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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새로운 사상의 등장⑧??⑨[이덕일의 事思史 ]
이장희 추천 0 조회 11 14.05.23 16: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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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회·북풍회 ‘아서원’서 조선공산당 결성하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새로운 사상의 등장

 

국내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한 서울청년회는 조선공산당을 창당해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으려 했다. 그러나 코민테른 파견원들이 주축인 화요회는 서울청년회에 공산당 창당의 주도권까지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화요회는 북풍회를 끌어들여 당 창건에 나섰다.

 

 

1925년 4월 전조선기자대회가 열렸던 수운회관. 이 행사는 조선공산당 창당 날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사진가 권태균]

 

1925년 4월. 일제 경찰(日警)은 정신 없었다. 4월 15∼17일 ‘조선기자대회’가 열릴 예정인 데다, 20일부터는 ‘조선민중운동자대회’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24년 1월 출옥한 박헌영·임원근·김단야가 동아·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기자들 중에는 이른바 ‘주의자’들이 많았다.

4월 15일 오전 10시 서울 경운동 천도교기념관(수운회관)에서 열린 ‘조선기자대회’는 1921년 한인 기자들이 조직한 무명회(無名會)가 주최한 것으로, 당초 2월에 열기로 했다가 4월로 연기된 행사였다. 연기 이유는 조선공산당 창당 날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기자대회 마지막 날인 17일에는 동대문 밖 상춘원(常春園)에서 간친회가 열렸는데 일경의 시선은 각종 언론 대표 693명이 모인 기자대회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상춘원은 천도교 교주 손병희가 3·1운동을 기획한 곳이기도 했다.

일경은 조선기자대회 행사가 별일 없이 끝난 데 안도할 사이도 없이 4월 20일부터 시내 장곡천정(長谷川町) 경성공회당에서 열리는 조선민중운동자대회(이하 민중대회)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4월 18일까지 민중대회에 참가 의사를 밝힌 단체 수는 노농단체 263개, 청년단체 100여 개, 백정 등 신분 해방 단체인 형평단체 18개, 사상단체 44개 등 도합 425개나 되었다.

그러나 민중대회는 서울청년회 계열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샀다. 민중대회 배후에 화요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청년회는 1925년 4월 7일 서대문 한성강습원(漢城講習院)에서 230여 개 단체가 모여 ‘전국민중운동자대회 반대단체전국연합회(이하 연합회)’를 결성했다. 연합회는 결의문에서 “화요회 일파가 주최하는 조선민중운동자대회는 그 소집 시기와 방법, 주최의 동기로 보아서 운동선(線)을 규란(糾亂)하는 것임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반대 대회를 개최한다”고 결의했다. 민중대회가 조선 민중의 투쟁 역량을 나누어 결과적으로 일제를 이롭게 한다는 논리였다.

 

 

1 서울 낙원동 민중대회 준비회 앞. 일제가 교통까지 막고 민중대회를 금지시킨 데 대해 관련자들이 항의하고 있다. 2 기자간친회가 열렸던 상춘원. 일경의 시선이 상춘원에 쏠린 틈을 타서 화요회는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을 결성했다.

 

연합회는 조선 사회운동의 가장 큰 문제점을 분규와 혼란으로 규정짓고 그 원인은 “화요회 일파, 해외에 있는 전 상해파 및 이르쿠츠크 일파의 수령(首領) 등에 있다”면서 “아등(我等)은 조선운동전선의 통일과 정의를 위해서 화요회 일파 및 전 상해파 및 이르쿠츠크파 수령 등을 철저히 구축하겠다”고 결의했다. 서울청년회는 코민테른 파견원들이 주축인 화요회가 자파의 세력 확장을 위해 국내 운동선을 분열시킨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연합회는 화요회 일파의 죄악서(罪惡書)를 작성해 발표하고, 화요회 성토 전국대회를 개최하겠다고 선언했다.

