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구] 기자들이 모여 살던 동네를 아시나요?
통일로 주변 기자촌과 은평 한옥 마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만약 정부가 나서서 특정 분야 종사자들만을 위한 택지를 조성해 저렴하게 제공한다면 여론이
어떨까? 분명 특혜 시비가 일 것이다. 만약 그 대상자가 언론사 기자들이라면? 권언유착이라며 시끄러울 게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이 실제 있었다. 정부가 언론사 기자들을 위해 택지 조성을 해 마을이 들어섰고 그곳에
기자들이 대거 모여 살았었다. 동네 이름도 ‘기자촌’이었다.
(2022. 05. 04) 서울 은평구 진관동의 기자촌 옛터 표지석.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기자들이 모여 산 ‘기자촌’
기자촌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기자들이 모여 사는 곳”을 의미하며 “선수촌에서의 소식을 취재하기 위하여
기자들의 숙소를 만들면서 생겨났다”고 설명한다. 서울 송파구에 있는 ‘올림픽선수기자촌’ 아파트 단지가 대표적이다.
이렇듯 특정 행사 취재에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기자촌은 행사 기간에만 임시로 운영하고 나중에 일반에 분양한다.
하지만 이번에 찾아간 ‘기자촌’은 40여 년간 언론사 기자들이 모여 살았던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의 어느 마을이었다.
정확한 위치는 지금의 은평뉴타운 11단지 인근으로 북한산 자락 바로 아래에 자리했었다. 현재는 서울이지만 택지가
조성될 당시에는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진관외리였다. 구파발을 포함한 이 지역은 1973년에 서울시 서대문구로
편입되었고, 1979년에 은평구로 분구했다.
1969년 3월에 있었던 한국기자협회 택지 조성 기공식.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이후락(오른쪽)이 참석했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그렇다면 당시 기자촌을 조성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예전 기사들을 검색해보니 기자들의 경제 상황을 배려한 사업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부터 발전의 흐름을 타지만 “당시 기자들 월급으로는 최저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웠다”고.
그래서 정부와 ‘한국기자협회’가 협의해 당시는 경기도였던 이곳에 택지를 조성하고 저렴한 가격에 분양했다고 한다.
1969년 3월에 열렸던 택지 기공식 사진을 보면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이후락이 참석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입김이
작용한 사업이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한국기자협회 소속 무주택 기자들 335명이 주택조합을 결성해 1969년 11월에 첫 입주를 시작했고,
1974년 3월에 분양이 완료되었다. 예전 기사를 보면 420여 세대가 입주했다고 하는데 당시 서울에 있는 언론 기관에
소속된 많은 기자가 한 마을에 모여 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기자촌은 서울 중심부에서 매우 멀었다. 통일로가 지나는 구파발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래서 ‘기자촌’이라는 이름 외에 ‘외딴섬’이라는 별칭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입주자 회고에 따르면 입주 초기에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우물을 파야 했고, 출근하기 위해서는 구파발까지 논길 사이로 걸어가야 했다고 전한다.
세월이 흐르며 기자들은 점차 기자촌을 떠났고 1990년대 후반에는 일부 퇴직 언론인들만 남았다.
2000년대 들어서는 44가구 정도만 남게 되었다고.
은평뉴타운의 기자촌 사거리.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아파트로 개발된 기자촌.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기자촌 옛터' 표지석 뒷면에는 이곳에 살았던 기자들의 이름이 박혀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기자촌 일대는 원래 그린벨트 지역이었다. 말 그대로 북한산 자락 바로 아래다.
그래서 2000년대 은평뉴타운 사업이 시작됐을 때 기자촌은 제외될 것으로 보였고 정비구역에도 포함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해 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기자촌은 결국 뉴타운 지역에 포함되었고 주택들은 모두 철거됐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와 사거리, 그리고 공원에 붙은 ‘기자촌’ 이름으로 옛 흔적이 남았다.
‘기자촌 옛터’라는 표지석으로도 남았다. 표지석 뒷면에는 이곳에 살았던 언론인 이름이 빼곡히 박혀있다.
당시 정부는 왜 기자들을 한마을에 살게 했을까. 표면에 드러난 것처럼 무주택 기자들을 위한 배려였을까.
