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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 뒤로 스티브 윤 교수가 대표로 있는 선양하나가 올해 준공을 목표로 짓고 있는 평양의대 소아행동발달장애 재활 병동이 보인다 |
한-다리 건너면
1.
다리 중간 지점에 이르자 버스가 멈췄다. 사진에서나 보던 인민군 병사 두 명이 차 안으로 올라왔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공식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이고, 짧게 '조선'이라고 부른다. 당사국이 '북한'이라는 명칭을 원하지 않는데, 그렇게 부를 이유가 없다. 이 글에서는 '조선'이라는 약칭을 사용한다)을 연결하는 두만강대교를 건너는 중이었다. 뒤편에 훈춘시의 취안허 통상구와 전면에 라선시의 원정 통상구가 마주 보고 있었다. 승객들 모두 적갈색 중국 여권을 꺼내 들었고, 초록색의 대한민국 여권은 나 하나였다. 긴장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옷차림을 한 중국인들은 대부분 함경북도 라선의 작은 섬 비파도로 간다는데, 영화배우 성룡이 세운 호텔 카지노가 거기 있다고 했다. 차로 건너는 데 1-2분도 채 걸리지 않을 다리지만, 중간 지점이 국경이라 모든 차량이 정지하고 검문을 받는다. 신참으로 보이는 병사가 내 여권을 보고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버스에서 뛰어내려 전화기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자니까 함께 탑승한 중국인들이 나를 쳐다보며 뭐라 한다. 안내하는 재중교포 선생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냥 모르시는 게 좋습니다” 한다. ‘한꿔런’이라는 말이 들리는 걸 보니, 나 때문에 오래 기다린다고 욕하는 것이리라 대충 짐작을 했다. “다리 하나 건너는 것이 뭐가 이렇게 복잡하냐…” 긴장이 되어서 그랬는지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2.
2013년 10월, 조선에서 인도적 지원 사업을 하고 있는 ‘선양하나’ 대표 스티브 윤 평양의대 교수와 당시 남가주에서 목회를 하던 ‘가나공방’ 김성환 목사의 초대로 조선을 방문하게 되었다. 두 사람에 관해서는 나중에 더 이야기하겠지만, 내 인생에 커다란 획을 그은 사람들이다. 어쨌든, 북녘땅을 밟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한국에서 군 복무까지 한 내게 휴전선 이북은 마음과 생각마저도 금기된 곳이어야 했다.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는 백범 선생의 말 그대로였다. 큰 바다를 건너 한반도에서 먼 미국 땅으로 이주해왔음에도 38선은 여전히 나의 무의식 속에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다. 평화와 화해에 관한 설교와 세미나들도 내 머릿속에서 38선 이북, 그리고 그 너머 동포들이 살고 있는 간도 땅의 지도를 되살려주지는 못했다. 다리를 건너 북녘땅에 발을 내딛기 전까지는 그랬다.
3.
대한민국 여권을 갖고 있더라도 미국 영주권만 있으면 조선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부리나케 영사관에 신고를 하고 영사와 인터뷰를 마친 후에 연길로 날아갔다. 김성환 목사 부부와 그 여동생, 그리고 재미교포인 헬렌과 존 부부, 마크와 캐시 부부, 그리고 몇몇 젊은 재중교포 부부들을 만났다. 이들과 이틀간 연길과 용정의 윤동주 생가와 일송정을 돌아보고, 한반도 화해와 평화를 위해 세계 각지에서 연변으로 모여든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느라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다음 날 훈춘으로 내려가 취안허 통상구에 도착한 후에야 내게 여권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정 때문에 미국에서 함께 간 팀들은 먼저 라선에 들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연길에 있는 선양하나 직원이 호텔에 두고 온 내 가방에서 여권을 찾아 택배로 보내왔고, 나는 오후 늦게야 중국 이민국을 통과할 수 있었다. 출구로 나가는 길에 라선시에서 훈춘으로 나오는 어느 가족과 스치듯 인사를 했다. 해맑은 아이들 셋과 엄마의 모습이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그들에겐 중국과 조선을 오가는 것이 일상인 것처럼 보였다. 후에 알고 보니 라선에서 15년 이상을 살면서 염소도 키우고 ‘크라훈’이라는 여행사도 운영하는 재미교포 크리스 김의 가족들이었다. 다리를 건너는 것이 나에겐 비상이었지만, 그들에겐 일상이었던 것이다.
