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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연꽃님:
본글의 문제점을 방문객님이 정확히 지적했기에 더 다룰 사항은 없지만...... 제가 각묵스님의 글을 소개한 의도를 말씀드리면, 본글에서는 세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1. 초기경에서 바른 선정을 네가지 선으로 정의했는가?
2. 각묵스님이 인용한 선 경에 부처님께서 네가지 선으로 표현되는 삼매를 모두 다 닦아 증득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는가?
3. 간화선은 사마타의 수행법인가? 이세가지에서 스님의 견해는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본 니까야에서 (4부니까야를 전부 읽지는 못했지만) 선정을 두가지 형태로 언급되어 있다고 기억됩니다. 네가지 선을 말씀하신후에 사성제로 끝을 맺는 형태와 9가지 선정을 모두 언급하는 형태입니다. 각묵스님이 본글에서 인용한 "선 경"도 9가지 선정이 모두 언급됩니다.
방문객님이 이미 언급했듯이, 청전도론에선 색계선정, 무색계선정, 멸진정으로 나뉘어져 기술되어 있습니다. 색계 4선은 땅의 까시나에서, 무색계 네가지 선정은 무색의 경지에서, 멸진정은 통찰지수행의 이익에서 다루어 집니다. 참고할 만한 사항은... 멸진정의 증득은 여덟가지 증득을 얻은 불환자와 번뇌 다한 자들이 도달할수 있지, 마른 위빳사나만 수행한 불환자와 아라한은 증득하지 못한다라고 되어 있으며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힘으로 증득된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초기경에는 선정이 9가지로 언급되어 있지 네가지로 정의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글에서 인용된 "선 경"은 전재성박사의 번역본을 보면 "선정에 의지함의 경"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각묵스님이 인용한 구절에 해당되는 부분은 전박사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 수행승은... 첫번째 선정에 든다. 그는 거기서 물질과 관련된것, 느낌과 관련된 것, 지각과 관련된 것, 형성과 관련된 것, 의식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을 무상하고 괴롭고...괴멸적인 것이고 텅 빈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는 이러한 것들에서 마음을 돌리며, 마음을 돌려서 불사의 세계로 이와 같이 '일체의 형성의 멈춤, 일체의 집착의 버림, 갈애의 부숨, 사라짐, 소멸, 열반, 이것이 적멸이고 이것이 최상이다'라고 마음을 모은다. 그는 그것에 입각하여 모든 번뇌의 부숨을 성취한다." ... 이구절은 제1선에서 7번째 선정인 무소유처까지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선정, 비상비비상처와 멸진정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 수행승들이여, 지각과 관련된 명상의 성취가 있는 한, 궁극적인 앎의 꿰뚫음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성취(비상비비상처정)와 지각과 느낌의 소멸(멸진정, 상수멸)의 두가지 세계에 관한 한, 수행승들이여, 이것들은 명상의 성취에 드는데 밝고 명상의 성취에서 나오는데 밝은 선정을 닦는 수행승들에 의해서, 그들이 명상의 성취에 들고 명상의 성취에서 나온 뒤에, 올바로 알려져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이와 같이 각묵스님이 인용한 "선정에 의지함의 경"은 올바른 선정에 대해 설하신 경이지 . 네가지 선으로 표현되는 삼매를 모두 다 닦아 증득할 필요가 없다고 설하는 경이 아닙니다.
스님이 인용한 구절은 제1선에서 7선까지 각각의 선정에 들어 어떻게 알아차림을 해야 함을 설명하고 있는 구절 입니다. 실참을 하지 않아 그 의미를 모른다고 하더래도, 인용한 앙굿따 9:36 "선정에 의지함의 경" 이 나오는 앞 뒤의 몇몇 경에서 보이는 기술된 형식만 보더래도 스님과 같은 이해는 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앙굿따는 숫자에 따라 경들이 나열되어 있어서 "9"이란 숫자에서 알수 있듯이, "9:36 선정에 의지함의 경" 주변에 소개되는 경에서 불교의 선정인 9차제정을 설하신 경들이 무척 많습니다. 이러한 경들에서는 윗글의 인용구절처럼 각각의 선정마다 반복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면, 9:38 바라문 세속철학자의 경에서는 "수행승이... 첫번째 선정에 듭니다. 바라문들이여, 이것을 두고 수행승이 세계의 끝에 도달하여 세계의 끝에서 지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이 사람도, 세계에 속해있지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나도 그에 대하여' 이 사람도 세계에 속해 있지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라고 말합니다" 이구절이 비상비비상처까지 반복해 나옵니다.
