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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관에서 살던 시절 낙동강변에서. |
구상은 1942~1945년 「북선 매일신문」 기자를 시작으로, 1948~1950년 「연합신문」 문화부장, 1950~1953년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 주간, 1953~1957년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1961~1965년 「경향신문」 논설위원 겸 동경지국장으로 재직한 것까지 해서 근 20년을 시인으로서 언론계에 머물렀다.
구상은 언론인으로서 “붓에 순사(殉死)할 수 있는 한국의 언론인만이 대한족의 정기와 공론을 수호해 가는 것”이라며, 이 땅의 언론인들에게 직필을 생명으로 삼으라고 일갈한다.
구상은 신문사 자체가 적극적 비판을 가하는 것을 꺼릴 때에는 ‘고현잡화’(考現雜話)라는 개인의 서명 칼럼란을 설치하고 신랄한 비판을 가하곤 하였다. 이런 구상을 보고 해공 신익희 선생 등 재야 세력에서 정계 진출을 권유하기도 했지만 거절한다.
1954년에 쓴 ‘나의 반생기’란 글에서 구상은, 일본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1941년부터 승리일보 주간으로 종군한 1953년 8월까지의 시간을 돌아보며,
“오직 하나인 신부 형이 공산당에 납치되어 간 것과 홀어머니의 생사불명이 나의 용력을 유지시켰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군대 생활을 털어 버린다는 것은 정신적인 허기와 피로로부터 벗어나고 기진맥진해진 자기를 구출키 위함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고는 “이제 나는 이 칠죄(七罪)의 연못 속에서 죽지를 상하고 있다. 고향도 갈 길도 하나같이 안 보인다.
그러나 나는 운명도 보이지 않는 손에 매달려 있음을 믿고 또 의탁하고 있다”고 가톨릭 신자답게 주님의 섭리를 고백하며 자작시 ‘나그네’의 한 구절을 덧붙인다. “뜻한 곳 저절로 이를 양이면/ 그제사 숨 한 번 크게 쉬고 끝없는 쉼의 그늘로 들라.”
1953년, 대구의 영남일보사 편집국장으로 일하면서 폐결핵이 재발하여 건강상으로 도시 생활이 적합하지 않았던 구상은, 대구와 인접한 칠곡군 왜관읍 낙동강변에 삶 터를 마련하게 된다.
북한에서 남하한 월남민으로서 그의 본적지가 된 경북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 788번지이다.
왜관은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함경도 원산 교외 덕원에 있던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한국전쟁 중에 감금되어 있다가 국제적십자사의 노력으로 풀려나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그중 몇몇이 한국으로 와서 대구교구 소속지인 왜관에다 수도원을 설립한 것이다.
구상과 그의 아내는 친정 같은 수도원 이웃에다 이사하기로 결정하고, 초가 한 채가 있는 500평의 땅을 샀다. 그리고 수도원 건축 책임자인 명용인 수사의 지휘 감독으로 아내가 일할 ‘순심의원’을 짓고 사랑채를 지었다.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이 사랑채에, 선배인 설창수 시인이 ‘관수재’(觀水齋)라는 당호를 지어 주고, 은초 정명수 서예가가 물을 바라보며 마음을 씻는다는 ‘관수세심’(觀水洗心)이란 제의를 써 보내 주었다.
구상은 이곳에 정착하여 가족과 함께 지내며 시를 썼다. 1952년부터 1956년까지는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로 통합된 효성여자대학교에서 문리과 대학 부교수로 강의도 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다들 서울로 올라가던 1955년에, 구상도 서울대학교에 강사 자리를 얻었다.
그런데 북한에서 실종된 형인 구대준 신부의 친구 임화길 신부가 「대구매일신문」 사장을 맡으면서 부탁을 해왔다. 당시 대구매일은 교회가 이승만과 반목 상태에 있었고 재정난과 인사 분규로 내우외환을 겪고 있었다.
교회의 위촉을 받은 구상은 기자가 아닌 상임 고문으로 신문사 경영에 참여했는데, 주필인 최석채씨가 쓴, 장관 지방 순시에 과도한 환영 비판 사설이 문제가 되어 한국 신문사에 남을 대구매일 대낮 피습 사건을 겪게 된다.
구상은 이 사건을 겪고 사태 수습에 나서면서 민주 사회의 본령인 여론 정치의 확립이 얼마나 창망한가를 깨달았다.
구상은 한국에서 연작시를 의도적으로 시도한 효시의 사람일 것이라고 스스로 평한다.
