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8일의 조선대 운동장
증 언 자 : 최규모(남)
생년월일 : 1938.(당시 나이 42세)
직 업 : 조선대수위(현재 조선대수위)
조사일시 : 1988.12
개 요
1980년 조선대학교 체육관 경비로 있으면서 5·18 광주민중항쟁 기간 동안 계속 출근해 조선대로 붙잡혀 온 시민, 학생들이 조선대학교에 주둔했던 공수들에게 무자비하게 구타당하는 것을 목격.
5월 18일 아침, 계엄령이 확대 조치된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8시경,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출근했다. 조선대학교 후문에 도착해 보니 2명의 군인이 M16에 착검한 상태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제지했다. 내가 체육관 경비를 서야 한다고 하자 들여보내줬다. 학교 운동장에는 야구장에서부터 공전 건물 앞에까지 군용천막 4, 5개가 쳐져 있었고, 운동장 옆 수도가에 가마솥 8, 9개를 걸어놓고 취사를 할 수 있도록 해두고 있었다. 취사장 앞 대형 천막에는 쌀가마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날 오후부터 학생, 시민들을 트럭에 가득 싣고 와서 야구장에다 내려놓고 운동장 끝에 있는 체육관 앞까지 굴리고 포복을 시켰다. 군인들이 따라다니면서 시민, 학생들을 발로 차고 곤봉으로 내리치면서 조금만 뒤처지면 더욱 살벌하게 구타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오후 5, 6시경 퇴근할 때 보면 그렇게 많이 잡혀와 기합을 받던 시민, 학생들이 다음날 아침 출근해 보면 한 명도 없는 것이다. 밤사이 그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군인들이 학교에 주둔하기 시작한 후 2, 3일 동안 체육관에 출근하여 보면 무수히 많은 머리카락과 피묻은 러닝셔츠로 어지럽혀져 있어 날마다 그것을 치우느라 애를 먹었다. 어찌나 끔찍스럽든지 어지간한 비위로는 보지도 못할 것이다. 아침마다 그것을 모아 체육관 앞 땅을 파고 묻었다.
그들은 수위들도 심하게 감시하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행위를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가끔씩 그들 몰래 돌아다니면서 훔쳐봤다.
어느 날인가, 아침에 출근해 보니 체육관이 난장판으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무용부 학생들이 사용하던 평균대는 후문 앞에 뒹굴고 있었다. 화가 난 나는 계엄군을 향해 소리쳤다.
"학교 물건에 함부로 손대면 안 돼요."
"이 개새끼야! 너는 뭐야?"
"저 새끼 쏴버려!"
어찌나 겁이 나고 무섭던지 두말 않고 체육관으로 들어가버렸다.
19일 오후, 공수 너덧 명이 붙잡아 온 학생 4명을 삭발시킨 후 묵사발이 되도록 때리면서 "너 데모했지? 했지?" 하면서 다그쳤다. 학생들이 안 했다고 하면 곤봉으로 머리를 치고 군화발로 짓밟아 실신하도록 때렸다. 내가 보고 있었더니 자기들끼리 "저 자식은 누구야?" "관리인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분위기가 어찌나 살벌했던지 나는 슬그머니 체육관으로 들어가버렸다.
20일인지 날짜는 확실하지 않은데, 낮에 의대 건물 앞 계단에서 학생 두 명을 끌어다놓고 군인들이 무자비하게 때리면서 위협하는 것은 정말 눈 뜨고 보지 못 할 지경이었다. 그중 한 명이 실신해 버렸다. 놈들은 쓰러진 학생의 몸을 가마니로 덮어놓고 그 위에 물을 부었다. 학생은 정신이 들었는지 다시 일어나자 또다시 곤봉을 휘둘러댔다. 그 꼴을 보니 속이 상해 더 이상 못견디겠어서 체육관으로 들어가버렸다.
얼마 후 계엄군 한 명이 와서 나를 불렀다. 조금 전 매를 맞다 쓰러진 학생과 함께 온 계엄군이 "이 사람을 전남대병원 가는 길로 데려다주시오." 했다. 나는 얼른 그 학생을 부축해, 조선대병원 너머까지 데려다주면서 넌지시 물어보았다.
"어찌된 일이냐?"
"우리 아버님이 전남대병원에 입원해 계셔서 병간호를 하던 중 밖이 소란스러워 나와서 병원 정문 앞에서 데모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군인 2명이 달려와 양쪽 팔을 끼고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때린 후 조선대병원으로 끌고 왔어요."
잡힌 순간부터 얼마나 무지하게 때리던지 반항은커녕 말 한마디 못 하고 맞다가 손목시계도 잊어버렸다고 했다. 내가 '방금 당신을 풀어준 군인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전혀 모른다'고 했다. 특별히 아는 사람도 없는데 풀려난 것을 보면 그 청년은 굉장히 운이 좋았던 모양이다.
