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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침략시에 조선과 일본의 다른 선택이 나라의 운명을 가르다!
이 글에서는 19세기에 서양 세력이 중국과 일본 및 조선을 침략한 과정을 알아보고, 전쟁후에 조선은
쇄국정책을 일관되게 유지한 반면에.... 일본은 개항해 전쟁까지 치룬 원수인 적국에서 서구문물
을 받아들였으니 이러한 서로 다른 선택이 운양호 사건에서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842년 하늘 같은 천자(天子)국이라 여겼던 중국 청나라 20만 대군이 2만명에 불과한 영국군과
아편전쟁에서 처참하게 패하자 동양 3국은 엄청난 충격에 빠지는데.... 난징조약으로 영국은
홍콩섬을 할양받고,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다섯개 항구를 강제로 개항시킵니다.
1. 중국이 아편전쟁에 패배한후 조선과 일본의 대응
2년이 지난 1844년에 중국인 웨이위안이 아편전쟁의 과정을 밝힌 “해국도지(海國圖誌)” 를 출판하니
일본은 막부의 로쥬 부터 260여명의 번주와 하급 사무라이까지 다투어 읽고 대책을 논의 합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서양 대책으로 마츠시로번주 사나다 유카쓰라등을 해상방어에 임명하니 후쿠자와 유기치,
요시다 쇼인과 3대 사상가인 사쿠마 쇼잔 (佐久間象山) 은 고문에 임명된후 아편전쟁 보고서 해방팔책
(海防八策) 을 작성하고 ‘동양의 도덕, 서양의 기술’ 이란 모토로 대포주조, 유리제작과 종두법을 도입합니다
일본인들은 저 “해국도지(海國圖誌)” 를 서양의 침략으로 부터 일본을 방어할 비책으로 여긴
데 비해.... 조선은 서양 세력의 침공에 대비할 국방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사교(邪敎) 인
천주교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책이라 여겨서 반겼는데 똑 같은 책을 보고도 이처럼 다릅니다.
북경을 다녀온 사신이 시내가 평온하다는 소식을 전하자 조선의 헌종과 대신들은 가슴을 쓸어
내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완전히 잊어버렸으며.... 헌종이 죽은 후 유배된 역적의
자손으로 농사꾼 강화 도령을 허수아비 임금으로 앉혀놓고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를 하니,
과거시험은 치르기도 전에 급제자 명단이 나돌고 벼슬은 뇌물을 바쳐야만 나갈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500년간 단 한척의 해외 무역선도 띄우지 못했고 단 한명의 상인도
자주적으로 개인이 무역하러 해외로 나간 적이 없었으니, 청나라 조정에서 발행하는 관보(官報) 와
사신의 말로만 정보를 얻었던지라..... 청나라가 대패하고 홍콩등 영토를 잃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반면 일본은 임진왜란 이전에 영파와, 베트남의 호이안과 태국 아유타야 및 말래카 등에 일본인촌을 건설
하고 무역했던 나라인데다가... 나가사키 데지마에 네델란드 상인이 거주했으니, 영국 식민지 싱가포르
의 영자(英字) 신문을 인용한 네덜란드 서적과 동남아 중국 상인들의 보고서를 종합해 아편전쟁 전투
의 실체를 알았으며.... 홍콩 할양에 영사재판권과 관세자주권을 내주는 불평등 조약에 대해 파악했습니다.
1856년부터 1860년까지 2차 아편전쟁이 발발하니 영국은 애로호 사건을 구실로 프랑스와 연합
하여 광저우를 점령해 민간인을 죽이고 시가지에 불을 질렀으며 3년간 지방관의 괴뢰정권을
앞세워 군정을 실시했으며 1858년 북상해 대구포대(大沽炮台)를 부수고 톈진까지 점령
하자 청나라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으며 톈진조약을 맺으니 반(半)식민지로 전락합니다.
일본 막부는 서양 선박에 대한 적대정책을 철회하고 총과 대포 및 증기선 수입등 개혁에 착수하는데, 훗날
청나라는 1876년 영국회사가 부설한 상해와 오송(吳淞) 간 철도를 운행했지만 풍수에 안맞는다는 반대로
곧 철거했으나, 일본은 페리제독이 1854년에 선물한 모형 기차를 뜯어보고는 영국 런던대학교에 유학한
이노우에 마사루가 책임자가 되어 18년만인 1872년에 도쿄와 요코하마 간 철도를 자력으로 부설합니다.
영국은 1863년에 일본의 사쓰마번을 그리고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델란드 함대는 조슈번을 침공했으며,
조선은 1866년 프랑스 병인양요와 1871년 미국 신미양요 침략을 당했는데, 전쟁을 치른 후에 대책이
1842년 아편전쟁때 처럼 조선과 일본은 전혀 다르게 행동했으니 두나라 운명을 바꾸게 되는데 아시아
40개 국가 중에 반(半) 식민지는 중국과 태국 두나라 이고 완전한 독립을 유지한 나라는 일본 뿐입니다.
2. 서양의 일본 침략
(1) 미국 페리제독 일본을 협박해 개항시키다.
1854년 미국의 페리제독은 구로후네(흑선)라 불린 군함을 이끌고 도쿄만에 나타나 일본에 개항을 강요하니,
바람의 힘으로 운행하던 나무로 된 일본의 100톤 짜리 작은 범선에 비하면 이 흑선이라고 불린 2천톤이
넘는 기선은 쇠로 만들어졌으며 석탄을 때어 운행했으니 그 시커먼 연기에 일본인들은 혼비백산했습니다.
미국의 기선들이 일본가지 항해해 온 노선은 도중에 석탄과 식량에 물을 공급받을수가 없는
지라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를 거쳐 태평양을 건넌게 아니라.....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를 경유해 말라카해협을 지나 필리핀을 거쳐 남쪽에서 왔으며 귀국도 같은 코스입니다.
미국은 도쿄시내를 불바다로 만들겠다며 일본에 개항을 강요해 2개 항구를 개항시키는데, 하나는
북태평양의 고래잡이 포경선을 위한 보급항으로 홋카이도의 하코다테이고
두 번째는 태평양을 건너와 중국으로 가는 미국 배를 위한 보급항으로 도쿄 입구 요코하마 입니다.
