도우며 신나게 살아서 보기가 좋았다. 코로나로 어려웠던 시기에 J가 몸이 아프고 너무 힘들어하는 것을 아신 부모님이 집으로 돌아오도록 하셨다. M도 코로나가 끝나자 한국으로 돌아와 자기 할 일을 찾고 여러 가지를 하고 있는 중이다. 내 큰 딸은 베를린이 자기 삶의 자리이니 또 다른 동거인들과 방을 나누며 살아가고, 자기 일을 잘하고 있다.
각자의 삶의 자리가 달라졌어도 세 사람은 여전히 소통하며 지내고 있다. 내가 수술 받은 후, 나를 보러 오지도 못하고 답답했던 딸은 자기 대신 나를 돌보아 줄 사람을 구해 달라고 M에게 연락했다. M은 자신이 마침 휴가 기간이라고 달려와 나를 도와주었다.
J의 전시회 소식을 알리며 큰 딸은 “엄마는 못 가보겠지만 M은 천안에 간다”고 했다. 묘했다. 그러니 갈 생각도 말라는 것인지, 가도 괜찮다는 것인지? 슬그머니 천안에 갈 방법을 알아보았다. 인천버스터미널에서 한 시간 반이면 천안에 갈 수 있다. 마침 집 앞에서 터미널 가는 시내버스도 있다. 천안행 버스 출발시간도 알아보았다. 토요일이라 사람이 많을 것 같아 차표를 미리 사야 할 것 같았다.
M에게 ‘J 작가와의 만남’이 있는 날 천안버스터미널에서 만나자고 했다. M은 놀라면서도 좋아했다. 마침 갤러리도 버스터미널 근처에 있어서 다행이다.
갤러리에서 만난 J는 베를린에서 보았던 사람이 아니었다. 건강이 좋아져서 만은 아닌 것 같다. 그동안 자신이 그려왔던 작품들을 발표하는 자리. 작은 갤러리를 꽉 채운 작품들이 그냥 그림들이 아니라 그의 분신처럼 여겨졌다. 그림을 설명하는 말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책의 표지와 삽화들로 이미 발표했던 작품들, 베를린에서 그렸던 것들, 한국에 돌아와 그린 작품들. 작품의 크기는 크지 않으나 그의 생각과 느낌들을 아주 꼼꼼하게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그려낸 그의 노력과 정성이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말없이 그의 등을 두드리는 것으로 내 마음을 전했다.
다나힐 병원 원장이며 갤러리 운영자인 의사 선생님이 사회를 본 “작가와의 만남”은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고백을 이끌어 내었고, 같이 자리한 이들이 이야기를 골고루 나누는 기회가 되었다.
아직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때, 그러나 때 이른 나들이는 내게도 힘과 희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