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군대”라는 필명을 쓴 목사님의 괘변(2)
“이처럼 주님의 부활은 소중하고 그날을 기념하는 축하일로 성도들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전해 내려온 것이 오늘날 주일(主日)이라 하겠습니다”
- 하늘군대 -
필자는 얼마 전 어느 개인 방송에서 전하는 한 탈북자의 탈북 소식을 듣게 되었다.
죽을 고생을 하며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머물면서 공안을 피해 갖은 고초를 겪던 중 한 선교사를 만나 잠시나마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단다. 당시의 그 선교사는 자신을 위해 기도를 해주며 껴안고 그렇게 울더란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따뜻한 인간애를 느끼게 되었다며 그때를 회상하며 눈시울을 적시던 모습이었다.
여기서 필자는 마음 속에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그 선교사가 그간 겪었을 탈북자의 고충과 아픔을 얼마나 깊이 공감했으면 눈물로서 그 아픔을 피력(披瀝)했겠냐이다.
따뜻한 인간애가 물씬 풍기는 장면이 아닐 수가 없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박애 정신으로 남의 아픔과 고충(苦衷)을 보듬어 주는 자들을
정작 주님께서는 받아주지 않으신다? 그깐 날자 하루 차이가 뭔 대수라고 이러실까? 라는 인간적인 측은지심마저 외면하는
주님의 속내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그렇다! 권위(權威)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상상으로 측량이 안 되는 권위를 지녔다. 지금 그 권위가 훼손당하고 있음은
인간적인 박애 정신으로도 무마(撫摩)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란 얘기이다. 그걸 지금 목사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이
허물고 있다는 얘기이다. 사탄이 좋아 할 일을 대신 해주는 꼴이다.
물어보나 마나 그 선교사는 일요일 옹호론자일 것이다.
안식일의 요구는 천지창조가 그 명분이었다.(cf 출20:8,11) 그리고 그 명분은 이제 와는 또 다른 신분 격상을
의미하기도 해서이다. 즉, 하나님을 신앙(信仰)한다는 것 자체가 애굽과 같은 죄악 세상에서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지 않아도 될
상태로의 신분 격상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세상적인 생활에서의 변화, 즉 새 신자 된 의무와 책무는 하나님의 요구조건인
안식일의 요구에 응해도 될 자유로운 신분임을 기념해서 생전 처음으로 “안식일을 지키”(신5:15)는 사실이 입증하듯
변화된 생활로 확인되는 것이다.
- 김종성 -
첫댓글 필명을 “하늘군대”라고 쓰는 목사님은 목사로서의 자질이 매우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천지창조의 결과로 탄생시킨 “7일 일주일”제도에 매주(每週)마다 불가피하게 목을 매고 있으면서도
이 제도의 생성과정(cf 창1:1-31; 2:1-3)이나 천지창조를 명분으로 운행시킨 그 지침(cf 출20:8,11)등에
조금의 관심이라도 가졌더라면 무식하게도 여기에 주의 부활을 들먹이지는 않았을 것이란 얘기이다.
도대체 천지창조를 명분으로 탄생된 “7일 일주일”제도와 예수님의 부활사건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을 것이라고 여기에다 자꾸만 연결 짓지 못해 안달이냐는 것이다. 7일제도 와는 아무 관련도 없지만
소중한 걸로만 따진다면 예수님의 탄생이 없이도 부활이 가능하냔 말이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 역시도 일반적인 죽음으로 보지 않는다. 그 의미하는 바가 엄청나지만 십자가
희생이 없이도 부활이 가능한 얘기던가? 말이다. 이 모든 사건 들은 “구속의 경륜”이다. ”7일 일주일“제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건들이다. 왜 이리도 머리가 안 돌아갈까? 하긴 ”하늘군대“목사님 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물론이려니와 전 세계의 수많은 목사님들이 매 마찬가지다. 사탄의 하수인을 자처한 카톨릭이
만든 ”사람의 계명“(마15:9; 막7:7)이나 또는 “사람의 전통”(막7:8)에 따름이나 마찬가지란 얘기이다.
제발 좀 똑바로 알자!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를 명분으로 삼아 7일 제도의 기준으로 안식일을
제정(cf 출20:8,11) 하셨지, 일요을 지정하신 게 결코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자체 만으로도
우리는 애굽과 같은 죄악 세상에서 더 이상 죄의 종노릇 하지 않아도 될 상태로의 신분 격상이 실현되었음을
기념하는 초신자로서의 생활에 처음으로 맞게 될 의무가 안식일준수 요구에 응하게 되는 것으로써 그 증거는
곧 변화된 생활로서 입증되는 것이다.(cf 신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