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마자 시계를 바라보았다. 5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창밖을 보니 비는 오지 않고 매미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있었다.
어제 뉴스에서 남부지방에 집중호우가 계속된다고 해서 내심 걱정하며 잠들었는데 끊임없이 들리는 매미소리에 희망이 생겼다. 비가 그만 올 것 같은 느낌이다.
서둘러 이불을 정리하고 세수를 했다. 그리고 옥상에 올라가 보았다.
앞에 인적없는 화개장터가 보인다. 어제 할아버지가 계신 하동에서 큰집이 있는 화개로 이동했었다.
좌측으로 황토빛으로 흐르고 있는 섬진강이 보였다. 평소에는 물 맑기로 소문난 섬진강이
집중호우로 인해 황토빛을 띄고 있었다. 우측으로는 안개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한 산이 있
었다. 쌍계사 방향의 지리산 줄기였다. 설레이는 마음에 옥상에서 내려와 식사를 했다.
7시가 되자 확인하는 의미에서 지리산 화엄사 지구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했더니 호우주의보
로 입산금지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가슴이 철렁하는 마음에 이곳을 비가 안오는데 그쪽은
오냐고 물어봤더니 비가 온다고 한다.
아 오늘도 못가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너무 아쉬워 사진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이곳의
사진이라도 찍어야지 하는 마음에서였다. 화개천 다리에서 쌍계사 방향의 지리산을 배경으
로 독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섬진강에 새로 새워지고 있는 남도대교도 찍었다.
그런데 점점 하늘이 맑아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개 터미널 근처에 있는 피시방에 들어가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운영
하고 있는 싸이트에 들어가 기상특보를 확인한 결과 전라도지방은 8시를 기해 호우주의보가
해제되고 경상도는 호우경보가 발령중이었다. 관리사무소에 물어보았을 때 지리산 어느 한
지역이라도 경계 경보가 발령중이면 입산통제가 된다고 하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도 여기서 하루를 더 머물기보다는 그냥 출발 해 보기로 했다.
화개터미널에서 화엄사로 가는 버스가 8시 40분에 있기에 서둘러 피시방을 나와 큰집으로
갔다. 짐을 싸고 큰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버스에 오르니 승객이 나 혼자다.
운전기사 아저씨에게 여쭤보니 25분정도 걸린다고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말씀해 주셨다.
차표를 검사하는 아주머니는 차량 앞에 서서 즐거운 여행되라면서 머리 숙여 인사를 하셨
다. 승객이 나 혼자인데도 정식으로 인사를 하다니 직업의식이 투철하다는 생각을 했다.
버스안에서 지리산에 대해 프린트한 자료를 보았다. (앞으로 프린트 한 자료는 두줄로 표시
할 예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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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이자(1967년), 최대면적의 육상공원(14억 5천 6백만평)으로서 우리
나라 산악의 대표성과 상징성 그리고 역사성을 고루 갖춰 흔히 민족의 영산으로 불릴만큼
우리의 정서속에 깊이 새겨진 자연유산인 지리산은 멀리 백두산맥이 흘러왔다 해서 두류라
하고 옛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 태조 등극 전에 팔도 명산 산신
제를 올려 등극의 대업을 알렸는데 유독 지리산에서만 대제를 올렸다고 한다. 전라남도, 전
라북도, 경상남도에 걸쳐 있으며 둘레만도 8백여리나 되는 지리산은 신라 5악의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 해서 지리산이라 불려 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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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어떤면이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어느새 버스는 섬진강을 끼고 달리다 화엄사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9시 10분에 화엄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위에 있는 가게도 그렇고 주차장도 썰렁 그 자체
였다. 집중호우로 등반하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제발 입산통제가 풀리기를 바라면서 버스에 내려 매표소로 향하였다.