4.
라선에 있는 선양하나의 신발 공장은 스티브 윤 교수의 부친이 다른 재중교포 가정과 함께 100명가량의 현지 직원을 두고 운영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20여 년 신발 공장을 운영한 베테랑으로, 당뇨에 시달리면서도 북녘 동포들과 동고동락하시며 노년을 보내시는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바닷물 수영장이 있는 동명산호텔에서 하루를 보내고, 이튿날 서류 작성 시 사진이 필요하다고 해서 라선시에 있는 사진관에 갔다. 거리에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여럿 보였고, 사진관 앞 길가에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긴장한 탓인지 말을 건네지는 못했지만, 눈과 눈이 맞닿으면서 묘한 감정이 일었다. 비로소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다음 날 한반도 북쪽 끝인 선봉군 조산리의 고아원과 진료소를 방문했다. 시설과 장비가 많이 열악했다. 미국과 한국의 넘쳐나는 전력 사용, 음식물 쓰레기, 의료장비와 대조되어 많이 미안했다. 그 외에는 말을 아끼겠다. 중국의 방천과 러시아의 핫산이 보이는 승전대에 올랐다. 세 나라가 만나는 지점에 서니 멀리 조선의 두만강역과 러시아의 핫산역을 잇는 조-러철교가 보였다. 저 다리를 건너 오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저 다리를 건너는 기차는 바이칼을 지나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으로 갈 수 있겠지? 한 다리만 건넜을 뿐인데, 그동안의 내 세계가 너무 작게 느껴졌다. ‘다리’는 가슴이 툭 트이게 하는, 그리하여 막혀 있던 상상력을 탁 터지게 하는 그 무엇이 아닐까?
5.
다시 중국 연길로 돌아와 기차로 심양을 거쳐 단둥(丹東)에 도착했다. 지금은 고속열차 덕에 시간이 상당히 단축됐지만, 그때는 침대 열차로 거의 하루를 달려야 했다. 단둥호텔에서 자고 다음 날 일찍 평양행 기차에 올랐다. 단둥을 떠나 조중우의교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 도착했다. 세관에서 장시간 검열을 받은 후, 평양으로 향했다. 철로 옆으로 높이 쌓아 올린 볏단들, 기차를 타는 누군가를 환송하고자 꽃을 든 사람들, 그리고 장마당 등이 지나갔다. 멀리 늦가을 낙엽 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릴 적 개구리 잡으러 다니던 동네 논밭 길을 떠올렸다. 남이나 북이나 창밖의 풍경을 만끽하는 데 기차여행만 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엊그제 라선에 들어갈 때와는 다르게 긴장감보다는 설렘이 앞섰다. 처음이 어렵지 한 번 건너고 나면, 다리는 길이 되는 것이 아닐까?
평양역에 이르니, 보내고 맞이하는 사람들로 무척이나 분주한 군중 속에 스티브 윤 교수와 지도원이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 교수는 백인 아내와 세 자녀와 함께 평양에 장기간 거주하면서 평양의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진료도 하고 있었다. 그를 보면서 십자가 생각이 났다. 미국, 한국, 조선 어느 곳에 가건 색안경을 낀 사람들의 의심과 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경계인의 자리, 그 자리에 윤 교수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가 대표로 있는 선양하나는 올해 평양의대 소아행동발달장애(뇌성마비 및 자폐증) 재활 병동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윤 교수 가정은 이 질문에, 다리가 길이 되도록 수없이 건너다니며 삶으로 답하는 사람들이다.
▲ 2013년 라선에 있는 선양하나 신발 공장 (이하 사진: 허현 제공) |
이-야기
1.
