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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펠러 사사끼
Ruth Fuller Sasaki
Dharma name: 慧龍紹谿 Eryū Jōkei
글 덕광 김형근(大慧 德光 金䵚 根) 본지 편집인
시대를 앞서 간 독특한 개성과 신념의 소유자.
보통사람으로는 하기 어려운 삶을 살면서 미국불교 개척자로
미국불교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루스 풀러(Ruth Fuller, 법명: 혜룡소곡, 慧龍紹谿 Eryū Jōkei October 31, 1892 – October 24, 1967)는 작가이자 불교 교사였고, 또는 미국 불교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1844년생으로 하와이 최초의 불교신자였던 메리 E. 포스터(Mary E. Foster)와 1849년생으로 미국 최초의 불교신자로 평가받는 상카미타 비구니로 불리는카나바로 백작 부인, 미란다 데 소자 카나바로(Miranda de Souza Canavarro) 보다는 대략 50년 후에 출생한 여성이다. 하지만 두 선배여성의 활동과는 그 급이 달랐다. 그녀는 미국불교사에 등장하는 다이세츠 스즈끼, 소케이안 스님, 잇슈 미우라(Isshu Miura)스님, 알렌왓츠(Alan Watts,) 게리 스나이더 등과 직간접적으로 깊은 인연을 맺으면서 미국에 불교를 소개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미국불교사에 관한 가장 대중적인 책인 릭 필즈가 쓴 ‘백조가 호수에 온 이야기 How the Swans came to the Lake’에 여러 차례 소개 된다. 그녀가 활동한 시기와 업적을 고려하면 진작 소개되어었야 하는데 너무 늦게 소개 된다.
그녀는 여생의 많은 시간을 교토에 머물렀고, 1958년에 임제종 선종 사찰 대덕사(大徳寺)의 승려가 된 최초의 유일한 서양인이자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는 외국인이고 여성이고 사찰절차에 대한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선을 서쪽으로 전파하는 일을 수행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기 때문에” 승려의 일반적인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다고 주의 깊게 자기의 활동 내용을 평가하여 기록했다. 그녀는 많은 선 문헌을 영어로 번역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Zen Dus禪塵(선진)’- 1966년 뉴욕의 ‘제일 선원First Zen Institute’에서 출판된 임제종 선의 공안과 공안 연구의 역사-였다. 2006년에 게리 스나이더 Gary Snyder는 “60년대 그녀의 글은 시대를 앞서 갔으며 정확하고 관련성이 높습니다.”라고 썼다.
선의 티끌(선진 禪塵) 이 글자는 책 제목인 ‘Zen Dust’의 한자 표기다. ‘禪塵(선진)’은 직역하면 ‘선의 먼지’ 또는 ‘선의 티끌’이다. 이는 책 제목 ‘Zen Dust’와 같은 의미이며, 선종의 수행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이야기, 공안(公案), 가르침 등을 상징적으로 ‘먼지’에 비유한 표현이다. 수행 중 일어나는 혼란, 번뇌, 또는 깨달음을 위한 자취로 볼 수도 있다. 이 책은 공안(公案)과 임제종(臨濟宗)의 전통에 대한 역사적 연구서로, 일본의 미우라 잇슈( Isshu Miura, 三浦一秀)’와 미국의 루스 풀러 사사키가 공저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보낸 어린시절
루스 풀러(Ruth Fuller)는 시카고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부와 특권을 누렸다. 그녀는 1913년 몇 달동안 스위스에서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또한 1년 반 동안 유럽에서 개인 교사들과 함께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공부했다. 25살이던 1917년에 그녀는 자신보다 20살 많은 재판 변호사인 에드워드 워렌 에버렛과 결혼했다. 1918년 말에 딸 엘어라 (Eleanor)가 태어 났습니다. 1938년부터 1948년까지 엘어라는 작가이자 선(禪) 철학자로 평가받는 알렌왓츠Alan Watts 와 결혼했다. 1923~24년에 루스와 딸 엘러라는 휴식과 치유를 위해 뉴욕 주 나약(Nyack)에 있는 클라크 타운(Clarkstown )컨트리 클럽으로 갔습니다. 이 리조트는 피에르 베르나르(Pierre Bernard)가 이끌었으며 요가와 동양 철학 및 종교에 대한 성인 교육을 제공했다. 그 후 1927년부터 1929년까지 그녀는 시카고 대학교에서 산스크리트어와 인도 철학을 공부했다.
