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없는 영원한 투쟁
“제가 두려운 것은 여기 방패를 들고 나와 있는 무장한 경찰도 아니고, 협박을 하는 어용 장애인단체장들도 아닙니다. 오직 두려운 것은 인간답게 살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아이의 눈빛입니다”
지난 9월 26일 세종로 정부청사 앞에서 장애인교육권연대 주체로 열린 장애인교육권 확보를 위한 학부모 결의대회에서 울산 장애인부모회 김옥진 회장이 쏟아 낸 말이다.
“정부가 의무교육, 공교육을 떠들고 있지만, 우리 장애 아이들에게는 말이 안 됩니다. 특수교사가 없고 특수학교와 특수학급이 없는데 무슨 교육을 말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싸워서 우리 아이가 제대로 교육받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면, 감옥에라도 가서 그것이 이뤄진다면, 정말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10월 11일 같은 곳에서 열린 집회에서 장애인참교육부모회 이순애 회원이 정부에 항의하며 절규하던 발언이다. 그 어머니는 수갑과 쇠사슬을 정부청사 철문에 묶고 시위를 벌이다 결국 33명의 부모들과 함께 경찰에 연행되었다.
뇌병변 장애아동을 둔 이씨는 재활의학과가 있는 병원에서 치료와 교육을 시켜왔지만, 더 이상 보험처리가 되지 않는다는 통보를 받은 뒤, 하루 치료비가 10만원이 넘는 사설 치료교육기관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보장받을 수 없는 자녀의 미래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가정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국가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장애아동 어머니들이 무엇 때문에 거리로 나와 대정부 투쟁을 하였을까.
복지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독일의 ‘정신지체장애인 부모회’ 회원들은 자신을 일컬어 ‘희망이 없는 영원한 투쟁자’라고 부른다. 장애인 자녀를 위해 끊임없이 싸워도 희망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으며 그 투쟁은 끝이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장애아동, 특히 정신지체 아동을 키우는 나 같은 한국의 부모들에게는 의미있게 다가오는 말이다. 복지 후진국인 한국사회에서야말로 장애 아이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기 위해 맞서 싸워야할 차별의 장벽은 얼마나 높은가!
한국사회 장애인, 장애아동의 현실
우리나라 헌법 31조는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장애인 교육을 규율하는 특수교육진흥법 5조는 국가의 임무로서 ‘특수교육대상자에 대한 초·중 교육은 의무교육으로 하고, 유치원과 고등학교 교육은 무상으로 한다’고 무상의무교육을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법 3조에는 이에 소요되는 비용을 ‘예산의 범위’ 안에서 우선적으로 지급하여야 한다는 독소 조항을 두어 장애인의 교육권리를 예산 조건에 종속시키고 있다. ‘예산조치가 부족하다고 인정되는 지방자치 단체에 대해서는 국가는 예산확충을 권고할 수 있다’는 권고조항은 결국 우리나라 특수교육을 무늬만 무상의무교육으로 하는 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같은 법에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장애를 가진 유아의 유치원 과정(3세 이상)의 교육을 촉진하기 위하여 장애의 조기발견, 교육시설의 확충 등 조기특수교육 시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조기특수교육 시책을 규정한 시행지침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 장애 유아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게다가 0-2 장애 영유아에 대해서는 아예 침묵하고 있어 국가가 장애영유아에 대한 조기중재와 교육을 공공적인 임무로 고민한 흔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교육부 자료에 의하면 장애아동으로 간주할 수 있는 특수교육 요구아동 출현율이 2.7%로 취학연령인구 800만명 중에서 22만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이중 특수교육 지원을 받고 있는 학생은 5만 4천명으로 특수교육 수혜율이 25%에 불과하다. 0-5세 장애 영유아도 9만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특수보육이나 특수교육적 지원을 받는 영유아는 8,600여명으로 수혜율이 10%에 그치고 있다. 절대 다수가 입학 기회에서 배제되거나, 보육과 교육 현장에 방치되고 있다는 얘기인데, 실제로 성인 장애인의 반 이상이 초등학교 이하의 학력을 가지고 있다.
