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총에 맞아 죽을 뻔했으나 성 주석(省主席) 장치중 장군은 친히 내가 입원한 상아 의원(湘雅醫院)에 나를 위문하고 병원 당국에 대하여서는 치료비는 얼마가 들든지 성 정부에서 담당할 것을 말하였다고. 당시 한구에 있던 장개석 장군은 하루에도 두세 번 전보로 내 병상을 묻고 내가 퇴원한 기별을 듣고는 나하천(羅霞天)을 대표로 내게 보내어 돈 3천 원을 요양비로 쓰라고 주었다.
퇴원하여 어머님을 찾아뵈니 어머님은,
"자네 생명은 하느님이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불범정(邪不犯正)이지."
이렇게 말씀하시고 또,
"한인의 총에 맞고 살아 있는 것이 왜놈의 총에 맞아 죽은 것만 못해"
하시기도 했다.
애초에 내 상처는 중상이어서 병원에서 의사가 보고 입원 수속도 할 필요가 없다 하여 문간방에 두고 절명하기만 기다렸던 것이 네 시간이 되어도 살아 있었기 때문에 병실로 옮기고 치료하기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내가 이런 상태이므로 향항에 있던 인이에게는 내가 총을 맞아 죽었다는 전보를 놓아서 안공근은 인이와 함께 내 장례에 참여할 생각으로 달려 왔었다.
전쟁의 위험이 장사에도 파급되어서 성 정부에서도 끝까지 이 사건을 법적으로 규명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내 추측으로는 이운한이 강창제, 박창세 두 사람의 악선전에 혹하여 그런 일을 한 것인 듯하다.
내가 퇴원하여 엄항섭 군 집에서 정양을 하고 있는데 하루는 갑자기 신기가 불편하고 구역이 나며 우편 다리가 마비하기로 다시 상아 의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엑스 광선으로 본 결과 서양인 외과 주임이 말하기를, 내 심장 옆에 박혀 있던 탄환이 혈관을 통하여 우편 갈빗대 옆에 옮아가 있으니 불편하면 수술하기도 어렵지 아니하나 그대로 두어도 생명에는 관계가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오른편 다리가 마비하는 것은 탄환이 대혈관을 압박하는 때문이어니와 작은 혈관들이 확대되어서 압박된 혈관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면 다리 마비하던 것도 차차 나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장사가 또 위험하게 되매 우리 3당의 백여 명 가족은 또 광주(廣州)로 이전하였으니 호남의 장치중 주석이 광동성 주석 오철성(吳鐵城) 씨에게 소개하여 준 것이었다. 광주에서는 중국 군대에 있는 동포 이준식(李俊植), 채원개(蔡元凱) 두 분의 알선으로 동산백원(東山栢園)을 임시 정부 청사로, 아세아 여관을 전부 우리 대가족의 숙사로 쓰게 되었다.
이렇게 정부와 가족을 안돈하고 나는 안 의사 미망인과 그 가족을 상해에서 나오게 할 계획으로 다시 향항으로 가서 안정근, 안공근 형제를 만나 강경하게 그 일을 주장하였으나 그들은 교통이 어렵다는 이유로 듣지 아니하였다. 사실상 그 때 사정으로는 어렵기도 하였다. 나는 안 의사의 유족을 적진 중에 둔 것과 율양 고당암에서 중국 도사 임한정(任漢廷)에게 선도를 공부하고 있던 양기탁을 구출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향항에서 이틀을 묵어서 광주로 돌아오니 거기도 왜의 폭격이 시작되었으므로 또 나는 어머님과 대가족을 불산(佛山)으로 이접하게 하였다. 이것은 오철성 주석의 호의와 주선에 의함이었다.
이 모양으로 광주에서 두 달을 지나, 장개석 주석에게 우리도 중경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청하였더니 오라는 회전이 왔기로 조성환, 나태섭(羅泰燮) 두 동지를 대동하고 나는 다시 장사로 가서 장치중 주석에게 교섭하여 공로(公路) 차표 석 장과 귀주성(貴州省) 주석 오정창(吳鼎昌) 씨에게로 하는 소개장을 얻어 가지고 중경 길을 떠나 10여 일만에 귀주성 수부 귀양(貴陽)에 도착하였다.