첫번째 아시아 여행
1930년대에 미국과 일본은 비행기로 쉽게 갈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미국에서 일본으로 가려면 선박으로 가야 했다. 미국 서부 해안(예: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에서 출발하여 태평양을 건너 일본의 주요 항구(예: 요코하마)로 도착하는 정기 여객선 노선이 운행되었는데 대략 2주 정도가 소요되었다. 1930년대는 대공황의 영향으로 전반적인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으며, 해외여행은 일반인이 부담하기에는 여전히 거금(큰돈)이 드는 일이었다. 이런 시기에 루스 플러 가족은 일본 여행을 갔다.
1930년은 한국불교사에서 미국과 첫번째 접촉이 있던 시기이다. 이 해 7월에 도진호 스님이 하와이 에서 열린 정토진종 서본원사가 주최한 ‘범태평양 청년불교대회’에 한국불교 대표로 참석하였다. 바로 이 해인 1930년 도진호 스님과 반대로 루스 플러는 기족과 함께 동아시아로 여행을 갔을 때 다이세츠 스즈키(D. T. Suzuki)를 만났다. 그는 그녀에게 명상에 대한 기본 교육을 해 주었고 선에 대해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본에서 장기간 머무르는 것이고 진지하게 배우고 싶다면 공인된 선사와 함께 수련해야 한다고 조언해 주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명상 수련을 계속하면서 스즈키와 서신을 주고 받았다. 1932년 4월 1일에 그녀는 다시 일본에 도착 했다. 스즈키는 그녀를 교토 임제선 계열의 남선사의 난신켄 스님 코노 무카이 Nanshinken Roshi (Kono Mukai))에게 소개했다.
난신켄 스님에게는 당시 여성 제자가 없었고, 자유분망한 서양인들이 좌복에 오래 앉아 수행 할 수 있을지 의심했기 때문에 그녀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루스는 선방 (젠도) 입실을 계속 요청했고, 마침내 난신켄은 자신의 집에 훌륭한 안락의자를 마련하고, 그 의자에 앉자서 명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선방(젠도) 안에서는 오직 좌선 방석만 허용되는 규율이 있었다. 루스는 가부좌를 배우고 짧은 시간 안에 선방의 남자들과 함께 수련할수 있게 되었다. 난신켄은 그녀의 노력과 인내심에 감탄하게 되었고, 결국 그녀에게 공안(코안)을 소개해 주었다. 이렇게 그녀는 그의 학생이 되었다. 처음에 그녀는 선방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스님의 작은 사찰에서 수행하였다. 일주일에 육 일은 오전 5시에 일어나 오전 7시까지 좌선을 하고, 아침을 먹고, 남선사에 가서 하루 종일 그곳에서 좌선을 하고, 집에 돌아와 저녁 식사와 목욕을 하고, 자정까지 집에서 더 많은 좌선을 했다. 난신켄 스님은 그녀에게 공안을 주었고 스즈키는 로시와 학생 사이의 통역을 했다. 한 달 후, 그녀는 선방에 앉기 시작했고, 원래는 저항하던 승려들이 곧 그녀의 존재를 환영했다.
그녀는 여름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수 십 년 후, 그녀는 남선사에서 보낸 그 달을 “내 인생에서 가장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시간”이라고 말했다.
1938년, 남편 워렌 에버렛은 동맥경화로 요양원에 입원하게 되자, 루스 풀러 에버렛은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이사하여, 아파트를 얻고, 최근 결혼한 딸과 사위 엘렌 왓츠가 그 옆 아파트에 머물도록 하였다.
