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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놀이의 한 가지로 사자의 탈을 쓰고 행하는 민속놀이. 사자탈 안에 2명 또는 3명이 들어가 보조를 맞추면서 사자의 춤과 동작을 보여주는 놀이이다. 특히 사자놀이는 오랫동안 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신령스러운 사자를 통해 그 해의 풍년을 기원하고 액운과 잡귀를 물리치며, 마을에 무사와 안녕을 빌었기 때문이다. 주로 북쪽지방의 농촌에서 농한기에 많이 행해졌고, 중부지방에서는 광주·용인·아산, 그리고 강원도 횡성·원주·울진에서도 행해졌다고 한다. 남부지방에서는 다른 탈놀이에 포함되어 부분적으로 행해진다. | ||||||||
중국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133년 후한(後漢) 때에, 서역(西域)의 국왕으로부터 사자를 선물받았다는 기록이 《후한서(後漢書)》에 있다. 우리 나라에는 통일신라시대 최치원(崔致遠)의 시구에 “사자가 멀리 사막을 건너 만리 길에 왔다.”는 기록이《삼국사기(三國史記)》권32 〈잡지(雜誌)〉에 남아 있다. 그러나 최치원의 시구는 산 사자를 말한 것이 아니고, 털옷을 둘러쓰고 대가리를 흔들면서 꼬리를 휘두르는 사자놀이를 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히려 사자놀이의 전래를 말한 것이다. 따라서 사자놀이는 서역에서 중국을 거쳐 신라에 다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밖에 《삼국유사(三國遺事)》권1 〈기이(紀異)〉편과 《삼국사기》권44 이사부전(異斯夫傳)에 “이사부(異斯夫)가 512년(지증왕 13년)에 우산국(울릉도)을 공격하기 위해 허수아비 사자를 만들어 배에 싣고 가서 섬사람들을 위협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자료들을 통해, 당시 사람들은 사자를 세상에서 제일 사납고 무서운 동물로 여기면서, 그 상징으로 싸움에서나 놀이에서도 사자탈을 많이 이용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밖에 가야국(伽倻國)이 망하면서,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들어온 우륵(于勒)이 <사자기(獅子伎>를 창작하였다. 이 사자기는 곡조만이 아니고 놀이를 동반하는 것이었는데, 우륵이 자기의 예술을 후대에 전수할 때 노래와 춤으로 나누어 가르친 사실로 보아서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 ||||||||
사자놀이가 다른 지방에서는 탈놀이의 막간에 등장하지만, 북청지방에서는 독립적인 주제로 행해졌다. 북청사자놀이는 함경남도 북청군 일대에서 전승되어 온 민속놀이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전승되는 사자놀이이다. 놀이는 해마다 음력 정월 14일 밤 달이 뜬 뒤부터 시작되는데, 놀이의 목적은 벽사진경(酸邪進慶)에 있다. 즉 벽사할 능력을 가진 백수의 왕 사자로 잡귀를 몰아내고 동네의 평안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아래에서 북청사자놀이를 자세히 살펴보자. 1) 다양한 사자의 모습 북청지방의 마을마다 사자 머리모습이 조금씩 다르다. 그 이유는 사자를 직접 보지 못하고 상상하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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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가 사자되면 잘할거 같지요으문다 비키거래이
아무나 물면 안되죠? ㅎㅎ나쁜 기운만 물어가세요....^^
큰행사때 빠지지않는 놀이지요,~TV에서 많이 본것같은데,~~
예.. 많이 봤었죠?
사자탈 안에 2~3명이 들어가 보조를 맞춘다는 것..
쉽지 않을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클로버님 감사합니다 늘 밝고 창대하십시요
행운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