조심스레 관리사무소이자 매표소에 계신 분에게 물어보니 전라도쪽만 호우주의보가 풀려 노
고단까지만 등반할 수 있고 그 이후는 상황을 봐가면서 등반해야 한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입장료를 냈다. 문화재 관람비(화엄사)와 국립공원입장료
를 합쳐서 3000원을 받는다고 한다. 혹시 기상특보가 다시 발령될까봐 얼른 돈을 내고 매표
소를 통과해서 아스팔트길을 걸었다.
전방에 보이는 지리산은 여전히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화엄사가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차를 잡고 올라갈까 생각을 했지만
산행을 하는 태도가 아닐 것 같아 그냥 걸어갔다.
9시 40분쯤에 화엄사 정문에 도착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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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華嚴寺)는 문화재가 많은 거찰로 찾는 사람들이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다. 우리 나라
10대 사찰, 31본산이 하나인 이 사찰은 신라 진흥왕 5년(544년) 연기조사가 세웠으며, 선덕
여왕 12년(643년) 자장율사에 의해 증축되었다. 그 후 당나라에서 귀화한 의상(義湘)이 화엄
십찰(華嚴十刹)을 두게 되면서부터 화엄사는 늘 많은 대중이 모이는 큰절이 되었다.
화엄사는 정유재란(1579년) 때 왜병의 방화로 전소됐는데, 이때 장육전(각황전의 전신)과 그
벽에 화엄경 80권을 새긴 석경(石經)이 파괴되어버렸다.
30년 동안 폐허로 남아있던 화엄사를 1630년 벽암 선사가 복구하고, 숙종 25년(1699년)에는
계파선사가 각황전을 재건하였다. 계파선사의 각황전 재건에는 유명한 전설이 있다.
'장육전이 불탄 뒤 그 재건에 고심하던 벽암 스님은 계파스님에게 중건의 대업을 맡겼다.
계파스님은 현재의 대웅전에서 100명의 스님이 100일 기도를 올리게 하고, 그 자신은 중건
불사의 성취를 위해 기도승을 시봉하는 공야주를 자원했다. 이윽고 100일 기도가 끝나는 회
향일(廻向日)이 된 날, 한 노장스님이 말했다.
"간밤의 꿈에 하얀 노인(文殊大聖)이 나타나 장육전 중건을 위한 화주승(化主僧, 돈 모으는
스님)은 물 묻은 손으로 밀가루를 만져 손에 밀가루가 묻지 않은 사람으로 삼으라고 일러주
셨소."
이에 따라 모든 스님이 밀가루를 만져본 결과 계파스님만이 밀가루가 손에 묻지 않았다.
계파스님은 밤새껏 부처님께 기도를 올렸다. 정성껏 기도를 올리던 그의 앞에 한 노인이 나
타나 말했다.
"그대는 내일 아침 바로 화주를 위해 길을 떠나되,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반드시 시주
를 권하라."
계파스님은 날이 밝기 무섭게 산문을 나섰다. 동구 쪽으로 내려가던 계파스님이 첫번째로
마주친 사람은 뜻밖에도 이 고을 일대를 떠돌아다니던 걸인 노파였다. 계파스님은 걸인 노
파를 알고 있었으므로 난감하기 짝이 없었으나, '문수대성'의 가르침을 생각하고는 노파에게
간곡하게 시주하기를 청했다.
당장 자신이 먹을 쌀 한 톨 없는 걸인 노파는 스님의 시주 간청에 하늘만 올려다보며 하염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이윽고 화엄사를 향해 합장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 큰 불사를 이루리 오니 문수대성은 가피(加被)를 내리소서."
걸인 노파는 그 말과 함께 그만 옆의 웅덩이에 몸은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 모양을 지켜본
계파스님은 너무 놀란 나머지 그 길로 멀리 도망가 5∼6년을 걸식을 하며 돌아다니다 한양
까지 가게 되었다.