남편이 병과 싸우고 있던 와중에도 그녀는 뉴욕에 공인된 선 수행 선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녀는 수동적인 학생이 아니었기에 소케이안 선사를 찾아가서 만났다. 루스 플러와 소케이안의 만남은 미국불교사에 중요한 것들을 남겼다. 그들은 나중에 결혼을 하였고, 미국 첫번째 선 교육기관을 함께 이끌었으며, 루스는 임제록을 영어로 번역하는 중심역할을 하였다.
소케이안(Sokei-an, 1882-1945)은 미국 본토에 처음으로 선을 교육시키는 기관을 설립한 스님으로 릭 필즈 저서인 미국불교사 책에 중요하게 소개된 사람이다. 그의 계보를 보면 코센(메이지 선의 거장)- 소엔 사쿠 – 소카츠 사쿠 – 소케이안으로 이어지는 법맥이다. 그의 속명은 시게츠 사사키, 원래는 화가였다. 미국에 오기 직전에 토모코 사사키라는 여성과 결혼하였다 그들 사이에는 3명의 자녀가 있다. 그는 부인과 함께 1906년 미국 도착하였다. 그리고 10년 후인 1916년 34살에 처음으로 뉴욕을 방문하였다. 미국에서 그는 불상 수리하는 일을 서부와 뉴욕에서 하였다. 그는 일본 신문 ‘주오코론’에 미국을 소재로 수필을 썼고, 그 수필중에서 뽑아서 수필집 미국 야화(Ameeica Night –Talk)와 시집인 ‘쿄수 Kyoshu’ 가 일본에서 출판 되었다. 1928년 그의 나이 48세에 소카츠는 일본에서 수행하던 소케이안에게 가르칠 권한을 주었으나, 소카츠가 소케이안의 출가를 반대하자 소케이안이 아웨노 푸테츠 에게 출가하였다. 이를 계기로 소카츠와 소케이안을 관계가 끊난다. 그는 1930년 뉴욕에 ‘미국불교도 협회(The Buddhist Society of America’ 설립)하였고 이 단체는 1945년에 미국 제일선원 (First Zen Institute of America)로 이름을 바꿈. 현재 뉴욕시 30가에 있다.
루스 풀러 에버렛이 뉴욕의 소케이안 선사를 만났을 때, 선사의 제자들은 여전히 의자에 앉아 명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일본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통해 서양인들도 공식적인 좌선 수행으로 명상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들에게 좌선 방석에 앉는 법을 가르치는 책임을 맡았다. 곧, 그녀는 불교 협회 프로그램의 다른 측면들도 전통에 맞도록 고쳐 나갔다.
남편 에버렛은 1940년에 사망했고, 루스는 소케이안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으며, 함께 보낸 시간의 일부는 공무 수행이었다. 루스 풀러는 헌신적인 선 수련자이자 학자로 남아 있었고, 소케이안의 도움을 받아 8세기 중국 경전인 ‘원각경(Sutra of Perfect Awakening)’의 영어 번역을 시작했다. 그 당시 딸과 사위와 함께 보낸 시간의 일부는 놀랍게도 그들의 연애(求愛)의 시간이기도 했다.
1941년 11월, 진주만 공격 몇 주 전, 루스는 불교 협회를 65번가 동쪽의 더 넓은 건물로 옮기도록 조치했다. 전쟁 발발과 함께 이 연구소는 정부 관계자들의 의심을 받게 되었으며, 정장을 입은 FBI 요원들이 출입하는 사람들을 감시했다. 그해 7월, 소케이안은 뇨겐 센자키(Nyogen Senzaki)와 마찬가지로 “적성 외국인”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메릴랜드의 억류 캠프로 보내졌다. 캠프 사령관은 자신의 수용 캠프에 있는 일본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동정심을 가진 점잔은 사람이었다. 소케이안은 옛 재주를 발휘하여 사령관을 위해, 용 모양의 지팡이를 조각해 주었다. 하지만 캠프의 환경은 열악했고, 소케이안은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는 캠프 생활을 하면서 너무 많은 체중이 줄어서 벨트가 네 칸이나 줄었다.