9:44 지혜로 해탈한 님의 경을 볼까요. " 수행승이... 첫번째 선정에 듭니다. 그는 지혜로 그것을 분명히 압니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경우 그 특정한 관점에서 그 분을 지혜로 해탈한 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구절은 9선정인 상수멸까지 반복해 나옵니다.
9:48 열반의 경에서는 "수행승이... 첫번째 선정에 듭니다. 지혜로써 보아, 그에게 모든 번뇌가 부서집니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경우 그 특정한 관점에서 그것을 열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구절이 상수멸까지 반복해서 나옵니다. 계속되는 경들에서 안온의 경, 불사의 경, 불사의 성취의 경,... 등에서 "열반"에 해당되는 구절에 경 제목에 해당되는 단어로 대치된 동일 구절이 상수멸까지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인용된 원래의 경 "선정에 의지함의 경"으로 돌아가서.. 방문객님이 댓글에 썼듯이 [이것은 …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빛바램(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는 구절은 다른 경전의 구조만 좀 신경써서 살펴도 제1선에서 7선까지 각각 선정에서 [그 특정한 관점에서] 말씀하셨다는 걸 쉽게 이해 할수 있습니다.
간화선은 사마타 기법인가를 살펴보면.... 저는 간화선법과 위빠샤나 모두 배웠습니다. 간화선법은 한국전통의 선맥을 잇고 계신 분께 배웠는데, 기초적인 자세, 호흡법, 화두를 받았습니다. 내쉬는 숨에서 화두를 들라고 배웠는데, 위빠사나의 호흡관찰과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들이쉬는 숨에서 일어남, 내쉬는 숨에서 사라짐이라 호흡관찰을 하라고 배웠죠. 내쉬는 숨에 화두를 드는 거나 내쉬는 숨에서 사라짐 하는 거나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간화선법이나 위빠샤나를 배우기 10년도 더 전에 혼자서 익히 방법이 더 편해서 제 방법을 고수했지만, 내쉬는 숨에 화두를 드는 거나 사념처의 호흡관찰하는거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내쉬는 숨 알아 차림해야지, 한편으론 화두를 들어야지 정신이 없지만, 집중력이 개발되면 호흡도 자연히 길어지고 특히 날숨과 들숨은 비례적으로 날숨이 길어지니 화두들기가 용이해집니다.
위빠사냐도 마찬가지로 날숨이 길어지면 사라짐, 사라짐..날숨이 길어진 만큼 계속 사라짐입니다. 다를바가 없다고봅니다. 위빠사냐 수행 경험담을 읽어 보면 호흡법(제가 혼자서 익힌 호흡법은 들숨과 날숨을 길이를 같게 하는 방법입니다)하면서 체험했던 거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건 사마타, 저건 위빠사냐 이렇게 딱 부러지게 구별되는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무색계 사마타 체험할 당시 오온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경전을 읽고 논서도 보면서 교학을 알게 되면서 그동안 경험했던 것들의 의미를 알게 됐습니다. 이렇듯이, 교학에 대한 바른 이해, 핵심은 연기법이겠죠. 마음이 어떻게 일어나 사라지는가 그리고 마음의 형성력은 어떠한가 등등, 교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체험의 바른 이해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배운바에 의하면, 한국전통의 간화선법은 분명히 지관 즉 사마타와 위빠사냐를 쌍수하는 불교의 수행법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현재의 한국선불교의 문제점은 선정지상주의가 아니라( '선정에 의지함의 경'에서 알수 있 듯이 바른 선정에 의지하여 모든 번뇌의 부숨을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증득을 우선하는 선불교에서는 당연히 선정지상주의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학을 등한시 하는데 있다고 봅니다....