물론 그런 평가를 받긴 하지만 정권에 비판적일 수도 있는 언론인들을 한곳에 모아놓았다는 시각도 분명 존재한다.
한데 모아 놓으면 관리 혹은 감시하기 편한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북한산 자락 한옥 마을
기자촌 사거리에서 북한산 입구로 가다 보면 다소 이채로운 마을이 나타난다. 일명 ‘은평 한옥 마을’이다.
서울 종로의 북촌이나 익선동에만 한옥 마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북한산 자락에도 한옥 마을이 있었다.
은평 한옥 마을 정경.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그곳도 은평뉴타운 지역으로 SH공사가 공급한 한옥 156필지로 구성됐다.
북촌이나 익선동처럼 지은 지 오래된 한옥이 아니라 2012년 이후에 새로 신축한 한옥들이다. 현대 감각에 맞춰 새로
설계한 한옥도 있지만 삼남 지역, 즉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의 조선 시대 기와집을 본뜬 한옥이 대부분이라고.
은평 한옥 마을은 북한산 봉우리들을 뒷마당으로 삼고 있는 모습이다. 대자연과 한옥 마을은 잘 어울리는 듯도 하지만 다소
어색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평평하게 정리된 택지와 반듯하게 뻗은 골목길에 줄지어 선 한옥들이 지형지물을 그대로 활용해 들어선 전통 한옥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2022. 05. 04) 은평 한옥 마을.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은평 한옥 마을.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마을 입구에는 ‘은평 역사 한옥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마당에는 은평뉴타운 개발지 곳곳에서 옮긴 묘지 석물들이 서 있고
유구 발굴지가 재현되어 있었다. 은평뉴타운이 들어선 지역에는 신라 시대부터 근대까지 조성된 묘지가 많았다고 한다.
이 지역 개발 과정에서 발굴된 무덤만 5천 기가 넘는다고.
왜 이 지역에 이토록 많은 무덤이 있었을까? 조선 시대에는 한양과 도성 밖 십리인 성저십리에 묘지 만드는 것을 법으로
금했다. 즉, 매장이 금지된 금장(禁葬) 지역이었다. 그런데 금장 지역을 벗어난 곳이 바로 경기도 고양에 속한 진관내리와
진관외리, 지금의 은평구 진관동이었다. 도성에서 비교적 가까운 지역이라 매장지로 많이 이용되었다고.
'은평 역사 한옥 박물관' 입구의 석물들. 은평뉴타운 개발 지역의 묘지들에서 가져온 것이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은평뉴타운 개발 당시 이 지역에 산재했던 5000여 기의 무덤들에 대한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평민의 무덤들을 소홀히 취급했다는 평가도 있다.
‘은평 역사 한옥 박물관’의 관련 전시물도 민초들 보다는 양반 문화 위주로 전시되어 있었다.
아무튼 은평 한옥 마을은 북한산 주변 풍경을 이채롭게 만드는 곳으로 자리 잡을 듯하다.
평일 오후 한옥 마을을 찾은 관광객이 눈에 많이 띄고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 시설들도 성업 중이었다.
이 지역이 한양 사람들의 오랜 매장지였던 것이 기록에 남았듯이 은평 한옥 마을 또한 2020년대 한국 문화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풍경으로 역사책 한켠에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2022. 05. 04) 구파발 사거리에 있는 '통일로' 표지석.
한편, 기자촌과 은평 한옥 마을 인근 구파발 사거리에는 통일로 표지석이 있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통일의 염원을 담아 이름을 짓고 글씨를 써주었다고 표지석 하단에 쓰여있다.
통일로가 처음 개통되었을 때는 서울과 경기도 고양군 경계부터 파주시 문산의 임진각까지가 통일로였고,
서울역부터 구파발까지는 의주로였다. 지금은 옛 의주로와 옛 통일로가 합쳐져 지금의 통일로가 되었다.
통일로는 한때 변경으로 향하는 도로였지만 확장되고 개발되는 서울과 인근 도시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길이 되고 있다.
그곳에 기자촌과 같은 변두리 마을이 있었고 지금은 은평 한옥 마을과 대규모 아파트촌인 은평뉴타운이 들어섰다.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