루스는 자신의 사회적 인맥을 이용하여 그를 위해 구명운동을 시작하였고, 1943년 8월 마침내, 소케이안은 석방 되었다. 그녀는 소케이안에 대하여 여전히 의심하는 당국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나이 52세 때인 1944년 7월에 그와 다시 결혼했다. 소케이안은 불교 협회 회원들에게, 미국 불교 포교사업의 난관과 거기에 필요한 인내를 ‘연꽃을 바위에 심어 거기에 뿌리가 내리기’ 라고 설명하며 미국에서 선이 뿌리내리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는 말을 하였다. -미국불교사 291페이지에서 옮김. 그는 “나는 이 나라를 사랑합니다. 씨앗을 뿌리기 위해 주변의 장애들을 치우다가 여기서 죽을 것입니다. 아직은 선의 때가 아니지만, 제가 선의 가르침을 뉴욕에 가져온 첫 번째 인물입니다. 저는 그 끝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고, 그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준비되어 있다고 확신시켰다. “저는 항상 자연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이제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는 루스 플러 사사키에게 자신의 사후에 불교도 협회와 함께 일할 정식 교육을 받은 임제종 선사를 찾을 책임을 맡겼다. 또한 그는 그녀의 수련을 완료하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소케이안은 결혼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1945년 5월 17일에 사망했다. 그의 사후, 불교 협회는 ‘미국제일선학회(First Zen Institute of America)’로 이름이 변경되었고, 소케이안의 가르침을 보존하는 데 전념했다.
소케이안이 바랐던 대로, 루스 플러 사시키는 수련을 계속하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조이겐 고토(Zuigan Goto)를 찾아갔는데, 그는 소카쓰(Sokatsu)와 함께 불운한 캘리포니아 농업 벤처에 참여했던 그룹의 일원이었다. 고토는 대덕사에서 가르치고 있었고, 루스는 그곳에서 재가 학생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모두 남성이자 일본인이었던 승려들과는 별도로 사찰 경내에 작은 집이 제공되었다. 그녀는 1955년까지 대덕사에서 6년을 보냈다. 그리고 불교도 협회를 이끌어 갈 임제종 선사를 찾으라는 소케이안의 유언을 실현시키기 위해 루스는 잇슈 미우라(Isshu Miura)스님과 함께 뉴욕으로 돌아왔다.
미우라 스님은 루스 플러 사사키가 통역을 맡아 공안에 대한 일련의 강연을 했다. 이 강연들은 그들이 공동으로 저술한 "선 공안: 임제선의 역사와 활용(The Zen Koan: Its History and Use in Rinzai Zen)"이라는 책의 기반이 되었다. 1957년, 루스 플러 사사키는 대덕사로 돌아갔고, 고토는 그녀가 자신의 집에 작은 선방을 건축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것은 서양인 학생들을 맞이하기 위해 특별히 의도된 일본 최초의 선방이었다. 이듬해 그녀는 대덕사 사찰 체계에서 승려 수계(서품)를 받은 최초의 여성이자 최초의 서양인이 되었다.
루스 사사끼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 미우라 스님은 한동안 제일선학회(First Zen Institute)에 머물렀지만, 주로 여성으로 구성된 이사회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1963년, 그는 사임했지만 뉴욕에 머물면서 16년 후 사망할 때까지 소수의 자신의 개인 학생들을 가르쳤다.
미국에서의 선(禪) 수행 전통을 아시아의 전통과 구별 짓는 특징 중 하나는 승가, 불교 공동체 (상가)에서 여성의 적극적인 참여를 들 수 있다. 루스 풀러사사키는 이 특징의 첫 번째라 볼 수 있다. 그녀는 여성불교의 전통을 시작하였지만, 함께 일하기 쉬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의지가 강했고, 자신의 의견에 확신을 가졌으며, 종종 융통성이 없는 행동을 했다. 그녀가 조이겐 고토에게 자신의 작은 선방에 기숙사를 추가할 의향이 있다고 알렸을 때, 고토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의 요청을 무시하고 건축을 진행했습니다.