내가 지금까지에 본 중국은 물산이 풍부한 지방이었으나 귀주 지경(地境)에 들어서는 눈에 띄는 것이 모두 빈궁이었다. 귀양 시중에 왕래하는 사람들을 보면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의복이 남루하고 혈색이 좋지 못하였다. 원체 산이 많은 지방인데다가 산들이 다 돌로 되고 흙이 적어서 농가에서는 바위 위에다 흙을 펴고 씨를 뿌리는 형편이었다. 그 중에서도 한족(漢族)은 좀 나으나 원주민인 묘족(苗族)의 생활은 더욱 곤궁하고 야매한 모양이었다.
중국말을 모르는 나는 말을 듣고 한족과 묘족을 구별할 수는 없으나 복색으로는 묘족의 여자를 알아낼 수 있고, 안광으로는 묘족의 남자를 지적할 수가 있었다. 한족의 눈에는 문화의 빛이 있는데 묘족의 눈에는 그것이 없었다.
묘족은 요순 시대의 삼묘(三苗) 씨의 자손으로서 4천 년 이래로 이렇게 꼴사나운 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 무슨 전생의 업보인고. 요순 이후로는 역사상에 묘족의 이름이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기로 그들은 이미 다 절멸된 줄만 알았더니 호남, 광동, 광서, 운남, 귀주, 사천, 서강 등지에 수십 백 종족으로 갈린 묘족이 퍼져 있으면서도 이렇게 소문이 없는 것은 그들 중에 인물이 나지 못한 까닭이다. 현재 광서의 백숭희(白崇禧)와 운남의 용운(龍雲) 두 장군이 묘족의 후예라 하는 말도 있으나 나는 그 진부를 단정할 자료를 가지지 못하였다.
귀양에서 여드레를 묵어서 나는 무사히 중경에 도착하였으나 그 동안에 광주가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우리 대가족의 소식이 궁금하던 차에 다 무사히 광주를 탈출하여 유주(柳州)에 와 있다는 전보를 받고 안심하였다. 그들은 다 중경에 오기를 희망하므로 내가 교통부와 중앙당부에 교섭하여 자동차 여섯 대를 얻어서 기강( 江)이라는 곳에 대가족을 옮겨 왔다. 군수품 운송에도 자동차가 극히 부족하던 이때에 이렇게 빌려준 중국의 호의는 이루 감사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나는 미주서 오는 통신을 기다리노라고 우정국 - 우체국 - 에 가 있는 때에 인이가 왔다. 유주에 계신 어머님이 병환이 중하신데 중경으로 오시기를 원하시므로 모시고 온 것이었다. 나는 인이를 따라 달려가니 어머님은 내 여관인 저기문(儲奇問) 홍빈여사(鴻賓旅舍) 맞은편에 와 계셨다. 곧 내 여관으로 모시고 와서 하룻밤을 지내시게 하고 강 남쪽 아궁보(鵝宮堡) 손가화원(孫家花園)에 있는 김홍서(金弘敍) 군 집으로 가 계시게 하였다. 이것은 김홍서 군이 호의로 자청한 것이었다.
어머님의 병환은 인후증인데 의사의 말이 이것은 광서의 수토병으로 젊은 사람이면 수술을 할 수 있으나 어머님같이 팔십 노인으로서는 그리할 수도 없고 또 이미 치료할 시기를 놓쳐서 손 쓸 길이 없다고 하였다.
6. 광복군을 창설하다 어머님이 중경으로 오시는 일에 관하여 잊지 못할 은인이 있으니 그는 의사 유진동(劉振東) 군과 그 부인 강영파(姜映波) 여사였다. 이 붗는 상해에서 학생으로 있을 때부터 나를 위하여 주던 사람들인데 쿨링( 嶺)에서 요양원을 경영하던 것을 걷어치우고 제 몸이 제 몸이 아닌 나를 대신하여 내 어머님을 모시고 간호하기 위하여 중경으로 온 것이었다. 그러나 유 의사 부처가 왔을 때는 벌써 어머님은 더 손 쓸 수가 없게 되었던 때였다.
