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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해서인지 나는 남달리 도전 의식이 강하고 한 번 목표를 세우면 죽기 살기로 덤비는 성격이다. 국가대표를 은퇴한 후 곧 바로 지도자와 심판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경기규칙을 위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심판 강습을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국제심판으로 활동하는 선배들이 영어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국가대표 출신이라 체력과 경기Reading능력이 뛰어나 영어만 하면 꿈에 그리던 월드컵과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을 것을 확신해 미련 없이 자비로 어학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나는 미국에서 영어뿐 아니라 젊어서 고생은 사서한다는 말같이 지독한 고생을 하고 싶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정신력을 바탕으로 사회 밑바닥부터 철저하게 미국 사회를 배우고 싶었고, 영어는 못하지만 내가 무엇을 얼마나 해낼 수 있는지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나는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내슈빌 시내에 있는 다운타운에서 빌딩 청소를 했고, 수업이 끝난 후에는 스포츠용품 점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해 수업료, 생활비 등 미국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경비를 스스로 벌어 생활했다. 또 축구 시합이 열리는 주말에는 경기 심판을 자청해, 현지 심판들과 판정을 놓고 토론하는 등 많은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9개월 뒤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 축구사상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축구 국제심판 자격증을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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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나는 나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확인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아시아 여자 축구심판으로는 처음으로 월드컵, 올림픽 준결승, 3-4위전 라운드에 섰고, 많은 나라에 초청되어 말레이시아 남자 프로축구 경기 주심, 북중미 골든컵 심판, 일본 기린컵 주심 등을 배정받았다. 또한 세계 최초 남자 프로축구 전임심판, 세계 최초 남자 FIFA 매치 여자 국제심판 기록 등을 남겼다. 그러면서 나의 시야는 참으로 많이 넓어졌다.
선수로 외국을 다녀올 때와는 사뭇 달랐다. 운동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분야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스포츠 마케팅이나 체육 행정, 스포츠 외교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욕심을 내어 도전해 보고 싶은 용기도 생겼다. 월드컵과 올림픽을 다녀온 후 많은 기회가 생겼다. 어릴 때부터 꿈꿔 왔던 아디다스 TV 광고모델로 선발되어6개월간 공중파를 타고 국가에서 선발하는 각 분야 여성 리더로 선발되었다. 물론 내가 왜 사람들에게 관심이 되는지 정확히 알기에 유명세를 즐기기 보다는 책임감으로 하루에 6시간씩 국가대표선수 때보다 더 많은 운동량을 소화해 냈다.
많은 국제경기와 국내 남자 프로축구를 쉼 없이 오가며 심판에 입문할 때 가졌던 목표 이상을 이루니 더 이상 심판을 지속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국제경기에 쌓은 현장 경험을 행정으로 옮겨 제2의 임은주를 아시아에 키우고 싶었다. 문제는 은퇴하기에 내 나이가 어리고 세계 정상에 있다는 사실로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였다. 이미 다른 도전에 갈증을 느낀 상태라 각 신문사에 은퇴자료를 내고 과감히 은퇴를 선언하였다.
국내와 국제에서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끝까지 밀어붙여 세계 여자심판 최초로 대륙의 심판위원이 되었다. 모든 위원들이 각 나라 축구협회장이였고 나이도 나보다 20살 이상 많고 여자가 혼자라 홍일점이었다. 아시아 축구행정에 관심이 높아지며 자연히 FIFA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아시아 여성 최초로 FIFA 심판강사에 임명되었다. 나의 목표와 꿈을 향해 가는 길이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국내외 많은 시기와 고통스러운 시간도 있었지만 뒤돌아 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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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축구연맹의 정식 위원이 되어 1년에 네 번을 아시아 축구연맹이 있는 말레이시아에 출장을 갔다. 심판위원이 여성심판을 위한 일을 하는 자리가 아니라 남녀 모든 심판의 교육, 배정, 선발 등 함께 다뤄 거의 90% 이상이 남자 아젠다에 집중되었다. 여성으로 여성심판에게 영향을 주지 못함이 안타까워 회장에게 아시아 여성심판 발전 방안의 프리젠테이션을 제안하고 발표하였다.그 덕에 여성위원회까지 위원으로 참석하게 되었고, 이전에 여자경기에 남자들이 주관하던 모든 행정을 모두 여자로 바꾸는 발판을 아시아에 마련해 주었다.
행정과 현장을 오가기 위해 심판감독관, 강사, 리쿠르트 위원까지 현역 심판 때 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게 되었고 매번 국제경기와 대륙미팅 때 각 나라 축구협회장과 관련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되어 많은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지구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축구행정을 하며 다른 종목의 리더들을 만나고 싶어 IOC나OCA의 세미나에 자비로 참여를 시작하였다. 그 덕에 KOC 여성위원회 활동과 지금은 KOC 스포츠 영웅 선발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스포츠 국제외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근간 우리나라가 많은 국제 이벤트 유치를 성공하면서 부족한 국제외교 인력에 대한 염려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스포츠 국제 외교를 성장시키는데는 지름길이 없다. 현재 최고의 위치에 올라있는 경험 많은 사람들도 시작 단계에는 맨땅에 헤딩하듯 세계 방방곡곡을 본인이 자비를 들여 맨발로 뛰었다. 개인이 국제 스포츠 외교관으로 갖추어야 할 노력과Personality는 본인의 몫이기에 끊임없는 개인의 성장을 위한 노력과 인맥유지가 관건인 것 같다.