일본 문화에서는 제자가 스승의 뜻을 이렇게 무시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고, 이로 인해 둘 사이에 불화가 생겼고, 고토는 그녀를 자신의 제자 중 한 명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교토 번역 팀
불교가 중국에 정착되는데에는 경전 번역이 매우 중요하였고, 그 중에서 유명한 사람이 쿠마라지바 스님이다. 인터넷으로 쿠마라지바 스님의 경전번역 방법을 검색해 보았다. 아래와 같이 나왔다.
<십주경(十住經)>은 쿠마라지바 자신이 가져온 경전이 아니라서 쿠마라지바도 내용을 명료하게 알질 못했다. 이 때문에 쿠마라지바는 원본을 받고도 한 달을 묵혀두었다가 해당 <십주경>에 대해 잘 아는 승려 불타야사(佛陀耶舍)를 초청하여 자세히 가르침을 받고 나서야 번역에 들어갔다. 먼저 다른 사람이 작업한 번역본이 있으면 그 옛 번역본의 장단점을 확실하게 파악한 다음 번역을 시작하였고, 번역 용어 선택이나 잘못된 곳을 고칠 때도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제자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상의를 거쳐서 진행하였다고 한다. 옛 번역본의 오류뿐 아니라 원어 사본의 오류도 교정을 시도했다. 서역의 음이 틀린 곳은 인도어로 고치고, 중국어가 틀린 곳은 글자의 뜻을 교정하였으며, 바꿀 필요가 없는 것은 바로 기록하고, 다른 이름은 올바르게 고쳤는데, 고친 서역의 음이 반 이상이었다고. 나아가 경전만으로는 그 뜻이 분명하지 않다싶으면 관련된 논서를 찾아 대조하는 과정까지 거쳤다. 그야말로 현대의 전문 번역가 못지 않은 수고를 들인 셈.
즉 그가 주축이 되어 번역을 하였지만 역할을 분담하여 하면서 아주 철저하게 한 것을 알 수 있다.
루스 플러 사사키도 번역을 시작하면서 미국인과 일본으로 구성된 팀을 구성하여 역할 분담을 하여 진행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과정은 아래와 같다.
그녀는 1957년 설립된 ‘미국 제일 선원의 일본지원’(또 는 1957년 에 설립된 Nichibei Daiichi Zen Kyokai)의 기치 아래 작은 팀을 만들어 그녀의 지도력 아래에서 연구와 번역 작업을 수행했다. 그 본부는 대덕사( 다이토쿠지(大徳寺)의 암자인 용원원(료센안 龍源院,Ryosen-an)이었다.
팀의 대부분은 정식 직업을 갖고 있었고 이 팀에서는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팀의 주요 프로젝트 중 하나는 선의 진수를 설파한 임제 의현의 저서인 임제록의 번역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루스 풀러 사사키는 원래 사망한 그녀의 남편 소케이안 스님이 번역하고 뉴욕에 있는 그의 학생들이 녹음한 번역을 사용할 계획이었지만 연구자들은 이러한 번역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팀의 책임자는 당송 시대 중국어 구어 분야의 세계 최고의 권위자로 평가받는 이리야 요시타카 (入矢 義高1910~1999 )였다. 그는 교토 대학에서 가르쳤고, 나중에는 나고야 대학에서 한문학과의 학장이 되었다. 그 팀에는 영어 교수 가나세키 히사오(1918~1996)와 교토대학에서 강의하고 나중에 하나조노대학 총장을 역임한 요코이(훗날 야나기다) 세이잔(1922~2006)도 포함됐다. 얌폴스키Yampolsky는 1991년에 야나기다 세이잔Yanagida Seize가 “중국과 일본 모두에서 선불교의 가장 뛰어난 학자로 인정받고 있다”고 썼다.
팀에는 버튼 왓슨(Burton Watson), 필립 얌폴스키(Philip Yampolsky), 게리 스나이더(Gary Snyder)라는 세 명의 미국인이 있었다.(루스 사사키는 스나이더의 첫 일본 여행을 후원했다.) 그들은 또한 피아니스트이자 ‘제일선원’의 회원인 월터 노줛(Walter Nowick)과 함께 임제록 작업에 참여했다. 이 그룹은 1961년 8월 얌폴스키(그녀는 팀의 임제록 번역을 훔쳐 자신의 것으로 출판했다고 비난받음)를 해고하였는데 왓슨과 스나이더가 이에 항의하여 사임하면서 큰 타격을 입
었다. 이는 고용주로서의 독재적인 성격의 루스 사사키의 권위와 팀원들의 학문적 권위 사이의 오랜 긴장의 정점이었다.