2016년 9월 마지막 주, 큰아들 건과 함께 조선을 방문했다. 내겐 두 번째,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던 건에겐 첫 번째 방문이었다. 2015년 6월 선양하나를 통해 조선의 고아들에게 방한화를 보내기 위한 후원금 마련 자전거 여행이 있었다. 김성환 목사를 따라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LA)까지 800km가 넘는 거리를 자전거로 종단하는 팀에 합류한 덕에 건과 나는 조선 정부로부터 신발 분배 확인 차 방문할 수 있는 승인을 받았다. 김성환 목사는 이 자전거 여행 때문에 어려운 일을 많이 겪어야 했다. 몇몇 교인들은 “북한 아이들을 왜 돕느냐?” “그 아이들이 크면 다 군인이 되어서 우리와 싸울 텐데, 그냥 죽게 놔둬라!” 하며 김 목사를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빨갱이’라 비난했다. 일일이 언급할 수 없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김 목사는 그러한 아픔을 승화시켜 화해의 십자가를 만드는 ‘가나공방’의 목수로 전업했다. 그가 만든 화해의 십자가는 원수 되었던 둘이 서로 끌어안음을 통해 하나가 되는 이야기를 상징한다.
2.
김 목사는 결국 그 여행에 함께할 수 없었다. 에스테파냐, 건,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은 LA를 떠나 북경을 거쳐 심양에 도착했다. 팀의 리더인 에스테파냐는 어린 시절 남미에서 자란 삼중언어를 구사하는 패션디자이너인데, 평양에 있는 사람들에게 타코를 해주겠다고 음식 재료들을 바리바리 싸갔다. 우리는 심양에서 재미교포와 재중교포로 이루어진 팀에 합류했다. 재중교포들은 여러모로 조선에서 일을 하는 데 장점을 갖고 있다. 조선어 억양과 문화가 비슷하기 때문에 북녘 사람들과 매우 가까운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고, 중국 여권을 가지고 있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선양하나는 초기부터 재중교포 리더십을 세워왔기 때문에 미국 정부가 여행금지령을 내려 미국인의 조선 방문이 어려워진 지금도 큰 어려움 없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는 심양에 있는 조선영사관에서 비자를 받고, 다음 날 고려항공편으로 평양에 들어갔다.
건의 한국어가 서툴러 걱정했는데, 눈치코치로 어떻게 이야기를 했는지 이민국을 무사히 통과했다. 세관을 통과해 나오니 스티브 윤 교수 가족과 지도원, 운전기사 분까지 나와서 환영해주었다. 조선에서 운전기사는 비상시 정비까지 가능한 자동차 박사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숙소로 가는 승합차 안에서 익숙한 음악들이 흘러나왔다. 60년대에서 80년대의 팝송들이었다. 건이 가장 좋아하는 비제이 토마스의 <Rain Drops Keep Falling On My Head>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잔뜩 긴장했던 건이 작은 소리로 콧노래를 부르며 얼굴을 폈다. 저녁노을이 남가주 해변에 견줄 만큼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날 저녁, 침대에 누워 건이 말했다.
“아빠, 아까 차에서 나온 그 음악 있잖아… 그거 내가 너무 불안해하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안심하라고 이야기하시는 것 같았어.”
▲ 평양의대 언어치료 프로그램. 치료사는 현지인이다. |
3.
팀원 중 평양의대에서 커피숍을 시작하는 분들이 커피 세미나를 했다. 커피에 대해 배운 적 없는 내가 첫 번째 커피 세미나를 평양에서 듣게 될 줄이야. 그분들이 평양의 커피숍들을 견학하고 싶다고 해서 서너 곳을 둘러보았다. 스티브 윤 교수의 자녀들과 건은 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보드게임을 하고 있었고, 우리들은 커피 맛이나 카페 분위기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 사업 이야기까지 나누고 있었다. 만나니 이야기가 시작되고, 서로에 대해 모르던 것들을 알게 되니,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았다.