지금은 인터넷과 스마트 폰의 발달로 상시 언제든지 연락이 가능해 중요한 정보를 얻는데 개인적 신뢰가 바탕이 되면 국가에 큰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또 하나는 각 국을 다니다 보니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나에게 잘 맞는 옷이 아니라 국제에서 필요한 규격에 내 몸을 맞추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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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에서는 많은 일을 하며 승승장구했지만 정작 국내로 돌아와 축구와 체육 행정을 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먼 나라 이야기 같던 학연, 지연 거기다 내편, 네편으로 갈라진 사이에서 나는 이방인이었다. 특히 발전을 위한 토의와 논리가 익숙한 나에게 틀린 것을 시키며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은 너무나 거북스러웠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내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 좋은 조직을 만들 거라는 나의 생각은 매번 허공에 메아리 같았다. 나답게 미련 없이 국내의 모든 일에 손을 떼고 나의 성장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그 동안 밀어왔던 공부를 위해 일본에서 박사과정을 국가 장학금으로 마치고 을지대학교 여가 디자인과 교수로 돌아왔다. 또한 2006년 독일 월드컵을 끝으로 잠시 쉬었던 K리그 해설도 3년간 함께하며 잠시 외인으로 국제 일에도 집중하였다.
한 동안은 축구나 체육계의 모든 갈등이 향 후 후배들에게도 전개 될 것 같아 고통스러웠다. 발전을 위한 논쟁을 해도 시간이 부족한데 포지션에 가장 중요한 책임보다는 권위에 관심들이 너무 큰 것 같았다. 한국축구나 체육계에 많은 실망을 했던 순간들이었다. 늘 큰 문제 앞에 많은 고민을 해오며 더 많은 준비로 성장해온 과거를 보며 지금도 그 순간이 아닌가 한다. 얼마 전 프로축구 강원FC의 사장으로 추천되어 3개월간 진통 끝에 팀의 해체가 안타까워 스스로 포기한 적이 있다.
내 인생에 스스로 포기한 첫 번째 케이스다. 나이가 어리고 남성이 아니라는 선입견, 많은 차별들을 즐기며 도전해 왔는데 이번 케이스는 차라리 어려운 문제였다면 당연히 두려움 없이 맞서 이겨냈겠지만 팀이 단보가 되고 그 동안 가진 나의 철학과 상관없이 관심도 없는 정치적 이슈까지 끼어 들어 한발 뒤로 물러섰다. 그 일로 상처보다는 돈 주고도 배울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배웠다. 또한 향 후 사회의 크고 작은 문제들에 대해 비평보다는 해결사가 되자 내가 해온 이 많은 경험들을 세상에 젊은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자라는 생각했다.
그 일이 있고 한 주도 되지 않아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스포츠 스타들의 경험을 기부하는 포럼을 기획하여 청와대, 문체부, 스포츠토토, 이디야커피 등 스폰서를 잡아 미친 듯 매달려 3주 만에 900명 이상의 체육과 특기자 학생들, 교수들을 불러 강의, 집중토의, 질의응답들 3시간을 성황리에 끝냈다. 작년 겨울 포럼이 끝나고 온 몸이 탈진이 되어 또 다른 일에 매진 할 쯤 가족과 주변의 성화에 못 이겨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잠시 휴식을 가지고 있다.
기억해 보니 평생을 남들이 포기하고 외면한 일을 끝까지 승부를 보는 강한 열정과 많은 경험을 통해 두려움 없이 불가능도 가능하게 하는 강한 도전을 그 덕에 보너스로 얻은 것 같다. 휴가도 5년 만에 처음 나에게 주는 첫 휴식인 것 같다. 때마침 라스베이거스에서 CES전시회를 해 가보니 우리나라 기업들이 큰 부스를 잡고 새로운 상품을 선보이기 있었다. 평생을 국가대표로 살기를 꿈꾸는 나에게 어딜 가던 보이는 삼성의 브랜드는 가장 큰 자부심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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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면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 특별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달려온 것 같다. 누구나 인생은 해피엔딩 드라마다. 다만 인생이 한 순간이 아니라 길다 보니 중간에 많은 장애물을 스스로 넘으며 넘어지고,뒤쳐지고, 상처 입으며 가야 하지만 어떤 순간에도 중도에 하던 일을 포기 하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의 강한 믿음과 오기가 자신감과 성취를 만들어 줄 것이다.
누군가 인생에 3번의 기회가 온다고 했다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단 한 번의 기회도 오지 않는다. 반면 준비된 사람에게는 왜 3번만 기회가 오겠는가. 30번 300번의 끝없는 기회가 온다. 포기하지 않고 작은 목표라도 성취한 사람만이 다음 도전에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올림픽 금메달을 몇 번 획득한 후배가 한 번 금메달을 따기가 힘들지 일단 목표를 달성하면 두 번째 도전에서는 또 딸 수 있는 확신이 생긴다고 한다. 나의 첫 도전도 많은 실수와 어려움이 많았지만 한국 최초에서 아시아 그리고 세계최초의 기록을 세우며 더 강한 도전에 목말라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더 크고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 가치를 치러야 하기에 목표를 정하면 그 무게만큼 많은 준비가 필요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상은 여러분들이 꿈 꾼 만큼 여러분들의 것이다.
글 : 임은주 아시아축구연맹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