21일 오전 체육관 밖으로 나와 서성거리고 있는데, 전날 전대병원 앞에서 붙잡힌 청년을 돌려보낸 군인이 와서 말했다.
"오후가 되면 사태가 악화될 것이니 여기 있으면 위험합니다. 빨리 피신하세요."
그 말을 듣고 당황한 나는 운동장을 피해 나무숲이 있는 곳을 골라 지금의 대학원 부지-조선대 본관 위쪽 산에 새로 설립한 건물 주위-로 도망갔다. 그곳에는 이미 다른 경비들도 와 있었다.
거기에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시내에서 총소리가 계속 들렸다. 도청 옥상에는 헬기가 이착륙하면서 비라를 뿌리고 '시민들은 자중하라'는 방송을 했다. 그 날 계속되는 총소리에 놀라 산을 넘어서 집으로 갔다.
학군단 앞 빈터에 드럼통 수십 개를 쌓아놓고 그들의 연료로 사용했다. 지휘관(중령?)은 체육관 옆 학군단 건물 2층에 본부를 정해 두고 낮에는 주로 지프차를 타고 시내로 갔다 들어오곤 했다.
18일에는 4, 5개 밖에 되지 않던 대형 천막이 하룻밤 지난 뒤 그 사이사이로 가득 들어찼다. 한 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날마다 큰 가마솥 8, 9개에 가득 밥을 짓는데 나는 그것을 다 먹을 만한 군인이 학교에 상주해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가끔 내가 그들에게 말을 시키면 "공수부대에는 상하 구별이 없다. 밥도 언제나 스스로 가져다 먹지 아랫사람을 시키지 않는다"면서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당시 그들은 석유나 경유로 밥을 지었는데 솥을 걸었던 자리의 땅이 새까맣게 타서 벽돌처럼 굳어졌다. 지금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자리의 땅이 돌처럼 굳어 있다.
22일 아침 8시 넘어서 출근하는데 전날과 다르게 운동장에 있던 군용 천막이 없어지고 군인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체육관 문을 열어보니 그 안에 군인들이 버리고 간 무전기, 식량, 모포, 사복(그들은 주로 사복을 입는다고 함), TV, LMG 2개, 침낭 등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내가 도청으로 전화를 걸어 체육관에 LMG가 있으니 가져가라고 했다. 그날 지프차를 타고 몇 명의 청년이 와서 "아저씨는 문단속 잘하시오." 하고 말하고 갔다.
그 후로 시민, 학생들이 트럭을 타고 무기를 가져가기 위해 여러 차례 왔으나 내가 신분증을 제출하라고 하자 "지금 광주시민들이 다 죽어가는데 왜 당신이 말리느냐?"면서 대들었다. 그래도 내가 함부로 내어줄 수 없다고 하면 "이 자식, 공수들하고 짜고 하는 짓이 아니냐?"면서 위협했다. 결국 시민들은 그곳의 무기는 가져가지 못하고 "시민들이 총에 맞아 죽어가는데 병원에 약이 부족하니 찾아서 달라."고 해서 약상자에 가득 들어 있는 약을 줬다.
또 어느 날인가 시민들이 GMC 군용 덤프차를 타고 어깨에 카빈 한 자루씩 메고 왔다. 어떤 사람은 중위계급장을 단 장교복 상의를 입고 있었다. 내가 "학군단에 있는 총은 '공이'를 빼버려서 가져가도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하자 되돌아갔다.
27일 계엄군에 의해 시내가 진압된 후 공무원은 정상 근무하라는 방송을 듣고 출근하던 중 지산동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군인이 가지 말라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학군단 관리인으로 있던 사람이 찾아와 "오늘 학교에 계엄군들이 와서 유리창을 깨고 체육관에 들어가 그들이 퇴각할 때 버리고 간 물건과 학교 비품도 가지고 가버렸다."고 했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보니 아니나 다를까 분실품이 많아 총무과로 신고했었다.
시내가 수습된 후 학부모들이 조선대에서 죽은 사람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왔다면서 자식의 시체를 찾으러 왔다.
그런데 나는 난리 중에도 학교당국으로부터 통행증을 발부받아 날마다 출근했지만 시체를 본 적은 없다. 5월 18일부터 계엄군이 광주에서 퇴각할 때까지 매일 수많은 시민, 학생들이 조선대학교 운동장으로 잡혀왔었다. 내가 퇴근할 때 보면 그렇게도 많이 잡혀와 있던 사람들이 출근할 때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는 5·18 광주민중항쟁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도 의문스러운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토록 많은 시민, 학생들이 어디로 끌려갔는지.
(조사.정리 양난희)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