주목할 것은 서울청년회에서 화요회의 뿌리인 이르쿠츠크파뿐만 아니라 상해파도 격렬하게 비판했다는 점이다. 결의문은 ‘해외에 있는 상해파 및 이르쿠츠크파 수령’ 등에 대해서 ‘저들이 조선운동선상에서 범한 상세한 죄악서를 발표하되 특히 흑하사정(黑河事情: 자유시 참변)과 40만원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적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르쿠츠크파에 대해서는 독립군을 무차별 학살한 자유시 참변의 책임을 묻고, 상해파에 대해서는 레닌 자금 횡령 사건의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요회에 대한 서울파의 공세는 일제가 18일 밤 11시쯤 돌연 민중대회 불허를 통보하면서 일제에 대한 분노로 옮겨갔다. 19일 아침 민중대회 관계자들은 낙원동 대회준비회로 몰려들었으나 일경에 의해 해산되었다. 일경은 준비회 정문과 집안 곳곳에 정·사복 경찰들을 배치해 일반인들의 출입을 봉쇄했다. 그러자 민중대회 관계자 300여 명이 오후 3시쯤 낙원동 파고다 공원으로 몰려들었지만 다시 일경에 의해 공원 밖으로 쫓겨났다. 밤 9시쯤에는 종로 2가 단성사와 우미관 앞에 200여 명의 시위대가 모여 붉은 기 5개를 들고 ‘전조선 민중운동자 대회 만세!’ ‘무산자 만세!’라고 외치며 종로 3가 방향으로 진행했다.

가두시위에 야시(夜市)에 나왔던 수천 명의 군중이 가세하면서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다. 깃발 중에는 ‘무리한 경관의 압박에 반항하자!’라는 내용도 있었다. 종로경찰서의 송천(松川) 경부보는 예비경비대와 사복 경관, 기마경찰대 등 50여 명을 출동시켜 진압했다. 동아일보(1925년 4월 22일)는 ‘시위 행렬에 참가한 사람들은 물론 거리에 번적거리는 사람은 부인만 빼놓고는 누구든지 닥치는 대로 곤봉으로 구타를 하는 등 극히 폭력적으로 해산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밤 10시쯤에야 단성사 앞에서 시위 군중을 겨우 해산시킬 수 있었을 정도로 저항은 격렬했다.

일경은 시위 광경을 촬영하던 시대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사진기자의 카메라를 부수거나 구타하고 사진을 압수해 언론계와 법조계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일경은 마산청년회원 김상주(金尙珠), 대구청년회원 신철수(申哲洙), 서울청년회원 정용석(鄭溶錫), 신흥청년동맹회원 김창준(金昌俊) 등 주모자 15명을 체포했다. 이 중 마산청년회원 김상주는 이틀 전 비밀리에 조선공산당 창당 모임에 참석했던 인물이었다. 이들이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시위를 조직한 세력이었다. 조선기자대회와 민중대회는 화요회가 조선공산당 창당 움직임에 쏠릴 일제의 정보망을 돌리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일경의 눈이 기자간친회가 열리는 상춘원에 쏠려 있던 1925년 4월 17일 오후 1시. 서울 황금정(을지로)의 중국음식점 아서원(雅<53D9>園) 2층 방에 20여 명의 사람이 모여들었다.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김재봉·김찬(김낙준)과 김약수, 윤덕병, 조봉암, 조동호(趙東祐:조동우), 송봉우, 유진희, 독고전 등이었다.

겉으로는 주연(酒宴)을 가장했지만 코민테른 파견원 김재봉이 ‘오늘의 집회 목적은 공산당 조직을 논의하는 데 있다’는 개회 선언을 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공산당 결성을 위한 것이었다. 김약수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지방 대표들의 현지정세 보고 때 신의주 대표 독고전(獨孤佺)은 ‘국경 지방의 사상 동향이 사회주의자들에게 고무적이다’고 보고했고, 이틀 후 민중대회 사건으로 구속되는 마산의 김상주(金尙珠)는 ‘공산주의 사상이 점차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장래가 유망하다’고 보고했다.

이것이 김재봉을 책임비서로 하는 제1차 조선공산당이다. 한국 근·현대사에 숱한 파란과 족적을 남긴 조선공산당은 이렇게 출범했다. 이 대회의 의사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관련 내용을 파악하려면 체포되었던 관련자들의 진술에 의존해야 하는데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대략 김찬, 조동호, 조봉암 3명을 전형위원으로 선출해 이들에게 중앙집행위원 7명과 중앙검사위원 3명의 선임을 위임한 것으로 보인다.