(2) 영국 함대 사쓰마번(가고시마) 을 침략하다
1) 사쓰마번 유구국 정복 : 사쓰마번은 1590년 임진왜란을 준비하면서 류큐에 군량미를 내놓아라,
가라쓰의 나고야성(名護屋城) 축조 비용을 분담해라등 무리한 요구를 하자 류큐국에서는
일부만 지불한 적이 있는데, 류쿠의 대신 웨카타 리잔이 사자로 온 사쓰마번 승려를
모욕하자 가바야마 히사타카를 장군에 임명하고 3,000명 병사와 선박 80척을 동원합니다.
1609년 3월 4일 사쓰마군은 가고시마를 출항해 7일 아마미오오시마(奄美大島)를 점령했고
3월 25일 류큐 왕국의 본토 나키진의 운텐항(運天港)에 도착해서는 나키진 구스쿠
(今帰仁城) 를 함락시키니..... 5월 15일 사쓰마번은 쇼네이왕과 100여명의 신하들을
가고시마로 데려오니 에도까지 끌려가서 막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항복합니다.
유구(오키나와)는 중국과 조선에 조공무역으로 이득을 챙기고 있었으니 사쓰마번이 유구를 정복
후 대외적으로는 조공무역 유지를 위해 독립국가인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통화까지 주조하고
사탕수수를 재배하게 해서 설탕을 약탈하는데.... 사쓰마번은 일본 260개 번 중에도 조슈번,
가가번, 센다이번, 도사번, 후쿠이번, 미토번, 우와지마번과 더불어 웅번 이라고 불리었습니다.
2) 영국인을 살상한 나마무기 사건 : 1862년 사쓰마번 전 번주 시마즈 히사미쓰는 막부정치를 개혁
한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7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에도(도쿄)로 상경했다가 교토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행렬이 나마무기 (生麦村) 마을에 접어들면서 말을 탄 영국인 상인과 여행자 일행
4명과 만났으니 번사가 엎드리라고 말했으나 ‘옆으로 통과’ 하라고 지시하는 것으로 오해 합니다.
영국인들이 멋대로 움직이자 몇 사람의 번사가 칼을 휘둘렀고 남자 3명은 중상에 여자는 머리
카락 일부가 잘렸는데, 막부는 사쓰마번 대신에 배상금을 물어주었으나 살해자를 인도
받는 것은 사쓰마번이 거부하자 영국은 사쓰마번(규슈 가고시마) 을 응징하기로 결정합니다.
3) 영국함대 7척 사쓰마번 침공 : 1863년 8월 11일, 영국 군함 7척은 가고시마로 진입하니 사쓰마번은 해안
포대로 방어하며, 외국과 교류가 많았으니 서양의 무력을 아는지라 교섭단을 파견해 대화로 풀어보고자
했고 에도 막부측에서도 통역관으로 선각자(엣날 화폐 만엔의 표지 인물) 후쿠자와 유키치를 파견합니다.
영국은 사쓰마번이 나마무기 사건에 대해 최대한으로 책임을 져야한다고 요구했는데, 후쿠자와는 실수로
사쓰마번의 최고 책임자가 처벌받아야 한다고 오역을 하게되는데, 전 번주 시마즈 히사미쓰를 영국
으로 압송하겠다는 뜻이 되니 협상은 결렬될수 밖에 없었고 1863년 8월 15일 영국은 공격을 개시합니다.
영국은 전쟁까지 갈 생각이 없었고 배상금만 뜯는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탄약고 앞에는 에도 막부
에서 받아낸 배상금 돈이 쌓여있던 터라 전투태세에 돌입하는데 시간이 걸리는지라,
사쓰마 포대와 교전하느니 배상금을 대신해 사쓰마측 증기선 3척을 나포해 끌고가기로 결심합니다.
영국이 군함을 탈취하려하자 해안 포대에서 포격을 하였고 영국군은 나포한 군함들을 이끌고
이동했기 때문에 표적이 되었으니 생각보다 강력한 사쓰마군의 화력에 놀라 증기선 나포를
포기하고 귀중품을 탈취한 채 군함들을 전소시킨후 전열을 구축해 사쓰마 포대에 응수합니다.
영국군은 비좁은 해협에서 사쓰마군의 치명적인 십자포화를 받았기 때문에 고전을 면치못하게
되었지만 악조건 속에서도 서서히 사쓰마군 포대를 하나하나 압도하며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주니, 사쓰마군의 포대가 무너지고 있을무렵 사쓰마군이 발사한
박격포 포탄이 영국군 기함에 작렬하면서 부함장이 전사하고 쿠퍼 제독도 부상을 입습니다.
영국군은 기함이 대파당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했으며 설상가상으로 군함 레이스호가 기관 고장으로
해안 근처에서 좌초되는등 악재가 계속되었는데, 해상 전력이 궤멸된 사쓰마군이 좌초된
배를 나포하려 들지않았기 때문에 레이스호는 우여곡절 끝에 다른 군함들에 의해 예인될수 있었습니다.
전투가 생각처럼 풀리지 않자 격분한 쿠퍼 제독은 사쓰마 포대 뿐만 아니라 가고시마 시가지에
보복 포격을 가하였고 이때 포격으로 가고시마는 가택 수백채가 전소되는 큰 피해를 입었
으며 다음날 아침까지 시가지를 향해 계속 포격을 퍼 붓다가 석탄이 떨어지자 물러나게 됩니다.
사쓰마군도 시가지가 초토화 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비장의 병기 기뢰를 설치하였고 당시 기뢰가
원시적이긴 했지만 군함 밑에서 폭발하게 되면 큰 피해를 줄수 있었는데... 다만 사쓰마군이
보유한 기뢰는 3개에 불과했기 때문에 영국 군함들은 운 좋게도 기뢰를 건드리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영국 함대가 철수하니 사쓰마번은 5명의 전사에 9명 부상이었고, 영국군은 13명 전사, 50여명
부상에 군함 2척이 파손됐으니 사쓰마번의 완승이었으며, 그리고 사쓰마번은 아편전쟁
이래 누구의 도움도 없이 독자적인 힘으로 세계최강 영국 함대를 격퇴하는
위업을 달성하게 된 것이었으니 즉 동양이 서구열강을 격퇴한 상징적인 전쟁이 된 것입니다?
