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두 얼굴] 시시한 논쟁 - 버트란드 러셀(5)
이제 오십 줄에 접어든 러셀은 도라의 “요정 같은 매력”에 매혹됐고, “달빛으로 목욕을 하거나 이슬 맺힌 풀밭 위를 맨발로 뛰어다니는”것이 즐거웠다. 도라의 입장에서는 군국주의자들이 그의 집에 “망할 놈의 반전주의자 심술쟁이가 여기에 산다”고 적어 놓았는데도 “단어 하나하나가 모두 정확했다”고 말하는 러셀의 모습에 호기심이 생겼다. 러셀의 외모는 모두가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러셀은 이때쯤 사람의 마음을 포고드는 낄낄거리는 웃음을 개발한 상태였는데, (케임브리지에서 그가 가르친 제자인) T. S. 엘리엇은 그 웃음을 “딱따구리 웃음소리”와 비슷하다고 묘사했고, 조지 산타야나는 하이에나 웃음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중충한 구식 스리피스 정장을 입었는데, 그 차림새는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그는 단벌신사가 아니었던 적이 드물었다). 발목 조금 위까지 오는 짧은 각반에 빳빳하게 높게 솟은 옷깃은 그와 도잇대를 살았던 쿨리지와 꽤나 비슷했다. 베아트리스 웨브는 러셀의 두 번째 결혼 생활 동안 그가 “퀴퀴하고 불건전하며 냉소적이고 너무나 늙은 사람이었다”고 일기에 기록했다. 그런데 도라는 러셀의 “바람에 날려 올라가는 두껍고 아름답기까지한 흰머리…..커다랗고 날카로운 코와 이상하게 생긴 작은 턱, 긴 윗입술을 좋아했다.” 그녀는 러셀이 “품은 넓지만 바깥으로 휘어진 작은 발”을 가졌고, 그가 “매드 해터[<이상한 나라 앨리스>에 나오는 미친 모자 제조공]와 딱 닮았다”고 기록했다. 도라는 “그를 세상물정 모르는 특유의 성향으로부터 호호”하고 싶어 했다(간절한 소망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존과 케이트라는 두 아이가 있었다. 부부는 1927년에 피터스필드 인근의 바콘 힐에 진보적인 학교를 설립했다. 러셀은 <뉴욕타임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열 가족가량이 결합한 협동 조합”이 아이들을 “한데 모아서는” “돌아가면서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밝혔다. 매일 “적절하게 균형이 잡힌” “수업을 두 시간”하고, 나머지 시간은 “활발하게 뛰어다니는 데” 소비됐다. 비콘 힐은 이런 이론을 구체화라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학교를 운영하는 데 돈이 많이 들었고, 러셀은 청구돼 오는 각종 대금을 지불하기 위해 돈벌이용 글을 써야만 했다. 게다가 톨스토이처럼 얼마 안 있어 학교의 일상이 따분해진 그는 극도로 진보적인 관점으로 인해 훨씬 책임감이 강했던 도라에게 학교 운영을 떠맡겼다.
두 사람은 섹스 문제를 놓고도 다툼을 벌였다. 웨브는 “러셀이 존경하지도 않고 존경할 수도 없는 경박한 품성과 물질 만능주의 철학을 가진 여자”와 한 러셀의 결혼이 실패할 것이 확실하다고 예측했다. 러셀은 다시 톨스토이처럼, 공개 정책을 주장했고, 도라는 거기에 합의했다. “버티와 나는 (…..)성적인 모험과 관련해서 각자를 자유롭게 내버려 뒀다.” 러셀은 그녀가 “성 개혁을 위한 세계 연맹” 영국 지부의 책임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1926년 10월에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성대회에 성전환 수술의 개척자인 매그너스 허시펠드 박사와 잘생긴 산부인과 의사 노먼 헤어와 함께 참석하는 것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라가 저널리스트 그리핀 배리와 관계를 맺고-18세기 휘그당 여성들은 아버지가 다른 아이들을 낳기도 했다는 러셀의 제안에 따라-베리의 아이 둘을 낳았을 때, 러셀은 점차로 심기가 불편해졌다. 많은 해가 지난 후, 러셀은 자서전에서 그 사실을 인정했다. “두 번째 결혼에서, 나는 내 신념이 명하는 바라고 생각했던 아내의 자유에 대한 존경심을 지켜 내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내 용서와 기독교적 사랑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나의 요구 사항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누구든 나에게 이 사실을 미리 말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론 때문에 눈이 멀었다.”