평양과 원산, 그리고 남포의 고아원을 돌아보면서 지난 3년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새로운 건물들이 세워졌고 아이들의 모습도 더 건강하고 밝아졌다. 선양하나 팀원들은 기증하는 신발의 개선을 위해 학교(고아원) 담당자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학교 농구팀 대표였던 건은 아이들과 농구공을 가지고 장난을 치며 놀기도 했다. 자신이 고생스럽게 참여한 자전거 여행으로 모아진 후원금이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눈으로 보고 아이들과 살을 비비면서 새로운 세계에 열린 마음을 갖게 된 것 같았다. 조선 사람들은 아들과 아버지가 함께 방문한 것을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나중에 건은 자신이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며 내게 말했다. 이전까지는 ‘North Korea’라는 말을 들으면 회색빛 그림들이 그려졌었는데, 평양에 내려 저녁노을을 보면서 자기 머릿속 조선의 이미지가 총천연색(full-colour)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했다. 원산의 모래사장에서 안내원, 운전기사, 재중교포 팀원들과 함께 웃통을 벗고 축구를 하고, 밤에 등대까지 나 있는 방파제 위의 포장마차에서 안내원과 운전기사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들이 사람처럼, 동네 아저씨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건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것이 내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생각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볼 수 있는 마음과 눈. 그래, 그러면 됐지…. 하나님은 세상에서 샬롬(온전함, 평화, 정의, 선)이 이루어지도록 일하신다. 히브리어 ‘샬롬’은 정의와 평화로 번역된다. 우리는 그런 샬롬의 왕이신 예수를 따라 평화로 가는 길을 택하고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정의를 위해 일하도록 부름 받았다. 지도에 그은 선으로 사람을 사람으로 볼 수 없게 하는 생명 경시와 비인간화의 이데올로기는 바로 성서에서 정사와 권세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전쟁(평화의 부재)과 기아(분배정의의 부재)로 많은 부모들이 귀한 자식들을 가슴에 묻고 있고, 더 많은 수의 아이들이 안아줄 부모의 품을 잃고 있다. 우리는 성별, 세대, 계급, 국가, 인종의 장벽을 허물고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 존중함으로써 정사와 권세를 이기신 예수의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이들이다.
4.
평양에서 북경으로 나오자 중국 수사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이 함께 점심을 먹자고 연락이 왔다. 북경 토박이들에게 유명한 식당에서 만났지만, 긴장한 탓에 음식 맛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한족 두 사람이 나왔는데, 그중 한 명은 거의 한국 사람처럼 한국어를 구사했다. 내게 던진 첫 번째 질문은 “어느 정부가 제일 잘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남한입니까, 북한입니까, 중국입니까, 아니면 미국입니까?”였다.
“글쎄요…, 저는 모든 정부가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속한 메노나이트 교단에는 모토가 하나 있는데요. ‘We have no enemy(우리에겐 원수가 없다)’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를 따르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겐 국경보다는 사랑이 필요한 곳에 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조선에도 갔지요.”
내가 그렇게 답하자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저는 그게 진짜 기독교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서 예수가 그렇게 말했지요.”
기가 막혔다.
“아니 어떻게 그걸 아십니까? 공산당원 아니신가요?”
“네, 저는 공산당원입니다. 기독교인 아닙니다.”
“근데, 어떻게…?”
“저희는 성경과 조직신학을 공부합니다. 하도 사이비가 많아서 어떤 것이 진짜인지 구별하기 위해서요.”
“저 같은 한국 목사들보다 낫네요!”
둘은 한바탕 크게 웃었다. 어쩌면 세상은 우리보다 복음을 더 잘 이해하고 있으며, 예수 따르는 이들이 믿는 복음이 이 세상에 구체화되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길,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 2016년 방한화를 지급한 고아원에서 |
세-워주기
1.
2016년 가을 조선을 방문했을 때다. 평양을 떠나기 전날, 조선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수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한반도 현대사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들으며, 동의하는 부분도 있었고,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많아서 여러 질문을 드렸다.
“조선은 6·15와 10·4 선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의 질문에 그 교수는 “우리는 백 퍼센트 그게 지켜지길 원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렇군요. 반가운 말씀입니다. 근데, 저는 통일 담론 이전에 우리가 화해를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은 통일보다는 민족이 먼저 화해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대화를 듣고 있던 스티브 윤 교수가 제안했다.
“그럼 우리 화해포럼 같은 것을 해보면 어떨까요? 재미교포와 조선의 청년들이 모여 화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 말입니다.”
실은 내가 조선에 들어가면서 마음에 가졌던 기도제목이 그것이었는데, 윤 교수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거기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윤 교수의 그 제안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이 내 귀와 심장을 울렸다. “그러기 위해서 제가 조선에 대해 좀 더 배우고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했더니, 내년에 다시 들어와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보자고 했다. 그 교수는 무엇보다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비판하지 않음으로써 서로를 존중하고 세워주는 것을 포럼의 규칙으로 정하자고 못을 박았다. 나는 그게 화해를 위한 대화 방법이라고 동의했다.
2.