사쓰마번은 승리했지만 가고시마 시내가 영국군 함포사격에 초토화되니 오랜세월 공들여 건설한
서양식 산업시설들이 잿더미가 되어버렸으니... 사쓰마번 내 도막파들은 양이(洋夷) 전쟁이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였으며, 사쓰마번이 양이론을 더 이상 내세우지 않는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하게 되었고 영국도 일본의 저항이 상상 이상인지라 동북아 침략 전략을 포기하게 됩니다.
(3) 영국, 미국, 프랑스 및 네델란드 함대 조슈번(야마구치)을 침략하다
사쓰마번(가고시마) 시미즈씨와 조슈번(야마구치) 모리씨는 일본의 전국시대에 가이국
(야마나시) 다케다 신겐, 에치고국(니가타) 우에스기 겐신, 사가미국(오다와라) 호조
우지나오, 스루가국(시즈오카)의 이마가와 요시모토, 오와리국(나고야) 오다 노부나가,
도사번의 조소카베씨 그리고 센다이 번의 다테 마사무네등 9명의 대 다이묘에 속했습니다.
조슈번의 모리씨는 6개국을 통치하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패했고 사쓰마번의 시마즈씨는
규슈를 80% 통일했다가 역시 히데요시에게 패했지만, 임진왜란때 가토 기요마사가 1만,
고니시 유키나가 7천에 비해 모리씨는 3만을 그리고 시마즈씨는 1만을 동원
했는데 히데요시 사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패배합니다.
일본은 전국을 66개국으로 나누었는데 모리씨는 수도인 히로시마와 4개국을 뺏기고 “2개국으로
조슈번” 이 만들어져 동해(일본해) 변두리 하기시를 수도로 삼아야 했고, 사쓰마도 전부 다
토해 내놓고 불과 2개국으로 사쓰마번(가고시마) 만을 통치했으니 속으로 큰 불만
이었지만 발톱을 숨기고 힘을 길러 19세기 말에는 에도 도쿠가와 막부에 도전장을 내밀게 됩니다.
1) 존왕양이를 부르짓다가 막부군의 1차 토벌 : 1854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군함 7척으로 도쿄
우리가만에 나타나 도쿄시내를 불바다로 만들겠다며 개항을 요구하자 에도 도쿠가와 막부
는 굴복해 요코하마와 하코다테를 개항하고 통상조약을 맺으니, 조슈번의 선각자
요시다 쇼인은 존왕양이(尊王攘夷) 론을 제창하며 막부에 맞서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조슈번은 막부에 밀려 허수아비가 된 천황(일왕)을 내세워 막부를 타도하려는 생각으로 군대를 교토에 올려
보내 천황(일왕)을 모셔오려다(납치?) 막부와 아이즈번 및 사쓰마번등과 교토시내에서 전투를 벌여 대패
했으며.... 이로인해 교토 시내는 불바다가 되니 에도 막부는 전국의 260개 번에 영을 내려 15만 대군
을 동원하자 조슈번은 항복하고 강경파 중신 십수명이 할복 자결하고 온건파(친막부파) 정권이 들어섭니다.
2) 신사쿠의 쿠데타 : 이에 요시다 쇼인이 세운 쇼카 손주쿠 학숙의 제자들이 궐기하니 1864년 12월 16일
다카스키 신사쿠는 이토 히로부미의 30명등 불과 80명의 동지로 고잔지 功山寺(공산사) 에서 기병해
시모노세키시를 장악하고 군함을 탈취하자 망설이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등이 참가해 300명 병력으로
3,600명 조슈번병을 격파하고 조슈번 정권을 장악하니 온건파(친막부파) 중신 십수명은 할복자결 합니다.
같은 요시다 쇼인의 제자인 구사카 겐즈이는 쇼카손주쿠 졸업생을 중심으로 미타테구미 御楯組(어순조) 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하였으며 1863년 조슈번(야마구치) 은“양이의 날”을 선포하기 전에 도읍을 동해(일본해)
항구 하기(萩)에서 내륙인 야마구치시 로 옮기고 구사카 겐즈이는 30명을 선발해 시모노세키로 내려갑니다.
3) 서양 배에 포격 : 구사카 겐즈이는 시모노세키 고묘지 光明寺(광명사) 에 본영을 설치한 후에 포대를
정비하고 1천명 병력에 군함 4척으로 해협을 봉쇄한후 1863년 5월10일 미국 상선 펨브룩호 를
시모노세키시 단노우라 포대와 가메야마 포대가 함께 포격했고..... 22일에는 프랑스 전함
킨창호에 포격해 사상자가 났으며 26일 네델란드 군함 메두사호에도 연거푸 포격해 4명이 전사합니다.
4) 서양 배 시모노세키에 포격 : 자국 배들이 불시에 포격을 당하자 그 보복으로 6월 1일 미군함 와이오밍호
는 조슈 해군을 공격해서 군함 2척을 침몰시키고 1척을 대파하는데, 미국은 남북전쟁 중이라 와이오밍호는
남군의 습격함 앨라바마호 추적을 위해 태평양을 횡단해 아시아에 파견되었으니... 미국 공사 로버트
프라인으로 부터 거류민 보호 요청을 받자 앨라바마호 추적을 중단하고 요코하마에 있었기에 남하한 것입니다.
이어 6월 5일 암스트롱포 35문으로 무장한 프랑스 군함 세미라미스호와 탕크레드호는 마에다와 단노우라의
포대에 맹포격을 가해 침묵시키고 해병대를 투입해 포대를 점거하자 조슈번 1천 병력은 제대로 된 저항
을 하지못하고 후퇴하니, 프랑스 해병대는 민가를 불태우고 포를 파괴했는데, 이에 조슈번은 구원
부대를 보냈지만 군함의 포격에 막혔고, 그동안 해병대는 철수하여 프랑스 함대는 요코하마로 귀환합니다.
