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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서원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한국서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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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배향인물: 유숭조(柳崇祖) 김중청(金中淸) 이종준(李宗準) 이홍준(李弘準) 정유일(鄭惟一) 홍준형(洪浚亨) 김성구(金聲久) 권두인(權斗寅) 권두경(權斗經) 이광정(李光庭) ❏창건연도: 2006년 ❏향 사 일: 3월 초정(初丁) |
경북 봉화는 영남의 북부 안동유교문화권(安東儒敎文化圈)에 속해있는 산자수명(山紫水明)하고 인심 좋은 군(郡)으로 관내(管內)의 서원(書院) 16개소(個所)와 리사(里社) 6개소(個所)에 봉안(奉安)된 60위(位)의 유현(儒賢)을 배출한 유서(由緖) 깊은 고장이다.
이곳에 세워진 송록서원(松麓書院)은 봉화(奉化)에 이미 있었던 송천(松川), 반천서원(槃泉書院)과 백록이사(栢麓里社)의 삼원사(三院社)를 통합(統合)하여 향중(鄕中)의 사림(士林)들이 정성(精誠)을 다 하고 국가(國家), 지방자치단체(地方自治團體), 민간자본(民間資本) 등의 보조금(補助金)으로 서원(書院)이 훼철(毁撤)된지 140년만에 옛 백록이사(栢麓里社) 자리에 복설(復設)한 서원(書院)이다. 돌이켜 보면 송천(松川)은 진일재 유숭조 선생(眞一齋 柳崇祖 先生), 반천(幋泉)은 구전(苟全) 김중청 선생(金中淸 先生), 백록(栢麓)은 용재 이종준(慵齋 李宗準), 눌재 이홍준(訥齋 李弘準), 문봉 정유일(文峯 鄭惟一), 매헌(梅軒) 홍준형(洪浚亨), 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의 여덟선생(先生)을 모신바 있었으니 오늘 복설(復設)한 이 서원(書院) 주벽(主壁)에 문목공(文穆公) 진일재(眞一齋) 유숭조(柳崇祖) 선생을 모시고 아홉 선생을 시대순(時代順)에 따라 동서(東西)로 나누어 동(東) 5위(位), 서(西) 4위(位)를 종향(從享)하여 봉안(奉安)하고 송록서원(松蔍書院)이라 이름하였다. 이들 10현(賢)은 향리(鄕里) 출신으로 그 행장(行狀)은 다음과 같다.
1)유숭조(柳崇祖, 1452~1512)
고려말에 음덕(蔭德)을 쌓아 오자일서(五子一婿) 모두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일세(一世)를 빛낸 완산백 휘습(完山伯 諱濕)과 비위 삼한 국대부인 전주최씨(三韓 國大夫人 全州崔氏)는 선생(先生)의 후손이다.
선생(先生)은 전생서령(典牲署令)이며 예조참판(禮曹參判) 증직(贈職)된 휘지성(諱之盛과) 안동권씨(安東權氏)(계림군 구(玽)의 후예인 득지(得志)의 따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1472년(성종3년) 21세 진사(進士)
1480년(성종 11년) 29세 성균관(成均館)에 유학
1489년(성종 20년) 38세 관시(館試)에 1등(等)으로 뽑힘
예문관 검열겸 춘추관 기사관(藝文館 檢閱兼春秋館 記事官)이 되고 성균관사(成均館事)를 겸임하다.
