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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직암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아오스딩
쉽게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물음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후세계(死後世界)에는 무엇이 있는가?" ... 등등 의
풀리지 않는 많은 문제와 신비가 밑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어떤 삶을 영위하느냐의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물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 혼수 상태에 빠진 어떤 부인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 부인은 불현듯 하늘로
들어 올려져 재판석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곳은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 장소였다. 그 때, "너는 누구냐?"하고 한 목소리가 물었다.
"저는 시장(市長)의 부인이다"하고 부인은 대답했다.
"나는 네가 누구의 부인이냐고 묻지 않고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저는 네 자녀의 어머니이다." "나는 네가 누구의 어머니냐고 묻지 않고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저는 교사이다." "나는 너의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지않고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렇게 문답은 계속되었다. 그 부인이 무슨 대답을 하든간에,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에는
못되는 것 같았다. 결국 그만족할 만한 대답이 부인은 시험에서 떨어졌고,
다시 지상으로 되돌려 보내지게 되었다. 병에서 회복되자,
그 부인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결심은 그 부인의 삶의
전체를 새롭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서 자신의 삶의 조건과 환경이 되는 것은 많이 알고 있고 또한 가지고 있으나 정작
자신의 본질적인 것에는 해답을 찾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한 '나'의 모습은 삶을 살아가면서 방황과 좌절, 고독과 소외, 무의미와 불안,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표류하는 조각배처럼 이리로 저리로 휩쓸리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나' 자신을 깊이 깨닫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 즉 인격적인 차원에서
'자신과의 만남'이 아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나를 의식하고, 나를 인정하고 나를 받아들 일 때,
우리는 진지하게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할수 있다. 그러한 만남과 깨달음이 이루어질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자연스럽게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연결된다.
라도 의미없는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의미자체는 이를 추구하
는 노력과 상관없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의미를 추구한다고 해서 그 노력이 곧 의
미를 충만하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의미한 삶이 우리 주위에는 얼마든
지 있다. 그것은 그들이 의미를 원하지 않거나 노력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의미
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미는 발견하는 것이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일단 발견된 의미는 우리 삶에 커다란 힘을 발휘한다. 의미있는 삶은 고통에도 불
구하고 이를 극복하고도 남을 보람을 우리에게 약속한다. 그래서 살아갈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삶의 형태를 문제삼지 않는다. 삶이 아무리 고달프고 상처를 주어
도 그 속에 의미가 있는 사람은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발견
하지 못한 사람은 삶의 형태를 문제 삼는다. 심지어 삶의 형태를 두고 삶의 의미
를 판가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오는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 의미라
면, 그것은 어디에서 무엇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님께로부터 온다고 믿는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가 되는 성서의 가르침에 의하
면, 사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닮도록 창조하셨고 당신과 함께 살도록 하
기 위해 창조되었다(창세 1-2장). 즉,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서 하느님의 나
라에서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하느님이 누구시냐에 따
라서 달라질 문제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증언
하는 성서에 따르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16라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사
람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아서 사랑을 하도록 창조된 피조물이라 말할 수 있다.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닮는 것이다. 사람의 겉모습인 육신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포함한 사람의 전존재(全存在)가 사랑을 할 때 하느님을 닮게
된다는 뜻이다. 성서에 있는 이 말씀의 정확한 의미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파견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서 비로소 밝혀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요한 13,35 참조). 다시 말해
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하느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삶을 의미한다.
이렇게 사람은 서로 사랑함으로써만 '하느님을 공경'할 수 있다. 이것이 사람이
하느님께로부터 창조된 뜻이며, 우리의 삶의 의미,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서로
사랑하는 삶이야말로 다가온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삶이다. 서로 사랑하
는 삶 안에서 사람은 자기 영혼을 구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볼 때, '하느님을 알
아 공경하는 길'은 자기 혼자서 죄를 짓지 않으면서 다만 착하게 사는 소극적인
길이기라기 보다는 오히려 이웃을 사랑하기에 애를 쓰는 적극적인 길이라고 이해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다. 그러한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죽은 다음에만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 여기
서도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요,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행복이란 바로 '사랑하는 기쁨'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을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며, 하느님 나라를 추구한
다'는 것이 인격적 차원에서 보면 바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
미 지향이 인격적 차원에 부합되어 조화로운 발전으로 나타날 때, 그리스도교 신앙
이야말로 '의미있는 삶의 발견으로서의 기쁜소식'이요, 구원의 기쁜소식에 대한 희
망의 표지로 드러나게 되며, 기쁜 삶을 살아갈 힘을 주고 자유를 주게 된다.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기쁜 소식)을 믿어라' 하셨다"(마르 1,14-15).
이는 예수께서 공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맨 처음 하신 말씀이며 앞으로 그분이
가르치실 내용의 핵심이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신 자신의
출현으로 하느님 나라는 실현의 때를 향하여 전진하고 있으며, 그 나라가 이미 실
제로 도래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한 표징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 안에서 그리
고 그의 말씀, 행적에서 뚜렷히 드러난다.
다. 우리는 성서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길 바라십
니다"(디모 2,4)라는 증언을 들을 수 있다. 이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그 목적에로의 초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분명히 실
현시키시고자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세상의 구원자, 구세주로 파견하셨다(1요
한 4,14 참조). 그리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어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마르
1,14)고 알리시며, 자신의 사명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
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19). 그리고는 이 말씀이 바로 이자리에서 이루졌다고 말씀하십니다(루가 4,21
참조). 과연 예수님은 자신의 온생애를 인간사회에서 모욕과 천대를 받는 사람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죄인들을 용서하는데 바치셨고, 아무런 조
건없이 사랑하셨다. 바로 그러한 예수님의 삶 안에서 '구원의 기쁜소식이란 무엇
인가'가 드러난다.