러셀은 공개 정책과 명백히 상반되는 짓들을 자신이 했다는 것, 긜고 부부간에 서로 숨기는 것이 있었다는 것은 밝히지 않고 생략했다. 섹스에 대한 전면 개방을 현실에 적용하려고 애쓰는 지식인들의 모든 사례에서, 보통의 바람난 가족에서 볼 수 없는 죄스러운 비밀을 갖게 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도라는 크게 동요한 요리사가 불러서 콘월에 있는 그들의 별장에 간 적이 있다. 그 요리사는 도라에게 가정 교사가 “주인님과 동침”했기 때문에 그녀가 두 아이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막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가엾은 요리사는 해고당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도라는 자신이 집을 비운 동안 러셀이 옛 애인인 콘스탄스 부인을 불러들여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갓난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마침내 불쾌한 충격을 받았다. “버티는 이제 그의 애정이 피터 스펜스에게 향하게 됐다는 말로 나에게 충격을 줬다” 마저리(“피터”) 스펜스는 휴일에 존과 케이트를 돌보러 왔던 옥스퍼드 학생이었다. 러셀 부부는 각자의 애인을 대동하고 프랑스 남서부에서 4인 휴가에 도전했다(1932). 러셀은 한 해 전에 형이 후사 없이 죽으면서 백작이 됐는데, 이로인해 많은 것이 달라졌다. 러셀은 더욱 귀족처럼 행동했고, 피터는 정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피터를 식구들이 사는 집안에서 살게 했다. 충격을 받은 도라는 “처음에는 버티가 나한테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런 남자”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러셀의 “비극적인 결정”은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중을 사랑했고 대중의 고통을 아파했지만, 서민의 정서가 결여된 귀족적인 내면 때문에 대중과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내를 버리고 새로운 아내를 얻을 때가 되면 러셀은 결코 “속세를 떠난”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도 도라는 경험을 통해 알게 됐다. 러셀은 그의 계급에 속 부유한 다른 남자들처럼 권세 좋은 변호사 팀을 재빨리 고용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 데 필요한 백지 위임장을 건넸다. 이혼은 대단히 복잡하고 고통스러웠다. 이혼에는 3년이 걸렸는데, 부분적으로는 부부가 결혼 초기에 서명한 별거 증서 때문이었다. 증서의 내용은 부부 양쪽의 간통을 허락한다는 것과, 1932년 12월 31일 이전에 행해진 결혼 생활에 대한 침해 행위에 대해서는 부부 어느 쪽도 훗날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소송을 복잡하고 혼란스럽게만 만들었다. 그 결과 러셀의 변호사들은 더욱 공격적이 됐다. 부부 각자는 쌍방이 모두 친자식이라고 인정한 두 아이에 대한 양육권을 갖고 싶어 했다. 러셀은 법정 투쟁 끝에 결국 아이들을 셸리이 불쌍한 자식들처럼 법원의 보호를 받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러셀의 변호사들은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 운전사의 진술서를 확보했다. 도라에 의해 쫓겨났다가 이제는 러셀에게 고용된 이 운전사는 도라가 자주 술에 취했고, 그녀의 방에서 위스키 병을 깨 버렸으며, 같은 방에서 아이들 아버지와 손님들과 동침했다고 진술했다. 러셀도 상처 하나 없이 소송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혼 법정 재판장은 1935년에 마침내 판결을 내렸다. 도라의 간통은 “남편이 벌이 최소한 두 건의 불륜 행위에 뒤이은 것이며, 남편은 결혼 생활을 침해한느 행동을 강화하면서 수많은 간통 행위를 저지른 결점이 있다…..피고는 부부가 공동으로 점유한 공간에서 집안에 있는 사람들이나 사업상 관계가 있는 사람들과 간통을 했다.” 이 길고 고통스러운 법정 투쟁에 관한 다양한 보고서들을 읽으면서 도라에게 동정심을 품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그녀는 자신의 원칙에 시종일관 충실했다. 반면에 러셀은 개인적으로 불편해지는 순간에는 자신의 원칙을 저버리고는 모든 것을 법에 호소했다. 도라는 처음부터 결혼을 조금도 바라지 않았다. “1935년 3월에 나는 법적인 결혼 생활에서 마침내 자유로워졌다. 나는 30대 후반이었다. 이혼은 내 인생의 3년을 잡아먹었고, 내가 결코 완전히 치유할 수 없는 비극을 나에게 안겨 주었다.
