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죽고 나면 우주만 남는다.
에고가 죽고 나면 신만 남는다.
그가 곧 본래의 자기요 참자기이다.
사람들은 많은 소원과 기도를 하지만 그렇게 원하는 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도는 바탕의 마음의 상태대로 그 바탕의 마음이 기본이 되어 그대로 이루어진다.그 마음이 우주의 에너지를 이끌어 원하고 기도하는 창조가 이루어진다.
어떤 유명한 스님이 임종시에 이렇게 대단한 말을 남겼다.
자신의 업이 수미산처럼 높음을 알았다고,
사실 다행스럽고 대단히 높은 통찰력이다.
그는 이제 빛의 세계의 문턱에 이른 것이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자신의 마음의 부정성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온통 부정성 속에 묻혀 살고 있음을
전혀 모르고 일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부정성의 바다에 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부정성을 알면 알수록 그 많음에 놀라게 된다.
자신의 부정성을 참으로 아는 것, 그로부터 깨달음의 문이 열린다.
자신이 밝아지면 깊이 묻힌 모든 부정성의 업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삶의 대부분을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간다.
나는 모른다.
나는 할 수 없다(안 된다).
아니다.
안 좋다(싫다).
두렵다.
자신이 모르니 할 수 없고,
할 수 없으니 아니라고 하고,
안 좋고 싫어지며 두렵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부자유와 무능과 제한들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아간다.
그들이 부정성인 것조차 전혀 모르고 살아간다.
그 부정성의 생각들의 근원을 찾아 올라가면 뿌리의 마음이 나온다.
그 뿌리의 마음이 주권의 상실(포기)에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주권의 상실이 곧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고,
자신의 생명과 신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이 무능하고 부자유하니
자신(自神))이 아닌 타신(他神)에 의존한다.
그러니 당연히 삶과 기도가 힘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게 된다.
그로부터 인간의 모든 고통과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나온 것이다.
스스로 포기한 자신의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자신에 대해 제한 없는 권능의 주권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유일한 회답이다.
그 주권자는 자신뿐만 아니라 우주의 주인이기도 하다.
때문에 전우주가 그를 돕는다.
그래서 자신의 주권을 회복한자, 천상의 사람들은
원하고 기도하는 대로 창조가 이루어진다.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부정성을 인정하지 못한다.
붓다의 팔만대장경과 모든 경전들은 인간의 부정성을 비쳐주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창조주께서는 감사하게도 그들의 역할이 다하지 못함을 대비해
보다 섬세하고 밝은 거울로 자연과 만물을 창조해주신 것이다.
번뇌의 마음으로 기도를 하니 꽃보다 번뇌의 잡초가 자란다.
자신의 마음은 없다고 하면서, 없는 것을 달라고 기도한다.
이미 있음을 인정하는, 있음에 대한 감사의 기도가 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좋아하거나 인정하는 것만을 선택하여 긍정한다.
이는 상대적인 긍정으로 에고적인 긍정이다.
부정성의 대상과 그 부정성을 보고 울고 웃는 자기 자신까지도
통째로 포용하고 긍정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온전한 긍정과 깨달음이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자신이 그 온전한 긍정 즉 절대적인 긍정이 될 때 그로부터
모든 부정성은 빛과 천사의 얼굴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나게 된다.
생로병사까지도!!!
사실 모든 부정성은 하늘이라는 절대긍정 속의 한 점 구름일 뿐이다.
하늘의 한 부분으로 하늘을 알려 주는,,,
큰 도는 하늘에 충만해 있으나
알고 그 행하지 못함은 사람들 자신에 달려 있다.
자신의 내면과 만물에 자신의 미음을 열고 다가가 보세요.
그들은 아름다운 그림(지혜정보)과 기쁨과 사랑으로 여러분을 껴안아 줄 것입니다.
자신의 환경이 어떠하든 믿음과 희망과 즐거움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곧 깨달음과 구원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