세 명의 일본 학자는 그녀를 위해 계속해서 선의 티끌(禪塵)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선의 티끌은 마침내 1966년 일본에서 처음 출판되었고, 다음 해 미국에서도 출판되었다. 이 책은 1965년에 400페이지 분량의 짧은 판인 공안(Zen Koan.)이 먼저 출판되었다. 임제선사의 기록은 1975년 루스 풀러 사사키가 사망한 후 ‘임제록Zen dust; the history of the koan and koan study in Rinzai (Lin-chi) Zen’으로 출판되었지만 이리야 요시타카 (入矢 義高 )의 메모나 야나기다의 소개는 없었다.
위에서 보듯이 루스 풀러 사사키는 소케이안의 작업을 이어받아 중국어 및 일본어 경전을 영어로 번역하기 위해 교토에서 학자 그룹을 모았다. 이들 중 필립 얌폴스키와 버튼 왓슨을 포함한 여러 학자들은 나중에 학계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루스 플러 사사키를 위해 일하는 것은 이 젊은이들에게 희귀문헌에 대한 비할 데 없는 접근을 제공했지만, 그들은 종종 그녀가 자신들에게 할당한 특정 작업이 지루하고 가치가 의심스럽다고 느꼈습다. 그녀는 또한 자신과 의견이 다르거나 어떤 이유로든 의심스러워진 사람들을 신속하게 해고하는 행동도 하였다.
간단한 프로젝트도 그녀의 지휘 아래서는 통제 불능으로 될 수 있었다. 그녀는 미우라 스님과 함께 출판한 얇은 ‘선 공안(Zen Koan)’에 주석을 달기 시작했고, 결국 참고문헌, 지도, 가계도 및 “선 구문 선집(Zen Phrase Anthology)” 외에 150페이지 이상의 각주를 더 작은 활자체로 추가했다. 그리고 루스 플러 사사키의 사망 직후인 1967년에 “선 더스트(Zen Dust)”로 재출간되었을 때, 이 책은 574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책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까지 그녀는 강인한 개성을 유지했지만 종종 너그러워 지기도 하였다. 그녀의 노력과 제일선원의 노력 덕분에 월터 노윅(Walter Nowick)과 게리 스나이더(Gary Snyder)를 포함한 여러 미국인들이 선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갈 수 있었다. 그녀 나름대로 그녀의 남편만큼이나 선을 북미에 가져오는 과정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것은 그녀의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용원원(료센안, 龍源院, Ryosen-an zendo) 선방 대덕사 북쪽 경계 바로 안쪽에 있는 작은 암자인 용원원 (龍源院)에서 풀러 사사키(Fuller Sasaki)는 약 15명을 수용할 수 있는 즈이운켄(Zuiun-ken)이라는 작지만 아름다운 선방을 유지했다. 이곳에서는 일본인이 아닌 서양인만이 좌선을 수행했다. 각 사람은 약 25분 동안 높은 단 위의 푹신한 방석 위에 앉아 있다. 그리고 종이 울리면. 모두 일어서서 홀 밖을 천천히 돌다가 다시 돌아와서 25분 동안 앉았다. 네 번 앉은 후 수행자들이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잠시 구호를 외치는 시간이 있었다. 선방은 매년 여름 내내 가득 찼다. 많은 서양인들은 처음으로 이 선방에서 좌선을 수행하는 방법을 배웠다.
루스 플러 사사키는 말 년의 건강 악화 속에서도 그녀가 오랜동안 진행해 온 프로젝트를 가능한 한 많이 완료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유럽 출판사와 거래하기 위해 유럽에 있던 중 지쳐서 쓰러졌다. 그녀는 1967년 10월 24일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때 용원원(료센안)에서 열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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