현행 특수교육진흥법이 장애인의 교육권리 보장을 강제하지 못하는데다가, 정부 또한 교육예산을 확보하여 교육권리를 실현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올해도 교육부가 입안했던 장애인교육예산 100억원을 삭감하고 특수교사 정원을 동결하려는 등 장애인 교육권 문제를 전향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어 보인다. 이에 장애아동 학부모, 교사단체, 장애인단체 등으로 이뤄진 장애인교육권연대는 지난 3년 동안 장애인의 교육권을 실현할 수 있는 예산 확보를 요구해왔으며, 모순된 특수교육진흥법을 전면 개폐하고 권리 보장을 확고히 하는 ‘장애인교육지원법’이라는 대체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
장애인에 대한 복지를 규율하고 있는 기본법인 ‘장애인복지법’도 사정은 비슷하다. 15조에 장애 영유아에게 중요한 장애의 예방과 조기발견, 조기치료에 대한 기본시책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시행령과 시행규칙 어디에도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같은 법 29조에 ‘장애인, 그 법정대리인 또는 대통령령이 정한 보호자는 장애상태 기타 보건복지부령이 정하는 사항에 관하여 시장, 군수 또는 구청장에게 등록하여야 하며, 시장·군수·구청장은 등록을 신청한 장애인에게 장애인등록증을 교부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장애 진단과 등록 책임마저 장애인 당사자에게 전가하고, 장애의 발견과 예방, 이를 극복하기 위한 치료와 교육 등 국가적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 국가기구는 그저 장애인등록증을 교부하면 끝이다.
2004년 6월 장애인교육권연대의 조사에 의하면 취학 전 장애영유아의 100%가 치료나 교육 목적의 사교육을 받고 있으며, 52.6%가 매월 50만원 이상의 사교육비를 부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장애 영유아에 대한 진단, 치료 등 조기중재가 공공의 영역이 아닌 사적 시장에 내맡겨지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사교육비를 부담하기 어려운 장애영유아들은 조기중재 없이 방치되어 치명적인 2차 장애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 장애영유아에 대한 공공적 지원의 방기는 장애인과 그 가족의 전 생애에 걸친 행복추구의 좌절을 의미하고, 전 생애에 걸친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여 복지 결핍의 악순환을 가져오게 된다.
결국 우리나라에서 장애영유아에 대한 국가의 법적, 제도적 책임은 아무 것도 없다. 0세 장애영아에 대한 조기 중재가 없다는 것은 모든 장애인에 대한 방기를 의미한다. 나아가 국가기구가 산발적으로 시혜적 지원만을 하다 보니 장애인에 대한 몰이해와 차별을 조장하고 있다. 시혜가 방기보다 더 해로운 건 현실을 은폐하는 기만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김호철님이 지은 ‘장애해방가’ 노랫말처럼 말 뿐인 장애복지 법조항마저 장애인의 생존을 비웃고 있지 않은가 반성해야 한다.