방문객님:
간화선 내지 묵조선, 지관겸수 내지 정혜쌍수 등등...여러 형태의 분류가 있습니다. 여러 전승의 기법이 섞이다 보면, 또 다른 독특한 기법에 따르는 새로운 전승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니 실제 행자가 행하는 마음작용을 살펴, 어떠한 기법인지 파악해야 합니다.
각묵스님이 위의 본글에서 사용한, [... ...좌선을 통한... ... 개념(특히 화두라는 개념)에 집중하는 선정수행... ...]등의 표현은,,,좌선이라는 형식적 자세만 보면, 묵조선에 가깝습니다. 간화선은, 원래 자세에 구애를 받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 행자가 행하는 마음 작용은, 화두를 쥐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어요. 그러니 각묵스님은, 간화선을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화두도 여러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천편일률적이진 않습니다. 그런데 각묵스님이 선택한 "개념에 집중"이라는 표현에서, 간화선의 가장 원칙적 형태로서의 화두를 거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소위 간화선의 가장 원칙적 형태의 화두는, "산냐"를 잡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산냐를 바로 잡는 경우는 드물고, 초심자는 대부분 처음에 개념을 잡게 됩니다. 처음에는...화두를 잡기 위해, '주어진 화두' 즉 '개념'을 붙들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화두를 잡는 일" 그것 자체만으로도...쉬운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칙적인 간화선은...부단하게 끊어짐 없이 화두만 붙잡아야 합니다.
따라서 집중인 겁니다. 삼매와 사띠 중 삼매기법으로 보아야 합니다. 행자가 실제 행하는 마음 작용을 봐야 하거든요. '화두(개념이 아닌 산냐)'만 붙잡은 상태가 지속되면...제행무상에 따라, 그 상태가 스러지겠죠? 화두가 사라져 버립니다. 화두가 소멸하는 거죠. 여기까지는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갈림길이 생기는 것은..."그 소멸이, 행자에게 알려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적었듯...그 소멸이 행자에게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행자는 곧바로 초선에 상응하는 경계로 돌입해 버리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하지만 초선에 상응하는 경계로 돌입하는 순간, 붙잡았던 화두는 사라진 상태입니다. 이에는...예외가 없습니다.
다음 경계로 나아가려면, 초선에 상응하는 경계에서 또다시 화두를 잡아야 합니다.
몇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만약 재수가 무자게 좋아서, 소멸이 알려졌다면...소위 "견성"입니다. 이런 무자게 드문 일이 발생한 경우...전생에서부터 수행한 공덕이 어떻고 저떻고, 근기가 최상승이 어쩌니,등등 합니다. 소멸이 알려지지는 않았을지라도...'화두가 소멸한 사실'은, 초선에 상응하는 경계로 돌입한 행자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현실과는 또다른 세계라는 점도 알 수 있습니다. 소멸이 직접 알려지지는 않았기에, 다소 거칠기는 하지만...최소한 무상은, 어느 정도 선명하게 알려집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름 대로 확증할 수 있는 거죠.
나름 대로 확증하는 일에서 알 수 있듯...삼매 수행은, 기본적으로 사띠적 요소가 있습니다.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러한 사띠적 요소를 놓치지만 않으면, 당연히 위빠싸나라 이름할 과보도 따르게 됩니다. '증득'이라할 무엇이 긍정됩니다. 그런데 한국 선불교는, 그러한 사띠적 요소를 오히려 죽입니다. 행자로 하여금, 그러한 사띠적 요소를 망각하게 만듭니다. 언설을 넘어 있네 어쩌네 이러면서, 소리만 댑따 지르니...도로아미타불인 겁니다. 행자가 "바른 삼매"를 하려고 해도, 오히려 주변에서 "요가 삼매"만 하도록 강요하는 실정입니다. "견성"도 사실 이름일 뿐입니다. 소멸에서는, 행자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름일 밖에요.
그런데 견성만을 찾으려고 하니, 경계를 추구하는 "요가 삼매"를 하게 되는 거예요. 뭐..."요가 삼매"도, 비록 지혜의 배양에 있어 너무나 비효율적이지만,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무색계 선정을 넘어 선정의 끝까지만 가면, 소위 "견성"이라 이름할 법이 알려집니다. 그런데 끝까지 가면 뭐합니까? 경계만 추구하던 업력에 따라...소멸을 소멸로 알지 못하고..."참 나"등 운운하게 되는데 말이죠. 경계만 추구하던 업력에 휘둘려..."없음(소멸)"이 드러나도...인과의 이치에 따라, 오히려 "상견"을 가지기가 쉽거든요. 설상가상으로...선정의 끝까지 가지도 않아요. 무색계선정 혹은 심지어 그 아래 선정에서, 견성을 선언하거든요.