하루는 계파스님이 창덕궁 앞을 걸어가다 나이 어린 공주와 마주쳤다. 이 공주는 계파스님
을 보자 무척 반가와 하며 달려와 어릴 때부터 꼭 쥐고 있던 손을 펴 보였다. 공주의 손에
는 '장육전(丈六殿)'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공주가 스님을 만나 손바닥을 펴게 되었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숙종은 곧 계파스님을 대궐로
불러 들였다. 숙종은 공주의 손바닥에 새겨진 글자의 내력을 스님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왕
은 크게 감명 하여 곧 왕명으로 장육전 중건을 하게 했다.
마침내 장육전이 완공되자 계파스님은 이 건물 이름을 대왕을 깨우쳐 보전(寶殿)을 중건하
였다고 하여 각황전(覺皇殿)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이것이 각황전의 이름 내력이다. 이 건물은 국보 제67호로 지정 받아 보호를 받고 있다. 또
이 건물 앞의 석등은 국보 제12호, 4사자 3층 석탑은 국보 제35호이다. 화엄사에는 그 밖에
도 많은 문화재가 있고, 수령 300여 년의 올벚나무가 천연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엄사 바로 앞에 서있는 남악사(南岳祠)는 원래 노고단에 있던 것으로 신라 때부터 나라에
서 제사를 모셨던 유서 깊은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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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화엄사를 둘러보는데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앞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아침마당 프로
그램을 진행하는 이상벽씨였다. 텔레비젼에서는 항상 웃는 얼굴이라 선하게 보였는데 실물
은 얼굴이 굳어있어 무서운 인상을 받았다. 휴가를 온 듯한 복장으로 화엄사를 둘러보더니
다른 사람들과 승용차를 타고 가는 것이었다. 방송인을 직접 볼 때 들뜬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사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인데 단순히 방송에 나온다는 이유로 특별한 존재로
인식이 되어버린다. 어려서부터 텔레비젼의 영향을 너무 받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텔
레비젼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생활관습이 아닐까 한다.
다른 생각을 뒤로하고 이제 본격적인 산행을 하기 위해 화엄사 옆길에 문을 통과해서 걸어
갔다. 계곡이 옆에 있는데 수련을 온 듯한 스님들이 제기를 딱고 있었다. 조금 더 걸어가는
데 3갈래 길이 나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표지판이 없는 것이었다. 그냥 아무쪽이나 선택해
서 갈까 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뒤로 내려와 스님에게 합장한 후에 여쭤보았다.
그랬더니 이 길이 아니라 다시 정문으로 나가 다리를 건너가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표지판을 제대로 안본 것이 실수였구나 하면서 다시 화엄사 정문으로 내려와 다리를 건너서
직진을 했다. 100m 를 가니 이번에는 표지판에 노고단이라고 써있지 않고 지정암으로 가는
길이라고 써 있는 것이었다. 그 지점에서 공공근로 하시는 분에게 여쭤보니 노고단 가는길
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좌측의 돌길로 가라는 것이었다. 다시 돌아내려와 보니 표지판이 보
였다.
두 번이나 실수한 후에 이제는 좀더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본격적으로 등반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10분도 못가서 배낭이 너무 무겁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 오다보니 이것저것을 챙겼던 것이 배낭을 무겁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걸어가는데 등에 땀이 차 오르는 것이었다.
10시 20분쯤 첫 쉼터인 대나무 쉼터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제대로 등산을 한지 20분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이러면 2박 3일 동안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다시 마음가짐을 바로 잡
기로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동타이머로 사진을 찍었다. 잘나왔을지 모르겠다.
