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재화는 행실을 그르치나니…” 조선조 ‘금수저’의 최후 김정탁 노장사상가 중앙일보 입력 2022.11.25 00:36
#울진 월송정과 무신 박원종: 조선에서 가장 팔자 좋은 삶을 산 사람은 누구일까. 세속적 기준에서 보면 성종과 연산군 시대를 거쳐 중종 시대를 살다간 박원종에 필적할만한 사람은 없다. 그는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부와 권력이 그의 곁에서 한 번도 떠나지 않은 그야말로 축복받은 삶을 누리고 갔다. 박원종은 성희안·유순정과 함께 중종반정을 일으킨 세 대장으로 유명하다. 반정 당시 무력을 책임졌기에 공신 중에서도 으뜸을 차지했는데 그때 나이 39살이었다. 그리고 세 대장 중에 가장 먼저 정승에 올라 우의정이 됐고, 곧이어 좌의정으로 승진했다. 42살에는 영의정에 올랐는데 병조판서도 겸했다. 이때 성희안은 좌의정, 유순정은 우의정이 돼서 반정 세 대장이 의정부를 모두 장악했다. #집안에 뇌물 가득, 기생용 별실까지 : 그래서 이들의 권력은 사실상 왕과 다름이 없었다. 중종도 이들의 눈치를 봐 조회가 끝나고 물러갈 때면 자리에서 일어나 이들이 문을 나간 후 자리에 앉았다. 왕의 이런 처신은 왕조 국가에서 상상할 수 없다. 또 이들의 집에는 뇌물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는데 박원종의 경우가 특히 심했다. 그는 연산군이 키운 흥청을 인계받아 이들을 위해 별실까지 지었다. 음식은 물론이고, 집도 신하의 도를 크게 넘어 궁중 못지않게 호화로웠다. 그래서 반정에 기대를 품은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았지만, 연산군을 무너뜨린 명분 때문에 누구도 문제 삼지 못했다.
물론 박원종보다 이른 나이에 영의정이 된 사람은 있다. 27살에 영의정이 된 귀성군 이준도 그중 하나다. 그는 세종의 넷째인 임영대군 아들로 이시애 난을 진압한 공로로 영의정에 올랐다. 그런 그도 한명회·신숙주 등 세조를 왕으로 만든 계유정난 공신들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처신했다. 그런데도 남이 장군의 옥사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돼 종친에 무인이라는 이유로 경상도 영해로 귀양 갔다가 10년 후 그곳에서 쓸쓸히 죽었다. 또 한강변 압구정의 주인공인 한명회도 박원종에 버금가는 영화를 누렸어도 계유정난 전까진 힘든 삶을 살았다. #성종 때부터 왕의 측근으로 군림 : 이에 비해 박원종은 완벽한 금수저 출신이다. 친할머니가 세종비 소헌왕후 여동생이고, 아버지는 이시애 난을 진압한 공신으로 병조판서를 지낸 무인이다. 그의 큰누이는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 부인이고, 다섯째 누이는 예종의 외아들인 제안대군 부인이고, 넷째 누이는 인수대비 조카 한익의 부인이다. 조선조에 궁중과 이처럼 긴밀히 연결된 인물은 흔치 않다. 한명회도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각각 시집 보내 두 왕의 장인이 됐어도 두 딸 모두 일찍 죽은 데다 후사마저 없어 장인으로서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박원종은 부친에 이어 무과에 급제하면서 곧바로 성종의 측근이 됐다. 25살의 젊은 나이에 정3품 당상관에 올라 지금의 국방부 차관보인 병조참지에 임명됐다. 그는 성종으로부터 어째서 이런 특별한 배려를 받았을까. 성종은 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왕이 됐기에 형에 대해 늘 미안해하면서 각별하게 신경을 썼다. 덕수궁이 옛날 월산대군 집터였던 것만 해도 성종의 이런 신경 씀에 대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박원종은 이런 월산대군과 처남 매부지간이었다. 그는 연산군이 즉위하고도 잘 나갔다. 연산군 특명으로 승정원에서 우승지·좌승지를 지내며 왕을 최측근에서 보좌했다. 35살에는 평성군에 봉해지고, 도총부 도총관을 겸직해 무인으로서 최고직에 올랐다. 갑자사화 이후에는 연산군 결정에 이견을 제시한 유일한 인물이었어도 파직당하지 않고 오히려 직급이 올랐다. 그후 강원도와 경기도 관찰사를 지내다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해직됐지만 곧이어 반정에 성공해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옹립했다. 그리고 중종 부인 신씨를 강제로 이혼시키고, 자신의 둘째 누이 딸을 중종의 새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했다. 