내가 중경에 와서 한 일은 세 가지였었다. 첫째는 차를 얻어서 대가족을 실어오는 일이요, 둘째로는 미주, 하와이와 연락하여 경제적 후원을 받는 일이요, 셋째는 장사에서부터 말이 되면서도 되지 못한 여러 단체의 통일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대가족도 안돈이 되고, 미주와 연락도 되었으므로 나는 셋째 사업인 단체 통일에 착수하였다.
나는 중경에서 강 건너 아궁보에 있는 조선 의용대와 민족 혁명당 본부를 찾았다. 그 당시 김 약산은 계림(桂林)에 있었으나 윤기섭, 성주식(成周湜), 김홍서, 석 정(石丁), 김두봉, 최석순(崔錫淳), 김상덕(金商德) 등 간부가 나를 위하여 환영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모든 단체를 통일하여 민족주의의 단일당을 만들 것을 제의하였더니 그 자리에 있던 이는 일치하여 찬성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여러 단체에도 참가를 권유하기로 결의하였다.
미주와 하와이에서는 곧 회답이 왔다. 통일에는 찬성이나 김 약산은 공산주의자인즉, 만일 내가 그와 일을 같이 한다면 그들은 나와의 관계까지도 끊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김 약산과 상의한 결과 그와 나와 연명으로, 민족 운동이야말로 조국 광복에 필요하다는 뜻으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여기 의외의 고장이 생겼으니 그것은 국민당 간부들이 연합으로 하는 통일은 좋으나 있던 당을 해산하고 공산주의자들을 합한 단일당을 조직하는 데에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주의가 서로 다른 자는 도저히 한 조직체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는 병을 무릅쓰고 기강으로 가서 국민당의 전체 회의를 열고 노력한 지 1개월 만에 비로소 단일당으로 모든 당들을 통일하자는 의견에 국민당의 합의를 얻었다. 그래서 민족 운동 진영인 한국 국민당, 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당과 공산주의 전선인 조선 민족 혁명당, 조선 민족 해방 동맹, 조신 민족 전위 동맹, 조선 혁명자 연맹의 일곱으로 된 7당 통일 회의를 열게 되었다.
회의가 진행함에 따라 민족 운동편으로 대세가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해방 동맹과 전위 동맹은 민족 운동을 위하여 공산주의의 조직을 해산할 수 없다고 말하고 퇴석하였다. 이렇게 되니 7당이 5당으로 줄어서 순전한 민족주의적인 새 당을 조직하고 8개 조의 협정에 다섯 당의 당수들이 서명하였다.
이에 좌우 5당의 통일이 성공하였으므로 며칠을 쉬고 있던 차에 이미 해산하였을 민족 혁명당 대표 김 약산이 돌연히 탈퇴를 선언하였으니 그 이유는, 당의 간부들과 그가 거느리는 청년 의용대가 아무리 하여도 공산주의를 버릴 수 없으니 만일 8개 조의 협정을 수정하지 아니하면 그들이 다 달아나겠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5당의 통일도 실패되어서 나는 민족 진영 3당의 동지들과 미주·하와이 여러 단체에 대하여 나의 불명한 허물을 사과하고 이어서 원동에 있는 3당만을 통일하여 새로 한국 독립당이 생기게 되었다. 하와이 애국단과 하와이 단합회가 각각 해소하고 한국독립당 하와이 지부가 되었으니 역시 5당 통일은 된 셈이었다.
새로 된 한국 독립당의 간부로는 집행 위원장에 김 구, 위원으로는 홍 진, 조소앙, 조시원, 이청천, 김학규, 유동열, 안 훈(安勳), 송병조, 조완구, 엄항섭, 김붕준, 양 묵, 조성환, 차이석, 이복원이요, 감찰 위원장에 이동녕, 위원에 이시영, 공진원(公鎭遠), 김의한 등이었다.