다시 출발한지 3분도 못되어 걸음을 멈추었다. 길 앞으로 뱀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길이는
60cm∼70cm 정도 되는 뱀이었다. 순간적으로 긴장을 했지만 다행이 아무 일 없이 뱀이 개
울가로 이동을 했다. 뱀을 보고 놀란 마음에 바로 양말을 위로 올렸다. 반바지를 입었는데
다음에는 꼭 긴 바지를 입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등반하고 내려오는 사람을 보았다. 아무 짐도 없는 것을 보니 노고단을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담배를 피면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이 좋은 공기에서 담배를
피다니....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10시 40분쯤 등산로 옆길에서 희한한 버섯을 보았다. 귤을 담는 노랑색 망으로 씌워 놓은
듯한 흰색버섯이었다. 신기해서 사진을 찍어놓았다. 사진을 찍고 살펴보고 있는데 갑자기 뒤
에서 '뭐예요' 하는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2명이 나의 곁에 서
있는 것이었다. '저도 신기해서 구경하는 중 이예요' 하면서 관찰할 수 있도록 길옆으로 비
켜주었다. 조금 있으니 고등학생의 부모님으로 보이는 분들이 오시기에 다시 등반을 하기
시작했다.
11시쯤 되어 연기암이라는 곳으로 들어가는 길에 도착하게 되었다.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
었다. 우리반 애들과 몇 주동안 관악산을 다녔을 때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는데..... 배낭의 무
게가 너무 무겁나 보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출발하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내려오면서 비가 조금씩 내리니 조
심하라고 하였다. 몇 명이 지나가면서 다들 걱정해주시는 것이었다. 산행을 하면 참 좋으신
분들이 많다. 지나가는 말이라도 걱정해주시고 수고하라는 말까지 하면서 지나치기 때문이
다. 누구 말대로 산행을 하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이 없다는 말이 맞는 말 같다.
11시 10분쯤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준비해간 우비를 입고 배낭에는 커버를 씌웠다.
비가 오기 시작하니 조금 무서웠다. 게다가 계곡을 따라 올라 가다보니 쏴아~~~~ 하는 물소
리를 계속 듣게 되었다.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계곡의 흐르는 물도 많았고 물의 색깔도 투
명한 색이 아니라 새하얀 색이었다. 그것을 바위에 부딪쳐서 물보라로 인해 만들어진 색이
었다. 비 소리와 계곡의 흐르는 물소리가 맞물려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조금 무서웠다.
내 주위에 산행하는 사람도 거의 없고 혼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
다.
또 한참을 올라가는데 표지판이 이상했다. 한참 전에 4.1km 남았다고 봤는데 최소 500m∼
600m 정도 올라간 것 같은데 4km 남았다고 표지판에 써 있었다. 올라가는 일행을 만나면
꼭 같이 가자고 해야지 생각하면서 500m∼600m 올라갔는데 이정표 밑에 두 남자가 쉬고
있는 것이었다. 이정표를 보니 2.7km 남았다고 써 있었다. 표지판에 대해 이상하다고 이야
기하자 이 두 남자도 자신들도 그렇다고 이야기했다. 지리산 관리공단에서 표지판 관리를
잘 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중에 내려가면 지리산 국립공원 게시판에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두 남자에게 동행해도 되냐고 물어봤더니 흔쾌히 승낙을 했다.
이제 2,7km 남았으니 지금 이대로의 속도면 12시 30분이면 도착할 듯 싶다.
어디서 왔냐고 물어봤더니 서울에서 왔다고 한다. 어제 새벽기차를 타고 아침에 도착을 해
서 8시쯤 매표소를 통과했다고 한다. 난 9시 20분쯤 통과했으니 내가 너무 빠르게 산행을
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페이스 조절을 못해 계속 숨쉬기가 고르지 못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중 한사람이 어제 새벽에 내려온 영향인지 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같이
올라가는데 계속 뒤쳐지는 것이었다. 같이 보조를 맞추다 보니 너무 느려서 속이 탈 지경이
었다. 하지만 같이 가기로 한 이상 이런 감정을 숨겨야 했다. 내가 이 사람들과 1시 20분 정
도 차이를 극복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가다가 금방 쉬고, 또 쉬고 하면서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덕분에 산을 구경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혼자 오를 때는 구경 못하던 것도 구경하며 새로운 나무들도 보고.....