박원종의 누이들이 왕가에 이렇게 많이 출가한 데는 미모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연산군이 자신의 큰어머니이자 박원종의 누이, 즉 월산대군 부인을 범한 게 반정을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박원종은 영의정에 임명되고 1년쯤 되어서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다. 그때 나이 43살이었으니 얼마나 아쉬움이 많았을까. 그에게 죽음이 이처럼 빨리 찾아온 건 부와 권력이 한꺼번에 몰려들어서 이를 주체하지 못해서가 아니었을까. #소나무 1만 그루가 있는 월송정 : 한 시대를 떵떵거리며 살았던 박원종도 지금은 그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최근 경북 울진에서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는 황천호씨(62)의 도움을 받아 월송정(越松亭)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했다. 월송은 ‘도선이 솔숲을 날아서 넘는다(飛仙越松)’에서 비롯된 이름인데, 이 정자는 박원종이 강원도 관찰사였을 때 세웠다. 지금은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과 함께 울진을 대표하는 정자다. 월송정이 자리한 지명이 평해(平海), 즉 평평한 바다인데 이 정자가 진해(鎭海), 즉 바다를 누르는 모습이어서 더욱 평평하게 느껴진다. 무신 출신이어도 문장을 즐기고 서화를 좋아했기에 여기를 지나치지 못하고서 정자를 지었다고 본다. 월송정이 유명해진 건 무성하게 자란 소나무 숲 때문이다. 이 숲에는 소나무가 만 그루 넘게 자란다. 여기에 어째서 이렇게 큰 소나무 단지가 자리할까. 소나무는 공기 중에 습도가 높아야 잘 자란다. 그래서 바닷가에는 방풍을 위해 조성한 소나무 숲이 늘 있게 마련이다. 나아가 이곳의 지역적 특성도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된 데 한몫을 담당한다. 동해의 바닷물로 생겨난 많은 습기가 태백산맥을 넘지 못하고 이곳에 머물러서다. 참고로 평해와 인접한 곳이 금강송 단지로 유명한 금강송면이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당대의 문장가 이산해는 월송정 숲을 두고 ‘월송정기’를 지었다. ‘푸른 덮개 흰 비늘의 소나무가 우뚝 치솟아 몇만 그루가 해안을 둘러싸는지 모르는데 그 빽빽함은 참빗과 같고 곧기는 먹줄과 같다’라며 숲의 울창함을 노래했다. ‘밤이 깊고 인적이 끊겨서 만뢰(萬籟·자연의 온갖 소리)가 잠들면 신선이 학을 타고 생황을 부는 듯한 소리가 공중에서 은은히 들린다’라며 숲의 신비로움을 읊었다. 또 월송정에 앉아 들리는 소리를 해풍이 불면 송뢰(松籟·소나무 소리)가 파도와 뒤섞여 만드는 소리라며 천상의 음악인 균천광악(勻天廣樂)에 비유했다. 월송정을 세운 박원종도 같은 느낌을 받았을 거다. #오색·오음·오미 탐닉 뒤에 남는 것 : 노자 『도덕경』은 “오색은 눈을 멀게 하고, 오음은 귀를 막히게 하고, 오미는 입을 마비시킨다. 또 얻기 어려운 재화는 행실을 그르친다”라고 말한다. 박원종도 반정 성공 후에는 부와 권력에 탐닉하다 오색·오음·오미에 빠져서 월송정에서의 경험과는 먼 삶을 살지 않았을까. 이어서 『도덕경』은 “성인은 배를 채울 뿐 눈요기에 힘쓰지 않는다. 고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저것’은 오색·오음·오미의 감각 활동이고, ‘이것’은 생명 활동이다. 박원종도 감각 활동에 정신이 팔려 행실을 그르치면서 생명 활동을 등한시하다 빨리 죽었다고 본다. 장자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천수를 다하는 게 최고의 축복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축복받은 삶이란 박원종처럼 부와 권력을 원 없이 누리는 게 아니라 오로지 하늘이 준 생명을 다하는 일이다. 그래서 삶을 뜀박질에 비유하면 부와 권력을 좇는 건 100m를 빨리 달리는 일이고, 천수를 다하는 건 마라톤을 완주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축복 된 삶은 100m를 빨리 달려서 좋은 기록을 세우는 게 아니라 천천히 달려도 완주하는 일이지 않겠는가. 장자는 “기름은 한 번 활활 타 없어지고, 불씨는 작아도 끊임없이 이어진다”라고 말한다. 부와 권력에 탐닉하다 한 번으로 활활 타 없어지는 기름 같은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불씨 같은 삶을 살 것인가. 어쩐지 월송정과 압구정도 박원종과 한명회에겐 불씨가 아니라 기름처럼 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