5) 다카스키 신사쿠 기헤이타이 창설 : 조슈번주 모리 다카치카는 비상사태에 당하여 은거중인 다카스키
신사쿠에게 위임하니,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인 "맹자 만장 하편 재야왈초망지신”에서 따온 “초망굴기
(草莽屈起)” 를 떠올리고 사무라이 선봉대 외에 평민의 자제로 기헤이타이 奇兵隊(기병대) 를 만듭니다.
다카스키 신사쿠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병사를 모집하니 일본 최초의 “국민군의 탄생” 으로
“전쟁에는 허실이 있으니 奇(기) 를 가지고 적의 虛(허)를 제압" 하는 군대를
만들었던 것인데 본대 600명에 유격대, 어순대, 집의대 및 역사대등 합계 2천명 규모였습니다.
기헤이타이 奇兵隊(기병대)는 정규전 보다는 게릴라전을 수행하기로 하고 훈련하는데, 당시는
장남이 아니면 사무라이가문의 가독이며 또 농민의 경우에는 농지도 상속이 불가능 할
때라 하급 무사 49%, 농민 42%, 상인 5% 등 병사들은 준 사무라이 신분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조슈번(야마구치현)은 사무라이 10% 에 평민 90% 분포였는데, 평민인 하야시 리스케는 아버지가
고용되어 일하던 중급 사무라이 주겐 신분의 "이토가에 양자" 로 가서는 이름이
“이토 히로부미” 로 바뀌는데.... 기병대에 참가해 한 부대를 지휘하니 신분 상승을 이루게 됩니다!
6) 시모노세키 포대 점령 : 고메이 천황(일왕)의 강력한 요구로 막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1863년
6월 25일 마음에도 없는 양이(攘夷) 이행을 억지로 약속했지만.... 전국에서 실제로 결행에 나선
것은 조슈번이 유일했던 것인데, 미국과 프랑스 군함의 보복포격을 당한후 조슈번은 포대를
복구하고 대안인 북규슈 고쿠라번 영지 일부를 점령하고 새로운 포대를 쌓아 해협 봉쇄를 계속합니다.
이듬해 1864년 7월 해협 봉쇄로 경제적 손실을 받은 영국은 조슈번에 대해 징계적 보복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으니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세 나라에 참가를 호소하여 17척
함선으로 연합 함대를 편성했고, 함대는 1864년 8월 5일부터 7일까지 시모노세키시
와 히코섬의 포대를 철저하게 포격하고 각국 해병대가 출동하여 점거하고 파괴 합니다.
3. 서양의 조선 침략
(1)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1791년 정조때 신해박해, 1801년 순조때 신유박해, 1839년 헌종때 서양
신부 3명을 죽인 기해박해, 1846년 헌종때 병오박해가 있었는데 5번째로 1866년 고종때
병인박해로 프랑스 신부 9명과 조선인 신자 8천명(산으로 도망쳐서 사고나 질병, 굶어
죽는 사람을 포함하면 수만명에 달함) 을 죽이니..... 프랑스군이 쳐들어 온게 병인양요 입니다.
천진에 있던 프랑스 극동사령관 로즈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니 1차 침공때는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양화나루와 서강까지 순찰후 물러갔으나, 전력을 보강하여 7척에
해병대 600명으로 강화도를 침공하니 15,000명의 조선군을 물리치고 강화성을
점령했는데, 그후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을 공격하다가 매복을 당해 큰 손해를 입었습니다.
프랑스는 책임자 처벌과 통상수교를 요구했으나 흥선대원군이 거부하자 양측 간에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하니 조선측 기록은 적 60여명을 살상했다고 나오지만... 프랑스군 기록은 3명 전사에 35명
부상으로 나오며, 1866년 11월에 퇴각하면서 강화읍을 파괴하고 장녕전에 방화했으며 강화 이궁과
외규장각 등에서 무기와 의궤등 수천권 서적, 국왕의 인장에 19만 프랑 상당의 은괴를 약탈해갑니다.
(2)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미국의 무장 상선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을 개항시켜 무역을 하기위해 1866년 7월 25일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부까지 올라와 수교와 통상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하자 조선측에서 소고기와 쌀, 채소등 식량을
제공했음에도 만경대에서 약탈을 하고 조선군에 포격까지 했는데, 그런 중에 대동강 수위가 낮아
져서 움직이지 못하자 평안감사 박규수는 기름을 뿌린 짚을 실은 목선들을 보내서 불질러 태워 죽입니다.
신미양요는 평양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책임과 통상 교섭을 명분으로 1871년 6월 1일
에 발생한 미국의 침략인데, 함대가 강화해협을 거슬러 오르자 3일간의 교전 결과
광성보가 함락되고 어재연등 대다수가 사망했으며 미해군은 20일간 통상을
요구하며 주둔하였으나 조선의 완강한 쇄국 정책으로 협상을 하지못하고 철수 합니다.
존 로저스는 1871년 5월 16일 프리깃함인 기함 콜로라도를 비롯 전함 5척을 이끌고 일본 나가사키 를
출발했는데 병력은 500여명의 수병과 150여명의 해병으로 남양부사에게 편지로“우리의 흠치대신이
귀국 대신과 협상할 일이 있어 온 것이니 조약이 체결되기를 기다렸다 돌아가겠다” 고 목적을 밝힙니다.
조선은 답변을 보내지 않고 교전을 준비하는데 어재연을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하여 방어토록 했으며
미 함대 두척이 손돌목을 지나니 조선군이 대포로 포격하자 미국 군함은 응사하며 빠르게 빠져나갔는데,
6월 2일 광성진에 포격을 개시했으며 조선도 응사해 미국 함선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피해는 경미했습니다.
6월 10일 교섭이 안되자 미군은 함포 지원을 받으며 651명이 초지진에 상륙하니 조선군이 백병전
을 벌이였으나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패퇴했고, 6월 11일 미군은 광성보를 공격하였으며
조선군은 결사 저항하였으나.... 화력 열세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남기고 덕포진으로 패퇴합니다.
