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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실전 전투 경험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여러 공비 소탕전과 월남전에 참가한 자랑스러운 후배들 앞에 이야기 꺼내 놓기가 민망한 감이 없지 않아 글 쓰기를 주저하였다. 그러나 ROTC 1기1차로서 당시의 공식, 비공식 기록이 전무한 가운데, 초창기의 여러 어려운 상황과 또 여러 시행착오를 솔직히 밝혀 두는 하나의 진솔한 기록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고쳐 먹고, 주위의 권유로 글을 쓰기로 하였다.
언제나 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에는, 해도 되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해서는 안되는 말이 있고, 또 군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글이 있는가 하면, 긍정적인 글도 있어서 매우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한 동안 여러 가지로 망서렸다. 그러나 잘 못된 것은 즉시 즉시 시정하는 것이 군으로서나, 국가적으로 득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주의 깊게 선별해서 과감하게 쓰기로 하였다.
어느 누구도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게 전쟁이라는 불행과 그 후유증과 피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물려 주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인간의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 것이 세상일이다. 새로운 세대 역시, 원하지 않는 그러한 것을 물려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물려 주고 싶지 않지만, 물려 줄 수 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려 받고 싶지 않지만, 물려 받을 수 밖에 없게 된 것이 또한 오늘의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특별히 한국의 불행한 근대사는 이를 극단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근본적인 국가적 문제를 불식하게 되는 경우는 최소한도 다음 세대 자신들이 스스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을 때, 그러한 희망을 조금 가질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전쟁을 싫어한다고 하지만, 솔직히 세상에는 전쟁을 하고 싶어하는 인간도 없는 것은 아니며, 지구상에 있는 온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전쟁이란 할 수 없이 말려 들어가서 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1차, 2차 세계 대전은 물론이고, 6.25의 경우도 일시에 삼천만 민족이 다 총을 들고 일어나 싸우자고 싸운 것은 아니다. 어느 날, 한 미치광이가 시작을 하였기 때문에, 온 국민이 이에 휘말리게 되었고, 국토는 황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이 땅 위에서 인간이 존속하는 한, 전쟁을 위한 전력이 아니라, 최소한도 전쟁 억지를 위한 전력 유지의 필요성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생각하여서는 안된다. 이것은 한반도의 통일 이전이나, 통일 이후에도 변할 수 없는 원칙이며, 또한 한반도에만 국한된 것도 아닌, 인류 전 사회, 국가, 지역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원칙이다.
그리고, 산 자는 죽은 자의 고귀한 희생을 잊어서는 안된다. 솔직히, 산 자는 죽은 자의 피를 먹고 사는 것이며, 그의 생명을 대신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사상자를 위시해서, 나라와 국민을 위하여 고귀한 생명을 바친 사람들의 유가족들을 섭섭하게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산 자로서의 인간 도리를 다 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의 목숨이 귀한 줄 알면, 남의 목숨도 귀하다는 것을 알어야 한다.
1961년 3학년이 되어서 ROTC 1기로 지원을 하자 바로 5.16이 터졌다. 101 ROTC 제 2 지단인 사대에는 지단장으로 전주식 소령(소장 예편, 종합 학교 동창회장), 교관으로는 안태일 소령과 갖 대위로 진급한 노태우 대위(육사 11기, 후일 대통령 역임)가 배속되어 왔으나 노태우 대위는 몇 주가 지나자 대학 본부로 전출하고, 후임에 조동휘 대위가 왔다. 1961년과 1962년 각각 1개월의 하기 야영 훈련은 학창 시절의 또 다른 하나의 추억 거리를 제공하였다. 3학년 첫번째 여름 야영 훈련에는 수색에 있는 30사단 E중대 1구대에서 서울 대학교 농과대학 교관으로 나와 있던 박찬옥 대위(육사 11기) 밑에서 호된 훈련을 받았다. 박 대위는 공수단과 육본 의장대장을 역임한 분으로 과묵한 편이나 2등을 하려면 아예 처음부터 뛰지도 말라는 것을 은영 중 나타내며 강인한 정신력을 강조하였다. 그의 경력으로 보아 구대장을 할 분은 아니지만, 하여튼 우리는 초특급의 구대장을 맞이하여 육사, 공수단, 육본 위장대에 준하는 훈련의 맛은 조금 볼 수 있었다. 주말 사단 연병장에서 여학생들과 함께 위문 온 서울대학교 학생처장 심상황 박사의 각설이 타령의 명연기도 잊을 수 없는 일로 남아 있다.