‘스파르타의 벼랑 끝’에서 던지는 물음
내 딸과 같은 장애아동들이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기 위해 고대 도시국가였던 스파르타로 되돌아가 보자. 고대 그리스 시대에 장애인들은 대체로 유기와 살해, 추방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도시 노예국가 스파르타는 군사훈련과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 국가가 모든 장애아를 살해하였다. 국가 장로들이 신생아를 엄격하게 검사하여 장애영아는 산 속에 버리거나 바닷가 벼랑 아래로 떨어뜨리는 식이었다. 장애인 살해 악습은 로마시대에도 이어졌으며, 장애인을 대대적으로 희생시킨 중세 마녀 사냥기를 거쳐 17세기까지 지속되었다. 현대에도 세계대전 전후 파시즘에 의해 재연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장애인 살해 악습은 지배 계급집단의 이해를 반영하는 사회경제적 구조의 산물이었지만, 동시대를 이끈 잘못된 인간관과 세계관에 근거하여 정당화되고 강화되었다. 예를 들어 이성을 신성시한 헤라클레이투스나 아리스토텔레스, 중세 기독교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져온 언어신수설(神授說) 등은 그릇된 인간관을 형성하였고, 형이상학적이고 주술적인 종교 관념을 만들어 부정적이고 비인간적인 장애인관을 더욱 강화하였다. 종교개혁가 루터는 정신지체아동을 ‘영혼이 없는 육체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말했고, 캘빈도 악마에 들린 이들로 보았다. 지배이데올로기로 작용했던 서구 기독교는 장애인에 대한 끝없는 주술과 오류를 낳았고, 박애주의와 자선적인 관점으로 퇴행하여 오늘 한국사회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억압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비인간적 장애인관은 경험과 이성에 주목한 18세기 근대 계몽주의와 시민혁명을 거쳐 봉건적 질서가 해체되면서 해소되기 시작했다. 19세기 장애인 교육기관이 실험적으로 설립되면서 정신지체인 교육을 포함해 장애인 교육이 태동하게 되었지만, 근대 자본주의가 의식적으로 왜곡된 장애인관을 해소시킨 것은 아니었다. 봉건적 생산양식을 대체하기 위한 인신의 자유와 기능적 요구에 따른 것이었을 뿐, 그 억압적 요소는 온존되었다. 서구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많은 장애인들이 시설에 수용되어 살아야 했는데, 장애인 복지라는 게 교육과 노동기회의 평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위험 관리 차원에서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정신지체인을 포함한 모든 장애인에게 보편적인 인권을 부여하고 평등한 교육과 직업기회를 법제화한 것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1970년대 미국은 장애아동교육법과 발달장애인법을 만들었고 독일은 중증장애인법을 제정하였고, 1990년대 들어 여러 국가들이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시행하였다. 완전한 평등을 요구한 장애인 교육권, 평등권의 역사는 반(反)장애인 사회에 대항하는 장애인과 부모들의 법정 투쟁의 역사였고, 그 저항과 투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21세기 자본주의 한국사회가 스파르타에서 얼마나 진보한 것일까?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정신지체인의 권리에 관한 한 스파르타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하면 과연 지나칠까. 우리네 장애아동 부모들은 공공연하게 장애 영아를 살해하던 스파르타의 벼랑 끝에 서서 떨어지는 아이를 붙잡기 위해 사투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 사회에서 그 벼랑 끝은 가난하고 중증인 장애아동일수록 내 몰리기 쉽고, 전 생애에 걸쳐 나타난다는 차이 뿐이다.