셋째 아내 피터 스펜스와 러셀의 결혼 생활은 15년 동안 가장 행복하게 이어졌다. 러셀은 간략하게 진술했다. “1949년에 내 아내가 더 이상 날르 원하지 않는다고 결정했을 때, 우리의 결혼은 최후를 맞았다.” 그릇된 인상을 주는 이 문장 뒤에는 러셀의 입장에서 보면 시시하기 그지없는 간통들로 이뤄진 긴 사연이 있다. 러셀은 멋잇감 여성을 찾아 고속도로를 헤매는 적극적인 난봉꾼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기는 해도, 그는 그가 가는 길에 서 있는 여성들을 유혹하면서 조금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결국에 그는 노련한 바람둥이들이 어린 나이에 터득한 수법에 꽤나 정통한 사람이 됐다. 그는 언젠가 오톨라인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당신에게 제일 안전한 계획은 당신이 역에 와서 플랫폼의 1등 대합실에서 기다리다가 택시를 타고 같이 호텔로 들어가는 거요. 이것이 다른 어떤 계획보다도 덜 위험하고, 호텔 직원들에게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거요.” 30년 후 그는 그 문제에 대해 시드니 훅이 요청하지도 않은 충고를 했다. “훅, 자네가 여자를 호텔에 데려갔는데 프런트의 직원이 의심스럽다는 눈길을 보내지는 않았나? 그 친구가 자네한테 방값을 얘기하면 여자한테 큰 소리로 투덜거리게. ‘너무 비싸잖아!’ 그러면 그 직원은 여자를 자네 아내라고 생각할 걸세.” 그런데 통상적으로 러셀은 런던 베리 가에 있는 그이 아파틀르 궁핍한 옛 제자 T. S. 엘리엇과 그의 아내 비비언에게 보금자리로 내 줬다. 엘리엇은 러셀은 “책임감이 없는 태아”인 아폴리낙스 씨[엘리엇의 시 제목]로 묘사하면서, “오후를 삼켜 버린 적나라하고 열정적인 얘기”를 할 때 그는 “단단한 잔디밭을 달려오는 켄타우루스의 발굽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엘리엇은 열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켄타우루스 옆에 아내를 혼자 놔두는 일이 잦은, 사람을 쉽게 믿어 버리는 인물이었다. 러셀은 이 사건에 대해 애인들한테 상반되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오톨라인 부인에게 러셀은 비비언과 벌인 연애는 플라토닉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콘스타늣 부인에게 러셀은 비비언과 사랑을 나눴지만, “소름 끼치고 메스꺼운” 경험이었다고 고백했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진실이 아닐 것이다. 비비언 엘리엇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진 것은 러셀이 한 짓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러셀의 희생자들은 호텔 객실 여종업원, 가정 교사, 그리고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젊고 예쁜 여성 등 하층 계급 사람인 경우도 잦았다. 혹은 러셀을 묘사하면서 이것이 러셀의 세 번째 결혼이 파탄 난 근본적인 이유라고 주장했다. 훅은 “믿을 만한 정보통으로부터” 러셀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의 앞을 지나는 치마 입은 사람은 누구나 쫓아다니고, 피터의 등 뒤에서가 아니라 눈앞에서, 그리고 집안 손님들이 보는 앞에서 하녀를 집적거리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고 들었다고 밝혔다. 피터는 러셀을 떠났다가 돌아왔지만, 러셀은 정숙한 결혼 생활을 하겠다고 서약하는 것을 거부했고, 마침내 그녀는 더 이상 창피를 당할 수 없다고 결심했다. 두 사람은 러셀이 여든 살이던 1952년에 이혼했다. 러셀은 그다음에 브린 모어 출신의 교사 에디스 핀치와 결혼했다. 러셀과 수년 동안 알고 지내는 사이었던 핀치는 러셀의 여생을 돌봤다. 러셀은 반미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으면 재치 있게 맞받아치곤 했다. “내 마누라들의 절반은 미국인이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