7명의 중앙집행위원은 책임비서 김재봉, 조직부 조동호, 선전부 김찬, 인사부 김약수, 노농부 정운해, 정경부 유진희, 조사부 주종건이었고 중앙검사위원은 윤덕병, 조봉암, 송봉우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재봉·김찬·조동호·조봉암 등은 코민테른 파견원들이 주축인 화요회에 속했고, 김약수·송봉우·정운해는 일본 유학생들이 주축인 북풍회(북성회) 소속이었다.

조선공산당은 국내 최대 사회주의 운동세력이었던 서울청년회를 배제한 채 화요회와 북풍회가 연합해 결성한 것이었다. 당의 명칭을 고려(高麗)가 아니라 조선(朝鮮)이라고 한 것에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악명 높은 파쟁을 연상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코민테른 파견원들의 계보를 따지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관련자들이므로 이르쿠츠크파가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한 것이었다. 그래서 북풍회의 김약수는 일경에 체포된 후 화요회가 주도한 당 건설에 큰 불만을 갖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아서원에 모였을 때 최초의 집합인 것처럼 자신에게 보이게 했고, 화요회가 북풍회를 서울청년회와 대립하는 데 끌어들였다는 것이었다. 또한 자신은 일종의 장식물로 만들면서 비밀에 속하는 일은 모두 화요회에 속하는 사람들이 처리했다고도 말했다.

김약수는 민중운동자대회에 소비한 5000여원에 대해서도 진술했는데(金枓佺 外 6人 調書) 결국 코민테른 자금이 유입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였다. 책임비서 김재봉과 김찬, 유진희 등은 훗날 일제 신문조서에서 ‘강령, 규약 등을 통과시켜야 했지만 때가 때인 만큼 중앙집행위원회에 맡기기로 하고 오후 4시쯤 산회했다’고 전하고 있다. 당 창건 대회가 3시간 만에 끝나면서 필수적인 당 강령과 규약도 통과시키지 못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당 강령은 전해지지 않지만 김찬은 일제 신문조서에서 당의 당면 문제 슬로건을 “일본제국주의 통치의 완전한 타도, 조선의 완전한 독립. 8시간 노동제·최저임금제·사회보험제, 여성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평등, 의무교육 및 직업교육, 중국 노동혁명 지지·소비에트 연방의 옹호 등이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또한 ‘민족개량주의자와 사회투기주의자의 기만을 폭로하자’는 것도 들어 있었다. 이렇게 조선공산당은 결성됐지만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는 일과 일제의 수사망을 따돌리면서 세력을 확장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다.

 

 

 

 

 

조선공산당 망친 신의주 청년들 ‘신영웅주의’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새로운 사상의 등장⑨ 신의주 사건

 

사회주의 운동은 국제주의 운동이기 때문에 국제적 관점에서 자신들의 활동을 계량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대일(對日) 항쟁기 때 한인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이런 국제적 시각 속에서 자신들의 처지를 객관화할 능력이 부족했고, 이것이 운동 역량 강화에 많은 장애를 초래했다.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관련자에 대한 재판 내용을 보도한 신문 지면(동아일보, 1927년 4월 3일자). [사진가 권태균]

 

 

조선공산당이 결성된 지 약 7개월 후인 1925년 11월 22일 밤 10시쯤. 국경도시 신의주 노송동 경성식당 2층에선 신의주의 청년 단체인 신만청년회 집행위원장 김득린(金得麟) 등 28명이 모여서 결혼식 피로연을 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1층에서는 신의주의 변호사 박유정(朴有楨)과 의사 송계하(宋啓夏)·최치호(崔致鎬)가 신의주 경찰서 순사 스즈키 도모요시(鈴木友義), 한인 순사 김운섭(金運燮)과 회식하고 있었다. 스즈키와 김운섭은 2층의 결혼식 피로연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런데 청년회원들이 술김에 먼저 친일 변호사와 의사, 일경(日警)들에게 시비를 걸면서 ‘신의주사건’이란 대사건이 촉발되었다. 청년회원 김경서(金景瑞)가 박유정과 스즈키에게 “나의 동지 결혼식 피로연인데 축배를 받으라”고 강권하면서 시비가 붙자 2층에 있던 청년회원 10여 명이 내려와서 “순사를 때려라. 잘난 체하는 변호사, 자산가를 때려 부수라”면서 집단 구타를 했던 것이다.

