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한국 독서글짓기 연구회 ( 도룡동 세종논술 )
 
 
 
 

지난주 BEST회원

 

지난주 BEST회원

 

지난주 BEST회원

 
 
 

회원 알림

 

회원 알림

다음
 
  • 방문
  • 가입
    1. 조은별 민기맘
    2. 크리스틴
    3. 서영마암
    4. 김지수
    5. melancholy
    1. 오남우
    2. 윤채원
    3. 오건희
    4. 대덕초김지우
    5. 정준서
 
 
 
 
카페 게시글
+성공,행운의 법칙 스크랩 마틴 루터 킹의 리더십/도널드 T. 필립스지음
김박사 추천 0 조회 72 08.05.05 09: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마틴 루터 킹의 리더십

도널드 T. 필립스지음/김광수 옮김

시아출판/2001년/382쪽/10,000원

▣ 저자 도널드 T. 필립스(Donald T. Phillips)

도널드 T. 필립스는 리더십 분야에서 널리 알려진 저자다. 그는 역사적 교훈에서 오늘날에도 유용한 각종 비즈니스와 삶의 전략을 이끌어내는 데 탁월한 면모를 보인다. 그는 현재 여러 기업과 정부 기구, 전문가 조직 등에서 강연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의 또 다른 저서로는 『Lincoln on Leadership』 『The Founding Fathers on Leadership』 『On the Brink; The Life and Leadership of Norman Brinker』등이 있다.

▣ 옮긴이 김광수

중앙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에서 공부했다. 현재는 (주)엔터스코리아에서 경제․경영 분야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21세기 리더』 『잭 웰치』 『리더십 키워드』 『작게 시작하여 크게 성공하라』 『e-비즈니스 에센스』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미국 역사에는 거의 100년을 주기로 세 번의 혁명이 있었다.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그리고 세 번째 혁명인 미국 민권운동으로 ‘분리하되 평등하다!’라는 인종 편견주의에 대항하여 일어난 운동이었다. 그것은 비폭력에 가까웠지만 결코 혁명에 뒤쳐진다고는 할 수 없다. 민권운동의 결과 연방 및 각 주에서 용인했던 분리 및 차별적 행태가 상당부분 개선되었다. 이 3대 혁명은, 말하자면 아메리칸 드림을 쟁취하기 위한 민중들의 전진이었다.

이 책은 마틴 루터 킹의 생애를 조명하면서 진정한 리더십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마틴 루터 킹의 리더십 원칙은 시간을 초월하여 어떤 조직의, 어떤 상황하에 있는 리더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그리고 거대한 변혁의 시기와 같은 혼란스런 상황에서 더더욱 그 빛을 발한다. 그는 진정한 리더가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진정한 리더란 현명한 판단과 성실함을 갖추어야 하며, 돈이 아니라 정의, 인기가 아니라 인류에 대한 사랑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의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시대는 순수한 마음으로 두 손이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 위대한 영혼을 필요로 합니다. 끝까지 소임을 저버리지 않는 리더, 삶의 유혹에 현혹되지 않는 리더, 헌신적이고 용기가 있으며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마틴 루터 킹의 리더십이 인종을 초월하여 전세계 수백만의 빈민과 피지배자들의 존엄을 일깨움으로써 독재에 항거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는 단지 미국의 흑인들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모든 민중들에게까지 자유를 확산시킨 것이다.

▣ 차례

제1부 리더로서의 준비

1. 먼저 경청하라: 상대방을 알아야 이끌 수 있다

2. 사랑과 비폭력으로 설득하라

3. 배우고 또 배워라

4. 화술의 달인

제2부 민권운동과 리더

5. 직접 행동을 유발하라

6. 창의성과 혁신을 촉진하라

7. 연대, 팀워크, 다양성을 기반으로 참여를 유도하라

8. 목표와 상세한 행동 계획을 수립하라

9. 결단력을 발휘하라

제3부 민중과 함께 승리

10. 가르침과 설교

11. 민중과 함께 한 행진

12. 협상하고 타협하라

13.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

제4부 미래를 약속하며

14. 희망과 동정을 전파하라

15. 사람들을 이끌 용기를 가져라

16.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어라

마틴 루터 킹의 리더십

도널드 T. 필립스지음/김광수 옮김

시아출판/2001년/382쪽/10,000원

제1부 리더로서의 준비

빨간 벽돌로 지어진 조그만 2층 건물의 계단에 올라섰을 때, 스물 다섯 살의 마틴 루터 킹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른편에 있는 낡은 주(州) 의사당 건물 꼭대기에서는 남부동맹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거의 한 세기 전에 펄럭이던 깃발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성조기가 남부동맹 깃발 아래에 있다는 것도 그는 놓치지 않았다. 킹이 들어가려던 건물은 덱스터 애비뉴 침례교회로, 목사가 된 그의 첫 부임지였다.