솔직히 한국 선불교에서..."언설을 넘어 있다"는 표현은, 자신의 무지를 감추는 수단에 지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교학과 체험 모두에서 그런 듯 합니다.
나이롱들은 나이롱이고, 진정으로 화두를 참구하는 행자의 이야기를 마저 적겠습니다. 소멸이 알려지지 않은 경우...사띠적 요소 이외에도,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첫번째 선정에 상응하는 경계에서, 다시 화두를 잡아서 선정의 끝까지 밀고 가는 방법이 있고...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소멸이 알려질 때까지 동일한 과정을 계속 반복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고 있는, 원형적인 간화선은...두번째 방법에 따릅니다. 주유소습격사건처럼...한놈만 팬다는 정신인 거죠...
하근기, 심지어 상근기도 아니고...곧 죽어도, 최상근기라는 겁니다. '최상근기 아니면 안한다'는, 무대뽀정신으로...밀어붙이는 겁니다. 하루 24시간, 1년 365일, 평생 심지어 일체생을 걸고...그냥 밀어붙이는 거죠. 이치로 따질 때, 가능성은 있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선불교의 기록에 따르면...그 방법이 그런 대로 통하는 듯 합니다. 많지는 않지만, 어쩌다 몇 명씩은 나오는 겁니다.
어떤 기법이든, 나름의 유용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법들은 나름의 특색이 있구요. 본질적으로..."어느 기법이 옳다 그르다"는 아닐 겁니다. 늘 주장하듯, 자신에게 보다 잘붙는 기법이 있을 뿐입니다. 다만 가능한한 이치는 아는게 좋죠...

첫댓글 닉네임을 너무 바꾸는 면이 있는 듯해서 지송해요.. 비단금, 지나가다, 홍련, 하얀연꽃 은 동일인입니다. 사연이 있는데요.. 제가 다음에 계정을 두개 갖고 있어요. 비단금, 지나가다, 홍련이 한 계정이고, 하얀연꽃이 하나의 계정입니다. 와이프 이름에 錦(비단금)자가 들어갑니다. 비단금은 한자 음훈이죠. 와이프 불명이 홍련화입니다. 불명을 따서 홍련이라 했습니다. '지나가다'는 닉네임은 객으로 잠깐 들렀다 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죠. 다른 계정을 하얀연꽃으로 한 것은 백련을 우리말로 적은 거구요.. 홍련, 하얀연꽃은 제가 불자임을 드러내고 싶을때 쓰는 닉입니다... 크.. 이렇게 심오한 의미가....
홍련님 닉 바꾸셨어도 금방 알아봤어요.
여기서도 자주 뵈었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 초기불교 이끌어 가시는 각묵스님께서... 교학으로도 밀리고, 실참으로 확증하셨는지 까지 의아한 상황이...초절정 고수 두분께 논파당하시니 참 거시기 하네요
이 자리에 각묵스님을 모신다면 또 어떤 견해가 펼져질지 흥미로워요
얼마전 이 게시판 324번글 꼬리말에서 적었듯, 홍련님이 저보다 교학을 더 잘 아시죠... 각묵스님도, 상좌부 교학은 당근 저보다 많이 아시구요...
"꿈조차 없는 깊은 잠", "전신마취 상태", "없음(멸진정:"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의 상태)"... 전신마취가 어떤 상태인지 몰라서요... 어쨌든 저로서는...연기의 이치를 스스로 확신하는데 있어 유용하면, 동등하다고 봅니다.
누차 말했듯...없음에서는, 행자도 없기 때문에...없음이라는 경계 자체와 관련하여서는, 체험자나 비체험자나 다를 바가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연기의 확증이라는 점을 제외한다면...단지 형성의 경향성을 떨치는 힘에서, 차이가 난다면 난단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