드디어 1시 20분에 노고단 근처에 도착을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돌길로된 평지에 많
은 사람들이 샌들이나 슬리퍼를 신고 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알고보니 노고단은 성삼재 관
광도로 개설이래 등산객보다 유산객이 더 많이 몰려들어 관광객의 소음이 뒤덮고 있고, 쓰
레기도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등 갖가지 부작용을 빚고 있다고 한다. 성삼재∼노고단은 불과
3㎞의 거리로 역시 도로로 연결돼 있고 시멘트로 포장까지 해둔 이 도로에는 관리공단 소속
차량등이 드나들고 있는데, 때로는 택시도 오르내리는 것이 목격된다고 한다. 좀 허무하기도
하였다. 일행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것 때문에 산이 망가진다고 한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사람들이 편하게 올라오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좋은 산들을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훼손을 한다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오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오버해
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역시 인간들은 자연과 함께 하기보
다는 이용가치를 높이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서울의 북한산도 우회하면 돈이 더 들기에 관
통해서 도로를 만들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자연과 더불어 함께 살지 않고서는 언젠가는
꼭 보답(?)을 받을 것 같다. 물론 지금도 이상 기온현상으로 여러 가지 재난을 당할 때도
많지만 말이다.
1시 30분쯤 노고단 산장에 도착했다.
산장이라면 통나무집에 고풍스러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현대식 건물이었다. 그곳 매점에서
산행이 가능한가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반갑게도 호우경보가 풀렸다는 것이었다. 오늘 아
무래도 내가 운수가 좋은 모양이다라고 생각을 했다. 이 기쁜 소식을 두 사람에게 전했더니
두 사람은 어제 새벽의 피로 때문인지 일단 밥을 먹고 어떻게 할지 정한다고 하길래 난 뱀
사골까지 먼저 가기 위해 컵라면을 사먹는다고 했다. 일행이었던 두 사람이 짐 정리 할 동
안 산장 매점에서 1000원주고 컵라면을 사서 먹었다. 뜨거운 국물덕에 비맞아 차가워진 몸
을 덥힐 수가 있었다.
2시에 노고단 산장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고 일행과 인사한 후에 출발했다.
노고단 정상(1,506m)은 산장에서도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이 정상에는 출입금지
로 갈 수가 없다. 자연 휴식년제로 인해 하루에 100명씩 4차례만 출입을 시키고 있기에 예
약을 해야 한다. 나도 원래는 9일에 인터넷 예약을 했었는데 입산 통제가 되는 바람에 취소
를 했다. 그 대신 야영장과 식수대 뒤편으로 노고단 고개로 올라가는 돌계단길이 만들어져
있다. 자연보호를 한다면서 길 좌·우편은 철망으로 막아놓았다.
노고단 고개는 산장에서 10여분이면 오를 수 있다. 이 고개가 지리산 종주산행 루트가 통과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노고단 정상을 못본 것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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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은 정상(1,506m)에서 노고단 고개로 뻗어 내린 지맥에서 경사 17~18도로 완만하게 전
개된 약 100여 정보의 고원이다. 노고단(老姑壇)의 옛 이름은 길상봉(吉祥峰)으로 신라시대
에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으
로 모시면서 매년 봄, 가을 제사를 올렸던 곳이다. 노고단이라는 이름도 선도성모의 높임말
인 노고(老姑)와 제사를 올리던 신단(神壇)이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지금
까지 남아있는 남악사(南岳祠)가 원래 이 노고단에 자리했었다.
신라시대에 화랑들이 심신수련도장으로 활용되었던 이 노고단에는 지난 1920년대에 외국인
선교사 수양관 49동이 세워졌다. 이 수양관 건물은 48년 여순사건 여파로 불태워졌는데, 일
부 건물은 그 잔해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노고단 주변에는 종석대, 관으대, 만복대, 집선대, 문수대, 청련대 등이 예부터 명승지로 꼽
혀 왔다. 이 고원 일대는 봄철의 진달래, 철쭉, 여름철의 원추리 군락이 유명하다. 이곳에는
운해(雲海)를 자주 볼 수 있는데, 노고 운해는 지리산 8경 가운데 하나이다.