한국에서는 수많은 장애영아가 부모를 비롯한 가족의 손에 의해 유기되고 있다. 가족과 지역사회를 떠나 시설에서 생활하는 등록 장애인이 5만명을 넘고, 많은 장애아동이 해외로 입양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두해 전 과중한 의료비 부담 때문에 인공호흡기를 제거하여 중증의 장애인 자녀를 살해한 부모에게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우리사회는 장애에 대한 책임을 가족에게만 귀속시켜, 존속에 의한 장애인 살해마저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되돌아보면 96년에 문제가 되어 최근에야 겨우 해결된 ‘에바다농아원 사건’은 한국사회에서 장애인이 처한 현실을 극명하게 말해 주었다. 가족으로부터의 유기, 장애인에 대한 강제노역과 임금착취, 의문사와 인신매매, 자선사업가로 위장한 ‘복지 마피아들’과 관료들의 추악한 거래로 점철된 이 사건은 장애인을 둘러싼 가족과 사회, 국가에 걸친 모든 모순을 한 눈에 드러냈다. 그리고 전국 여러 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에바다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시설 장애인 인권침해 사건들은 21세기 한국 사회가 고대 스파르타에서 크게 진보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70년대 특수교육진흥법 제정, 80년대 장애인복지법 제정으로 장애영유아에 대한 유기와 살해는 예외적인 일이 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장애영유아에 대한 치료와 교육 지원을 법제화하여 권리로서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든지 유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즉, 한국사회에서 장애인들은 여전히 스파르타의 벼랑 끝으로 내몰릴 위험을 가지고 태어난다. 태어나면서부터 장애인들이 직면하게 되는 생존의 문제는 오늘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비장애인사회의 모순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인식해야 하는 냉엄한 출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내 딸도 유아기에서부터 보육과 교육차별, 사회적 통합의 거부를 경험해야 했다. 지금은 초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특수교육 지원을 받고 있지만, 공교육 문턱을 넘어서기까지 장애유아기에 받았던 차별은 장애아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스파르타 체제와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2003년 아이를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면서 우리가 운영하는 홈페이지에 아내가 올렸던 글을 그대로 소개한다. 11살 어린이의 사회전기를 기록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제 딸아이는 올해 남보다 2년 늦깎이로 초등학교 가게 됩니다. 정신지체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는 학교에 입학하기까지 쉽지 않은 과정을 겪었습니다. 마치 험한 산, 깎아지른 암벽을 가느다란 밧줄을 부여잡고 건너온 듯이 지나간 시간들이 위태롭게만 느껴집니다. 그만큼 딸아이와 함께 겪어온 일들이 우리 가족에게는 너무나도 절절하고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내 딸과 같이 장애를 가진 어린이에게 교육은 생명과도 같습니다.”
아내가 쓴 장애 딸아이의 사회전기
우리나라 어린이들은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비슷한 생활을 할 것입니다. 너 댓살이 되면 집 주변 어린이집이나 미술학원 같은데 다니다가, 예닐곱 살이 되면 유치원에서 한두 해를 보내게 됩니다. 보통 좋다고 하는 곳을 선택하고, 어디를 가도 대부분 환영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딸아이가 4살 되던 해부터 경제적으로 부담 되는 돈을 들여가며 치료교육을 시켜왔고, 이를 위해 서울 수유동으로 이사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장애아동 조기교육을 위한 공공 기관이 거의 없는데다가, 교육비 지원은커녕 사설기관에서 교육받는다고 하여 세금조차도 되돌려 주지 않고 있습니다. 대부분 선진 국가들은 장애아동 교육을 영아일 때부터 보장해 줍니다. 과연 대한민국이 선진국을 대표한다는 OECD국가 중 하나일 수 있는 것인가요?
조기교육과 더불어 장애아동들에게 중요한 교육은 비장애 어린이와의 통합입니다. 저희가 사는 집 주변에 있는 어린이집, 학원, 유치원만 해도 수십 개가 있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장애를 가진 딸아이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다섯 살에 장애아동에게 좀 관대하다는 동네 ㄱ유치원에 찾아가 입학을 시켰습니다. 3일 후에 원장이 집으로 찾아와서“산만한 딸아이를 보기에 현재 유치원 교사로는 역부족입니다”라며 입학금을 돌려주었습니다. 어쩌면 보조교사만 있었어도 그 유치원에서 딸아이가 교육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유치원은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거꾸로 ㅈ어린이집에 찾아갔습니다. 나이에 맞지는 않지만 3-4세 영아반에 두는 조건으로 입학하여 6개월 정도 다녔습니다. 여섯 살이 되어 딸아이를 5세반에서 교육받게 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어린이집 원장은 “한 교사가 30여명의 어린이를 돌보는 형편에 딸아이를 돌 볼 수는 없고, 또한 영아반에 더 이상 있게 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라며 넌지시 그만 다닐 것을 종용하였습니다.