1954년의 몽고메리는 인종분리의 온상이었다. 압제와 절망이 끝없이 소용돌이치며 세대를 거쳐 이어져 온 곳이 바로 몽고메리였다. 예를 들어 버스에 타더라도 흑인과 백인이 함께 앉을 수 없었다. 만일 흑인 옆자리에 백인이 앉으면 흑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에 서야 했다. 심지어 승객의 75퍼센트가 흑인이었지만 그들의 자리는 늘 버스 뒤편이었으며, 규정을 어길 경우에는 도시 조례에 따라 벌금을 내거나 구속되었다. 운전기사는 모두 백인으로 이들에게는 규정을 강제할 권리가 있었다.

“나는 우리 역사상 가장 혹독한 시기에 덱스터에 왔습니다.” 첫 설교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어둡고 음울한 우리의 하늘을 피로 물들일 수 있는 전쟁의 화염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모든 흑인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혼란과 갈등, 자포자기, 의미 없는 절망과 근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덱스터는 모든 남자와 여자들을 평화와 구원의 언덕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리고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제시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 처한 덱스터를 이끌어 나갈 것입니다.“ 몽고메리의 신임목사는 청중들로부터 열광적인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킹이 몽고메리에 부임한 이듬해, 미국의 민권운동에 불을 붙인 중요한 사건이 한 버스 안에서 일어났다. 1955년 12월 1일, 재단사 보조로 일하던 로라 팍스라는 42세 여성이 버스를 타고 가는 중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운전기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그 소식은 삽시간에 몽고메리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에 자극을 받은 흑인 지도자 집단은 버스 탑승 거부 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였다. 즉, 에버너디가 주창한 몽고메리 개선위원회(MIA)라는 이름의 새로운 조직에 전체 지도자들이 호응하였고, 의장으로는 놀랍게도 킹이 추천되었다. 킹은 그 자리에서 의장직을 받아들였다.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에 제가 적임자라면, 기꺼이 제가 그 일을 하겠습니다.”

집회는 기도와 성서 낭독으로 시작되었다. 다음으로 의장으로 선출된 킹 목사가 일어서 15분간의 개막연설을 시작, 로라 팍스 여사를 영웅으로 칭송하고 그녀가 겪은 사건을 다시 한번 언급한 후 강한 어조로 연설의 끝을 맺었다. “이제 우리 민중들은 지쳤습니다. 오늘 밤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도 그 동안 우리를 지치게 만든 사람들, 잔인한 압제의 발길질로 우리를 혹사시킨 사람들에게 우리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대안은 저항뿐입니다.” 우레와 같은 군중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버스 거부 운동은 몽고메리의 흑인 지도자 집단에 심각한 문제를 유발하였다. 오랫동안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던 사람들이 과연 언제까지 마땅한 교통수단 없이 버틸 수 있단 말인가? MIA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운의 모든 택시 회사와 계약을 맺어 버스와 동일한 운임인 10센트에 택시를 이용하는 합의를 성공시켰다. 또한 합승 운동(car pool)을 고안하여, 도시 전역에 40곳의 승하차 정류소를 지정한 후 사람들이 공동으로 택시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자 승용차를 보유한 수백 명의 시민들이 자원하여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킹은 몽고메리의 저항 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중의 소망에 귀를 기울였다. 즉 상대방을 알기 위해 노력했으며, 특히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그럼으로써 킹의 신뢰성은 대중의 입을 통해 확산되었다. 진정한 리더는 대중이 자신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줄 사람을 원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경청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한 행동기회를 만들 수 있다. 만일 이 과정이 배제된다면 무슨 수로 ‘사람들이 가치를 부여하는 특정의 목표, 즉 그들의 기대와 욕구, 열망과 기대'를 알아낼 수 있겠는가?