2017년 5월 말, 지난 여행에서 이야기 나왔던 화해포럼을 준비하기 위해 김성환 목사와 함께 조선을 방문했다. 나는 화해포럼 5개년 계획을 제안했고, 김 목사는 화해포럼과 연계해서 백두에서 판문점을 통과해 한라까지 자전거 종단여행을 제안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처음에는 대화가 잘 진척이 되질 않았다. 내가 공동대표로 있는 ‘ReconciliAsian’이라는 단체의 짧은 역사도 그렇고, 나 자신이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조선 분들의 신뢰를 얻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예정된 일정을 거의 마쳐갈 무렵, 이전에 미국 메노나이트 교단 대표인 어빈 스투츠만에게 요청해 교단의 이름으로 발표했던 <한반도 전쟁 반대 선언문>을 조선 분들에게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마음을 움직였던 것 같다. 9월 첫 주에 평양에서 화해포럼 첫 모임을 하기로 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 주일에 봉수교회 예배에 참석했는데, 나에게 말할 기회가 주어졌다. 강단에 서서 보니 미국에서 방문 중인 신은미 씨 부부와 평양과기대 교수들도 앉아있었다. 조선에 들어가기 전 주일에 나는 목회하던 마운틴뷰메노나이트교회에서 설교하면서 교인들에게 물었었다. “이제 다음 주일이면 저는 평양에 있는 봉수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될 겁니다. 혹시 그곳 강단에 설 기회가 주어진다면, 제가 그분들께 인사를 드리면서 예수의 이름과 여러분들을 대신해 사랑한다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대다수 백인인 교인들은 답이 없었다. 내가 재차 다시 물으니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좌우간 교회로부터 허락을 얻은 나는 봉수교회 강단에 서서 인사를 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그리고 마운틴뷰메노나이트교회를 대표해서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예배 참석자들이 “아멘”하고 박수를 쳤다. “그럼 제가 다음 주일에 다시 미국에 돌아가 제 교회에서 설교를 할 텐데요… 그분들께 예수의 이름과 여러분들을 대신해 사랑한다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다시 “아멘”하고 박수를 보내왔다.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런 게 정말 의미 있는 일일까? 한반도와 미국의 긴장이 급격히 고조되고 있는 이 시기에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영향력도 없는 이런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다시 나에게 반문했다. 그럼 그게 아니면 평범한 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적이 된 사람들을 서로 축복하고 존중하고 세워줄 수 있도록 돕는 것 말고, 목사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또 있을까.
3.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조선에 감금되었던 미국 청년 웜비어가 석방되어 귀환했고, 얼마 후 사망했다. 조선에 대한 미국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결국, 여행금지령이 발표되어 9월 첫 주부터 조선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스티브 윤 교수를 통해 다시 연락이 닿았다. 11월 첫 주에 연길에서 모임을 하자는 연락이 왔다. 부리나케 다시 준비를 시작했다. 화해포럼에 참여할 젊은이들을 모으기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반도 평화에 관심을 가진 교포 젊은이들이 많지 않았고, 그나마 관심 있는 이들도 부모들의 반대가 심했다. 우여곡절 끝에 김성환 목사 가정과 안태형 박사 부자, 크리스틴 장과 도나 박, 그리고 우리 가정을 포함해 13명이 연길로 가는 비행기 표를 샀고, 포럼을 위한 숙소와 장소를 예약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극보수적인 사람들로부터 화해포럼 참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보수와 진보 양 진영에서 존경받는 분으로부터 공개지지(endorsement)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ReconciliAsian’의 시작 때부터 함께해주시는 주빌리파트너스 공동체의 돈 모슬리 형제에게 부탁을 드려 친구인 지미 카터 대통령의 지지 편지를 받았다. 해비타트 사역으로 캐나다에 집을 지으러 갔다가 쓰러져 입원해 계시느라 돈 형제의 처음 이메일을 확인 안 하셔서 한동안 답을 못 받았는데, 돈 형제가 집을 방문하시는 길에 다시 부탁을 드렸다고 했다. 여러모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 같아 기뻤다. 카터 대통령은 조선과의 관계에 있어서 핵심단어는 “존중(respect)”이라고 하셨다.
4.