졸업과 동시에 예비역 포병 소위로 임관한 나는 3월 7일부 소집을 받고, 광주 포병학교(교장 최철 준장)에 입교하여 포병 1기 1차 1구대 1 내무반(포대장 육사 13기 김헌세 대위; 구대장 육사 15기 송원식 중위)에 소속되어 소정의 훈련을 받았고, 특히 포술학 교관 유근무 대위(육사 13기, 중장 예편, 현 재향 군인회 부회장)와는 각별한 교분을 쌓았다. 이들 장교들은 1기생들의 교육을 맡았다는 자부심을 넘어 자신들이 열의를 가지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은 우리 모두를 감격하게 하였다. 포병학교 시절 나는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교육기간 동안 ROTC 최초의 작전장교(S-3, 제5구대장 육사 16기 서정헌 중위)의 보좌관(s-2/S-3 보좌관)으로서 동료들의 교육 책임을 맡고, 매일 학과 과정, 학과목, 학과 시간, 교관, 교장(敎場) 확인을 위하여 뛰어 다니느라고 하루 3끼 끼니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고생을 하였고, 동료들이 취침한 후에도 교제 배부를 위해서 잠도 잘 수 없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풍익 홀”(강당)에서 동료들의 학과복습을 위해서 자주 강의도 하였다. 그래서 내 살림인 내무반 정돈은 바로 옆에 있던 한상복 소위(서울 문리대 물리과 졸업, 해양학 박사)가 항상 도맡아서 해 주었다. 1기 1차 교육의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비로서 <ROTC 포병의 SOP>가 완성되어, 1기2차부터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바른 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ROTC 포병의 기초를 다지는데 일조하였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포병학교 졸업후, 제1야전군 산하 보병 26사단, 228 포병 대대, B 포대의 관측 장교로서 근무를 하였고, 임진강 건너 고랑포에서 철책도 없이 개활지로 노출되어 있던 비 무장지대 경계선상의 한국군 최서단 OP를 맡아 한 때를 지나기도 하였다. 포병은 포병 자체의 포대, 대대, 포단의 훈련, 대대 테스트, 실탄 사격훈련에다가, 보병 및 기갑 훈련에도 언제나 빠지지 않고 지원을 나가 주어야 하고, 미 1군단(제1기갑사단, 보병7사단)의 혹한기 훈련, 64년 한국군의 마지막 기동 훈련(보병 26사단, 보병 2사단)에도 참가를 하였고, 또 이를 위한 예비 훈련 등, 만 2년을 한시도 쉴새 없는 훈련 속에서 지내다가 제대를 하였다(만 25개월). 나는 또 부산 화학 학교에도 가서 화생방 및 원자전에 대한 특별 교육을 받기도 하였다(학교장상 수상). 대대장(이흥조 소령), 포대장(박양래 대위), 작전장교(오운영 대위)를 위시한 모든 장교들이 우리들을 무한히 애끼고, 격려하여 주고, 세밀하게 보살펴 준 일에 대해서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보다 한발 앞선 학보 출신들과 일반 장병들은 어렵고 힘든 여건 하에서, 고지, 평지를 불문하고 1차, 2차 진지 공사와 막사 건축 공사를 위해서 막대한 고생을 하였고, 또 그 이전의 선배들은 실제로 6.25 사변에 직접 참전하여 귀중한 생명을 바쳐가며 많은 피를 흘린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금년(2003)으로 임관 40주년을 맞았다. 지내고 보니 인생이 이렇게 짧은 줄 몰랐다. 대학교 2학년이 되자 경무대 입구 최선봉에 선 서울대의 사대 남녀 대학생들은 4.19 최초로 현장에서 피격되어 즉사한 희생자를 비롯해서 다수의 사상자를 내었다. 그들을 기념하는 석비와 4.19 기념 석상을 그들이 다니던 교정의 한쪽 잔디밭에 만들어 준공하는 자리에서 학생 대표(당시, 사대 신문 주간)의 한 사람으로 꽃다발을 바치며, 시골에서 하얀 한복을 입고 올라온 순박하기 짝이 없는 유가족들을 바라보면서, 이 땅에 이러한 역사가 또다시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다짐을 하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이후의 한반도의 반쪽도 안되는 남쪽의 역사는 아군과 적군도 가리지 못하는 참으로 통탄할 역사만 되풀이 되었다. 항일, 반공의 기틀이 깨어진 오늘, 국민을 하나로 결집하는 국민적 정신과 철학도 없고, 지도자도 보이지 않는다. 생활 수준은 전보다 나아졌으나, 정신적인 혼란은 해방 직후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나가 되어도 21세기의 난국을 헤쳐 나가기가 힘이 드는데, 온 국가와 국민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남으로 갈지, 북으로 갈지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국민을 선도하여야 할 지도층의 혼란은 일반 국민을 능가한다.