버스 거부 운동이 성공을 거두면서 버스회사에서는 운행 거리 1마일당 22센트의 적자를 보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 결과 운동을 막기 위한 갖가지 방안이 모색되었다. 그래서 일부 흑인 거주 지역의 노선을 폐지하기도 했지만 적자는 오히려 더 늘어만 갔다. 경찰청장까지 나서서 택시 회사를 상대로 승객 1인당 법적 최저 요금인 45센트를 받지 않으면 벌금을 부과하겠다고 경고했다. 또 합승정류장에까지 경찰이 동원되어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협박하고 해산시켰다. 1956년 10월 말, 마침내 몽고메리의 지방 검사들의 요구에 의해 법원에서는 임시 명령을 통해 합승 운동의 중단을 명령하였고, MIA 지도자들 역시 더 이상은 계획을 진행할 수 없었다.

당시 상황에서는 모든 것이 불리해 보였다. 거의 1년간 버스를 외면하면서 이용하던 값싼 대체 교통수단을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더군다나 법원에 구속된 상태에서 시 당국에 맞서려면 변호사 비용도 필요했고, 15,000달러라는 벌금도 감당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킹은 낙관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합승 운동은 이제 끝났습니다.” 킹은 언론을 상대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발을 묶어 두는 명령을 내릴 법정은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 따라서 우린 걷거나 서로의 차를 함께 이용하면서 이 투쟁을 계속할 것입니다.”

11월 13일, MIA 의장으로서 시 당국에 의해 핵심 피고로 몰려 피고석에 앉아 판결을 기다리고 있던 마틴 루터 킹은 한 장의 쪽지를 건네 받았다. 대법원에서 앨라배마의 버스 인종차별 법이 위헌이라는 하급 법원의 결정을 확인했다는 내용이었다.

몽고메리 버스 거부 운동은 381일간 계속되었다. 그 동안 흑백 양측에서 수십만 달러의 비용을 쏟아 부었다. 4만 명 이상의 군중이 정부에 대해 ‘대규모 비협력 운동’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출하였으며, 비인간적인 버스를 타는 것보다 당당하게 걷는 것이 훨씬 영광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57년 5월 17일 8월 초, 115명의 흑인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몽고메리에서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흑인 지도자들은 선거인 등록에 초점을 맞추며 몽고메리 방식의 민권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남부 기독교 지도자 회의(SCLC 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를 발족시키고 킹을 만장일치로 새 단체의 의장으로 선임했다.

킹은 대중들에게 폭력이 결코 대안이 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비폭력주의는 일반의 생각과는 달리, ‘유약하고 비겁한 방법이 아니라 강하고 대담한 접근법‘임을 주장하며 비폭력주의를 변화의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그에게 비폭력주의는 ‘진보를 위한 발걸음’이며 ‘성취 수단’ 그리고 ‘정의와 진실의 방패이자 무기’였다.

이러한 전술은 흑인 대중과 백인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먼저 흑인 대중에게 비폭력주의는 사람들의 가슴과 영혼에 무언가 메시지를 던졌다. 그로 인해 스스로의 내면에 숨어 있던 자존심과 열정,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비폭력주의는 백인들의 양심에 영향을 미쳤다. 백인들의 도덕적 방어막을 허물어뜨렸으며, 그로 인해 잃어버렸던 양심을 되찾는 계기가 되었다.“

제2부 민권운동과 리더

유능한 리더는 사람들의 행동을 격려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상황이 호전될 때는 격려의 강도를 약간 낮출 수 있지만, 상황이 불리할 때는 그 강도를 끌어올린다. 유능한 리더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격려한다. 몽고메리에서 발생한 위기 상황에서 킹은 ‘끊임없이 주장하라, 날 수 없으면 뛰어라, 뛸 수 없으면 걸어라, 걸을 수 없으면 기어라.’고 역설했다.

잦은 시련으로 때론 참고 기다려야 했지만, 킹은 물러서지 않았다. “운명의 날 앞에서 꾸물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전진해야 합니다. 전진해야 합니다.” 그의 이러한 충고에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호소가 담겨있었다. 1963년 버밍엄 교도소에서 쓴 유명한 편지에는 그 의미가 잘 나타나 있다.

