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1월 16일, K-tel레코드는 국제아동 연금을 기념해서 13곡이 들어있는 자 선모금 베스트앨범을 내놓았다. 이 앨범에는 제플린의 곡 'Candy store rock'도 수록되어 있었는데 재킷에는 앨범의 계획에 동의하는 제플린 멤버들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은 제플린에게 최대의 찬사를 보냈다. 잡지 Cream과 Circus에서 음악분야의 대부분의 상을 제플린에게 주기로 한 것이었다. 두 잡지사에서 수여하는 상이란 상은 거의 제플린이 맡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Stairway to heaven'은 70년대의 넘버원 송으로 꼽았다. 제플린에게는 정말 생 각하지도 못했던 상이었고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떨어진 격"이었다. 2월 로버트 는 버밍엄에서 Rockpile의 게스트로서 스테이지에 섰다. 그리고 3월 상순 존 보냄 은 TV영화의 테마뮤직을 작곡하기도 했다. 4월이 다 갈 즈음, 제플린은 런던에 있 는 Rainbow theatre에 들어가 며칠간의 연습을 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중도에 보 도되어서 이들은 또 다른 장소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제플린의 유럽 연주여행 뉴스가 공식화 되었다. Harvey Goldsmith에 의해 기획된 이 연주여행은 5월초 비엔나에서부터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연습이 이럭저럭 늦어져서 공연날짜는 뒤로 미루어졌고 6월 6일에야 첫 공연을 하게 되었다. 연주여행 첫 무 대는 독일의 Dortmund였다. 연주여행의 일정을 보면 18일 - 케룬, 20일 - 부랏셀, 21일 - 로테르담, 23일 - 브레멘, 26일 - 빈..이러한 순서로 진행케 되어 있었다. 이렇듯 타이트하게 짜여진 유럽 순회연주가 끝나면 곧 미국으로 향해서 다시 미국 내 연주여행을 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스테이지는 보통 2시간에서 2시간 30분 정도의 공연 스케줄이었다. 유럽각지에서의 평균 청중수는 4천명에서 1만명사이였 다. 연주여행 도중 지미는 언제나 처럼 녹색의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각멤버의 헤어스타일은 1969년때의 그 모습이었다. 그런데 우연인지는 모르나 오 프닝 넘버가 또 으레 1969년대의 것이었다. 가는 곳마다 팬들로부터 절찬을 받은 제플린의 연주는 어딘가 조금 변한 것이 있었다.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것들이 나 타났는데 그중의 하나가 스테이지의 변화였다. 지금까지의 스테이지는 호화판 일 변도였는데 이번에는 상당히 소박해져 있었다. 그러나 변화무쌍한 조명이라든가 'Trampled under foot'에서 관객을 향햐 온통 조명을 비치는 조명은 여전했다. 이렇게 휘황찬란하던 조명이 'No quarter'가 시작되면서 부터는 모두 사라지는 것 이었다. 오직 비치는 곳은 바이얼린을 연주하는 지미에게만 Scoop 라이트를 쓰는 것으로 조명방법이 달라져 있었다. 연주 곡은 보통 13곡으로 스테이지에서는 'All my love'가 처음으로 레코딩에 적합하게 연주되고 있었다. 이번 연주여행에서는 모든 것이 중간정도의 규모였다. 규모가 적어졌기 때문에 멤버와 청중사이에는 친 밀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지미는 이러한 무대생리가 마음에 드는지 그는 여느때보다도 무대 위를 많이 돌아다니면서 연주를 했다. 이번 연주회에서 또하나 전에 볼 수 없었던 광경은 지미가 곡이 바뀔때마다 곡목을 소개하는 것이었 다. 때로는 그 나라의 언어로 곡목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지미의 발음이 정확치는 않았지만 무척 애교가 있어 보였다. 이러한 곡목의 소개는 그 나라 청중을 한층 더 기쁘게 해 주었다. 그런데 청중들의 반응이 굉장했는데도 영국의 신문, 잡지들 은 제플린의 유럽여행 소식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반면에 유럽의 많은 매스컴 들은 제플린의 활동을 소상하게 그리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Steve Gheft는 뮌헨에서의 제플린의 공연실황을 멜러디 메이커지에 실었다. 페이 지의 사진을 곁들여 보도한 기사가 근대 제플린에 대한 보도의 전부였다. 스티브 가 쓴 뮌헨 공연에 대한 기사를 보면 제플린 멤버가 청중과 혼연일체가 되어서 정 말로 즐거운 연주여행을 하고 있다고 썼다. 그런데 제플린은 독일 Nurenberg에서 는 3곡만을 연주하고 공연을 중단했다. 존 보냄이 무대위에서 쓰러진 것이다. 놀 란 것은 멤버뿐 아니라 청중도 마찬가지였다. 장내는 한때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 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진 존 보냄은 응급조치를 받았다. 정신을 차린 존 보냄은 그래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의사의 선고는 무거웠다. 쓰러진 원인은 극도 의 피로가 겹친데에 있었다. 이틀뒤 스위스의 Zurich에서는 존 보냄도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그러나 공연이 끝난 뒤 그는 심한 복통을 호소했다. 1980년 유럽의 여 름은 몹시도 무더웠다. 낮뿐 아니라 해가 진 뒤에도 무더위는 가시지 않았다. 한 밤에도 비지땀을 흘려야 했고 에어컨을 가동시킨 방에서도 더위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무더위는 공연장에서도 역시 고약했다. 특히 지미는 땀을 대단히 흘 려 지미가 머리를 흔들 때마다 그 땀이 객석으로 튀어가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이 연주여행을 소재로 한 책이 2권 발행되었다. 한권은 Viva rock이라 는 일본어로 된 사진 화보집이었는데 유럽연주여행의 모습을 칼라와 흑백사진으로 엮은 다큐멘터리였다. 그리고 또 한권은 제플린의 유럽공연을 동행한 Dave Lewis 가 쓴 기행문이었다. 이 책에서 데이브 루이스는 유럽연주여행을 하고 있는 제플 린과 그 멤버들의 소상한 생활을 숨김없이 기술했다. 로버트가 그 어느 연주여행 보다도 뜻있게 보냈다는 내용으로 시작해서 각 멤버들의 습관, 기습, 식성에 이르기 까지 알려지지 않은 화제도 많이 담고 있었다. 이즈음에도 존 보냄의 위통은 자주 나타났다. 한번 위통이 일어나면 그는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고통을 겪는 것이 었다. 주변에서 근본적인 치료를 해야할 게 아니냐고 물으면 그는 별로 근심할 정 도가 아니라면서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 웃음뒤에는 몹시 견디기 어려운 고 통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었다. 유럽순회공연은 Knebworth festival 이래 처음 열 리는 큰 것이었으나 웬일인지 연주 프로그램은 제작되지 않았다. 프로그램 대신 연주여행 출발에 앞서 촬영된 대형 칼라 포스터가 스완 송 레코드 회사 발행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이밖에 제플린의 심벌마크가 새겨진 뱃지가 나왔고 제플린의 모 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페넌트가 팔리고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상품들은 제플린 이 가는 곳이면 어디서든 날개돋힌 듯 팔렸다. 연주여행이 끝나자 로버트 플랜트 와 존 폴 존스와 존 보냄은 각기 가족과 함께 단란히 지내기 위해 가정으로 돌아갔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