스즈키는 식당 밖 일본인이 많이 사는 영정(榮町) 노무라(野村)상점으로 도주했다. 청년들이 상점 안까지 쫓아가서 스즈키를 구타하자 상점 주부는 이웃집으로 달려가서 신고했고, 일경이 달려오자 청년들은 일본어로 ‘적(敵)이 왔다’고 호응하면서 도주했다. 그 전에 집행위원장 김득린은 박유정 등을 구타하고 나서 오른쪽 팔의 붉은 완장을 가리키면서 ‘이것이 성공했다’고도 말했다. 신의주 경찰서 측은 붉은 완장을 가리키면서 ‘성공했다’고 말하고 경찰을 ‘적’으로 지칭한 것 등이 ‘혁명’을 의미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치밀한 내사에 들어갔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청년회원들은 다음날 밤 8시쯤 진사정(眞砂町) 영생루(永生樓)에 모여 ‘체면 있는 사람을 음식점에서 구타하면 체면상 고발 못한다’ ‘관권 및 자산가를 구타한 축하회를 개최하자’ 등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는데, 이것도 고스란히 일제 정보망에 들어갔다.

 

모스크바 공산대학. 고려공산청년회 박헌영은 이 대학 출신이었는데 청년회 결성 후 비밀리에 21명의 한인 학생을 뽑아서 유학을 보냈다.

김경서의 집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일제는 예상하지 못했던 문서들을 압수했다.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박헌영이 상해의 여운형을 통해 코민테른으로 보내는 비밀문서들이었다.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회의 회원 자격 사표(査表) 및 통신문 3통’ 등의 문서들을 통해 일제는 국내에 이미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이하 고려공청)가 결성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선공산당 결성 다음날인 1925년 4월 18일, 서울 훈정동 4번지 박헌영의 집에서 20여 명의 ‘주의자’가 모여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했던 것이다. 박헌영이 개회사를 하고 김단야가 낭독한 강령 및 규약을 통과시켰는데, 참석자들은 ‘동아일보’의 박헌영·임원근, ‘조선일보’의 김단야·홍증식, ‘시대일보’의 조리환(曺利煥), 노동총동맹 권오설(權五卨), 신흥청년동맹 김찬·김동명·조봉암 등과 각 지방 청년회의 대표들이었다.

그 가운데 마산 청년대표 김상주는 하루 뒤에 민중대회 개최 금지 항의시위를 주도했다가 체포되었는데, ‘신의주사건’으로 비밀결사 조직 혐의가 추가되었다. 고려공청은 조봉암·김단야·박헌영 3인을 전형위원으로 선출해 7인의 중앙집행위원과 3인의 중앙검사위원의 선임을 맡겼다. 증언이 일치하지 않지만 중앙집행위원은 책임비서 박헌영, 국제부 조봉암, 조직부 권오설, 교양부 임원근, 연락부 김단야, 그리고 김찬·홍증식 등이 선임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공청도 조선공산당처럼 화요회가 주도한 것이었다.