인종차별의 고통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은 ‘기다려라’는 말을 쉽게 내뱉을 겁니다. 그러나 자의적으로 여러분이 부모에게 폭력을 가하고 여러분의 형제자매를 물에 빠뜨리는 악한 사람들을 볼 때, 분노에 눈이 멀어 우리 흑인 형제 자매들에게 욕을 퍼붓고 구타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경찰을 볼 때, 흑인을 받아주는 모텔이 없어서 자동차 안에서 쭈그리고 자야 할 때, 날이면 날마다 ‘백인’과 ‘흑인’이라는 성가신 표지를 보며 굴욕감을 느낄 때, 여러분의 이름이 ‘검둥이’가 되고 중간 이름은 여러분의 나이에 상관없이 ‘애숭이’가, 그리고 성은 ‘녀석’이 돼 버릴 때, 백인들이 여러분의 부인과 어머니에게 절대 ‘여사’라는 존칭을 사용하지 않을 때, 흑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밤낮으로 고통 당할 때,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초조함 속에서 속으로는 공포를 밖으로는 분노를 느끼며 살아갈 때, ‘쓸모 없는 놈’이라는 퇴행적인 인식과 싸워야 할 때, 여러분은 왜 그저 기다리기가 어려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1962년 9월, 앨라배마 주 버밍엄에서의 SCLC 총회 - 마틴 루터 킹이 기조연설을 하다가 누군가의 주먹에 얼굴을 맞는 것으로 끝나버린 - 가 끝난 후, SCLC의 버밍엄 지부 대표였던 프레드 셔틀스워스는 애틀랜타에 있는 SCLC 본부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마틴 루터 킹에게 버밍엄에서 대대적인 민권운동을 벌여보자고 제안했다. “만약 당신이 민권운동의 승리를 원한다면 버밍엄으로 오십시오,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지나치게 낙관적이었고, 킹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흑백통합의 조짐이 보이면 버밍엄의 백인들이 집요하게 맞서 싸운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킹은 버밍엄을 ‘전국에서 가장 철저하게 인종 차별이 가해지는 곳’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에이브러햄 링컨과 토마스 제퍼슨, 권리장전과 헌법 서문, 그리고 제13, 14, 15차 헌법개정안, 공립학교에서의 인종 차별을 불법화하는 미 대법원의 1954년 판결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만 모여 사는 곳‘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초기의 토론은 셔틀스워스와 킹의 전화통화로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킹이 SCLC에 제기한 질문이 중심이었다. 그 질문은 바로 ‘우리가 과연 비밍엄으로 가야 하는가?’라는 것이었다. 모두들 버밍엄 시 당국이 가장 대적하기 어려운 상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버밍엄에서 그들의 뜻을 성취한다면, 전 남부를 통틀어 그 뜻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그 일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제 토론은 그 일에 대해 상세한 계획을 짜는 일로 이어졌다. SCLC는 이 계획을 “프로젝트 C"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C는 ‘대결(Confrontation)을 의미했다. 어떤 식으로 표현하든 간에 버밍엄에서의 운동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킹은 회의 마지막날 사람들을 모두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엄중히 경고했다. “나는 여기 모인 모두가 아주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 자신이 정말로 이 운동에 참가하기를 원하는지 판단해주기를 바랍니다. 내 판단으로는 오늘 여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는 이 운동이 끝날 때까지 살아 남지 못할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 점에 대해 생각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 발언은 SCLC의 투쟁계획 과정이 어떤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시위는 시간이 흐르자 확실한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4월 6일에는 소규모의 시위자들이 평화적인 행진을 한 후 체포되어 호송차에 실려 끌려갔다. 또 일련의 공공 도서관에서의 연좌 농성과 신중하게 선택한 백인 교회에서의 예배시위도 이어졌다. 그러다가 부활절 기간에 이르러 불매 운동의 여파가 뚜렷이 느껴지자, 버밍엄의 기업가들은 시 당국에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4월 10일에는 법정에서 주장을 펼칠 기회를 줄 때까지 모든 시위를 중단하라는 법원 명령서가 발부되었다.