끝으로, ROTC의 의의를 쓰라면, 첫째 초급 장교의 대량 배출이다. 당시 일군 예하 모든 전투 부대의 장교는 T.O.의 50%에도 못 미치고 있었다. 이것을 일개 대대에 2명 밖에 없었던 정규 육사 출신들과 다른 여러 간보 후보생 출신으로 충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둘째는 장교의 고급 학력화이다. 서울에서 가까운 서부 전선에 있던 우리 대대의 경우도 4년제 대학 학력 보유자는 2명의 육사 출신과 사병으로 입대하였다가 간보 훈련을 받은 서울 농대 출신의 선배 한 명 등 모두 3명 밖에 없었다. 소위 빽이 없다고 투덜대었던 중부, 중동부, 동부 전선의 경우는 결코 이보다 낫지 못하였을 것이다. 셋째, 부정부패의 단절이다. 전쟁이 끝난지 10년, 정부가 부패하다보니, 군만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난한 국가에서 일반 공무원4급 을에 해당되는 소위의 초봉은 겨우 쌀 한가마니의 값 밖에 안되는 4,550원이었다. 가족을 많이 거느린 중상사의 경우는 이 보다 훨씬 적었다. 가족의 기본적인 식생활도 안되는 봉급을 가지고, 거기다가 주거해야 하는 주택도 없이, 그리고 자녀들의 교육비등, 자유당 말기, 5.16 혁명 직후의 대한민국 전체의 국력이 동남아의 태국과 필립핀이 하늘처럼 올려다 보일 때였다. 외국으로부터의 수입도 못하고, 자체 생산 능력이 없었던 당시, 전국에서 움직이는 화물차와 뻐스의 엔진은 다 군에서 나온 것이다. 돈이 없어 기름도 못 사오고 정유 시설도 없던 시절, 그 많은 자동차를 움직이는 휘발유는 다 어디서 나온 것일가. 그리고, 각종 부속이며, 연장이며, 타이어, 기름은… 그 밖에 군복, 군화, 담요, 배낭, 야전삽 등, 동대문 시장에서는 한 시간 내로 2개 보병 사단, 남대문 시장에서는 1개 보병 사단의 병참 물자를 조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 EE-8 군용 전화선을 각 가정에서 빨래줄로, 그리고 바구니로도 만들어 썼다. 그리고 수 많은 건전지와 전국 각지에 널려 있는 약방에 진열되어 있는 약품과 의료 기구는 대부분이 군에서 흘러 나온 것이다. 멋도 모르고 인수 인계서에 싸인을 하고 나서, 확인차 창고를 열어 본 순간, 텅 비어 있는 창고를 보고, 그 자리에서 도망을 갔다는 병참, 병기를 위시한 여러 병과의 동기생들의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어느 정권도 감히 막을 수 없었던, 군의 한계를 넘는 이 국가적인 커다란 부패의 흐름을 ROTC로 인해서 일시에 차단할 수 있었다는 것은 군의 범위를 벗어나는 국가적인 큰 공로라고 할 수 있으며, ROTC로서만이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단순한 지식 교육의 대상이 아닌, 미래의 교훈이다. 올바로 선 역사 위에 올바른 역사를 세울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잘 못된 근세, 현대사는 자라나는 새 세대로 하여금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국가도 발전하고, 군도 발전하여야 한다. 선배 없는 후배는 존재하지 않는다. 선배는 후배의 거울이다. 올바른 선배는 후배의 성공의 교두보가 될 것이며, 옳지 못한 선배도 실패의 경종이 될 것이다. 후배는 선배의 잘 잘못, 양쪽을 다 알고 있어야 한다. 한쪽만 보면, 애꾸가 되기 쉽다. 최후의 승자는 승승의 연속이 아니라, 승패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태어난다. 자체 보급도 월등하게 나아졌고, 화력도 막강하여졌다. 그러나 못내 아쉽게 생각되고, 미련이 남는 것은, <정신 무장>과 <사기>에 대한 것이다. 특히 계급이 높아지는 고급 지휘관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6.25 때는 국가가 생존할 수 있었으나, 현대전에 있어서 <채병덕>과 같은 인간이 또 다시 나온다면, 군과 국가가 재기, 재생할 수 있는 기회는 없다. 후배들로부터 21세기의 군을 이끌어 나갈 훌륭하고, 유능한 지휘관, 전술, 전략가, 군사학자들이 많이 배출되기 바라며, 이 가운데서 국가를 이끌어 나갈 훌륭한 지도자들도 많이 배출되기 바란다. 사람은 많지만, 인재는 하루 아침에 저절로, 자연히, 자동적으로 혹은 우연히, 우발적으로, 그리고 돌발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군을 사랑한다>. 그리고 새 역사를 창출할 후배들에 대한 기대도 크다. 나의 이 보잘 것 없는 글이 동료들에게 아름다운 추억 거리를 전해 주며, 후배들에게는 어려웠던 시절, 역사의 한 단편의 기록과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글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오늘도 전후방에서 남이 모르는 가운데, 묵묵히 자기의 본분을 다하며, 통일의 대업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격려를 보낸다. 그리고 ROTC 전체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임관 40주년(2003년)을 맞이하여,
포병 예비역 소위 주영세 (101 ROTC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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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들의 <이야기>이지만, 지나간 역사의 한 <단편>과 <자료>로서 많은 친구들과 후배들이 서로 권고하며, 읽어주면 고맙겠다. 그리고, 쓰는 사람의 노고를 위해서도, 그냥 읽지 말고, 좋던 나쁘던 많은 <댓글>을 올려주면, <사랑의 회초리>로 생각하고, 더욱 분발하도록 할 것이다. 대한민국 ROTC 50 역사상, 최초의, 그리고 유일무이한 기록이라고 자부한다.
많이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