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각 교구에서 활동하는 명예기자들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본사 기자들 손과 발이 미처 닿지 못하는 곳에서 평화신문 명예기자들은 넘치는 열정으로 취재현장을 누빈다. 때로는 취재를 위해 자신의 일도 제쳐두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 덕분에 평화신문은 전국 곳곳의 생생한 소식을 전할 수 있다. 평화신문 창간 20주년을 맞아 명예기자들이 축하와 함께 기자 열정을 가득 담아 보내왔다.
▨대전 정완영 명예기자
장애인 행사 봉사 취재 갔다가 즉석 봉사자로
벌써 8년이 지났다. 2000년 대희년을 시작하며 첫 연수를 받고 10년만 봉사하자고 다짐하고 평화신문과 인연을 맺은지 8년 세월이다. 돌아보면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지루하게 보낸 긴 시간도 아니었음을 느낀다.
지금은 '대전교구의 마당발' 혹은 '얼굴이 곧 명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활동하고 있지만, 초창기 2년 정도는 남 모르게 어려움도 많이 겪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충실히 실행해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교회의 전통적 사고방식과 꼭 취재를 해서 신문에 싣고자 하는 기자 정신이 상충하면서 빚어진 촌극들도 없지 않았다.
"기사 쓰시면 그 원고를 제게 이메일로 먼저 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하고 기사를 사전에 검열하려 할(?) 때와 "이거 신문에 꼭 실리나요?"하며 권한 밖 일에 대한 질문 받을 때는 특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평화신문의 모든 기자들은 사람을 살리고자 기사를 쓰는 평화적인 기자들이니까 믿고 맡겨 도 좋을 듯 하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한 번은 장애인 행사에 취재를 간 적이 있는데, 봉사자가 없어 취재하다 말고 봉사자가 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더없는 뿌듯함을 한아름 가슴에 안고 기사를 쓸 수 있었다.
취재를 다니며 만나는 많은 분들의 도움과 좋은 관계로 맺어진 친분은 덤으로 받은 하느님 선물이자 은총으로 간직하고 싶다. 내가 쓴 기사가 '이 그늘진 땅에 따뜻한 햇볕 한 줌'으로 남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제주 오상철ㆍ김승호 명예기자
명예기자하면서 맺은 인연 탐라의 명콤비로
'평화신문'이 창간 20주년을 맞이해 성년으로 성장을 하게됨을 축하 드린다.
명예기자가 아닌 신자로서 마음의 평화와 온유와 그리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자라는 좌우명을 실천하는데 평화신문이 일조하고 있음에 또한 감사드린다.
평화신문 애독자로 지내다가 명예기자를 모집한다기에 제2기 명예기자로 응모하여 지금껏 십년 넘게 평화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 두 사람은 명예기자 활동을 하면서 만나 사진과 취재를 각각 담당, 사이좋게 다니며 돈독한 정을 쌓게 됐다.
지금은 제주교구에 4명의 명예기자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우리 명예기자들 모두 교구 소식과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발굴해 세상의 빛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겠다는 사명감으로 가득차 있다.
명예기자 초창기 시절에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았던 터라 기사를 써서 특급우편으로 보내고 사진을 현상해 보내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지금은 취재한 그 자리에서 곧바로 현장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돼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그동안의 명예기자 생활에 큰 보람을 느낀다. 앞으로도 죽는 날까지 평화신문 명예기자로 활동할 것을 다짐한다.
▨수원 최효근 명예기자
국가기록원 '기록인'으로 뽑혀 공로상 받아
1993년 54명의 명예기자들은 피정을 겸한 연수에서 언론 사도직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고 복음전파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며 '명예'라는 이름을 앞에 달고 전국 각 교구를 뛰어다니기로 약속했다.
15년 동안 평화신문에 게재된 200여 편의 기사와 투고 스크랩을 다시금 펼쳐 보면서 변화해가는 기사 내용과 내 자신의 변화된 모습도 함께 되돌아본다.