해가 바뀐 후 좋은 분이라는 소개를 받고 목사 부부가 운영하는 교회 부설 ㅋ어린이집을 찾아갔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표시하면서도 받아주었습니다. 그 후 여러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보통 아이들보다 절반의 시간만 어린이집에 있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적응기간이 필요하니 시간을 줄여서 서로 조금씩 적응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두어 달이 지나 어린이집에서 연극을 보러가게 되었는데 제가 도우미로 함께 따라 갔습니다. 그 다음날 원장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딸아이만 엄마가 따라 오면 다른 자모들이 항의하는데 어린이집 측에서 변명할 수가 없어서 앞으로 딸아이는 야외프로그램에는 데려가기가 곤란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장애를 가진 아이가 야외에 나갈 때 엄마가 함께 간다고 하여 문제 삼는 부모가 과연 있을까요? 맡을 의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만 두었습니다. 허탈하고 절망스러웠습니다. 그 많은 유아보육이나 어린이 교육기관들 중에서 어디에도 딸아이가 다닐만한 곳은 없는 것인가 한숨을 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조기에 통합하여 교육시키는 게 어쩌면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통합을 포기하고 서울 수유동,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장애아동 전담 어린이집을 찾아가서 딸아이를 일곱 살까지 맡겼습니다. 헌신적인 교사들의 지도로 딸아이는 그곳에서 즐겁게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덟 살이 되어서 초등학교에 입학시켜야 할지 유예시켜야 할지 고민하다가 적응기간을 위해 다시 한번 일반 유치원에서 통합교육을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몇 해 전 여기 저기 전전했던 두려운 기억들이 생각났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용기를 내어 주변에 있는 유치원들 목록을 뽑아 장애아동을 입학시킬 만한 몇 곳을 정하고 방문했습니다.
그 가운데 넓은 마당이 있었고 천주교 수도회에서 운영하던 ㅅ유치원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유치원에는 우리 부부가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놀아주었던 멋진 놀이기구가 있었습니다. 동네 유치원으로 딸아이에게 가장 적합할 것 같아 먼저 방문했던 곳이었는데, 그 유치원장은 입학은 고사하고 문전에서 거절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한 남편은 10개월 후 장애아동에 대한 교육차별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하게 되었는데, 차별이라고 입증하기 어렵다는 비겁한 결정을 하였습니다.
나중에 장애아동 교육에 관심이 깊었던 동네‘성실유치원'에서 1년간 취학 전 통합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딸아이에게 유치원에서의 1년은 더없이 귀중한 시간이었고, 행운이었습니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10만 여명의 취학 전 장애아동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딸아이와 똑같은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집 주변에 있는 수많은 어린이집, 유치원이 있는데, 대부분은 장애를 가진 딸아이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이미 다 지나간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장애를 가진 제 딸의 어린 후배들을 눈물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통합의 문을 두드리기조차 두려워하고 있는 절망하고 있는 많은 동료 부모들이 계시지요. 얼마나 더 많은 장애아동들과 부모들이 흔한 유아교육 시설들을 전전해야 하고, 당당한 거부에 좌절해야 할까요? 얼마나 더 장애아동을 둔 부모가 그들의 자식을 교육하는데 그저 운이 좋기만을 빌어야 할까요? 우리는 딸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면서 좋은 선생님과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장애 어린이들과 우리 부모들이 더 이상 위태로운 행운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장애인 자녀를 교육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희망이 이뤄지는 날까지 '장애인 참교육'을 열망하는 모든 장애아동 부모들과 연대하여 싸울 생각입니다. 남편이 하는 말에 백번 공감하는 게, 우리 아이들을 이 세상에 맞춰 살도록 하는 것보다 이 세상을 바꿔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훨씬 더 쉬울지도 모르겠습니다.”(장애아동 부모의 연대와 희망 www.littlepower.org )
한국 사회에서 장애아동 부모로 살기
아내와 마찬가지로 예기치 않았던 딸아이의 장애를 발견한 이후 10여년 세월은 아이를 둘러싼 고민과 결단의 연속이었다. 비장애아 부모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아이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좌절감, 늘어난 경제적 부담, 크고 작은 차별에 저항하며 고군분투하며 살아왔다. 아내는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2년의 육아 휴직 끝에 주부로 복귀해, 보통 아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보육을 감당하면서 편견에 가득 찬 주변에 맞서 싸워야 했다. 장애아동을 키우는 불안과 사회적인 절망감을 눈물로 호소하면서도 나약해지지 않으려고 자신과의 싸움을 지속해 왔다.