광성보 전투에서 어재연등 240여명이 전사하고 100여명이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했으며 20여명이 포로로
잡혔고, 미군은 3명이 전사하고 10명이 부상당했는데, 미군은 광성진의 관아를 불태우고 초지진을 거점
으로 주둔했으나 밤에 조선군의 기습도 있고 제한적 공격이 목표였는데 전함이 암초에 부딪쳐 피해도
있는지라 물치도로 물러나 포로석방을 빌미로 통상을 요구했으나 응하지않자 포로를 석방하고 물러갑니다.
4. 전쟁 이후 조선과 일본의 대응
(1) 조선
1) 병인양요 이후: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또 다른 이유는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이었으나 이 사건으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더욱 거세졌고 쇄국정책은 한층 강화
되었으며 분노한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더럽혔던 땅을 서학인의 피로 씻음이
마땅하다" 고 하면서 양화나루 옆의 잠두봉에 형장을 설치해서 천주교인들을 처형 합니다.
이때 수천명 천주교인들이 잠두봉에서 죽게 되었으며 잘린 목은 한강에 던져졌고, 한강물이 핏빛으로
변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천주교도의 잘려나간 머리가 산처럼 높이 쌓였다 하여 이곳은 절두산
(切頭山)이라 불리게 되었으니 병인양요로 말미암아 천주교도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거세진 것입니다.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귀중 도서와 은괴 19상자 등을 약탈당했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군
을 물리친 일로 자신감을 가진 대원군은 기존에 고수하고 있었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하게 되니 대원군은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더욱 고집하여 천주교 탄압에 박차를 가합니다.
2) 신미양요 이후 : 광성보 패전 후에도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며 항전의지를 굽히지 않았
는데, 이양선이 나타나 전투가 있었고 크게 패했다는 소문이 서울에 자자하였으니
대원군은 소문의 확산을 경계하며 사대문 밖으로 피난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였습니다.
신미양요는 미군이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조선 입장에서는 결사 항전하여 이양선
을 몰아낸 사건으로 인식되었으니...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고수하였으며, 일본이 여러차례 통상을 요구하는 것을 거절 합니다.
미국의 함대 재편과 조선 침공은 미국도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려는 정책의 소산이었으나,
해외팽창 정책은 별다른 성과 없이 조선의 배외 감정만을 더욱 높이게 되었으니 개항해 서구
문명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조선인은 없었으며 쇄국정책을 고수합니다.
(2) 일본
1) 막 부 : 1862년 도쿠가와 막부는 한층 더 쇄국정책을 고집하는 조선과는 달리 유럽에
견구사절단(遣欧使節団) 을 파견하였으니, 조슈번(長州藩)은 2명이 배정됐으나 1명
으로 줄자 제외된 다카스키 신사쿠등에 대해 막부는 상하이 사절단으로 파견하니
상하이를 일본의 무역거점으로 삼고 네덜란드를 중개역으로 무역하는 것을 검토했습니다.
유학자이기도 한 혁명가 다카스키 신사쿠는 상해에서 태평천국의 난과 공자묘에 영국군 부대
가 주둔하는등 청나라가 서양의 식민지로 전락해가고 있는 실정을 보고 귀국했는데
유청오록(遊清五録) 에 따르면 큰 영향을 받았으니 일본이 중국과 같은 수난을
겪지 않으려면 국력을 키워 서양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막부는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서양과 전쟁에서 패하니 두 번(番)을 대신해 사과하고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주고는 서구문명을 도입하는데... 1868년 조슈번과 사쓰마번등은
나가사키 영국 무기상에게 구입한 전함과 대포, 기관포와 신식총으로 무진전쟁
(메이지유신)을 일으키자 막부는 프랑스에서 차관을 내어 무기를 구입해 대항합니다.
2) 사쓰마번 : 1863년 사쓰에이 전쟁에서 영국함대의 포격으로 가고시마 시내가 불바다가 되니
걸출한 개명 영주였던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세운 서양식 용광로와 대포 제조 공장에
유리공장등 서구식 공장까지 초토화 되자 사쓰마번은 솔직히 패배를 인정하고
적국인 영국에 대해 보복하고 배척하며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 은 아예 하지도 않습니다.
사쓰마번은 양안 해안포대의 십자 사격으로 영국 기함등 2척을 대파시키고 쫓아냈으니,
기함이 파괴되는 초유의 일을 겪은 영국 함대가 기겁을 해서 황망히 물러간 것
이라 대원군 처럼 승리했다고 주장하며 크게 선전할만도 했지만.... 그들은
“방향을 180도 전환”하고 발상을 고쳐 “우수한 서구문명을 배워야” 하겠다고 결심합니다.
가고시마광장에는 동상들이 있으니 이름하여“젊은 사쓰마의 군상 (わかいさつまのぐんぞう)”
인데.... 1865년에 서양의 신문물을 갈망한 사쓰마 젊은이 19명이 영국에 서구문명을
배우기 위해 떠난지 100주년 되는 해에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사쓰마번은
근대화를 위해 극비리에 영국에 젊은이들을 유학생으로 보내는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영국에 유학간 것이 뭐가 대단하냐 하면.... 당시 에도(도쿄) 막부는 조선처럼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개항을 했어도 그건 중앙의 막부 단위이고 지방의 번들이 함부로 나서면
안되는 것이었으니, 발각이 되면 이들은 자칫 “배를 갈라야” 할지도 모를 매우 위태로운 결정이었습니다!
3) 조슈번 : 시모노세키에서 서양 배에 포격하기 한달 전인 1863년 4월 조슈번은 야마오 요조(도쿄대 공학부
창설), 이노우에 마사루(1872년 신바시 요코하마간 철도 설립), 엔도 긴스케 (조폐공사 창립) 외에
이노우에 가오루 와 이토 히로부미 5명에게 감히 막부의 쇄국정책을 어기고 “영국 유학 밀명”을 내립니다.
유학비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이토 히로부미가 호소하자 에도(도쿄) 조슈번주 저택의
책임자 로쥬는 금고를 연 후에 아무 말 없이 슬며시 자리를 비켜주니....
돈을 훔친 이토 히로부미는 조슈번에 편지를 쓰는데,“ 돈을 부정하게 빼내오기는
했으나 먹고 마시는데 쓰지 않고 살아있는 무기(자신들을 인재로 키움!) 를 살 작정 입니다.”