'어디에서 몰려왔는지도 모르게 운무(雲霧)가 파도처럼 밀려와 산야와 계곡을 메우고, 수려
한 노고단 중턱 산허리를 감돌아 흐르면, 홀연히 운해만리(雲海萬里) 구름바다를 이루어 높
은 봉은 점점이 섬이 되어 완연히 다도해로 변한다. 이 변화무쌍한 자연조화의 신기로운 경
관은 오직 숙연한 감동과 외경감(畏敬感)을 안겨준다.'(이종길 지음<지리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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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 고개를 넘고 나서부터는 길이 한사람만 다닐 정도로 작아졌다. 양옆으로 대나무가
많다. 큰 대나무가 아니라 대나무 잎만 달린 것이다.(여기서 대나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대나무 잎인 것 같아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임)
갑자기 비가 더 심해졌다.
돼지평전이라는 곳을 지나고 있었다.
돼지 평전이라는 곳은 멧돼지들이 자주 출현해 붙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본
나무의 중간부분 껍질이 벗겨져 있고 멧돼지들의 뿔로 찍은 듯한 자국이 있었는데.... 혹시
나타나면 어떻 하지 하며 대응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일단 주위의 큰 나무로 올라가는 것이
상책이겠거니 생각을 했다. 사실 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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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4고지를 가볍게 오르는 능선길은 전망이 아주 빼어나다. 남쪽으로는 왕시루봉 능선과 피
아골이, 북쪽으로는 만복대 능선과 심원골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1,424m봉우리에는 등산
시즌 중 당귀차 등을 파는 노인이 있다. 20수년째 지리산에서 살고 있다는 이 노인의 본가
는 부산에 있다고 한다. 그의 캠프(?)는 노루목 쪽에 있다는데, 노루목에서 당귀차를 파는
사람의 캠프는 반대로 이 쪽(돼지령 부근)에 있다고 한다. 가끔 그의 아들이라는 청년이 임
걸령에서 땀을 흘리며 물을 길러오기도 한다.
1,424고지에선 약간 내리막길을 거쳐 풀밭이 펴쳐진 돼지평전에 닿는다. '돼지평전'이란 색
다른 이름은 마늘 모양의 원추리 뿌리를 멧돼지들이 종종 파먹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다시 구상나무, 잣나무 숲길을 얼마간 감돌아 가면 '임걸령 삼거리'이정표를 만난다. 이곳에
서 다시 숲길을 10여분 감돌아가면 임걸령에 닿는다. 샘터와 야영장이 먼저 눈에 띈다. 지리
산 종주산행에선 이 샘물과 야영장(나무숲 사이에 자연적으로 조성되었다)이 아주 요긴하게
이용된다. 그러나 샘터 주변이 지저분한게 큰 결점이다.
임걸령(林傑嶺)이란 이름은 조선 명종때의 초적 두목 임걸년(林傑年)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는 설이 있다. 그는 화살보다 더 빨리 다녔다고 하는 다소 과장된 듯한 전설이 있다. 이 임
걸령에서 곧장 남쪽으로 피아골과 연결되는 등산로가 있다. 임걸령 삼거리~불로교 삼거리의
능선길이 개척되기전에 이용되던 산길이다. 바로 이 옛길이 시작되는 곳에 '황호랑이 막터'
라 불리는 곳이 있다. 그 전설이 재미있다.
화엄사 계곡 어귀에 황전리(黃田里)라는 마을이 있다. 옛날 이 마을에는 성이 황씨(黃氏)인
한 총각이 지리산의 약초를 캐며 살아가고 있다. 그는 약초를 캘 수 없는 겨울철에는 나무
주걱을 대신 만들어 팔았다.