임시 의정원에는 나를 국무회의 주석으로 선거하였는데, 종래의 주석을 국무위원이 번갈아 하던 제도를 고쳐서 대내, 대외에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국, 서울, 워싱턴에 외교 위원부를 설치하고 이승만 박사를 그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한편 중국 중앙정부에서는 우리 대가족을 위하여 토교(土橋) 동감폭포(東坎瀑布) 위에 기와집 세 채를 짓고 또 시가에도 집 한 채를 사 주었으나 그 밖에 우리 독립 운동을 원조하여 달라는 청에 대하여서는 냉담하였다. 그래서 나는 중국이 일본군의 손에 여러 대도시를 빼앗겨 자신의 항전에 골몰한 이때에 우리를 위한 원조를 바라기가 미안하니 나는 미국으로 가서 미국의 원조를 청할 의사인즉 여행권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런즉 중앙 정부의 서은증(徐恩曾) 씨가 말하기를, 내가 오랫동안 중국에 있었으니 중국에서 무슨 일을 하나 남김이 좋지 아니하냐, 사업 계획서를 제출하기를 청하므로 나는 장래 독립한 한국의 국군의 기초가 될 광복군 조직의 계획을 제출하였더니 곧 좋다는 회답이 왔다.
이에 임시 정부에서는 이청천을 광복군 총사령고나으로 임명하고, 있는 힘 - 미주와 하와이 동포가 보내어 준 4만 원 -을 다하여 중경 가능빈관(嘉陵賓館)에 중국인, 서양인 등 중요 인사를 초청하여 한국 광복군 성립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우선 30여 명 간부를 서안(西安)으로 보내어 미리 가 있던 조성환 등과 합하여 한국 광복군 사령부를 서안에 두고 이범석(李範奭)을 제1지대장으로 하여 산서(山西) 방면으로 보내고 고운기(高雲起) - 본명 공진원 -를 제2지대장으로 하여 수원(綏遠) 방면으로 보내고 나월환(羅月煥) 등의 한국청년 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광복군으로 개편하여 제5지대를 삼았다.
그리고 강서성 상요(上饒)에 황해도 해주 사람으로서 죽안군 제3전구 사령부 정치부에서 일보고 있는 김문호(金文鎬)를 한국 광복군 징모처 제3분처(韓國光復軍徵募處第三分處) 주임을 삼고 그 밑에 신정숙(申貞淑)을 회계조장, 이지일(李志一)을 정보조장, 한도명을 훈련조장으로 각각 임명하여 상요로 파견하였다.
독립당과 임시 정부와 광복군의 일체 비용은 미주, 멕시코,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보내는 돈으로 썼다. 장개석 부인 송미령(宋美齡)이 대표하는 부녀위로총회(婦女慰勞總會)로부터 중국 돈으로 10만 원의 기부가 있었다.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니 인원도 많지 못하여 몇 달 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던 중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여 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 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온 것이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학병으로 일본 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安徽省) 부양(阜陽)의 광복군 제3지대를 찾아온 것을 지대장 김학규가 임시 정부로 보낸 것이었다.
7. 하필 이 때 일본이 항복하다니 이 사실은 중국인에게 큰 감동을 주어 중한 문화 협회(中韓文化協會) 식당에서 환영회를 개최하였는데 서양 여러 나라의 통신 기자들이며 대사관원들도 출석하여 우리 학병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발하였다. 어려서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아 국어도 잘 모르는 그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고 총살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시 정부를 찾아왔다는 그들의 말에 우리 동포들은 말할 것도 없이 목이 메었거니와 외국인들도 감격에 넘친 모양이었다.
이것이 인연으로 우리 광복군이 연합국의 주목을 끌게 되어 미국의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미국 전략 사무국의 약자 -를 주관하는 사전트 박사는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윔스 중위는 제3지대장 김학규와 합작하여 부양에서 우리 광복군에게 비밀 훈련을 실시하였다.