연길로 떠나기 한 주 전 트럼프 대통령의 동북아 순방이 발표되었는데, 화해포럼과 같은 주간이었다. 중국이 조선에 대한 경제 제재와 보안을 강화하면서 조선 대표들이 연길로 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저렴한 비행기 표를 사두어서 환불을 받을 수도 없었다. 우리 팀은 한 명을 제외하고 연길로 가겠다고 했다. 여기서 그만둘 것이 아니라면 우리만이라도 계획대로 포럼을 진행해야 한다고들 하니 힘이 났다. 문제는 재정이었다. 포럼에 드는 비용 전체를 지불하기로 한 후원단체로부터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원을 취소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1만 2천 달러가 넘는 비용을 갑자기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여러 사람들을 통해 작은 후원금들이 모였고, ‘ReconciliAsian’ 이사들도 예산에 없던 긴급 재정 사용을 기꺼이 허락해주었다.
5.
연길에서의 모임은 많은 도전을 주었다. 선양하나의 사역을 보고, 그들과 함께 국경을 돌아보며, 함께 포럼을 진행했다. 재중교포, 한족, 한국인, 재미교포, 백인들이 할아버지부터 손녀 손자까지 어울려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동역하는 것을 보니 우리가 말로 가르치는 화해의 공동체가 바로 여기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문에 가서 두만강 건너편을 바라보고, 백두산 천지에도 올라 조선을 바라보며 한반도에 속히 화해와 통일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했다. 김성환 목사는 전부터 백두산의 나무와 한라산의 나무를 합쳐 화해의 십자가를 만드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이번 여행을 통해 그 꿈을 이루었다. 나는 그의 꿈이 이루어져 가는 것을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다음은 김성환 목사가 자신이 만든 화목(和睦)의 십자가에 관해 설명한 글이다.
백두산의 나무와 한라산의 나무로 만든 ‘화목의 십자가’(Reconciliation Cross)
지난 11월, 저는 백두산에 다녀왔습니다. 다녀온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 백두산에서 나무를 주워오기 위함이었습니다. 영하 18도의 추운 백두산 숲속에서 땅에 떨어진 자작나무 몇 토막을 주웠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북경과 인천공항을 경유해서 제주도 한라산에 갔습니다. 4·3 평화박물관 뒤, 한라산 기슭에서 나무 몇 토막을 주웠습니다. 미국 LA에 돌아와서 두 나무를 다듬어 ‘화목의 십자가’를 만들었습니다.
훗날, 통일된 한반도에서는 판문점이 교회 건물이 되면 좋겠습니다. 판문점 교회를 ‘평화 교회’라 명명하고 한때 분열의 상징이었던 벽 한가운데 백두산과 한라산의 두 나무 막대기를 연결하여 만든 저 ‘화목의 십자가’를 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를 만들다가 울컥하여 작동하던 톱을 멈추고 용암 같은 눈물을 쏟았습니다.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선지자가 두 나무 조각을 합하며 두 나라가 하나가 될 것을 예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한반도에 이루어지길 바랍니다.(37:15-23)
주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써라. 막대기를 또 하나 가져다가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써라. 그리고,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되게, 그 막대기를 서로 연결시켜라. 그것들이 네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네 민족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일러주지 않겠느냐?’ 하면, 너는 그들에게 말해 주어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에브라임의 손 안에 있는 요셉과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지파의 막대기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 유다의 막대기를 연결시켜서, 그 둘을 한 막대기로 만들겠다. 그들이 내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하셨다고 하여라. 또 너는, 글 쓴 두 막대기를 그들이 보는 앞에서 네 손을 들고, 그들에게 말해 주어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 살고 있는 그 여러 민족 속에서 내가 그들을 데리고 나오며, 사방에서 그들을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그들의 땅 이스라엘의 산 위에서 내가 그들을 한 백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며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두 나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다시는 우상과 역겨운 것과 온갖 범죄로 자기들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범죄한 그 모든 곳에서, 내가 그들을 구해 내어 깨끗이 씻어 주면,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 2017년 평양 봉수교회 성가대 |
화해의 복음
1.