킹은 그 명령서에 대한 대응 방침을 생각해보기 위해 조직원들을 다시 모았다. 개스턴모텔 30호실에서 몇 시간 동안 토론한 끝에 그들은 법원의 명령을 따르지 않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앨라배마 법정이 부정과 차별을 영속화하기 위해 사법 절차를 오용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 킹은 말했다. 성 금요일인 4월 12일 킹과 랄프 애버너디 그리고 수많은 시위자들은 버밍엄 다운타운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다섯 블록을 채 지나지 못해서 그들은 경찰국장 불 코너를 비롯한 수많은 경찰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현행 법원의 금지 명령을 어겨서 체포한다고 말하고는 곧바로 시위자들을 경찰 호송 차량에 태웠다. 버밍엄 감옥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킹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한 곳에 몰아넣었다. 킹은 어두운 독방에 매트리스도, 담요도, 베개도 없이 감금되었다. 그에게는 전화통화도 허락되지 않았으며, 그의 변호사도 킹을 만날 수 없었다.

킹이 투옥됨에 따라 버밍엄 시위는 거의 중단되다시피 했다. 사람들은 리더 없이 11일을 지냈고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행동을 취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가 4월 22일, 킹과 애버너디를 비롯한 시위자들은 재판을 받았고 모든 시위를 금지하는 법원명령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판사는 그들에게 5일간의 구류와 5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킹은 버밍엄에서의 민권운동을 쇄신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보석금을 지불하고 변호사들에게 항소 신청을 하도록 지시했다.

킹이 풀려난 뒤 처음으로 한 일은 운동의 참가자들을 모아 조직을 재구성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버밍엄 지역에 거주하며 운동에 기꺼이 참가할 만한 흑인 성인들 대부분이 이미 감금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행동팀들은 버밍엄에 있는 흑인 고등학교를 찾아가서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책자를 돌렸다.

고등학생들이 행진을 하기로 계획되어 있던 5월 2일, 한 고등학교의 교장이 학생들이 학교를 나서는 것을 막기 위해 교문을 폐쇄하였다. 그러나 수백 명의 청소년들이 담을 넘어 행진 출발점인 10번가 침례교회로 향했다.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어린 수백 명의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이들도 참가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이 어린 학생들은 세 무리로 나뉘어 앤드류 영과 제임스 베벨이 이끄는 행렬을 따라 출발했다.

이들은 다시 경찰청장 불 코너와 만났는데, 이번에는 단순히 경찰관들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경찰견, 소방용 호스, 장갑차까지 동원되었다. 첫 번째 무리의 학생들은 경찰 호송차에 끌려 올라가면서 ‘아무도 우릴 돌려보내지 못하네’ ‘우리는 끝내 이기리’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무리의 학생들에게는 소방수들이 소방용 호스로 학생들에게 물을 뿌렸는데, 수압이 너무나 세어서 나무껍질이 벗겨질 정도였다. 어른들과 고등학생들은 그 물을 맞고 건물에 부딪히거나 말 그대로 쓸려 내려갔다. 어린이들은 독일산 셰퍼드의 심한 공격을 받았다. 어른들 중에는 너무나 분노하여 벽돌과 병을 던지기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것은 비폭력에 대한 암묵적 약속을 어기는 행동이었다.

분노한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들은 곤봉을 쥐고 몰려와 때리고 차고, 닥치는 대로 아무렇게나 매질을 해댔다. 시위 군중들은 마침내 흩어져 서둘러 교회로 되돌아왔다. “저 검둥이들 도망가는 꼴 좀 봐!” 하고 불 코너가 외쳤다. 하지만 이 오만한 인종 차별주의자인 경찰청장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전국으로 방송되는 뉴스 카메라 앞에서 그는 무고한 희생자들에게까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렀던 것이다. 다음날 언론은 요란한 보도로 들끓었다. 어린이들을 물어뜯는 경찰견, 소방용 호스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고 쓰러지는 십대 청소년들, 어른들을 잔인하게 구타하는 경찰관들의 사진이 곳곳에 퍼져 나갔다.

이제 전국의 눈이 버밍엄에 집중되었다. 열렬한 시위의 와중에 3천명 이상이 체포되어서 더 이상 수용할 감옥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킹이 “민권운동 역사상 우리는 최초로 ‘감옥을 모두 채워버려라.’는 간디의 원칙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습니다.”고 말했을 정도다.

