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광복절 경축식 주제영상의 제목은 '꿈의 릴레이'였다.
선열이 품었던 꿈이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이어진 과정을 보여주겠다는 기획이었고, 정부가 내건 축은 셋이다.
김구의 문화강국,
안창호의 세계국가,
이회영의 자주국방.
인물의 서열을 매기는 자리가 아니라 주제를 인물에 걸어 푸는 자리였다.
세 번째에서 의아했다. 광복절 무대에서 자주국방을 말한다면, 먼저 불려야 할 이름은 '백포 서일'이다.
우당 이회영이 만주 독립운동 기지의 설계자였다는 사실은 다툴 여지가 없다. 여섯 형제가 재산을 처분하고 압록강을 건넜고, 1911년 경학사를 세웠으며, 그 곁에 신흥강습소를 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이회영은 1913년 군자금을 모으겠다며 국내로 들어갔고 다시 중국으로 나간 것은 1919년이다. 그사이 6년의 행적은 지금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강습소가 신흥무관학교로 확장돼 독립군 간부를 쏟아내던 시기, 청산리로 이어질 병력이 실제로 만들어지던 그 시기에 그는 만주에 없었다.
신흥무관학교를 근거로 자주국방을 말하려 한다면, 그 학교의 전성기를 떠받친 이름들이 따로 있다는 뜻이 된다. 설립의 공과 운영의 공은 같은 무게가 아니다.
자주국방을 문자 그대로 (군을 세우고 지휘하고 일본군과 실제로 맞붙은 계통으로) 읽는다면, 계보의 정점에는 '서일'이 있다.
서일은 1911년 만주로 건너가 대종교인을 규합해 중광단을 만들었다. 3·1운동 뒤 이를 대한정의단으로 개편하고 무장조직을 붙여 대한군정부를 세웠다. 임시정부와 이름이 겹친다는 지적에 따라 대한군정서로 고쳐 부른 것이 우리가 아는 북로군정서다. 총재가 서일, 총사령관이 김좌진이었다. 이범석도 이 조직 소속이었다. 청산리 전과를 임시정부에 정식 보고한 문서의 명의 역시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이다.
청산리 뒤 밀산에 모인 부대들을 하나로 묶은 대한독립군단에서는 총재가 서일, 부총재가 홍범도, 참모부장이 김좌진, 군사고문이 지청천이었다.
지금 육사 충무관 앞에 서 있는 네 장군이 한 지휘 계통 안에 묶였던 순간이 있었다. 그 계통의 맨 위에 있던 사람이 서일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매긴 등급은 정반대다. 1962년 김좌진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서일은 같은 해 독립장을 받았다. 1등급과 3등급. 총재가 예하 사령관보다 두 계단 아래에 놓였다. 전투의 이름은 남기고 전투를 조직한 사람은 지우는 방식이 여기서 굳어졌다.
흉상 이야기.
개인적으로 흉상이 세워질 때부터 줄기차게 주장한 부분을 말하려 한다. 2018년 3월, 탄피를 녹여 만든 다섯 기가 육사 충무관 앞에 섰다.
왼쪽부터 홍범도, 지청천, 이회영, 이범석, 김좌진.
가운데가 이회영이다.
2023년 이전 결정으로 한바탕 논란이 일었다가 2025년 5월 철회됐고, 지금은 그 자리에 영구 존치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육사는 오래도록 자신을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으로 설명해 왔고, 그 논리 위에서 학교를 세운 사람을 한복판에 놓았다. 눈여겨볼 것은 그 선택의 성격이다. 다섯 사람 가운데 군인이 아닌 이는 우당 한 사람이다. 육사는 이미 총을 든 사람이 아니라 군을 만든 사람을 중앙에 세우기로 결정한 셈이다.
그 기준에 나는 동의한다. 다만 같은 기준을 끝까지 밀고 가면 답이 달라진다.
학교를 만든 사람과 그 학교 출신들이 들어간 군대를 만든 사람 중 누가 더 중앙에 가까운가.
학생을 배출한 조직과 그 학생들을 실제 전투 서열에 배치한 조직 중 어느 쪽이 자주국방인가.
서일은 종교 조직을 무장 조직으로 전환했고, 그 조직에 총사령관을 앉혔고, 흩어진 부대를 다시 하나의 군단으로 묶었다. 군을 만든 사람을 기린다는 원칙에서 그보다 앞자리에 놓일 사람을 나는 찾지 못했다.
그가 사상가였다는 점도 결격이 아니다.
서일은 대종교 종사였고 '회삼경'을 남겼다. 만주 무장투쟁이 이념 없이 굴러간 적은 없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답하지 못하는 군대는 오래 버티지 못하며, 청산리로 모인 병력을 붙들어 맨 것이 바로 그 사상이었다. 사관학교가 가운데에 두어야 할 것이 무공이라면 그 자리는 김좌진의 몫이다. 군을 세우는 원리를 가르치려면 서일이어야 한다.
책임의 문제도 그렇다. 서일은 1921년 자유시에서 부대가 무너지자 그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독립기념관에 세워진 그의 어록비에는 동지를 다 잃고 무슨 면목으로 살아 조국과 동포를 대하겠느냐는 말이 새겨져 있다. 승리를 조직한 사람이 패배까지 떠안은 것이다.
지휘 책임을 자기 목숨으로 계산한 사례를 우리 군사(軍史)에서 몇이나 꼽을 수 있는가. 생도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바로 이 대목이라면, 그를 중앙에서 비켜 세울 이유가 없다.
경축식장에는 이종찬 광복회장이 앉아 있었다. 우당의 친손자이고 육사 16기이며, 2023년 흉상 이전에 가장 앞장서 반대했던 사람이다. 조부가 자주국방의 표상으로 호명되는 자리에 그가 앉아 있었다. 행사를 기획한 곳은 행정안전부이고 광복회장이 인물 선정에 관여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도 그림이 곤란하다.
본인이 원했든 아니든.
독립운동사에서 대종교 계열은 늘 뒤로 밀렸다.
나철, 김교헌, 서일. 삼종사 가운데 대중이 아는 이름은 사실상 없다. 종교의 옷을 입은 무장투쟁은 근대사 서술에서 자리를 얻기 어려웠다. 그러나 청산리에서 총을 든 부대의 뿌리는 그 종교였다.
꿈의 릴레이라 부르려면, 첫 주자를 빠뜨린 채 바통부터 넘겨받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