구상은 세상을 떠나기 전 해인 2003년 늦가을, 연작시전집의 출간 ‘자서’에서, “시인으로서 존재의 무한한 다면성이나 복합성을 조명해 내려고,
한 제재를 가지고 응시를 거듭함으로써 실재에 도달하려 하였다”고 의도적으로 연작시를 쓴 이유를 밝히고 있다.
구상이 1967년에 「주간한국」에 연재한 ‘밭 일기’ 100편과 1970년대에 시작한 ‘그리스도 폴의 강’ 60여 편은 어릴 적 함경도 시골에서 산 체험도 있지만,
왜관의 수도원 농장들과 당시 집 앞에 하포라고 부르던 나루터가 있던 낙동강에서의 삶이 시의 소재나 제재가 되었다.
“아침 강에/ 안개가/ 자욱 끼어 있다.// 피안을 저어가듯/ 태백의 허공 속을/ 나룻배가 간다.// 기슭, 백양목 가지에/ 까치가 한 마리/ 요란을 떨며 날아다닌다.// 물밑의 모래가/ 여인네의 속살처럼/ 맑아온다.//
잔 고기떼들이/ 생래의 즐거움으로/ 노닌다.// 황금의 햇발이 부서지며/ 꿈결의 꽃밭을 이룬다.// 나도 이 속에선/ 밥 먹는 짐승이 아니다.”
이 시기 구상과 이중섭의 우정은 지금까지 회자된다. 구상은 일본 유학 시절 만나 인연을 맺었고 1946년 원산여자사범학교에서 함께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시집 「응향」의 표지화를 그린 화가 이중섭과 만나 1954년부터 1년 반을 함께 지낸다.
일본인 아내와 두 아들과 떨어져 부산에서 외로이 지내던 이중섭을 대구로 데려와 대구역 앞 경복여관에 머물게 하며 관수재가 있는 왜관 살림집에서도 함께 지낸다.
이중섭은 비운의 천재 화가라 불리듯이, 1955년 8월에 서울로 올라가 화가로 사는 게 부끄럽다며 음식을 먹기를 거부하며 정신과 증세를 보이다가 이듬해 9월 6일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홀로 세상을 떠난다.
병상에 있던 구상에게 천도복숭아를 그려 우정을 표시하기도 하고, ‘시인 구상의 가족’을 그려 선물하기도 한 대향 이중섭, 구상은 그의 유골이 든 상자를 이듬해 ‘펜 클럽’ 동경 대회에 갈 때 고이 안고 가서 일본인 부인에게 전한다.
그러나 왜관에서 구상의 삶이 목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승만 정권의 전횡에 대한 계속적인 저항으로 구상은 자유당 정권 말기인 1959년 봄, 마침내 옥고를 치르게 된다.
민권수호국민총연맹 문화부장을 맡아 염상섭 등과 정치 집회 연사로 나서기도 했던 구상은, 남대문시장에서 미제 진공관을 사서 일본을 통해 북한에 보내려 했다는 ‘이적 병기 북괴 밀송’이란 조작된 죄목으로 구속되었다.
이른바 ‘레이더 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으로 파리 가톨릭 대학원에 가려고 여권 수속까지 끝냈던 구상은, 재판에서 15년을 구형받았다.
조국을 모반한 치욕을 쓰고 단 하루라도 목숨을 구차히 이어가느니보다 죽음이 차라리 편안하다며 사형을 선고하라고 최후 진술을 했다. 같은 해 11월 구상은 무죄로 풀려나게 된다.
옥중 생활 속에서 구상은 주로 알베르 카뮈의 「희곡」을 비롯한 전후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나 문예사상가들의 작품이나 이론을 의식적으로 읽었는데, 그때 깨달은 것이 ‘인간 실존에 내재된 것은 불안이 아니라 수치’라는 명제였다.
면회를 왔던 승려 시인 고은에게 보낸 글에서도, “예서 지내온 삶을 돌이켜 보면 천지분간도 못 했다는 게 실토일까. 용케도 넘겨온 고비, 고비, 새삼 아슬한 생각도 들고 수치로 붉어도 지네”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수치심이야말로 인간 최초의 것이요, 본연의 것이요, 인간 구제의 가능성이요, 모든 규범의 시원”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고 출옥하여 빨치산 여자 대원 이야기를 소재로 희곡 ‘수치’를 완성한다.
옥고를 치르면서 구상은 독방에서 면벽 좌선 하듯 하며, 한 지성인이 양심과 양식을 가지고 한국 사회를 살아오기엔 얼마나 불필요한 곡경이 많았던가를 체험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고는 현실에서 일체 손을 떼고 오직 문학만을 하며 살겠다는 결심을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