5월 5일에는 현대 비폭력 투쟁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순간을 기록할 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천여 명의 사람들이 기도 순례를 하러 버밍엄 감옥을 향해 걸어가다가 불 코너의 부하들을 만나 멈춰 섰다. 무전기를 들고 이 행사를 주관하고 있던 마틴 루터 킹은 선두에서 무리를 이끄는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이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려 하자 코너는 호스로 물을 뿌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소방수들은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했고, 개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빌어먹을!” 하고 코너가 고함을 질렀다. “물을 틀어!” 시위자들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소방수와 경찰관들의 대열이 갈라지면서 길이 트였다. “그건 버밍엄 운동 역사상 가장 꿈같은 순간이었습니다.” 킹은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 비폭력이 지난 힘과 긍지를 목격했습니다.”

전세계 언론의 관심은 버밍엄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코너의 부하들은 더 이상 맞서 싸울 의지를 상실했으며, 불매운동이 기업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감옥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마침내 버밍엄 행정당국은 흑인 리더들과 협상을 하기로 결정, 5월 10일, 마침내 ‘버밍엄 휴전 협정’이 발표되었다. 이 협정은 SCLC가 원하는 것을 거의 다 충족시켜 주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잇달아 전국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버밍엄 사태의 해결을 치하하고 협정의 내용을 위반하는 일은 허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함으로써 극적이고 용감하게 지지를 표했다.

버밍엄에서의 성공은 미국 민권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 마틴 루터 킹에게는 비폭력 직접행동의 방법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 준 계기가 되었다. 여름이 끝날 무렵 9백 곳이 넘는 도시에 비폭력 저항 운동의 불길이 번져나갔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워싱턴 DC에서 1963년 8월 28일에 일어난 시위였다.

그날 오후 1시경, 여러 연사들이 국가와 정부를 향해 자유와 민권을 요구하는 연설을 듣기 위해 2십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링컨 기념관과 워싱턴 기념탑 사이에 물려들었다. 이날 행한 킹의 연설이 바로 그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이었다. 워싱턴에서 역사적인 행진이 있던 날, 가장 중요한 점은 그날 모인 사람들 중 1/4이 백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백인들이 민권운동에 대규모로 참가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들은 전국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버밍엄에서 있었던 사건에 큰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그 해 여름, 케네디 대통령은 그때까지 창안된 어떤 법안보다도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민권 법안을 의회에 상정했다. 가을에는 남부의 모든 학교에서 인종 통합이 이루어졌고 어떠한 폭력의 조짐도 나타나지 않았다.

악한 자들은 음모를 꾸미고 선한 자들은 계획을 세웁니다. 악한 자들이 불을 지르고 폭탄을 던지면, 선한 자는 건설하고 일굽니다. - 마틴 루터 킹

제3부 민중과 함께 한 승리

마틴 루터 킹은 노르웨이에서 노벨 평화상을 받았지만, 미국 민권운동에서는 그의 리더십이 도전을 받고 있었다. SNCC(학생 비폭력 조정 위원회)의 성급한 젊은이들은 상황이 지나치게 완만하게 전개 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SCLC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최남부 지역까지 민권운동을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 또한 뉴욕에서는 말콤 X라는 분노에 불타는 젊은 종교 지도자가 더욱 투쟁적인 접근 방법을 역설하면서 ‘흑인 회교도단(The Black Muslims)'을 이끌고 있었다.

리더는 사람들을 이끌수 있는 유능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의 지도를 받음으로써 지도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간디가 “저기 나의 사람들이 간다. 나는 그들을 따라가야 한다. 내가 그들의 지도자이니까!”라고 했던 말은 오늘날에도 적용시킬 수 있는 훌륭한 명언이다.

킹은 민중과의 거리를 가능한 한 좁히려고 노력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행진, 특히 대중들과 함께 하는 행진을 즐겨 채택했는데 이는 킹 자체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킹이 군중과 행진할 때 사람들은 그가 군중의 일부이자 민중의 한 사람이며, 상아탑에 안주하는 군주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또한 행진은 동맹관계를 구축하고 끈끈한 대인관계를 발전시키려는 그의 전략을 촉진시켰다. 그리고 행진은 지도자로서의 실천과 업적의 상징이기도 했다.