초창기에 기삿거리를 찾아 이웃 본당을 넘나들던 열정이 식어가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열심히 활동을 하지 못했다는 미안한 감마저 든다. 하지만 그 때 그 열정 때문에 항상 소형 카메라와 수첩을 지니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마다 기록을 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 덕분에 지난해에는 국가기록원으로부터 '생활 속의 기록인'으로 선정되어 국가기록원장 공로상을 수상하는 영예도 얻었다.
2003년 2월 서울 장충동 성 베네딕도 피정의 집에서 연수가 있을 때 일이다. 본사 기자 한 분이 꼭두새벽에 꾸르실리스따인 명예기자를 찾는 것이었다. 수원교구 남성 꾸르실료 100차 축하식 취재를 가는데, 꾸르실리스따가 아니면 행사장에 들어갈 수 없어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91차 수료자인 나는 눈을 비비며 기꺼이 동행을 했고, 행사 내용은 내가 쓰고 본사 기자는 사진을 촬영해 멋진 기사가 완성됐다.
지난 15년을 되돌아보며, 언제나 독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밝은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하느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큰 신문, 큰 언론'과 함께 명예기자로서의 소명을 다할 것을 다시금 다짐해 본다.
▨대구 서시선 명예기자
사진 필름 실수로 날려버리고 주저앉아 울어
2000년 1월 1일. 평화신문 명예기자로 선발된 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이렇게 흘렀다. 취재를 위해 고군분투한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대구 여성 꾸르실료 도입 25돌, 사형수들의 어머니 정팔기 할머니 장례미사, 전 대구대교구장 이문희 대주교의 김천 태풍 피해 지역 방문, 성 바오로 청소년의 집 축구단 창단, 대구지하철 참사,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화재….
필름 카메라로 취재하던 시절, 필름을 감지 않은 채 뚜껑을 열어 사진을 다 날려버리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울었던 순간도 있었다.
돈이 없어 수술받지 못하는 8개월된 젖먹이를 취재할 땐 아기를 안은 부모를 찍으려 아파트 베란다에 매달린 적도 있었다. 사연이 소개되고 독자들은 성금을 보내왔고 성준이는 뛰놀 수 있게 됐다. '신문 기사 하나가 생명을 살리는구나'하며 언론 사도직에 대해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참사도 잊지 못한다. 눈물바다가 된 추모식 현장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데 '이 모습을 어이 글로 다 옮길 수 있을지….' 검게 그을린 지하철역과 가족들의 고통스런 얼굴이 떠올라 지금도 눈물이 난다.
뒤돌아보면 힘든 일도 있었지만 기쁘고 밝은 소식을 전하는 평화신문과 함께해 보람이 있었다. 창간 20주년을 축하하며 앞으로도 좋은 소식을 전하는데 노력할 것을 다짐해본다.
▨광주 김상술 명예기자
'벽안의 천사'로 특종상… 내 생에 가장 흥분
평화신문 명예기자 위촉을 받고 활동한 지 벌써 6년이 흘렀다.
교구 행사는 물론 내 이웃의 아름다고 사랑 넘치는 소식들이 내 손을 통해 기사화되고, 다른 모든 신자들에게 전달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은 오늘도 나를 설레게 한다.
그동안의 활동 중에서 2005년 12월 소록도에서 43년 동안 한센인 환우들을 보살피다가 낡은 여행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고향으로 떠난 '벽안(碧眼)의 천사' 마리안느 수녀와 마가렛 수녀의 기사 발굴을 잊을 수 없다.
나 스스로도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던 그 기사 하나로 각종 방송과 인터넷에서 평화신문을 인용해 앞다퉈 보도하는 것을 보며 펜의 위력을 실감했다. 또 평화신문 명예기자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기회였다. 덕분에 평화신문 특종상 수상의 영예를 안게 돼 내 생에 가장 흥분된 일로 기억된다.
이 밖에도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에 소개된 뒤 독자들 사랑에 용기를 내어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신자들을 볼 때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평화신문 창간 20돌을 축하하며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진정한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의 눈과 귀가 돼주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웃들, 가난한 이들의 대변인으로 남아주길 바란다.
아울러 본인도 평화신문 명예기자로 긍지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성장시켜가며 영원한 평화맨(man)이기를 다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