예정대로 3개월의 훈련을 마치고 정탐과 파괴 공작의 임무를 띠고 그들을 비밀히 본국으로 파견할 준비가 된 때에 나는 미국 작전부장 다노배 장군과 군사 협의를 하기 위하여 미국 비행기로 서안으로 갔다.
회의는 광복군 제2지대 본부 사무실에서 열렸는데, 정면 우편 태극기 밑에는 나와 제2지대 간부가, 좌편 미국기 밑에는 다노배 장군과 미국인 훈련관들이 앉았다. 다노배 장군이 일어나,
"오늘부터 아메리카 합중국과 대한 민국 임시 정부와의 적 일본을 항거하는 비밀 공작이 시작된다"
고 선언하였다.
다노배 장군과 내가 정문을 나올 때에 활동 사진의 촬영이 있고 식이 끝났다.
이튿날 미국 군관들의 요청으로, 훈련받은 학생들의 실지의 공작을 시험하기로 하여 두곡(杜曲)에서 동남으로 40리, 옛날 한시에 유명한 종남산(終南山)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동구에서 차를 버리고 5리쯤 걸어가면 한 고찰이 있는데 이곳이 우리 청년들이 훈련을 받은 비밀 훈련소였다. 여기서 미국 군대식으로 오찬을 먹고 참외와 수박을 먹었다.
첫째로 본 것은 심리학적으로 모험에 능한 자, 슬기가 있어서 정탐에 능한 자, 눈과 귀가 밝아서 무선 전신에 능한 자를 고르는 것이었다. 이 시험을 한 심리학자는, 한국 청년이 용기로나 지능으로나 다 우량하여서 장래에 희망이 많다고 결론하였다.
다음에는 청년 일곱을 뽑아서 한 사람에게 숙마바 하나씩을 주고, 수백 길이나 되는 절벽 밑에 내려가서 나뭇잎 하나씩을 따가지고 오라는 시험이었다. 일곱 청년은 잠간 모여서 의논하더니 그들의 숙마바를 이어서 한 긴 바를 만들어 한 끝을 바위에 매고 그 줄을 붙들고 일곱이 다 내려가서 나뭇잎 하나씩을 따 입에 물고 다시 그 줄에 달려 일곱이 차례차례로 다 올라왔다. 시험관은 이것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중국 학생 4백 명을 모아놓고 시켰건마는 그들이 해결치 못한 문제를 한국 청년 일곱이 훌륭하게 하였소. 참으로 한국 사람은 전도 유망한 국민이오."
일곱 청년이 이 칭찬을 받을 때에 나는 대단히 기뻤다.
다음에 폭파술, 사격술, 비밀히 강을 건너가는 재주 같은 것을 시험하여 다 좋은 성적을 얻은 것을 보고 나는 만족하여 그 날로 두곡으로 돌아왔다.
이튿날은 중국 친구들을 찾을 차례로 서안으로 들어갔다. 두곡서 서안이 40리였다.
호종남(胡宗南) 장군은 출타하여서 참모장만을 만나고 성 주석 축소주(祝紹周) 선생은 나와 막역한 친우라 이튿날 그의 사저에서 석반을 같이 하기로 하였다. 성당부에서는 나를 위하여 환영회를 개최한다 하고, 서안 부인회에서는 나를 환영하기 위하여 특별히 연극을 준비한다 하고, 서안의 각 신문사에서도 환영회를 개최하겠으니 출석하여 달라는 초청이 왔다.
나는 그 밤을 우리 동포 김종만(金鍾萬) 씨 댁에서 지내고 이튿날은 서안의 명소를 대개 구경하고 저녁에는 어제 약속대로 축 주석 댁 만찬에 불려갔다. 식사를 마치고 객실에 돌아와 수박을 먹으며 담화를 하는 중에 문득 전령이 울었다. 축 주석은 놀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중경에서 무슨 소식이 있나 보다고 전화실로 가더니 잠시 후에 뛰어나오며,
"왜적이 항복한다오!"