킹은 상징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군중을 이해시키기 위해 상징을 이용하기도 했다. 특히 1966년 8월, 킹이 5개 지역 민권운동단체의 연합체인 CCCO(시카고 지역사회 단체 조정협의회)의 의장 알 래비 목사의 요청에 따라 시카고의 도시 빈민가의 비참한 상황개선을 위한 대중운동의 일환으로 6백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백인 중산층 거주 지역을 통과하여 마케트 공원으로 행진하기 전 군중을 향해 했던 그의 연설은 그러한 면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화염병을 들고 행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바라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무기도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 또한 우리가 바라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벽돌과 화염병을 들고 행진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그 모든 것보다 강력한 것을 가지고 행진할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의 힘을 가지고 행진할 것입니다. 우리는 용기라는 무기를 가지고 나설 것입니다. 우리는 의(義)라는 방패와 하나님의 온전한 갑옷을 입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행진할 것입니다.!”

킹은 수많은 난관을 뚫고 나간 결과 마침내 시카고 당국의 주요 인사들과의 정상합의에서 합의점을 이끌어냈으나 흑인사회에서는 이 ‘정상합의’를 수용하지 않았다. CORE(인종평등회의)와 SNCC의 조직원들은 킹이 너무 쉽게 협상하고, 너무 빨리 양보하고, 너무 많이 포기해버렸다고 비난했다. 어떤 이들은 ‘정상합의’는 킹이 배신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설상가상으로 200명의 두 조직원들이 앞장서서 행진을 강행했다. 행진 현장에는 2,000명 이상의 일리노이주 방위군이 투입되어 수천 명의 격앙된 백인들을 저지함으로써 대규모 폭력사태를 막았다.

킹은, 협상은 항상 사람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하며 때로는 최소한의 기대조차 저버릴 때가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타협과 협상을 통해서만 목적을 달성하고 구체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운동을 이끄는 처지에서는 타협과 협상이 필수적이었다.

예를 들어 ‘윈윈(Win-Win)'이라는 스티븐 코비의 전제에 명시되어 있듯이 “윈윈은 기법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총체적 철학”이다. 윈윈은 삶을 경쟁의 장이 아니라 협력의 장으로 보게 한다. 윈윈 개념은 ’항상 모든 사람을 염두에 두자.‘ 즉 ’한 사람의 성공은 다른 사람들의 희생이나 실패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는 생각에 바탕을 둔다.”라고 설명했다. 모든 사람들이 승리하도록 유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능숙한 타협 기술을 갖추는 것도 지도자로서의 성공 조건이다. 마틴 루터 킹은 민권운동 내내 온건과 타협의 중도노선을 견지했다. 협상 능력이야말로 마틴 루터 킹을 훌륭한 지도자로 만든 요인이었다. 그에게는 상반된 견해 사이의 공통분모를 인식하는 천부적 재능이 있었다.

제4부 미래를 약속하며

민권운동에 대해 킹이 가지고 있는 이상은, 자신이 ‘진정한 평등을 위한 투쟁’이라고 칭한 미국의 이상과 분명하고 절묘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언젠가는 자유를 얻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투쟁하고, 함께 감옥에 가고, 함께 자유를 지킬 수 있는 미래에 대한 믿음’이 포함되어 있었다.

킹이 자신의 이상을 가장 설득력 있게 밝힌 것은 1963년 8월 28일 워싱턴에서 가진 연설에서였다. 이날 킹은 후세에 가장 유명한 연설이라고 기억되는 연설을 통해 역사적인 순간의 정점을 장식했다. 그 유창하고도 영감으로 가득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은 바로 이날 행해진 것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빚을 받으러 이 나라의 수도에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나라의 건국자들은 헌법과 독립선언문 등의 장엄한 글을 쓰면서 모든 미국인들이 상속받아야 하는 약속어음에 서명을 했습니다. 이 어음은 모든 사람들, 그렇습니다. 백인뿐 아니라 흑인들도 삶의 절대적 권리와 행복 추구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분명 미국은 유색인종에 대해서는 이 약속어음 지불을 게을리 했습니다. 우리는 기회라고 하는 이 나라의 거대한 금고에 자금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결론 부분에 이르렀을 때, 킹은 군중의 열정적 반응에 힘을 얻어 자신도 모르게 연설을 계속해 나갔다. 킹은 미리 준비하지 않은, 순전히 마음과 영혼에서 나온 연설을 5분 동안 더 이어갔다.