복음은 상황 안에 묶인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가난, 포로됨, 눈멂, 눌림이라는 상황에 묶인 사람들의 절규에 대한 과거-현재-미래를 함께 사시는 하나님의 행위선언이다(눅 4:19-20). 구체적 상황 없는 복음은 사변화되어 현실에서는 힘을 잃고 만다. 남북관계를 자신들이 직면한 상황(immediate context)에서 배제한 한국인들에게 진정한 복음 이해가 가능할까 고민해봐야 한다. 이 시대는 다른 어느 때보다 진정한 화해를 부르짖고 있다. 화해는 성서를 가로지르는 핵심 주제이며, 그런 측면에서 우리 시대에 다시 발견되어야 할 복음의 영역이다. 통일 담론 이전에 교회가 평화와 화해의 관점에서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빌레몬-오네시모로 극화된 ‘화해의 공동체’라는 신약 교회의 비전이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 몸을 입고 뿌리내리도록 일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사명이다.
2.
지금 나의 주요 관심은 조선의 역사 안에 있는 화해의 이야기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역사와 전통에서 나온 공통의 이야기(shared story)들이 우리의 정체성(identity)을 형성하고, 그런 정체성에서 우리가 해야 할 바(mission)가 발견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화해의 이야기들을 찾아 서로 배우고, 다시 본인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경험한 우리 부모 및 조부모의 트라우마 이야기는 세대를 거쳐 대물림되었고, 남북 및 북미 관계의 회복이 일어나는 최근의 상황에도 여전히 분노와 두려움이 남북관계의 전위대가 되어, 정확한 지식과 이해를 기초로 한 대화를 가로막는다. 리처드 로어 신부는 “방치된 아픔은 전이된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총기 사고만 나면 ‘정신병’ 문제로만 치부하고, 한국에서는 사회 쟁점마다 ‘종북’ ‘빨갱이’ 딱지를 붙이는 것이 유행이다.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들에 딱지를 붙임(labeling)으로써 근본적인 치료를 피해간다.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이해하자. 그리고 우리에게 전이된 그 아픈 상처와 고통들을 다음 세대에게는 넘겨주지 말아야 한다. 로어 신부는 또 말한다. “새로운 길을 갈망한다고 길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래된 길을 끝내야 새 길이 열린다.” 이제 우리는 트라우마로 얼룩진 오래된 길을 끝내야 한다. 자녀들이 화해와 용서의 마음으로 복수와 두려움을 몰아내고 좋은 이웃으로 다 함께 살아가는 평화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그리고 서로를 치유해야 할 때이다. ‘자녀의 미래’라는 렌즈를 통해 과거의 아픔을 재해석하며, 지금 닦는 길이 비록 작고 좁고 약해 보인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평화와 화해의 길을 내어야 한다.
교회, 대안적-예언자적 정치체제
1.
마르쿠스 바르트는 “만약 그리스도께서 평화라면, 그분은 본질상 사회적이고, 심지어 정치적인 사건이시다”라고 말했다(《The Broken Wall: A Study of the Epistle to the Ephesians》, 1959). 리사 셔크도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peace makers)은 단순히 폭력을 멈추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평화를 뒷받침하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일한다”라고 했다(《전략적 평화 세우기》, KAP 역간). 우리가 평화의 왕이신 예수의 백성으로서 그를 따른다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런 면에서 예수 따르는 이들은 정치적이다.
2.
정치적인 문제를 간과할 수 없기에 ‘ReconciliAsian’은 메노나이트와 퀘이커 Advocacy Teams 등과 함께 전쟁 반대 법안 세우기 운동에 참여한다. 퀘이커 Advocacy Teams는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점조직 망으로 정치권, 특히 의회가 평화와 정의를 증진하도록 로비하는 그룹이다. 2018년 이들의 가장 큰 어젠다는 ‘한반도 핵전쟁 반대’로 정했다. 그들과 함께 지역의 상원의원과 하원의원 사무실을 찾아가 한반도 전쟁에 관한 트럼프의 발언에 대한 우려를 전하고 그들이 의회에서 적극적으로 전쟁을 반대하도록, 그리고 법안을 상정하도록 강하게 의견을 전달한다. 아이들도 함께 가서 “어른들이 저지른 전쟁 뒤치다꺼리를 다음 세대가 고스란히 받아 안게 된다”고 피력하며 시민으로서 정치에 참여한다.
3.