하였다.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
서안과 부양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각종 비밀한 무기를 주어 산동에서 미국 잠수함을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어서 국내의 요소를 혹은 파괴하고 혹은 점령한 후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도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었던 것을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진실로 전공이 가석하거니와 그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것이다.
나는 더 있을 마음이 없어서 곧 축씨 댁에서 나왔다. 내 차가 큰 길에 나설 때에는 벌써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만세 소리가 성중에 진동하였다.
나는 서안에서 준비되고 있던 나를 위한 모든 환영회를 사퇴하고 즉시 두곡으로 돌아왔다. 와 보니 우리 광복군은 제 임무를 하지 못하고 전쟁이 끝난 것을 실망하여 침울한 분위기에 잠겨 있는데 미국 교관들과 군인들은 질서를 잊을이 만큼 기뻐 뛰고 있었다. 미국이 우리 광복군 수천 명을 수용할 병사를 건축하려고 일변 종남산에서 재목을 운반하고 벽돌가마에서 벽돌을 실어 나르던 것도 이날부터 일제히 중지하고 말았다.
내 이번 길의 목적은 서안에서 훈련받은 우리 군인들을 제1차로 본국으로 보내고 그 길로 부양으로 가서 거기서 훈련받은 이들을 제2차로 떠내 보낸 후에 중경으로 돌아감이었으나 그 계획도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내가 중경서 올 때에는 군용기를 탔으나 그리로 돌아갈 때에는 여객기를 타게 되었다.
중경에 와 보니 중국인들은 벌써 전쟁 중의 긴장이 풀어져서 모두 혼란한 상태에 빠져 있고 우리 동포들은 지향할 바를 모르는 형편에 있었다. 임시 정부에서는 그 동안 임시 의정원을 소집하여 혹은 임시 정부 국무 위원회 총사직을 주장하고, 혹은 이를 해산하고 본국으로 들어가자고 발론하여 귀결이 못 나다가 주석인 내게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3일간 정회를 하고 있었다.
8. 중경 생활의 추억 나는 의정원에 나아가 해산도 총사직도 천만부당하다고 단언하고 서울에 들어가 전체 국민의 앞에 정부를 내어 바칠 때까지 현상대로 가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여 전원의 동의를 얻었다. 그러나 미국측으로부터 서울에는 미국 군정부가 있으니 임시 정부로서는 입국을 허락할 수 없은즉, 개인의 자격으로 오라 하기로 우리는 할 수 없이 개인의 자격으로 고국에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7년간의 중경 생활을 마치게 되니 실로 감개가 많아서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두서를 찾기가 어렵다.
나는 교자를 타고 강 건너 화강산에 있는 어머님 묘소와 아들 인의 무덤에 가서 꽃을 놓고 축문을 읽어 하직하고 묘지기를 불러 금품을 후히 주어 수호를 부탁하였다.
그러고는 가죽 상자 여덟 개를 사서 정부의 모든 문서를 싸서 중경에 거류하는 5백여 명 동포의 선후책을 정하고, 임시 정부가 본국으로 돌아간 뒤에 중국 정부와 연락하기 위하여 주중화 대표단을 두어 박찬익을 단장으로 민필호(閔弼鎬), 이 광(李光), 이상만(李象萬), 김은충(金恩忠) 등을 단원으로 임명하였다.
우리가 중경을 떠나게 되매 중국 공산당 본부에서는 주은래(周恩來), 동필무(董必武) 제씨가 우리 임시 정부 국무원 전원을 청하여 송별연을 하였고, 중앙 정부와 국민당에서는 장개석 부처를 위시하여 정부, 당부, 각계 요인 2백여 명이 모여 우리 임시 정부 국무 위원과 한국 독립당 간부를 초청하여 국민당 중앙당부 대례당에서 중국기와 태극기를 교차하고 융숭하고도 간곡한 송별연을 열어 주었다.
장개석 주석과 송미령 여사가 선두로 일어나 장래 중국과 한국 두 나라가 영구히 행복되도록 하자는 축사가 있고 우리 편에서도 답사가 있었다.