조선으로 치면 대원군이 프랑스와 병인양요 전쟁을 치르며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중에 평안감사
박규슈가 서울의 조정이 모르게 비밀리에 젊은이들을 뽑아 “감영의 공금을 유용해 프랑스
에 유학”을 보내는 것이니 발각되면 모두“참수를 면치못할 국법을 우롱한 엄청난 범법” 행위라?
조슈번 5명은 5월 14일 요코하마를 출발했으니 시모노세키 포대가 이틀 전에 미국상선을 포격한 사실을
모른채 사쓰마번의 유학생들 보다 8개월 빨리 상해에 도착했는데, 훗날 런던 대학교 교정에 유학
온 쵸우슈항시(長州藩士 장주번사) 동판 기념비가 세워지고 " 영화 조슈 파이브" 가 제작되기도 합니다.
1836년 설립된 런던 공립 유니버시티 칼리지는 마하트마 간디가 법학과를 졸업했으며 UCL 은 5년
전의 통계로 보면 31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2명의 필즈상 수상자들을 배출하였고
런던대학교 전체를 보면 2015년까지만 쳐도 무려 74명의 노벨상 수상자 들이 배출된 명문 입니다!
그런데 상하이의 매디슨 상회에 영국행 배 주선을 부탁할 때 이노우에 가오루가 목적을 나비(해군) 대신에
“내비게이션”으로 잘못 대답하니, 선원이 될려는 것으로 오해한 선장이 이노우에 가오루와 이토 히로부미
를 페가서스호의 견습사원으로 삼으니 둘은 “6개월간 기관실에서 석탄”을 뒤집어 쓰는 생고생을 하게됩니다.
1864년 들어 영국, 미, 프, 네델란드군 연합함대가 조슈번을 공격하기로 하는데, 1월에 런던 신문
에 계획이 보도되자 런던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화학과에 재학 중이던 이토 히로부미
는 오랜 고민 끝에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유학을 중단하고 무단 귀국했으며, 이토
히로부미는 6월 10일 요코하마에 도착해 영국 공사 올콕을 만나 공사의 친서를 받습니다.
4) 전쟁 이후 협상: 이토 히로부미는 조슈번으로 내려와 어전회의에 참석했으나 영국과 전쟁을 중단
하자는 설득에 실패하니.... 8월 4일 영국 9척, 프랑스 3척, 네델란드 4척, 미국 1척 등 17척 5천명
의 서양 연합 함대는 조슈번의 시모노세키 초후 앞바다에 나타나서는 시모노세키시를 포격 합니다.
조슈번 수비대는 포 120문에 병력 2천명 이었는데, 포격후 4개국 육전대(해병대) 가 상륙하니
결국 3일간의 전쟁에서 참패한지라, 조슈번은 절에서 근신중이던 다카스키
신사쿠를 호출하니...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통역으로 대동하고 강화협상 대표 로 나갑니다.
영국은 홍콩 처럼 시모노세키 앞 바다의 히코시마 彦島(언도) 섬 할양을 요구하자 신사쿠
는 "나는 항복하러 온것이 아니다" 라며 4국 연합군 3천 육전대로는 내륙에서
3만(실제로는 4천 정도!) 조슈군을 결코 이길수 없다고 엄포를 놓으니, 러일
전쟁 강화회담시 러시아는 하얼빈에 육군 40만이 건재하다고 큰소리 친 것과 비슷합니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 26세 다카스키 신사쿠의 배짱에 쿠퍼제독은 결국 물러서는데 단지 선박 자유통행,
포대 신축금지, 물과 식량, 연료 보급에 배상금 3백만$ 을 요구하니 이번에도 다카스키 신사쿠는
몇년 전에 조슈번 동료 겐즈이가 교토로 올라가서 일왕의 공경들에게 공작하여 막부로 하여금
천황(일왕) 앞에서 지킬수도 없는 양이(攘夷) 결행 이라는 억지 약속을 한 일을 상기시킵니다.
양이(攘夷)는 도쿠가와 막부가 결의한 것을 단지 조슈번이 실행한 것에 불과하니 조슈번은 배상금
을 낼수 없다고 버팁니다! 당시 조슈번 양이파 들이 천황(일왕)을 통해 들이민 결의를 막부는
싫으면서도 울며 겨자먹기로 억지로 수용 했던 것인데 이것이 이제 도쿠가와 막부를 옭아맬 줄이야?
전 해에 영국 함대의 사쓰에이전쟁 사쓰마번의 배상금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조슈번의 배상금을
애꿎은 막부가 대납하게 되는데, 이는 지방의 일개 번이 외국과 직접 교섭하는 외교행위를 에도막부가
꺼렸기 때문이기도 하니 러일전쟁후 배상금 대신에 사할린 남부를 일본에 떼준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제는
영토 보다 돈을 중하게 생각했지만 “아편전쟁 홍콩”을 기억하는 신사쿠는 “작은 섬” 하나라도 절대 불가라?
(3) 일본 무력대항 포기와 서구문물 도입
1)일본의 지사들은 중국이 패한 아편전쟁과 전후 처리결과를 알고 대비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때 영어 통역을 하면서, 유럽 제국주의자를 상대하는 신사쿠 한테서 한 수 배운 이토
히로부미는 이후 임오군란 제물포조약, 갑신정변 텐진조약과 청일전쟁 시모노세키조약
및 러일전쟁 포츠머스조약시 자국 이익 수호를 철저하게 견지하니 제대로 배운 것입니다!
조슈번은 무력에 의한 양이(攘夷)를 포기하고 서양의 지식과 기술을 도입하여 군비와 군제를 현대화시키는
정책으로 전환하며, 또 사카모토 료마와 나카오카 신타로 등의 중개로 1866년 3월 7일 토회간살적
(討會奸薩賊 : 철천지 원수) 이던 사쓰마 번과 “삿초동맹”을 체결하고 1868년 도사번과 히젠번을 끌어
들여 천황(일왕)을 받들고 무진전쟁 내란을 일으켜 에도 도쿠가와 막부를 전복시킨후 메이지유신을 이룹니다.