‘아이보다 단 하루만 더 살았으면’하는 장애아동 부모들의 동병상련은 무엇 때문일까. 장애아동을 양육하는 어려움보다도 아이의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압박감으로 다가 온다. 한국의 모든 장애아동 가족들이 겪는 문제이고, 많은 부모들이 그 중압감에 짓눌려 절망감을 안고 살아왔다. 사회 안전망이 허술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장애인을 오히려 차별하고 도태를 강요하는 한국사회의 일상적인 현실 때문이다.
많은 장애아동이 유기되고 가정이 해체된다는 사실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장애 자녀를 포기하지 않는 한, 가정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어렵다면 이는 얼마나 야만적인가? 우리 사회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졌고, 이러한 체제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부모의 도리도 인간으로서의 양심도 지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유아기로부터 시작되는 장애아동에 대한 일상적인 차별, 복지 부재의 현실에 맞서 부모인 당사자가 나서지 않는다면 손톱만큼의 희망도 없다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장애아동 인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려고 먼저 찾아간 곳이 국가 인권위원회였다.
2002년 같은 정신지체 아동을 둔 어머니와 함께 두 가지 사건에 대해 진정서를 제출했다. 국민의 인권을 책임진 독립된 국가기구였기에 장애아동 인권에 대해 전향적인 판단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나는 아이의 입학을 거부한 사립 유치원장과 서울시 교육감을 상대로 진정하였고, 국가가 장애아동에 대한 치료와 교육을 공공화 하고 무상화 할 것을 주문하였다. 함께 간 어머니는 대기자가 많다는 이유로 치료를 중단당한 자녀의 사례에 대해 국립 재활원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상대로 진정하였다.
장애인 교육권 침해 사례로서 처음 진정된 사건이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고 인권위원회도 중요 사건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인권위원회는 1년간이나 끌더니 결국 실망스런 결정을 안겨 주었다. ‘장애가 아니라 나이 때문에 입학을 거절했다’는 피진정인인 유치원장의 진술에 의존하여 간접 차별을 수용하였고, 차별을 입증할 충분한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 결정을 하였다. 다만 ‘장애아동에 대한 입학거부와 취학유예 등 향후 장애아동의 차별 시정을 위하여 제도와 정책에 대해 별도의 조사와 연구를 진행하기로 한다’는 사족을 덧붙여 비판을 모면하려 하였다. 국가 인권위원회는 장애인 교육차별 관행이 현행 교육 관행과 제도적인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국가 책임이라는 것을 공식화하지 못하는 관료주의적인 한계를 드러냈던 것이다.
국가 인권위원회의 결정을 받은 후 우리나라에서 장애인 인권은 국가기구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국가기구에 대항하는 당사자들의 투쟁에 의해서만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 보도자료를 통해 ‘학부모 운동을 통한 자력 구제와 법 개정 투쟁, 예산확보 투쟁을 통해서 장애아동 교육인권을 지켜나가겠다’는 취지로 국가인권위원회에 항의 성명을 냈고, 곧이어 일하던 직장에 사표를 냈다. 2년이 지난 지금 장애인단체들의 요구를 받아 민주노동당은 ‘장애인차별금지법’을 발의하여 국가 인권위원회가 아닌 독립적인 차별금지위원회를 만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아이가 취학한 이후에도 취학전 장애영유아 문제를 고민해왔는데, 최근 민주노동당 안에서 ‘장애영유아 지원’을 법제화하기 위한 정책팀을 함께 꾸리게 되어 정말 다행스럽다.