1490년(성종21년) 39세 사유(師儒)로 선발
1493년(성종24년) 42세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1503년(연산 9년) 52세 경기도 여주(원주)에 부처(附處)
1505년(연산11년) 54세 경옥(京獄)에 갇혔다가 다시 여주로 유배(流配)
1506년(중종 원년) 55세 경연(經筵)에 입시
1507년(중종 2년) 56세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에 제수(除授)
1511년(중종 6년) 60세 문묘(文廟)에 배알(拜謁) 후 명륜당(明倫堂)에서 강(講)함
학전(學田) 백결하사(百結下賜)
저서 대학강목잠(大學綱目箴)과 성리연원촬요(性理淵源撮要)를 국왕께 바치다
특지(特旨)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자급(自給)을 높이고 당표리(唐表裏) 한 벌과 금대(金帶) 하나를 하사(下賜)
11월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에 배명(拜命)되었으나 외직(外職)의 부당함을 계(啓)한 삼공(三公)들의 말을 들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바꾸다
1512년(중종7년) 61세 고종(考終)
국왕은 관곽(棺槨)과 부의(賻儀)를 내리다
문사들이 조문하여 경학노사(經學老師)께서 돌아가시니 유가(儒家)의 횡액(橫厄)이라 하였으며 성균관 유생(儒生)들은 자신의 친속(親屬)인양 7일간이나 소복(素服)을 입고 조문하다
1822년(순조22년) 위판(位版)을 전주(全州) 용강서원(龍岡書院)에 봉안(奉安)
1823년(순조23년) 위판(位版)을 안동부(安東府 내성현(지금의 봉화읍) 송천서원(松川書院)에 봉안(奉安)
1851년(철종 2년)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사(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経義禁府事) 홍문관대제학예문관(弘文館大提學藝文館)
대제학지춘추관 성균관실록사(大提學知春秋館 成均館實錄事)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 都摠管)에 증직(贈職)
1854년(철종 5년) 유범휴(柳範休), 유정문(柳鼎文), 유치명(柳致明)의 상소로 문목(文穆)이란 시호(諡號) 내림
1855년(철종 6년) 부조묘(不祧廟)를 시행토록 윤허(允許)
1862년(철종 13년)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사(崇政大夫 議政府 左讚成 兼 判義禁府事 知經筵事) 총문관 및 예물관 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大提學知春秋館 成均館事 五衛都摠府 都摠管)으로 증직(贈職)
1883년(고종 20년) 문묘 배향(文廟 配享)을 상소(上疏)하여 청(淸)했으나 후일(後日) 기다리라 하다
조선 성종때의 학자, 자는 종효(宗孝), 호는 진일재(眞一齋), 시호는 문목(文穆), 본관은 전주(全州), 14889년(성종20년) 문과에 급제, 한림(翰林)ㆍ삼사(三司)를 거쳐 중종 때 대사성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일찍이 연산군 난정(亂政)때 장령(掌令)으로서 10여 조의 소문(䟽文)을 올려 직간(直諫)했으며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때에 원주(原州) 장배(杖配)되었다가 중종반정 후에 특히 판결사(判決事)로 뽑혔고,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등을 지내면서 중종의 신임을 받았다. 역서(易書)ㆍ예기(禮記)ㆍ천문ㆍ역상(曆象) 등을 모두 통달,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었으며, 「칠서언해(七書諺解)」를 지었는데 이는 경서(經書)의 언해로는 처음의 것이었다.
저서 진일재집(眞一齋集)이 있다.
2)김중청(金中淸, 1567(명종22)~1629(인조7))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이화(而和). 호는 만퇴헌(晩退軒)ㆍ구전(苟全), 아버지는 절충첨지중추부사(折衝僉知中樞府事) 몽호(夢虎)이다. 조목(趙穆)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났다.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13년 전적, 예조좌랑, 정랑을 역임하고 이듬해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5년에 문학(文學)이 되었으며, 정언(正言)으로 폐모론을 반대하는 이원익(李元翼)을 탄핵하라는 대북파(大北派) 정인홍(鄭仁弘)의 부탁을 거절하자 파면되었다. 1616년 신안현감(新安縣監)에 이어 1621년 승정원승지로서 선유사(宣諭使)가 되어 영남을 순행하였다. 이후 산직(散職)에 머물렀으며 인조반정 후에는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봉화의 반천서원(槃泉書院)에 제향되었다.
3)이종준(李宗準, ?~1499(연산군 5)
조선전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균(仲鈞), 호는 용재(慵齋)·용헌(慵軒)·부휴자(浮休子)·상우당(尙友堂)·태정일민(太庭逸民)·장육거사(藏六居士). 안동 출신. 대사헌 승직(繩直)의 손자이며, 홍준(弘準)의 형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에 1등 3인으로 급제하였고, 의성현령으로 있으면서 〈경상도지도〉를 만들었다. 1493년에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며,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그는 풍류로 명성이 있어 일본호송관 또는 북평사(北評事) 등의 직책에 임명되었고, 의정부사인에 이르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서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가는 도중에 단천군 마곡역을 지나다가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바른말 하다 귀양가는 당개(唐介)를 송별하면서 지은 시 한 수를 써놓고 갔는데, 함경도관찰사 이승건(李承健)이 이는 나라를 비방하고 왕을 기롱(譏弄)한 것이라고 조정에 고하였다. 마침내 연산군은 그가 원망하는 뜻을 가졌다 하여 서울로 압송, 국문 도중 죽었다. 홍귀달(洪貴達)이 그를 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부제학으로 추증되었고, 안동의 경광서원(鏡光書院)·백록리사(栢麓里祠)에 제향되었다. 유고가 있다. 시·서·화에 능하였고, 그림은 매(梅)·죽(竹)을 잘 그렸다고 하나 전하는 유작은 없다. 현재 장식화풍으로 그려진 송학도(松鶴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1점이 그의 전칭작품으로 전하고 있다.
4)이홍준(李弘準)
호는 눌재(訥齋)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용제(慵齋) 이종준(李宗準)의 아우로 형제(兄弟)간이다.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일세(一世)에 빛났다. 천성향약(川城鄕約)을 만들어 효제(孝悌)와 돈목(敦睦)으로 인도하여 많은 문학지사(文學之士)를 배출하다.