중경을 떠나던 일을 기록하기 전에 7년간 중경 생활에 잊지 못할 것 몇 가지를 적으려 한다.
첫째 중경에 있던 우리 동포의 생활에 관하여서다. 중경은 원래 인구 몇 만밖에 안 되던 작은 도시였으나 중앙 정부가 이리로 옮겨온 후로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지방의 관리와 피난민이 모여들어서 일약 인구 백만이 넘는 대도시가 되었다. 아무리 새로 집을 지어도 미처 다 수용할 수 없어서 여름에는 한데에서 사는 사람이 수십만이나 되었다.
식량은 배급제여서 배급소 앞에는 언제나 장사진을 치고 서로 욕하고 때리고 하여 분규가 아니 일어나는 때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 동포는 따로 인구를 선책하여서 한 몫으로 양식을 타서 하인을 시켜 집집에 배급하기 때문에 대단히 편하였고 쌀을 쓸기까지 하였다. 먹을 물도 사용인을 시켜 길었다.
중경시 안에 사는 동포들뿐 아니라, 교외인 토교(土橋)에 사는 이들도 한인촌을 이루고 중국 사람의 중산 계급 정도의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간혹 부족하다는 불평도 있었으나 규율 있고 안전한 단체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나 자신의 중경 생활은 임시 정부를 지고 피난하는 것이 일이요, 틈틈이 먹고 잤다고 할 수 있었다. 중경의 폭격이 점점 심하여가매 임시 정부도 네 번이나 옮겼다.
첫 번 정청인 양류가(楊柳街) 집은 폭격에 견딜 수가 없어서 석판가(石版街)로 옮겼다가 이 집이 폭격으로 일어난 불에 전소하여 의복까지 다 태우고 오사야항(吳獅爺巷)으로 갔다가 이 집이 또 폭격을 당하여 무너진 것을 고쳤으나 정청으로 쓸 수는 없어서 직원의 주택으로 하고 네 번째로 연화지(蓮花池)에 70여 칸 집을 얻었는데 집세가 1년에 40만 원이라, 그러나 이 돈은 장 주석의 보조를 받게 되어 임시 정부가 중경을 떠날 때까지 이 집을 쓰고 있었다.
이 모양으로 연이어 오는 폭격에 중경에는 인명과 가옥의 손해가 막대하였으나 동포 중에 죽은 이는 신익희 씨 조카와 김영린의 아내 두 사람이 있었다.
이 두 동포가 죽던 폭격이 가장 심한 폭격이어서 한 방공호에서 4백 명이니 8백 명이니 하는 질식자를 낸 것도 이때였다.
그 시체를 운반하는 광경을 내가 목도하였는데 화물 자동차에 짐을 싣듯 시체를 싣고 달리면 시체가 흔들려 굴러 떨어지는 일이 있고, 그것을 다시 싣기가 귀찮아서 모가지를 매어 자동차 뒤에 달면 그 시체가 땅바닥으로 엎치락뒤치락 끌려가는 것이었다. 시체는 남녀를 물론하고 옷이 다 찢겨서 살이 나왔는데 이것은 서로 앞을 다투어 발악한 형적이었다.
가족을 이 모양으로 잃어 한편에 통곡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편에는 방공호에서 시체를 끌어내는 인부들이 시체가 지녔던 금, 은, 보화를 뒤져서 대번에 부자가 된 것도 있었다. 이렇게 질식의 참사가 일어난 것이 밀매음녀 많기로 유명한 교장구(較場口)이기 때문에 죽은 자의 대다수가 밀매음녀였다.
중경은 옛날 이름으로는 파(巴)다. 지금은 성도(成都)라고 부르는 촉(蜀)과 아울러 파촉이라고 하던 데다. 시가의 왼편으로 가릉강(嘉陵江)이 흘러와서 바른 편으로 오는 양자강과 합하는 곳으로 천 톤급의 기선이 정박하는 중요한 항구다. 지명을 파라고 하는 것은 옛날 파 장군(巴將軍)이란 사람이 도읍하였던 때문이어서 연화지에는 파 장군의 분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