어느 추운 겨울날, 황총각은 주걱을 깎으러 지리산에 들어갔는데, 그날은 유달리 집에서 기
르던 암캐가 따라나섰다.
황총각은 반야봉의 밀림지대에서 주걱을 한 짐 깎아 집으로 돌아가려고 임걸령까지 내려왔
다. 그런데 별안간 눈이 내리면서 날까지 저물었다. 그는 걷기를 단념하고 임걸령 샘에서 동
쪽으로 30여m 떨어진 낭떠러지로 내려가 바위를 의지하여 나무가지를 모아 간단히 산막을
만들었다. 그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산막에서 밤을 새우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주인을 따라온 암캐가 새끼 7마리를 낳았다.
밤이 깊어가지 눈은 멎고 하늘이 맑게 갰으나, 호랑이 한 마리가 느닷없이 나타나 으르렁거
렸다. 황총각은 어쩔수 없이 강아지를 차례로 호랑이 입으로 던져 주었다. 그는 이번에는 벌
겋게 단 돌덩이를 주걱으로 던져주며 "옛다, 먹어라!"고 했다. 이를 덥썩 받아삼킨 호랑이가
포효하며 눈 위에 뒹굴다가 죽었다.
남다른 용기와 지혜로 무기도 없이 호랑이를 잡은 황총각에게 고을에서는 큰 상을 내렸으
며, 그에게 '황호랑이'라는 별명까지 붙여주었다. 그때의 그 막터는 지금도 '황호랑이 막터'
로 불리고 있다.
임걸령은 원래 '몰두덩이'라고 불렀다. 화랑들의 연마도장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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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 20분쯤이었다.
임걸령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혼자 가기 또 심심하고 적적하던 차에 앞에서 쉬고 계신 한
아저씨를 만났다. 아저씨에게 어디까지 가냐고 했더니 지리산 종주 하던 중이라 되도록 많
이 가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동행해도 되냐고 하자 좋다고 하셨다.
걸어가며 어디서 오셨냐고 여쭤봤더니 서울 상계동에서 오셨다고 한다. 우리 집과 가깝다는
생각에 반가움이 더했다. 지리산만 이번이 20번째라고 하셨다. 매년 휴가를 받아 오신다고
했다. 참 대단하신 분이라 생각이 되었다. 한참을 대화하며 걸어 가다보니 비가 더 오는 것
이었다. 1시간쯤 더 가자 뱀사골 산장으로 내려가는 길과 연하천으로 가는길이 있었다. 잠시
아저씨와 의논한 결과 뱀사골 산장으로 가서 하루밤 묵기로 했다. 벌써 시간이 4시 30분이
되었다.
뱀사골 산장에 도착하니 4시 40분이었다.
뱀사골 산장에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도착해있었다. 급한 마음에 산장지기 아저씨께 예약을
했다고 했더니 이런 비상시국에 예약이 무슨 필요가 있냐고 하면서 자리는 많다고 하셨다.
그리고 다시 호우경보가 발령되어 더 이상 못 간다고 하셨다. 이런 올라오던 사이에 기상특
보가 또 바뀐 모양이군! 하지만 내일은 풀리겠지 하면서 자리를 잡았다.
뱀사골 산장은 나무로 지어 노고단 산장보다는 훨씬 산장다워 보였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편이었다.
일단 추위를 피하기 위해 옷부터 갈아입었다. 젖은 옷을 벗고 마른 옷을 입자 살 것 같았다.
양말을 벗어보니 발은 퉁퉁 불어있었다. 마치 곰발처럼.....
5시 20분부터 식사 준비를 하기로 했다. 지리산에 오기 전에는 혼자 해먹을 생각을 했었는
데 동행하기로 한 아저씨 덕분에 같이 식사준비를 해서 수고가 덜어졌다.