나와 아내는 작년 12월 이후로 주로 타 인종이 주관하는 모임에 가서 한반도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재미교포가 만든 <잊혀진 전쟁의 기억>(The Memory of Forgotten War)이라는 영상을 보여주며 ‘평범한 미국 시민인 우리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나눈다. 퀘이커 활동가인 앤써니와 제자회신학재단(Disciples Seminary Foundation)의 천진석 목사와 연계해 짧은 강연들을 해왔고, 바나바 박, 안태형, 이인엽 교수 등 전문 학자들을 초청해 타 인종 대상의 세미나를 열고 있다. 작고 보잘것없는 발걸음이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성공(successful)이 아닌 신실함(faithful)이기에 평화를 위해 한 걸음씩 내디딘다.
이제까지 긴 얘기를 풀어 놓았다. 글에 언급된 한인 디아스포라들만 해도 수십 명이다.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로마서 16장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라는 한마디 말로 퉁치지 않았다. 그 지역에 거주하며 로마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개인들의 이름, 그리고 가정교회들을 하나하나 호명한다. 나는 바울도 아니고 그가 자신의 동역자들을 일일이 기억하는 것처럼 글에서 언급된 분들을 깊이 알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들에 대해 분명히 아는 사실 하나가 있다면, 이들 한인 디아스포라는 ‘침례(세례) 요한’ 같다는 것이다. 오고 있는 예수의 길을 준비하고 첩경을 평탄케 해야 했던 요한처럼 한인 디아스포라는 결국 한반도 화해와 평화 물결의 주인공인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민들이 다시 만나도록 준비하는 일꾼들이라는 것이다.
평화와 화해를 일구어가는 기본 과정은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서로에게 그리고 서로에 관해 배우는 것이라고 한다. 이 글을 쓰는 중에 제3차 남북정상회담(4·27)이 있었다. 한반도가 평화와 화해로 가는 과정을 시작한 것이다. 남북 정상은 도보다리를 건너며 이야기를 나눴다. 두 사람이 벤치에 앉아 이야기 나누는 장면이 전 세계에 보도되면서,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제는 서로에게, 서로에 관해 배워야 할 때이다. 이 글이 그 과정에 들어선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상황이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어느 학자의 말처럼, 한국 정부가 한반도 상황에 관련해 해야 할 일이 뭔지 하룻밤만 고민하면 답이 나오는데도 실행이 어려운 이유가 있다. 전쟁으로 배를 불리는 사람들이 어느 체제이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권력과 돈을 쥔 자들인 경우가 많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와 관련된 한 아이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권력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원하지 않는단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전쟁으로 먹고살기 때문이지. 이건 매우 심각한 일이란다. 어떤 권력자들은 무기를 생산함으로써 먹고 산단다. 그건 죽음을 생산해 내는 산업이야.”
하지만, 이제 한반도에 화해와 평화가 올 것이다. 정치적으로 극보수이지만 삼각산에 올라 한반도를 위해 철야기도를 하던 할머니와 어머니들, 빨갱이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분주히 담 너머로 손을 내민 선배들, 해외에서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를 바라며 다리를 놓던 디아스포라들, 그리고 무엇보다 준비된 곳에 평화를 선물로 주시기 위해 온 세계를 화해로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 때문에 그렇다. 그런 날이 오면 한국과 조선이 세계의 모든 분쟁지역에 평화와 화해의 다리가 되어주길 바란다. 원수 된 자들이 다리를 건너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존중하고 세워갈 수 있도록 다리가 되어주기를! 이것이 한인 디아스포라의 하나인 나의 간절한 기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되… 쉽게 던져진 정답들, 반쪽짜리 진실들과 피상적 관계에 계속 불편하게 하셔서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담대히 진실과 사랑을 찾게 하시길.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되… 불의와 억압과 인간에 대한 착취에 분노하게 하셔서 우리로 모든 사람들 안에 정의와 자유와 평화를 위해 지치지 않고 일하게 하시길.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되… 아픔과 배제와 굶주림과 상실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흘리는 눈물의 은사를 주셔서 우리의 손을 내밀어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고통을 기쁨으로 변화시키게 하시길.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되… 우리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정말 가능하다고 믿도록 충분히 어리석게 하셔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 있게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하시길. (프란시스칸 축도)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우리 아래에, 우리 앞에, 우리 뒤에, 우리 옆에, 그리고 우리 안에 영원히 계십니다. 주님의 평화!
허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