2) 이와쿠라 사절단 : 무진전쟁 내란이 끝난지 2년 후인 1871년에 출발해 2년간 12개국 구미 시찰단
은, 특명전권대사는 이와쿠라 도모미이고 부사는 무진전쟁의 핵심세력인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이지만 실제로 설계하고 실행한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 인데....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서유럽으로 보낸 대사절단에 착안했으며 메이지유신 이전에도 에도
막부는 1860년 미국, 1862년에 제1차 유럽, 1863년에 제2차 유럽 사절단을 보낸적이 있었습니다.
사절단 46명, 수행원 18명, 유학생 43명 합계 107명은 1871년 12월 23일 미국 증기선으로 요코하마항을
출발하여 태평양을 건너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내린후 열차를 타고 워싱턴을 방문했으니, 미국에서
8개월간의 장기체류를 했으며 대서양을 건너 영국(4개월), 프랑스(2개월),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3주),
러시아(2주),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비엔나 만국박람회), 스위스 등 12개국에 이릅니다.
귀로는 지중해에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여 홍해를 거쳐 아시아 각지에 있는 유럽 국가의 식민지
(실론, 싱가포르, 사이공, 홍콩, 상하이 등)에 대한 방문도 이루어졌는데, 출발 1년 10개월 후인
1873년 9월 13일 요코하마 항에 도착했으니... 이들의 부재 중 정부에서는 조선 침공을 둘러
싸고 사이고 다카모리등 정한론(征韓論) 논쟁이 가열되었고 이후“서남전쟁 내란” 이 일어납니다.
무진전쟁 내전이 막 끝난 나라에서 혁명 중에 정부의 수장들이 모두 나라를 떠나 장기간 외유한다는
것은 그 유례를 찾기가 힘든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으나... 직접 서양 문명과 사상에 접하고 국정을
비교 체험할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 그들에게 끼친 영향은 컸으며, 동행한 유학생 43명도 5년후
귀국해 정치, 경제, 과학, 교육,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여 일본의 문명개화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권한을 넘어 조약을 개정하고, 협상을 하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에 과도 정부와 마찰을 빚게 되는
데.... 사절단은 삭발을 하고 양장을 입었으나 이와쿠라만큼은 일본 문화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투(촌마게)와 기모노를 입은 모습으로 도항을 했으나, 결국 시카고에서 삭발하고 양장을
입었으며 사절단 임무는 불평등조약을 재협상하고 신문명을 도입해 근대화를 촉진하는 일이었습니다.
서구문명 도입 중에 하나가 철도니 페리제독이 선물한 장난감 기차를 보고 연구를 시작해 신바시~요코하마
(新橋~横浜) 노선이 개통된건 1872년으로 1067mm을 궤간으로 정했는데, 영국 철도기사 에드문드
모렐(Edmund Morel) 의 의견을 들어 훗날 와세다대학교를 만든 대장대보 (大蔵大輔) 오쿠마
시게노부가 결정했고, 영국에 유학을 했던 조슈번의 이노우에 마사루가 책임을 맡아 철도를 완공합니다.
5. 조선과 일본의 충돌과 수교 및 개항
(1) 운양호 전후의 상황
1) 조선 일본과 수교 거부 : 동서고금 5천년 인류역사에서 이웃나라는 철천지 원수라 국력
이 비슷하면 평화가 유지되지만 차이가 나면 침략으로 이어지니 100년 평화가 드문데,
1603년 부터 1874년 까지 270여년간 선린우호하며 평화를 유지한 극히 드문
사례가 있으니 바로 조선과 일본으로 400여명 내와 통신사를 12차례나 파견했습니다.
일본의 대접은 극진했으니 반년 남짓 조선통신사를 접대한 비용이 막부의 2년치 예산에
달할 정도였는데, 1868년 무진전쟁 내란후 막부를 쓰러트린 일본 신 정부가
조선에 정권이 바뀌었다며 새로운 국교수립을 요청하자 조선은 도쿠가와
막부의 문서가 아니라며 거부하니 무시당한 일본은 무력으로 개항시키기로 결심합니다.
2) 정한론(征韓論) : 메이지유신으로 폐번치현이 되자 무진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사무라이들은 주군인
번주가 없어지니 연공(월급)을 줄 사람이 없어진지라 실업자가 되고 거리에서 칼을 찰 자유도
뺏기니 토사구팽(兎死拘彭) 을 당한지라 자칫 반란을 일으킬 처지에 놓인데다가 조선은
신정부의 수교요구를 거부했으며 또 서양세력이 조선을 먼저 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깁니다.
3) 서남전쟁 내란 : 2년간 미국과 유럽, 세계를 일주하고 돌아온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 및 이토 히로부미는 사이고 다카모리등의 지금 바로 조선을 취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에 반대했으니, 조선을 침공하면 그 종주국인 중국 청나라와 전쟁을
해야 하는데 아직 일본은 군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니 전쟁은 시기상조라며 거부합니다.
그러자 사이고 다카모리등 정한론파들은 실각해 귀향했으며 1874년 사가의 난부터 시작해 1877년
의 세이난(서남) 전쟁이 일어나는데, 반란군은 임진왜란때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에서 잡아온
울산 사람들을 이용해 건축한 견고한 구마모토성을 공격하다가 4만 중에 2만이 전사한
반면에, 신정부군은 7만 중에 6,300명이 죽고 9,500명이 부상했지만 진압에
성공하는데.... 조선은 침략 시기를 놓고 일본에서 내란이 벌어졌다는 사실 자체도 몰랐습니다.
(2) 운양호 침범
1875년 9월 대포 2문을 장착하고 65명이 탄 일본 군함 운양호가 강화도 초지진을 침범하니
포격당하자 반격해 초지진을 포격하고는 22일 영종진에 이르러 포격후 22명 육전대를
보트 2척에 태워 상륙시키니, 450명 조선군은 전사 35명에 포로 16명을 내고 대포
35문과 총 130여정을 뺏긴채 도주하는데 일본군 피해는 전사자는 없고 경상 2명 입니다.