아저씨가 밥을 하기로 하고 나는 찌개를 끊이기로 했다. 먼저 참치 캔을 따서 기름을 코펠
에 붓고 비장의 무기인 작년 김장김치를 얼려서 가져온 것을 꺼냈다. 다 녹아서 쉰 냄새가
진동을 했다. 칼로 썰어 코펠에 넣고 김치를 볶았다. 김치를 볶는 냄새가 군침을 돌게 만들
었다. 한참을 볶은 후에 참치와 고추, 마늘, 고춧가루를 넣고 물을 부었다. 어느 정도 끊인
후에 맛을 보니 얼큰한 것이 너무 맛있었다.
아저씨가 소주를 꺼내셨다.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져 있는 200ml짜리 소주였다. 아저씨와 주
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몸에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저녁을 다 먹고 나서 설거지를 대충 물로 하였다. 잘 안 되는 것은 휴지로 딱고... 산에서는
세제를 쓰지 않도록 해놓아서 세제를 쓰는 사람은 없었다.
짐 정리를 하러 다시 들어오자 벌써 7시가 되었다. 산장에 자가 발전기를 돌려 전기가 들어
오는데 간신히 보일 정도였다. 젖은 옷을 대충 걸어놓았고 침낭을 자리에 깔아놓았다.
배낭 정리를 다하고 보니 사람들이 보였다. 전라도 어느 고등학교에서 선생님과 아이들 10
여명이 온 것 같았다. 부모님과 아이가 있는 가족이 1팀, 연인같은 2팀, 친구끼리 온 듯한 1
팀, 그리고 아저씨와 나 이렇게 산장에 숙박을 하는 것 같았다.
7시 20분쯤이 되자 아저씨가 자자고 했다. 벌써라는 의문의 표시를 했더니 할 것 있냐고 물
어보신다. 아니라고 하자 오늘 피곤했고 내일도 무리해야되니 자두는 것이 좋다고 하셨다.
아저씨의 말대로 잠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고등학생들이 어찌나 떠드는지 잠이 통오지 않았
다. 일어나서 한마디 해주려다가 그래도 신나는 여행에 찬물을 끼었는 것 같아 그냥 참았다.
계속 잠은 오지 않고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이는데 아저씨는 잘 주무시는 것이었다. 더군
다나 아주 심하게 코를 고시면서......
얼핏 잠이 들었다가 9시 40분이 넘어서 깼다.
배낭을 맨 어깨와 종아리, 허벅지가 너무 아파서 잠이 깬 것이었다. 준비해간 맨소래담으로
맛사지를 했다. 그랬더니 맛사지 한 부분이 너무너무 뜨거운 것이었다. 참고 또 참았지만 쉽
사리 뜨거운 것이 가라앉지는 않았다. 다음에 또 온다면 시원한 것을 사와야지 생각을 했다.
주위를 보니 다들 자고 있었다. 희미했던 불도 꺼졌고 발전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사람들이 자면서 내는 숨소리와 아저씨의 아주 큰 코고는 소리, 이에 질새라 열
심히 코고는 학생 한명.... 그리고 밖에서 들리는 비가 내리는 소리였다.
오늘 하루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헤드랜턴을 켜고 수첩에 일정을 적었다.
10시 30분쯤 되어 정리가 끝나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원래 잠이 많은
편이고 잠자리를 잘 가리지 않는데 이상하리 만치 잠이 오지 않는다. 옆에서 코골며 주무시
는 아저씨 때문인가 해서 배게로 삼고 있는 옷을 여러번 잡아당겨 코고는 소리를 멈추게 해
도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는 김에 지리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어머니의 산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 같았다. 한없이 넓고 포근한 느낌을 주기에.....
내가 왜 이 여행을 오게 된 것일까? 고민해보았다. 하지만 하나로 정리가 되지 않고 이것
저것이 생각나며 생각이 엉킨 실타래처럼 혼란스러웠다. 이런 혼란스러움 속에 서서히 잠이
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