조선기자대회, 민중대회 등에 일경의 시선을 쏠리게 해놓고 당과 청년회를 결성했기에 조직 결성 사실을 모르고 있던 일제에 국경지방 청년들의 소영웅주의 행태가 조직의 기밀을 넘겨준 셈이었다. 박헌영은 비밀문서를 ‘조선일보’ 신의주지국 기자 임형관(林亨寬)에게 주어 상해로 보내게 했는데, 신의주의 청년운동을 주도하던 독고전·임형관은 일경의 주목을 받는 자신들보다 김경서의 집에 보관하는 것이 안전하리라고 판단했다가 거꾸로 피해를 보게 된 것이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다루었다. 일제는 1919년 3·1운동이 발생하자 4월에 허겁지겁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를 제정해 독립운동가들을 억압했다. 제령 7호의 제1조는 “정치 변혁을 목적으로 다수가 공동하여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방해코자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는 것이고, 제2조는 “이를 선동한 자의 죄도 동일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령 제7호로써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는 이른바 ‘주의자’들을 처벌하기가 애매하자 1925년 5월 치안유지법을 제정한 것이었다.
치안유지법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 본토의 사회주의자들도 겨냥한 것이었다. 제1조는 “국체를 변혁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거나 또는 그 정을 알고 이에 가입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는 것으로서 ‘사유재산제도 부인’이 추가되었다. 제2조와 제3조는 ‘이의 실행을 협의한 자나 선동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치안유지법은 일본 본토와 식민지 또는 조차지였던 조선, 대만, 화태(樺太:하얼빈), 관동주(關東州:대련), 남양제도 등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조선공산당(이하 조공)과 고려공청은 결성 직후 각각 조동호·조봉암을 코민테른과 국제공산청년회(이하 국제공청)에 보내 승인을 받으려 했다. 승인을 받을 경우 공산주의 운동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계기도 되고, 예산을 비롯해 많은 물적 지원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화요회는 어떻게 국내의 최대 운동세력이었던 서울청년회를 배제한 채 조공과 고려공청을 조직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을까? 서울청년회, 곧 서울파는 화요회의 조선공산당보다 2년여 빠른 1923년 2월(일제 정보자료는 1924년 10월) 고려공산동맹(이하 공산동맹)을 결성했다. 공산동맹은 책임비서 김사국을 블라디보스토크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원동부로 보내 코민테른 국내지부로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책임비서 김사국이 직접 간 것은 경성자유노동조합 사건으로 수배 중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코민테른 승인 여부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승인을 거부했다. 서울청년회는 국내 사회운동을 장악하는 세력이 국내 공산당도 조직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코민테른의 생각과 달랐다. 이 무렵 코민테른은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총지휘부가 아니라 러시아 공산당의 하부기관으로 전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 초기만 해도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유럽의 다른 나라로 사회주의 혁명이 확산되리라고 생각했다. 레닌이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 중에서 볼셰비키 노선을 지지하는 사회주의자들을 모아서 코민테른을 결성한 것 자체가 러시아 혁명을 유럽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볼셰비키들이 특히 주목한 나라는 자본주의가 발달했던 독일이었는데, 독일혁명이 지지부진하면서 러시아의 볼셰비키 사이에서 노선 투쟁이 발생했다. 크게 보아서 영구혁명론과 일국(一國)사회주의론이 대립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주장한 영구혁명은 원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50년 ‘공산주의자 동맹 중앙위원회의 동맹자에 대한 호칭’에서 사용한 용어였다.

영구혁명론의 핵심은 후진국인 러시아 일국으로는 사회주의 혁명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에 유럽 혁명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으로서 세계혁명론이라고도 한다. 이 노선에 따르면 러시아 공산당도 세계 혁명에 우선 종사해야 하기 때문에 러시아 공산당이 유럽이나 다른 국가의 공산당에 대해 우월적 지위를 주장할 수 없었다. 여기에 맞서 스탈린이 제기한 일국 사회주의론의 핵심은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이 뒤따르지 않아도 러시아 일국만으로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이 노선에 따르면 러시아 공산당은 전 세계의 모든 공산당을 지휘할 수 있고, 각국 공산주의자들 역시 러시아 혁명의 보위를 최우선의 혁명 과제로 삼아서 활동해야 했다.

1922년 5월께 레닌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요양에 들어가면서 스탈린의 권력이 강해지고 코민테른은 사실상 러시아 공산당의 하부조직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코민테른 지부와 각국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소련에 대한 충성이 가장 우선시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국내 최대 운동세력이라는 기반으로 코민테른의 승인을 획득하려 했던 서울청년회의 공산동맹은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을 수가 없었다. 화요회가 서울청년회를 종파주의자라고 비난하는 문서를 코민테른에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김사국이 러시아 볼셰비키 지도부의 노선 변화의 의미를 정확히 간파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화요회도 일국 사회주의론이 한국의 혁명노선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정확하게 가늠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다만 화요회로서는 국내 공산주의 운동 주도권 장악에 국내의 지지보다 해외, 곧 러시아의 지지가 중요해져 자파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다. 이른바 국제무대에서 서울청년회는 화요회에 밀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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