"너희가 듣고 본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제
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은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마태 11,5-6).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구원'이란 병이나 태어날 때부터의 결함이나
노쇠에서 오는 고통을 치유받아 신체적으로 완전하게 되는 상태뿐 아니라 나아가
육체적인, 사회적인 이유로 인해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고립되기 때문에 생기는
마음의 상처까지도 치유받아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치유는
사람들과 관계뿐 아니라 사랑자체이신 하느님과의 관계까지도 회복케 하며, 하느
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희망에 찬 사랑의 삶을 살게 한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
의 출현, 현존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구
원의 표징이 되며,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선언이며,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
의 기쁜소식'이 되는 것이다.
적인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느님 나라는 하나의 신비스런 실재로, 하느님께로부터 온 당신만이 그 나라
에 대해 알려줄 수 있다. 그 나라는 주로 스스로 모든 것을 아는체 하는 사람들에
게 보다는 어린 아이와 같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알려집니다. 예수님
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
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보이시니 감사한다"
(마태 11,25).
이스라엘 사람들도 오랜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알고
있었고, 그러한 '하느님 나라'는 극적으로 오리라고 기대했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정치적인 왕국으로 세워지리라고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들의 예상이나 기대와는 전혀 다른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셨다. 즉,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받아들일 때 다가오는 것으로 씨앗이 땅에 떨어져 자라
나는 것처럼 자라야 한다(마태 13,3-9.18-23 참조)고 말씀하신다. 그러한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어린 양떼들'-당신을 받아들이는사람들-에게 주어진다(루가 12,32 참조).
그리고 이 나라는 큰 나무처럼 자라 모든 나라, 온 인류를 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드리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커나가기 때문이다(마태 13,23 참조). 또한 하느님
나라는 겉으로 드러나지만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세속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지상에 드러난다고 해서 세상의 왕국과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예수께서도 사람들이 당신을 왕-정치적인-으로 세우려 하자 몸을 숨기셨
다(요한 6,15 참조)는 증언에서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후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살펴 볼 때 자세히 설명되겠지만 최종
적인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결코 이 지상에서의 삶이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삶을 준비하는 자리는 분명 우리의 이 지상에서의 삶 밖에는 없다.
또한 우리는(사람은) 지상의 세계와 손을 끊고 사후의 세계만을 기다리며 살아갈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인들이 믿는 구원이 다만 내세의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구원이 이미 이 지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것은 현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사이비
종교가 달콤한 말로 약속하는 행복은 아니지만 진정한 행복과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땅이 아직 황폐하고 가시나무로 덮여 있을지라도 확실히
결실을 가져오는 과일 나무의 묘목을 기르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기쁨이며, 행복이
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진력을 다하는 멋진 삶에 눈을 뜬 사람은 이 세상이
약속하는 모든 것을 포기할지라도 이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만큼 소중하고 멋진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서는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씀을 전한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느님 나라는 어떤 장사꾼이 좋
은 진주를 찾아 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면 돌아가서 있는 것 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마태13,44-46).
바로 이것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에로의
초대이며, 참여하는 우리의 자세라 할 수 있다.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삶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천을 한다면, 그 기쁜 소식은 참된 생명의 말씀으로 살아 움직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르는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중심은 예수님이며, 오직 그 분만이 우리 인생에 삶의 의미를 불어넣어 줄 수 있다.
예수님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메시지를 전하셨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셨다.
예수께서는 어떠한 사람이라도, 사회에서 경멸당하고 축출된 죄인이라 할지라도 다 받아들이시고
사랑하셨다. 그러한 예수님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같은 메시지를 전하신다:
우리도 받아들이시며 용서하시고 사랑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께 받아들여질 만하다거나,
그만한 가치가 있거나, 용서받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다.
무슨 특별한 덕(德)이 있어서도 아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 허약함과 죄스런 모습 그대로를 하느님께서는 받아주신다.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우리에게 알기 쉽게 보이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당신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인다. 당신은
사랑을 받고 용서를 받고 있다." 우리가 이 메시지의 뜻을 실감한다면, 우리의 삶은 깊은 영향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 다만 하느님께서 받아주시는데 적합하지 못하다고 지레 짐작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려는 믿음과 용기가 없을 뿐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아무런 조건없이 받아들여
주신다는것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푸념할 수 있다 :
"모든 선(善)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죄악으로 오염되고, 경쟁심과 시기심,이기심으로 가득차고,
세속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나'와 같은 속물을 어떻게 현재의 내 모습대로 받아들여 주신다는
말인가?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소리인가?" 그러나 무가치한 나, 절조없는 나, 안일하고 나태한
습성에 빠져버린 나를 받아들여 주시는 그분이 바로 모든 것을 초월하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시다. 이 메시지를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2. 앤소니 드 멜로, 이미림, [개구리의 기도 제1권], 분도출판사, 1991
3. 명동천주교회 교육관 편집부, [믿을 교리 1], 1990
4. 마태오 맥게트릭, 이선비, [묵상], 성요셉출판사, 1989
5. 교리교육위원회 편집부, [은혜로운 만남],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1982
6. 가톨릭 교리신학원, [교사용 초대받은 당신], 서울대교구 사목국
7. 가톨릭 대학 신학부, [예비자교리교안집2]
8. 이봉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분도출판사, 1989
9. 교리교육위원회 편집부, [그리스도교 교리 강좌],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