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모얼랜드의 지상 작전 개념에 따라 미군 및 연합군을 투입하여 1965년 말까지 ‘기울어져 가는 전세’를 바로잡는 제1단계는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1966년도부터 제2단계로 ‘적을 분쇄’시키기 위하여 남베트남 영내 적의 성역이라고 일컬어지는 작전기지, 확인된 적 부대에 대하여 우세한 기동력과 화력으로 탐색 및 격파 작전을 실시하였다. 1966년 한 해 동안 미군 전사 5,047명에 비하여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55,000명이 사살되었고 2만여 명이 귀순하였다.
1966년과 1967년도의 발 묶인 전쟁 양상에서는 어떤 전략적인 결정이 나올 수 없었다. 있다면 전술적인 결정이 있을 뿐이다. 미군 병력규모를 얼마로 하며 북폭 표적의 범위와 강도를 결정하는 문제들이다. 전과 대 사상자 비율이 지상군 지휘관들의 관심사이며 평정지역이 얼마나 증가되었느냐가 중대한 이슈였다.
베트콩들의 침투가 용이하고 그들 활동의 본거지가 되는 농촌지역을 베트콩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해주고 각종 지원으로 농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정부를 신뢰하게 하여 농민의 지지를 획득하도록 하는 평정계획은 남베트남이 독립하면서부터 명칭을 바꾸어 가면서 시행되어 왔다.
민사활동(1955~1956)을 필두로 하여 농촌개발 센타(1957~1959), 농촌 도시화 계획(1959~1961), 전략촌 계획(1961~1963), 신생활촌 계획(1964~1965), 농촌개발 계획(1965~1966), 혁신 개발계획(1966~1967: 남베트남 정부에 혁신개발부가 신설됨) 등 실패하면 명칭을 바꾸어 평정계획은 계속 시행은 되어 왔었다.
이 평정계획은 남베트남 정부 내에서도 손발이 맞지 않았고 실적 위주로 무리한 계획의 추진, 계획된 자금과 물자 분배에 부정의 개입, 베트콩들의 끈질긴 방해활동, 미국의 각 기관별 개별 활동, 군과 민간기관과의 보조 불일치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어 계획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답보상태에 있었다.
평정계획의 추진이 부진하자 존슨 미 대통령은 1966년 3월 로버트 코머(Robert W. Komer)를 베트남전의 비군사분야 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하고 남베트남의 평정계획을 개선시키도록 하였다. 남베트남을 수차례 방문하면서 평정계획을 통제, 조정하는 동안 코머는 민간기관 간의 경쟁적인 활동을 통합함과 동시에 군, 민간 기관의 활동을 통합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이를 존슨 대통령에게 건의하였다.

로버트 코머
건의를 받은 존슨은 1967년 5월 코머가 군, 민의 평정계획을 통합하여 중앙통제하도록 주베트남 미군 사령부에 민사작전 및 혁신개발지원본부(CORDS)를 설치하도록 하여 코머를 평정계획 담당 MACV 부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코머는 육군 소장을 군사보좌관으로 하여 모든 민간기관의 활동과 고문관들의 활동을 통합하여 평정계획이 효율적으로 수행되도록 하였다.
평정계획의 진도를 파악하기 위하여 컴퓨터를 이용한 촌락 평가제도가 시행되었다. 평정계획 수행의 진도를 파악할 수 있는 각종 자료를 공정성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남베트남 행정관청과 미 고문관이 월별 진도를 별도로 보고토록 하여 이 자료를 컴퓨터에 입력시켜 평가하였다.
1964년 말부터 1967년 6월까지 평정지역에 거주하는 인구가 420만(당시 남베트남 인구는 1,720만명)이 증가하였고, 전체 인구 비율로는 1964년 말 42%에서 1967년 6월 55%로 증가하였다. 이제 평정계획의 추진도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고 판단하였다.
평정계획을 계속 확대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였다. 전쟁에서 병력은 다다익선이었다. 그래서 전사가(戰史家)들은 그 어떤 장군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충분한 병력을 가지고 전투를 한 전례는 아마 없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웨스트모얼랜드의 추가병력 요청은 항상 최소 필수병력 수준이었다.
1967년 4월 27일 웨스트모얼랜드는 워싱턴에서 현재의 주베트남 미군병력 47만 명으로 추가 증원이 없어도 현재의 소모전 양상에서 패하지는 않으나 승리하는데는 5년이 소요될 것이며, 10만 명이 증원이 되면 3년 내에, 10만 명이 더 증원이 되면 1969년도 중반이면 승리가 가능하다고 발표하였다.
같은 날 웨스트모얼랜드는 상, 하원 의원들에게 귀국보고 연설을 하였다. 그는 의식적으로 승리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미국의 목표가 북베트남을 패배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남베트남에 있는 연합군은 이길 것(prevail)이라고 보고하였다.
1967년 11월 21일 웨스트모얼랜드는 기자회견장에서 연설을 하였다. 당시 미국에서는 반전 데모가 열을 올리기 시작하였고 언론의 보도도 남베트남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현재의 베트남전황에 대해 최상의 낙관론을 폈다. 적은 최근 승리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러한 전술적 패배와 연관하여 미국에 정치적 압력으로 미국이 타올을 던지도록(권투경기와 같이) 한다는 환상을 갖고 있다고 말하였다. 또한 베트남에서는 계속 적을 격멸하는 3단계 작전으로 전환되었고 남베트남군을 증강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으며 남베트남군이 증강되면 미군을 단계적으로 감축하는 제4단계가 있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1967년도 말의 전황은 군사적인 상황이나 평정계획 수행 면에서도 괄목할만한 진전이 있었다. 적어도 수량적으로 나타나는 각종 통계가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북베트남의 끈질긴 전쟁의지였다. 그들은 오히려 미국 국민들의 의지를 소모시키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