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가슴에 엎드린 인연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자신만의 모습이나 향기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소심한 존재들은 숨어서 그들만의 향기를 가진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들은 나의 어린 시절부터, 은밀한 나의 신체의 한 곳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 왔다. 꼭 필요할 순간에는 어항 속 생명의 힘을 공급하던 공기 방울이 되었다. 특유의 존재감을 알리며 맑게 빛났다가, 순간 사라지곤 했다. 내 손끝의 기억에서 건져낸 차고 단단한 존재, 똑딱단추. 그와의 첫 만남은 한 발짝 딛고 기우뚱하다가 내딛는 첫돌바기의 서툰 발걸음이었다.
만남의 소리는 아주 작지만 강했다. ‘똑’, 한숨 돌리고 머뭇거리는 '딱'으로 다가왔다. 짝을 찾았다는 신호였다. 가슴 조이던 첫사랑을 재회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똑’ ‘딱’ 할 때의 채우고 푸는 소리는 경쾌한 이중주였다. 실내악의 향연처럼 소리가 주는 감탄과 감동이 있었다. 그로 인하여 그들은 자주 여인네들의 놀잇감이 되기도 했다. 수줍은 연인의 가슴에 엎드린 첫사랑의 설렘이 되었다가, 때로는 감춰진 비밀에 매달려 있던 초조한 장난감이었다. 비밀을 감추듯 가슴 여미는 순간을 함께 한 친구였다. 그러나 급박하게 헤어질 때 나는 소리는 짝사랑에 사로잡힌 소녀의 심박 소리였다. 이별의 불안을 거부하는 몸짓이었다.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이 숨어 있기도 했다. 채워진 긴장보다 혼자만의 편안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작은 존재는 단추라는 이름보다 똑딱이로 더 많이 불렸다. 어쩌면 똑딱이라는 글자 자체로 모음조화의 규칙을 따르는 것을 보면 한 단어의 '형태소' 조차도 짝의 필요성을 모색함이었을까. 암수 한 쌍은 음과 양, '머스마'와 '가시내', 씨실과 날실을 대표했다. 그들이 알려 준세상의 이치는 조화와 합일이었다. 어느 구석에서든지 말없이 각자의 몫을 하도록 조물주에게 부여받은 역할이었다.
똑딱단추는 한 쌍으로 있어야만 하는 존재다. 어느 한쪽이 없으면 의미를 잃는다. 만날 때부터 찰떡궁합이어야 했다. 짝꿍으로 인하여 완벽한 존재감을 증명한다. 혼자서는 서로를 밀어낼 수조차 없다. 반드시 타인에 의해서만 만났다 헤어지는 이타적인 운명을 가졌다. 함께 살아가는 것보다 헤어져 있는 시간이 더 많다. 마치 기다림을 기본으로 깔고 사는 우리네 인생처럼.
여학생 시절, 그들은 교복의 앞가리개와 함께 보냈다. 제일 위쪽의 옷깃 뒤에 숨어서 점자처럼 작게 도드라져 있었다. 수줍은 사춘기 소녀의 성장의 심쿵함을 제일 가깝게 누리던 특권이었다. 마음자리를 먼저 느낀 은밀한 존재였다. 찜기 뚜껑을 열면 뜨거운 김 속 찐빵같이 팽팽히 부풀어 오른 젖무덤의 비밀을 눈치챈 목격자였다. 일기장의 비밀이 하나씩 늘어 갈수록 똑딱이의 숨결 소리도 더 조심스러워졌다. 흔들리는 사춘기 주인을 수호하는 소임을 맡은 강한 존재로 변해갔다. 똑딱이는 아침 이슬같은 냉혹한 소녀들의 삶을 이어준 끈이었다.
초가을 억새의 부르짖음 같던 숨소리를 듣던 그 순간부터 똑딱이의 삶도 시작되었다. 그 후 흔들림 없이 주로 여성의 상의에서 자존심을 지켜 왔다. 고고한 자태로 은둔의 공간에 존재하도록 허락한 무언의 약속이었을까. 그 헌신이 화려한 단추들보다 먼저, 그리고 깊게, 뭇 여성들의 체취와 비밀을 탐닉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소녀가 성장할수록 그들은 점점 더 작아지고 투명해졌다. 혹시라도 주인의 실수로 노출되었을 때 자신을 숨긴 채 소임을 다하려는 배려이기도 했다. 흰색에 더하여 투명하게 희석되는 안개꽃처럼, 여린 모습으로 네 군데의 가느다란 실에 매달려 있었다. 잘 차려진 숙녀의 정장 속에서, 여민 깃 안에 숨어서 떨리는 청춘을 살았다. 무엇이 그들을 더욱 작아지게 만든 것인지 고민할 틈도 없이, 소녀와 함께 나이가 들어갔다.