5)정유일(鄭惟一, 1533(중종 28)~1576(선조 9))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중(子中), 호는 문봉(文峰). 본관은 동래(東萊), 이황(李滉)의 문인이였다. 1558년(명중 13)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영천군수(榮川郡守)‧이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1571년 사인(舍人)으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대사간, 승지,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주자학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중심으로 이황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따랐다. 《한중필록(閑中筆錄)》 《관동록(關東錄)》 《송조명현록(宋朝名賢錄)》 등을 저술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그밖의 저서에 《문봉집》 등이 있다. 안동(安東)의 백록리사(栢麓里祠)에 제향되었다.
6)홍준형(洪俊亨, 1606(선조 39)~1666(현종7))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언겸(彦謙), 호는 매헌(梅軒), 아버지는 적(勣)이며 어머니는 기계유씨(杞溪兪氏)로 대기(大祺)의 딸이다. 작은 아버지인 진사 사려(思勵)에게 입양되었다. 1651년(효종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학행으로 천거되어 1658년 선릉참봉(宣陵參奉)이 되었다.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역학(易學), 의약학(醫藥學)에 조예가 깊었다. 백록리사(栢麓里社)에 제향되었다.
7)김성구(金聲久, 1641(인조19)~1707(숙종 33))
조선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덕휴(德休), 호는 팔오헌(八吾軒)·해촌(海村), 봉화출신, 아버지는 용양위 부호군 추길(秋吉)이다. 1662년(현종3) 사마시를 거쳐 166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전적, 무안현감, 직강, 지평, 수찬, 정언 등을 지냈다. 수찬 재직시 국가 재정에 관하여 각사(各司)의 비용과 내탕비(內帑費)를 줄여 진휼비에 보충하는 일과 경사(經史)를 열심히 강론하여 치도(治道)를 구하는 일 등 수천언의 소를 올렸고 정언재직시에는 당시 형조판서 남구만(南九萬)이 진휼비를 탕감했다고 고발하였다. 1679년(숙종 5) 장령재직시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누어지면서 논핵(論劾)되어 제주도 정의((旌義) 등의 벽지로 쫓겨났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복관되어 대사성·집의·헌납·좌승지·강원도관찰사·병조참지 등을 거쳐 호조참의를 역임하였다. 그뒤 갑술환국으로 노론이 득세하자 향촌에 물러나서 서사(書史)를 즐기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는 관직생활에 있어서 공사를 분명히 하였다. 봉화의 백록사(柏麓祠)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팔오헌집이 있다.
8)권두인(權斗寅, 1643(인조21)~1719(숙종45))
조선시대 학자, 자는 춘경(春卿), 호는 하당(荷塘), 본관은 안동(安東) 연이은 부모와 조부의 상으로 인해 35세때 비로서 진사시(進士試)에)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심, 학행으로 효릉참봉(孝陵參奉)이 되었다. 충재(冲齋)의 5대손으로 매헌(梅軒) 홍준형(洪浚亨)에게 수업하고 공조좌랑 영춘현감(永春縣監)을 역임
9)권두경(權斗經, 1654(효종 5)~1728(영조 1))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천장(天章), 호는 창설재(蒼雪齋). 충정공(忠定公) 발(橃)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자감정 석충(碩忠)이며, 아버지는 유(濡)이고, 어머니는 예안김씨(禮安金氏)이며, 처는 김시온(金是榲)의 딸이다.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으로 이재(李栽) 등과 교유하였다. 1679년(숙종 5)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89년 문학으로 천거되고, 1694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태릉참봉(泰陵參奉)·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직장(直長)·종부시주부를 거쳐, 형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700년 봄 정랑(正郞)에 승진되었으나 곧 이어 영산현감(靈山縣監)으로 부임하여 풍속을 크게 교화시켰다. 1710년 문과에 급제, 성균관직강·전라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그뒤 사간원정언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는 이변이 있자, 사직 상소를 올려 시정(時政)의 잘못에 대해서 논하였다. 1717년 영남에서 1만여인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릴 때 그 상소문을 기초하였다. 1721년 경종이 즉위하자 고산찰방(高山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뒤 귀향하였다. 1723년(경종 3)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그뒤 수찬이 되어 시정의 폐단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 문장이 뛰어났는데, 특히 시에 능하였다. 뿐만 아니라 산천의 형세, 인물의 출처(出處), 세대의 변혁, 동방군신(東方君臣)의 현부(賢否), 정치의 득실(得失) 등에도 예리한 안목이 있었다.
저서로는 창설집이 있고, 편저로는 퇴계선생언행록(退溪先生言行錄)과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