우리 사회는 장애인과 함께 살아 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 장애인을 잘 모른다. 특히 정신지체인이나 발달장애인과 소통하는 방법에 익숙한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말아톤’과 같은 영화나 대중매체가 정신지체 장애를 소개하면서 널리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성공해서 유명해진 사례들은 정신지체 장애인에 대해 단면만을 보여 준다. 개별적인 장애극복 노력이 중요하지만, 부모의 욕구에 의해 이끌어진 성공한 ‘장애인 신화’는 오히려 현실을 덮어버리기 쉽다.
정신지체인은 다른 장애인보다 사회적 편견에 놓이기 쉽고, 비인간적인 대접과 차별을 받기 일쑤다. 그 차별은 쉽게 확인되지도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아동, 특히 정신지체아동이 처한 문제는 인간으로서의 평등과 그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전제한다. 정신지체인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하며, 동시에 모든 ‘비(非)정신지체장애인’ 분리는 곧 차별이라는 사회적 연대의 정신을 실천해야 한다.
장애 발생의 원인은 99%가 후천적인 것으로 사회적이고 환경적인 산물이며, 인간 발달의 역사적 결함이나 유전에 의한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다. 생명체의 진화는 자기 완결성을 가지며 하느님이 인간에게 장애를 만들어내는 심술쟁이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애 문제에 대한 인식과 해법을 사회화해야 한다.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연대할 수 있어야 하며, 장애인은 비장애인과의 관계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진보적 장애운동, 참된 부모운동을 향하여
2001년 초 시흥시 오이도역에서 리프트가 추락하여 한 장애인인 참혹하게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장애인이동권연대가 조직되어 ‘더 이상 죽을 수 없다’며 저상버스 도입 등 진보적인 이동편의 보장 요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7월 진보정당 활동가로서 서울역에서 전개된 이동권연대의 천막농성 현장에 결합하면서 박경석 공동대표를 만나게 되었고, 경찰병력과 대치한 이동권연대 동지들의 치열한 투쟁을 접하게 되었다.
같은 해 겨울 장애운동가이자 진보정당 동지인 최옥란 열사가 중증 장애인의 기초생활을 요구하며 죽음을 건 투쟁을 전개하였고, 2002년 3월 그녀의 장례식 행렬을 보고 돌아와서 추모시를 쓰면서 ‘그녀의 죽음 속에서 내 딸의 앞날을 보았다’고 고백했다. 그 후 해마다 전개된 ‘420 장애인차별철폐 공동투쟁단’에 참여하면서, 차별에 저항하는 중증장애인 동지들의 격렬한 몸부림과 투쟁을 통해 정신지체인인 내 딸의 요구도 함께 깨닫게 되었다.
장애인의 이동과 접근을 제한하고 노동의 권리를 차별하는 사회적 물리적 구조를 비장애인들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버스는 장애인들의 탑승을 배제하고 있으며, 지하철을 이용하는 장애인들이 당하는 사고를 일상적으로 접한다. 한국과 같은 경쟁사회에서 장애인이 고용되기란 하늘의 별따기이며, 삼성과 같은 대기업은 장애인 의무고용을 지키기보다는 얼마 안 되는 부담금을 내고 만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장애인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다. 경쟁과 효율의 관점에서 장애인 차별을 정당화하면서도,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고 시혜적인 제도로 해결하려는 낡은 관점이 문제다. 결국 장애인이 가진 평등한 역할 가치를 인정하고 소유권 중심의 낡은 사회의 질서를 바꿔 공공의 영역을 확보하고 사회화를 실천하는 것이 핵심일 것이다.