다음 만남은 엄마의 수유 저고리였다. 다소 편안한 마음으로 가슴 위에 나직이 엎드려 쉴 수 있을 정도의 세월이 흘렀다. 더 씩씩해진 볼록한 젖가슴에 기댈 줄도 알았다. 들숨과 날숨에 함께 일렁이던 순간이었다. 이 시절에는 짝꿍끼리도 함께 하는 시간보다 헤어져 있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볼록한 가슴도 이미 아기에게 빼앗긴 지는 오래였다.
다소곳함을 잊는 순간조차도 ‘엄마’의 떨리는 가슴을 감춰주었다. 더욱 가깝게 들리던 아기 숨소리를 자장가 삼았다. 아기를 어르던 엄마의 노래를 들으며 잠들기도 했다. 엄마의 가슴은 첫사랑의 존재를 지켜주던 신전이었다. 똑딱이는 그 신전 속의 모성을 지킨 후원자였다. 존재감을 숨긴 채, 평생을 통한 헌신이었다.
지붕이 뻥 뚫려있는 상가 모퉁이의 허름한 수선 가게는 유리문 경계도 없다. 등이 굽은 노인이 벌써 30여 년이 넘은 분신 같은 재봉틀을 굴리고 있다. 숨을 쉴 때마다 그르렁거리는 노인의 기관지처럼 재봉틀의 바퀴도 거칠게 덜덜거렸다. 노인의 굵은 주름이 얽힌 얼굴에는 나이를 말해주는 검버섯만이 빼곡히 덮여 있었다. 서랍 속에서도 가끔 똑딱이들도 노인만큼 검버섯 가득 피운 몸뚱어리를 내밀었다. 그래도 언제든 다시 그 헌신의 맥을 이어갈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다는 듯이.
개울물처럼 세월이 흘렀다. 시간의 흐름만큼 똑딱이의 모양새와 향기도 지쳐갔다. 경쾌함과 포근함의 기억 자리를 지닌 채, 이제는 ‘찍찍이’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더 간편하고 빠르며, 유익한 방법에 익숙해졌다. 진화와 발명, 혁신의 이름으로, 예전에 중요했던 것들이 그 설 자리를 잃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뒷방 늙은이 취급에 억울한 것처럼.
나도 은근히 구석 자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똑딱이처럼 있는 듯 없는 듯 드러나지 않는 삶에 편안함을 느낀다. 그래도 주어진 일만큼은 어떤 상황에서든 야무지게 살고 싶었다. 나 또한 똑딱이 같은 삶을 원한 것은 아닐까? 드러나지 않는 작은 존재이지만, 그 역할에서나 존재감은 뚜렷했던 일생 말이다. 그들처럼 영광의 한 획을 찍었던 나의 일대기도 나날이 쇠퇴해 가고 있다.
우리네 인생도 인연이라는 섭리로 만남과 이별이 반복된다. 억지의 만남으로 선택된, 서로 맞지 않는 똑딱이가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죽음으로 증명되기도 하는 인연이라는 만남이 그 존재의 가치를 영원히 이어준다고 믿기도 한다.
사람의 마음도 적당하게 채우고 비울 줄 알아야 하나 보다. 닫히고 열 줄도 알아야 한다. 똑딱이는 채움과 비움, 닫힘과 염, 만남과 이별의 진리를 욕심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살아온 나날이 기억의 방을 차지하면서 점점 욕심의 자리는 비워진다. 오만함도 점점 작아져 골방으로 보내진다. 자신의 가치에 대해 겸손함을 보여준 똑딱이처럼.
첫댓글 똑딱이 에 묻어나는 서로의 연민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전개되어 있음을 봅니다. 멋진글 감사합니다.
개성이 강한 글, 촘촘한 묘사가 치열합니다. 거듭해서 읽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