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 개강을 한지 한 주가 지났습니다. 신학교는 대면 강의를 실시하고 있으니,
학교에 출퇴근을 한 지 한 주가 지난 셈입니다.
하루하루 수업들을 준비하고 본당 예비자 교리와 자모 교리 등을 녹화하며
한주를 지내고 나니 솔직히 “망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한 학기를 어떻게 이렇게 살지? 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러한 걱정이 기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실 것이고
저는 성실하게 제 할 일에 임하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입니다.
사실 마리아의 탄생에 관하여 공식적인 기록은 전해지는 바가 없지만
로마교회에서는 7세기 무렵부터 신자들의 신앙을 토대로 이 날을 축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 축일과 복음을 연관시켜보면 다시 의아한 것이 사실입니다.
마리아의 탄생을 축하하는 오늘, 다소 뜬금없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이야기를
복음으로 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복음을 찬찬히 살펴보며
이것이 마리아의 탄생과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시점은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드러난 뒤입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혼인을 치르지 않았고 약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했음을 요셉이 알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에 비해 나이가 아주 많았고,
평소에 성실함과 의로움으로 마을에서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요셉에게 마리아의 잉태는 인간적으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직 혼인을 치르지 않았는데 내가 사랑하는 약 열여섯에 불과한 어린 소녀가
임신을 했다고 합니다.
나자렛이라는 작은 고을에서 이 소문이 분명 삽시간에 퍼져나가게 될 것이 쉽게 예상됩니다.
‘마을 사람들은 나를 비웃겠지’,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어린 마리아가 돌에 맞아 죽으면 어쩌지?’
온갖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결국 마리아의 잉태 사건은 요셉에게 있어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겪는 어려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며 천사를 만났다고 증언하지만
인간적으로 믿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평소 신심이 두터운 그녀이기에 믿어보려 하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혹시나...”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번 양보해 이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고 칩시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임으로 단순히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사람들에 의해 제기될 아기의 출생에 대한 험담,
마리아에 대한 소문들을 견디어 내야하는 심리적인 고통.
이 모든 것을 앞으로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평범한 가정을 원하는 자신에게
왜 하필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원망스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파혼을 남몰래 결정하자 천사가 나타나 요셉에게 이야기 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이에 요셉은 천사의 명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이 행동은 결코 단순한 응답이 아닙니다.
이는 결국 자신의 모든 두려움을 껴안고 세상을 위해 평범한 삶을 버리는 용기있는 행위이며,
나아가 충분히 예상되는 고통스러운 삶을 신앙으로 극복하는
굳건한 믿음의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요셉의 순명은 우리 인간 모두의 운명을 구원으로 이끌어줄 것이며,
묵묵한 남편의 역할 안에서 마리아가 성실히 하느님의 외아들을 키울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어 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 축일인 오늘,
요셉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얼마나 적합한 것인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마리아의 삶에 있어서 요셉은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이었으며
혼자 걸어갈 수 없는 길을 가능하게 하는 동반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삶은 마리아의 전 생애와 깊은 연관이 있으며
인류의 구원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살다보면, 우리의 삶에서도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힘에 부치는 일들이 주어지곤 합니다.
베우자도 자식들도 돌봐야 하고, 손주 손녀도 돌봐야 하고,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불가능한 역할을 부여받은 듯합니다.
가족관계가 아니라 할지라도 여러 인간관계 안에서 오해와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고
버거운 사회적 역할을 부여 받기도 합니다.
그러한 와중에 건강은 허락되지 않고 좋지 않은 일들은 계속해서 일어나는데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하니
참으로 난감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할 때에 우리가 명심할 것은 마리아에게 요셉이 있었고
아기 예수님께 마리아가 있었듯 결코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이 십자가로 고통 받는 순간에도
그 십자가를 함께 짊어질 수 있도록 시몬을 보내셨고
아들의 고통에 신음하는 마리아에게는 함께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는
예루살렘 여인들과 사도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십자가에는 언제나 이를 도와줄 하느님의 천사가 따라 붙습니다.
이를 기억하며 우리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도움의 손길을 확신하며
오늘 하루 나 자신 또한 하느님의 도구로써 누군가의 벗이 되길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저 역시 하루하루 강의에 나서며 주님의 도움이 어떠한 방식으로 저와 함께 하시는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잘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이러한 다짐을 하는 저에게 매우 큰 힘이 됩니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아멘.
첫댓글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부디, 건강에 유의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