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친 것과 망한 것
최광희 목사
시험을 망쳤어. 오 집에 가기 싫었어. 열 받아서 오락실에 들어갔어.
어머 이게 누구야. 저 대머리 아저씨. 내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 아빠.
한스밴드의 인기곡 “오락실”의 가사이다. 1998년, IMF 외환위기 시절에 등장한 3인조 그룹 한스밴드는 충청북도의 한 목사 가정의 3남매로 구성되었다. 그룹 이름을 보면 한 씨 집안 딸들일 것으로 짐작되지만 사실은 김 씨 가족이며 그룹명 한스밴드는 한나, 한별, 한샘 3남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스밴드가 노래한 것처럼 학창 시절에 시험을 망쳐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시험을 망치게 되면 자신에게도 짜증 나고 엄마의 잔소리도 예상되어 집에 가기도 싫어진다. 하지만 짜증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비관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실패는 다음에 더 열심히 하게 만드는 동기부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노래의 가사에서 보듯이 옛날 학생들은 시험을 잘 보지 못한 것을 ‘망쳤다’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학생들의 입에서 시험을 ‘망쳤다’라는 말 대신에 ‘망했다’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봐도 “이번 시험은 망했다.”라는 표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시험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시험 한 번 망쳤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인생이 끝장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왜 망친 것을 ‘망했다’라고 표현할까?
요즘 학생들이 망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시험만이 아니다. 교복도 줄여서 입고 언어도 줄여서 사용하는 요즘 청소년들의 용어 가운데 ‘이생망’이라는 말이 있다. “이번 생애는 망했다.”라는 말의 줄임말이다. 청소년은 희망을 품고 노력하면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존재이다. 도공(陶工)의 손에 들린 진흙 덩이나 파티시에(Pâtissier)의 손에 들린 반죽처럼 어떤 작품이 나올지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 청소년이다. 이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청소년들이 ‘이생망’이라고 말하는 대신 용기를 내게 할 수는 없을까?
한 사람이 자존감이 풍부한 성인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부모로부터 충분한 지원과 적절히 통제받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마치 연날리기에서 실을 적절히 풀고 감는 것과 비슷하다. 실을 너무 풀어주면 연이 바람을 타지 못해서 떨어지고 실을 너무 감으면 연이 높이 날지 못한다. 적절한 실 조절로 연을 하늘 높이 띄우듯이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으면서 자존감이 강해지고 적절한 통제와 훈육(訓育)을 통해 인내심이 강해질 것이다.
장난이 아닌 걸. 또 최고기록을 깼어. 처음이란 아빠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용돈을 주셨어. 단 조건이 붙었어. 엄마에게 말하지 말랬어.
‘오락실’ 노래의 주인공은 시험은 망쳤어도 인생이 망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빠가 있기 때문이다. 그 집 아빠도 마찬가지이다. 회사마다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한창이던 IMF 외환위기 시절에 아빠는 직장에서 해고된 사실을 숨긴 채 대낮에 오락실을 전전(轉轉)하고 있지만 망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 아빠의 비밀을 지켜줄 딸이 있기 때문이다.
오락실에서 마주친 아빠와 딸이 서로 비밀을 지켜주기로 약속하는 다정한 모습은 슬프면서도 희망이 느껴진다. 시험을 망친 딸에게는 다음 시험은 꼭 잘 보겠다는 다짐이 있고 오락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아빠는 반드시 새로운 직장을 구하겠다는 결심이 있다. 그래서 좋은 일이 있을 때까지 엄마에게는 비밀로 하는 것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추진하던 일을 망치는 수가 있다. 하지만 중요한 일 한번 망쳤다고 ‘이생망’은 아니다. 시험을 망치고, 프로젝터를 망치고, 심지어 직장생활을 망쳤을 때 PC방 오락실에 들어가 스트레스를 풀든지, 바다를 찾아가 쿵따리 샤바라 빠빠빠 소리를 지르든지, 산꼭대기에 올라 ‘야호’를 외친 후에 다시 길을 찾는다면 여태껏 보지 못한 새로운 길이 보일 것이다. 기억하자. 망친 것은 망한 것이 아니다.
(글쓴이: 최광희/ 신학박사, 행복한교회 목사, 17개광역시도악법대응본부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