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전쟁의 서막
최무선과 신숙주 그리고 왜구
by온기철 James Ohn1시간전
hp-jun. tistory.com 역사로 보는 정치; 최무선
조선은 바퀴 달린 차가 다닐 수 있는 육로가 없었다. 가장 넓은 길이 장정 셋이서 어깨를 붙이고 서면
꽉 차버리는 지경이었다. 요지음 등산로가 조선의 육로 였다고 생각하면 된다. 자연히 사람이 물건을 등에 매고 다녔다. 그래서 가마, 지게, 보부상 등 사람이 육로 운송을 직접 담당하는 나라가 되었다.
호남지방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거두어 들이는 세금은 모두 배로 운반했다. 세금을 곡식으로 납부 했기 때문에 열악한 육로로 사람이 두발로 걸어서 운반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었다. 고려 때에도 세금을 수로로 운반 했다. 조선이 열악한 육로를 가지고 있었다면 고려는 말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왜구는 세금 운송선을 노렸다. 해안 주민들을 약탈 하는 것만으로도 피해가 만만치 않은데 세금이 털리면 국고가 흔들 렸다.
왜구 토벌 덕분에 최영 장군과 이성계 라는 영웅을 만들어 냈지만 정작 왜구로 부터 나라를 구한 장 본인은 최무선이다. 최무선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배에 화포를 장치하여 왜적을 물리쳤다. 이순신이 바다에서 일본 수군을 섬멸 한 것도 최무선 덕분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북 아시아는 한국, 중국, 일본이 뒤 얽혀서 역사를 만들어 왔다. 임진전쟁도 일본이 조선으로 처들어 오고 명나라 원군이 조선에 들어와 진행되었다. 1380년 왜구가 금강하구로 전선 500척을 이끌고 처들어 왔다. 전라북도 군산과 충청남도 서천이 마주보는 지역이다. 군산근처 임피에는 세금으로 거두어 들인 곡식을 저장하는 진성창이 있었다. 이 지역을 진포라고 하였다. 최무선은 함포를 적제한 군함 100척을 동원하여 왜적 함대 500척을 섬멸 했다. 서천지역에서는 나세 장군이 왜적을 제압 했다. 왜구 또는 왜적 하는 말은 얼핏 해적을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일개 도둑에 불과한 집단이 어떻게 500척이라는 큰 해군을 동원하여 조직적인 공략을 할 수 있었을 까?
당시의 일본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두명의 천황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이를 남북조 시대(1336-1392)라고 한다. 북조는 교토에 남조는 요시노(오사카 동쪽)에 근거지를 두고 출발하지만 남조는 큐슈로 밀려난다. 1380년 대에는 규슈의 남조가 북조에게 크게 밀렸던 시기이다. 남조는 북조에게 땅을 빼앗겨서 부족한 곡식을 약탈로 매꾸려 하였다. 당시에는 곡식이 요즈음의 돈과 같았다. 말하자면 해적을 조직화 해서 조선의 곡식 창고를 털려고 시도 한 것이 진포 대첩이라고 할 수 있다. 1392년에 북조에 의해서 남조는 통합 되었다.
최무선은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화약과 화포를 계속 발전 시켰다. 이전에는 왜구가 육지로 들어오기를 기다려 전투를 벌리는 수 밖에 없었다. 최무선은 바다에서 왜구를 물리칠 수 있는 수전화공지책을 확립 했다.
고려는 우세한 화력으로 1389년 왜구의 가장 중요한 기지인 대마도를 정벌 했다.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군사정변을 일으킨 다음 해이다. 1392년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 했다. 그리고 화통도감을 철폐 했다. 최무선은 너무 실망하여 은둔의 생활을 시작 했다. 1395년 죽으면서 아들 최해산에게 화약수련지법이라는 책을 비밀리에 간직할 것을 부탁했다. 그는 준기사에서 무기개발에 매진 했다.
