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입니다.
이씨조선의 개국공신 무학대사
그의 본명은 ‘박자초’라고 하며 주로 무학(舞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출생지는 경상도 상기군 삼가면으로 지금의 경남 합천읍이 고향이다.
고려 충숙왕 14년인 1327년에 태어났는데 부친은 박인일, 모친은 채씨이다.
태조 이성계보다 8살 위다.
무학대사의 탄생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어느 늙은 선비가 아들이 죽자 혼자 된 며느리와 한집에 살게 되었는데 과부가
된 며느리한테서 손자하나 얻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한 시아버지는 며느리한테 가까운 절에 들어가 백일기도를
드리도록 했다.
백일기도를 마치고 며느리가 귀가하여 먹음직한 천도 복숭아를 먹는 태몽을
꾸고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무학이었다.
무학을 낳은 후 동네에 망측스러운 소문이 나돌자 늙은 선비인 시아버지는
며느리와 상의하여 아이를 내다 버리기로 하고 밤에 몰래 갖다 버렸다.
그러나 막상버렸지만 밤새도록 걱정이 돼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버린 곳을 가보니 학이 춤을 추고 있다가 사람을 보더니 날아 가버렸고
그 자리에 버렸던 아이는 웃고 있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보통 아이가 아님을 알고 아이를 다시 데려다 길렀고
아이의 이름을 '춤추는 학'이라는 뜻의 무학(舞鶴)이라고 지었다.
무학의 소년기는 집이 워낙 가난하여 부자 집 머슴살이를 하며 살았으나
하늘이 내린 천재 소년답게 남달리 하는 일이 뛰어 났다.
18세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고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서 혜명국사의 제자가
되어 학문을 배웠고 묘향산 금강굴에 들어가 도를 닦아 득도했다.
득도한 후 여러 산사를 돌아다니며 자기보다 학문이 높은 스승을 찾았으나
마땅한 스승을 찾을 수 없자 중국 원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26세 때 나옹선사를 만나(고려 공민왕2년 1353년)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스승인 나옹선사는 무학을 따라 나와 고려인으로 귀화하여 공민왕의 왕사로
지냈으며 경기도 양주에 호암사를 짓고 무학을 불러 國師가 되기를 권했으나
무학은 극구 사양했다고 한다.
아마 무학은 고려가 망할 것을 미리 예견했을지도 모른다.
후에 이성계를 만나 이성계의 책사가 된다.
조선의 국가경영 기초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에 두었기 때문에 무학은
조선왕조에서 별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태조 이성계와 무학의 일화 가운데 어느 날 태조가 무학대사를 보고
“우리 둘 중 누가 농담을 잘하는지 내기 한번 해 봅시다.”
“대왕께서 먼저 하시지요.”
태조 이성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보니 스님은 흡사 돼지처럼 생겼소.”
무학대사는 태조의 농담에
“제가 보니 대왕께서는 부처님 같습니다.”
“어째서 스님은 왜 농담을 안 하시오. 내가 스님을 돼지라고 놀리면 스님도
나한테 농담을 하셔야 재미있지 않겠소, 나를 '부처'라고 하니 농담하는 내가
재미없지 않습니까?"
이에 무학대사는
"대왕, 저도 농을 한 것입니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는 법입니다."
이에 두 사람은 손뼉을 치며 파안대소했다고 한다.
오늘이 마침 '부처님 오신 날'이기에 옮겨 보았습니다.
내마음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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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이라 생각되어 하나 옮겨 봅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나의 잣대로 생각하고 본다면 남이 안보이겠죠
ㅎㅎㅎ 감사합니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