일본군 부상자 2명은 조선군과 전투중에 발생한게 아니고 보트에서 해안가에 상륙해 뻘밭에 빠져서
다친 것이니, 견고한 성에서 대포 35문을 갖춘 450명 조선군이 성을 기어오르는 일본군을 단
한명도 죽이기는 커녕 부상조차 입히지 못했으니 서양식으로 훈련된 일본군과 재래식 무장인
조선군의 전투력의 차이인데, 이후 일본군은 민가에 들어가 약탈과 강간에 방화를 저지르고 철수합니다.
(3) 강화도 조약과 수신사
1) 강화도 조약 : 운양호 침입후 일본은 조선을 개국시키기로 하고는 1876년 1월 30일 군함 3척에 전권
대사 구로다 기요타카와 부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보내 협상을 강요하니.... 전쟁을 두려워한 조선
정부는 시원임대신회의(時原任大臣會議) 후에 신헌(申櫶)을 접견대관, 윤자승을 부관으로 회담에 응합니다.
조선은 중국과 조공무역 체제라 근대무역과 통상에 대해서는 장님과 같은 상황이었으니 무관세등
불평등 조약이 되었는데, 그럼에도 세계 대세로 볼 때 개국해야만 할 상황이고 일본의 무력시위
가 척화론(斥和論)보다 강력했으며 민씨 일파가 쇄국을 계속하면 흥선대원군의 득세를
초래하게 되는데다가, 청나라가 개국을 찬성했으며 고종이 개항에 적극적이었던 점 때문입니다
2) 수신사 일본 파견 :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뒤 수신사 김기수와 김홍집이 일본에 다녀온후 서양의 근대문명
과 일본의 문물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해 1881년에 조사시찰단이 파견되니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김옥균등 11명을 위원으로 삼고 수행원과 통역을 일본에 파견하는데... 에도 막부가 사절단을 미국에 처음
파견한게 1860년이니 21년이 늦은 것인데, 그것도 미국이나 유럽에 직접 간게 아니라 일본인게 아쉽습니다.
조선 조사 시찰단(신사유람단)은 4개월 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도쿄, 오사카를 주로 하고 지방까지 가서 문교·
내무·농상·외무·대장·군부 등 각 성(省)의 시설과 세관·조폐 등의 중요 부문 및 제사(製絲)·잠업(蠶業) 등에
이르기까지 고루 시찰하고 귀국했는데, 이때 윤치호와 유길준은 수행원 이었으니 이후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등과 후쿠자와 유기치의 지도를 받아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일본으로 도주합니다.
3) 미국과 수교 : 미국 정부의 명을 받은 슈펠트는 일본을 통해 조선과 수호조약을 맺으려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聲)의 소개장을 가지고 부산에 입항했지만 여의치 않는중에, 청나라의 북양대신 이홍장은
일본의 조선 진출을 막고 조선의 종주국 노릇을 하기 위해 구미와 수호통상을 권고하는지라, 슈펠트는
이홍장의 주선으로 1882년 음력 3월 청나라 사신 마건충(馬建忠)·정여창(丁汝昌) 등과 인천에 도착해
그들의 알선으로 전권대관 신헌, 부관 김홍집과 음력 4월 6일(양력 5월 22일) 수호 통상조약을 체결 합니다.
6. 조선의 다른 선택?
1875년 운양호 사건 영종진 전투에서 보듯 구식 대포 35문을 가진 450명 조선군이 신식 대포
2문을 장착한 작은 배인 운양호 한척을 상대하며, 22명 육전대가 상륙하자 전사 35명에
포로 16명을 내고 대포 35문과 총 130여정을 뺏긴채 도주하는데 성을 함락시킨
일본군 전사자는 단 한명도 없었으니 두 나라 전투력의 차이가 이미 크게 벌어진 것입니다.
1) 1866년 병인양요시 조선은 다섯차례의 천주교도 박해에서 프랑스 신부 12명과 만여명의
조선인 천주교인을 학살했던지라... 당시 프랑스와 전쟁을 할게 아니라 학살에 대해
사과하고 배상한 다음 프랑스와 수교하여 외교관계를 수립해 개항하고는 서양의
대포와 총이며 군함등 무기를 도입하고 청년 100여명을 뽑아 서양에 5년간 유학 보냅니다.
2) 이후 개혁을 해야 하니 양반과 상놈 오래 된 반상의 차별을 철폐하고 천민 제도를 전면 폐지하며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500년 강고하게 이어온 과부 재혼금지 제도를 철폐하며 왕실과 정부
회계를 분리하고 경찰과 검찰에 사법부를 설치하며 도량형을 통일하고 서구문물을 도입해야 합니다.
유학을 국교에서 제외하고 기독교를 공인하며 선비들의 평생의 꿈인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유학에서 돌아온
청년들을 관료로 발탁하며, 농지개혁을 통해 지주들의 토지를 시가의 50% 로 몰수해 소작농이나 노비에서
해방된 자들에게 분배하고 10년간 분할상환하며 양반 지주들에게는 대금을 채권으로 주어 군수산업과 철도,
도로, 공장, 무역회사의 주식으로 바꾸어 부국강병의 길로 나가 군사력을 키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3) 개혁에는 시기가 중요하니 1866년 조선이 병인양요때 전쟁 대신에 개항해도 1854년에 개항한 일본 보다
12년이 늦는데.... 이때 못하고 1871년 신미양요때 개항했더라면 일본보다 17년이 늦으니 따라가기 힘들며,
하물며 1881년에 수신사를 미국이나 유럽도 아닌 일본에 보냈지만 일본 보다 21년이나 늦는지라... 이때
는 일본이 군국주의 무력을 갖춘후라 이미 늦었다고 보니 “기회는 1866년 단 한번” 뿐이었다고 생각됩니다?
1871년 신미양요때 개항은 힘든 것이 1875년 운양호 전투때 엄청 벌어지는 전투력을 불과 4년만에 따라잡기
어려운데다, 결정적인 것은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존왕양이론자들이 무진전쟁 반란을 일으켜 막부를 쓰러
트린게 1868년이니... 1866년은 조선과 270년간 선린우호한 우방인 도쿠가와 정권 이었지만, 1871년이면
군국주의와 팽창주의인 메이지 신정부니 1866년의 일본과 1871년의 일본은 전혀 다른 나라이기 때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