장애아동을 둔 부모들도 단결하여 당사자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고 많은 부모들이 사회적, 제도적 변화만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믿게 되었다. 나는 서울지역 장애인 부모들과 만나 ‘장애인참교육부모회’라는 학부모 조직을 만들고 ‘장애인교육권연대’ 공동대표를 맡으면서 장애인교육권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진보정당 활동가로서 성인장애인, 학부모들과 함께 ‘민주노동당 장애인위원회’를 조직하였고, 내 딸과 같은 장애아동, 장애인들에게 무엇이 진보일까 정책적 고민을 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
그 와중에 경제적 안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내 딸을 비롯한 장애인들의 미래를 대변하고 실천할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한다. 열심히 벌어서 아이의 미래를 대비하는 개인적 해법보다는 사회제도를 바꿔내자는 전망을 선택한 셈이다. 그 전망이 불투명하고 영원한 싸움일 수밖에 없다고 해도 끊임없이 나아갈 도리 밖에는 없지 않느냐고 아내를 설득하였다.
나는 사랑하는 딸아이가 장애를 가졌지만 인간으로서 평등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존중하기에 그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 실천하려고 한다. 그 실천은 우리 사회에서는 불행하게도 장애인, 특히 장애인의 평등과 역할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지배적 세력과의 싸움일 수밖에 없다. 장애아동 아버지로서 낮은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며 더욱 더 우리 사회의 변혁을 갈구하는 좌파의 한사람으로 살게 한다. 소수자 관점과 소유하지 않은 계급을 옹호하여 장애인의 해방과 우리 사회의 진보를 실천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오늘도 천진스럽고 해맑은 아이의 웃음 속에서 장애인의 생존을 비웃는 ‘정글과 자본의 법칙’이 지배하는 체제에 저항하라는 요구를 읽는다.
나는 부모운동에 참여하면서 ‘부모운동의 당사자주의’를 주장하며 장애인 자녀를 대신하는 참된 당사자가 되자고 역설해왔다. 부모운동에서 당사자성의 핵심은 내 자녀만을 생각하는 학부모 이기주의를 버리고, 장애를 가진 ‘우리 모두의 아이들’로 바라보고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또한 ‘부모 없는 아이들을 위한 부모운동’으로까지 나아가자고 말하곤 한다. 장애인 부모들이 진정한 당사자일 수 있는지 물음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당사자성을 어떻게 실천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은가. 장애운동에서의 당사자성은 생물학적인 게 아니라 권력에 종속되지 않는 진정성, 자기결정성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한다. 진정한 당사자성을 확보한 장애 운동만이 사회를 변혁하고 장애인을 해방시킬 것이다.
노동능력이 자본과 같은 속성을 갖기도 하는 오늘의 세계에서 장애인이야 말로 생산노동 능력의 차이로 인해 하나의 계급이 된다. 생산수단을 소유하여 관리할 가능성도 노동능력을 소유할 가능성도 적은 공동의 이해를 가진 집단을 이룬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Marx의 개념을 빌려 말하자면, 즉자적 장애인(disabled class in itself)에서 대자적 장애인(disabled class for itself)으로 전화하는 지점에 당사자성의 핵심이 있다고 본다. 대자적으로 인식할 때,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이 잃을 것이라곤 차별과 고립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장애인은 단결해야 한다. 2005년 장애인들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라는 진보적 장애인운동 연대체의 이름으로 단결하고 있다.
장애인 부모와 가족들도 단결해야 한다. 장애인 부모들이 참된 당사자로서 자기 역능(力能)을 가지면 아이들이 열망하는 세상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아내와 함께 아이들을 돌보고 장애아동을 키우는 어머니들과 소통하면서 돌봄과 나눔의 가치, 부모들이 가진 고유한 힘들을 깨닫게 된다. 또한 사랑하는 딸아이 때문에 장애아동의 눈으로, 장애여성의 눈으로, 아이를 돌보는 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여전히 협소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