나의 친구들인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우리의 오늘과 내일이 비록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메리칸 드림에 깊게 뿌리 박힌 꿈으로, 언젠가는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이념의 진정한 의미를 실현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진실을 자명한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언젠가 조지아의 붉은 언덕에서 옛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한 형제로 마주하리라는 꿈이 있습니다. 또 나에게는 나의 어린아이들이 언젠가는 피부색이 아닌 인격으로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리라는 꿈이 있습니다. 나는 오늘도 그 꿈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뉴햄프셔의 거대한 언덕 꼭대기에서 자유의 종이 울려 퍼지게 합시다. 뉴욕의 장엄한 산맥에서 자유의 종이 울려 퍼지게 합시다 ... 미시시피의 크고 작은 모든 언덕과 산골짜기에서도 자유의 종이 울려 퍼지게 합시다.

자유의 종이 울려 퍼질 때, 모든 마을과 모든 주와 도시에서 자유의 종이 울려 퍼질 때, 우리는 흑인과 백인, 유대교도와 기독교도, 가톨릭교도, 신교도 할 것 없이 신의 모든 자손들이 손을 맞잡고 “마침내 자유로우리라. 마침내 자유로우리라. 주여, 감사합니다. 마침내 자유를 얻었나이다.“ 라는 흑인 영가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런 말을 남겼다. ‘노예들에게 자유를 인정하는 것은, 자유인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킹은 ‘위기가 도래하면 자연스럽게 리더가 출현한다.’고 했다. 그 존재가 바로 마틴 루터 킹이었다. ‘그의 리더십’이 변화를 이끌었으며, 1986년에 국경일이 선포된 것도 바로 그의 영예 때문이었다. 왜? 왜 마틴 루터 킹이었을까? 그토록 많은 대중 속에서 왜 하필 그가 일어선 것일까? 무엇이 그를 다른 사람과는 다른 존재로 만들었는가? 왜 사람들은 그를 따랐던 것일까?

한 집회에서 마틴 루터 킹은 대중을 향해 말했다. “언젠가 내가 쓰러져 죽은 모습을 보더라도 여러분은 결코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위엄과 인내로 꿋꿋하게 저항하는 것, 그것이 내가 여러분에게 진정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킹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수백만 대중의 격정과 분노는 그 무엇으로도 통제할 수 없었다.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미국 전역의 130개 도시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폭동으로 2만 명 이상이 체포되었고, 최소 45명이 사형되었다. 그처럼 대규모 폭동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서는 스토클리 카마이클의 설명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어젯밤, 백인들은 킹 목사를 죽임으로써 우리에게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킹 목사는 우리와 같은 흑인이면서도 백인들을 향한 사랑과 동정과 자비를 깨우쳐주려고 노력한 분이었습니다.”

존슨 대통령은 킹의 장례식이 있던 4월 9일 화요일을 국가적 추모일로 정했다. 학교와 관공서가 문을 닫았고, 모든 관공서에서는 조기가 휘날렸다. 그리고 두 마리 노새가 끄는 낡은 짐마차에 실려 애틀랜타 거리를 지나가는 킹의 주검을 수십만의 애도 인파가 묵묵히 따랐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비행기로, 기차로, 버스로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의 입에서 자유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과거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 앞으로도 전혀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이 서로 손에 손을 붙들고 있었다. 미국이 탄생한 이후로 이처럼 비통한 순간이 있었을까?

킹의 사망 이후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의회에서는 민권법을 통과시켰고, 존슨 대통령은 즉각 법안에 서명했다. “마틴 루터 킹은 이 법을 만들기 위해 생명을 바쳤습니다.” 해리 벨라폰테와 스탠리 르비슨은 이런 글을 남겼다. ‘마틴 루터 킹은 대중을 위해 투신한지 불과 12년 만에, 지난 100년 동안 이룬 것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흑인의 지위를 향상시켰다.’

그의 외침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심장을 뛰게 한다.

“인류의 진보란 필연의 수레바퀴 위에서 저절로 굴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헌신적인 개인들의 쉼 없는 노력과 행동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묻는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발맞춰 행진할 것입니까? 아니면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의 메아리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까?“ ”우리가 갈 길이 너무 험난하다고 말하겠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앞길에는 열망과 희망, 헌신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선택은 바로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