진포대첩이 있었던 1380년은 원명교체기에 속한다. 1368년 명나라가 원나라의 수도 대도를 함락하여 건국 했지만 원나라가 완전히 멸망한 것은 1388년이다. 일본 남조가 지원하는 왜구는 대만과 명나라 남해안 까지 진출 했다. 이들은 중국인들을 잡아서 노예로 팔아 먹기도 했다. 이와 같이 명나라는 건국 초기 부터 북에서는 원나라의 잔당과 남에서는 왜구와 싸우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명나라는 남조 일본천황을 일본국왕으로 책봉하지만 왜구의 출몰은 끝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원나라가 1388년에 완전히 소멸되자 명나라는 건국 초기에 왜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본정벌 계획을 세웠다. 상왕 태종과 세종은 만약 명이 일본정벌에 나서면 조선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세종대왕 시절에 왜구는 명나라에 많이 출몰 했고 조선 쪽은 조용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종과 세종은 1396년 명이 일본정벌을 시작하기 전에 대마도 정벌을 단행했다. 대마도 종주는 조선의 우세한 화력에 당할 수가 없어서 항복 했다. 대마도가 경상도에 속하고 조선에게 조공을 바치기로 했다. 그 댓가로 조선은 대마도에게 삼포를 개항 했다. 삼포는 부산포(동래), 내이포(진해), 염포(울산)이다. 이곳에 왜관을 설치하고 무역을 허락 했다. 이후 명나라 해안의 왜구 출몰이 잠잠해지고 명나라는 일본정벌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조선 세종1년 대마도 정벌 “왜구 소탕보다 명의 일 정벌 차단; 이규철: 서울 신문 2009년3월18일)
조은 스카이, 크레인; 숙주나물 신숙주
조선초기의 명신 신숙주는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성종 밑에서 요직을 맡아 공적을 쌓은 인물이다. 1443년(세종25년), 서장관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방문 했다. 그는 7개월 동안
일본(혼슈, 규슈, 이키도, 대마도)과 유구국을 여행하며 일본의 지리, 풍습, 제도, 국민성, 언어 등을 자세히 관찰 했다.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 들려 종주와 계해조약을 체결하여 왜구가 조선을 더 이상 범하지 못하도록 단속 했다. 그는 1471년(성종 2년) 일본을 다녀온지 28년만에 일본방문을 토대로 여행기 뿐만아니라 일본에 대한 안보와 외교 지침서 역활을 할 수 있는 “해동제국기”라는 책을 발간 했다.
신숙주는 서문에서 일본 사람들은 성격이 사납고 믿을 수가 없으니 항상 경계해야 하지만 무력으로 누르는 것보다는 외교로 다스려야 하며 전란을 막기위해서는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왕에게 충고 했다.
그는 또한 임종에서 성종에게 “일본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되 저들과의 화호(좋은 관계)만은 끊지 마십시오”
라고 당부 했다.(징비록)
성종은 신숙주의 유언대로 일본에 사신을 보냈으나 풍랑을 만나 대마도에 몸져 누워서 더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왕은 편지와 예물을 대마도 주에게 맡기고 오라고 명 했다. 마침 일본은 전국시대에 돌입하여
다이묘(영주)들이 패권을 놓고 서로 싸우는 전화에 휩싸였다. 1497년 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천하를 통일 하던 해인 1590년 까지 무려 백년동안 전쟁이 계속 었다. 이를 센고쿠 시대라고 한다.
일본사람들은 전화 때문에 먹고 살기가 힘들어 졌다. 자연히 왜구가 되어 약탈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왜구는 일본 본토, 조선, 명나라 해안에 출몰 했다. 무려 백년동안 조선 조정은 일본이라는 나라는 안중에
없었다. 그 안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었는 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일본은 그저 왜구 였다.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신숙주의 충고은 까많게 잊어버린지 오래 였다. 동인과 서인의 당파는
이제 시작 이었다. 국방은 둘째고 인성이 먼저 였다. 성리학이 그 꽃을 피우고 있었다.
토요도미는 천하를 통일하고 왜구를 근절 시켰다. 그리고 1592년 대륙정벌이라는 대망을 완성하기 위해서 조선을 침공 했다. 조선 조정은 이를 임진왜란이라고 했다. 그저 해적의 준동이라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도요토미는 이순신과 최무선의 화포가 기다리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