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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스가랴-05 스가랴가 본 메시야(스가랴 9장 9-10절)
성경말씀은 스가랴서 9장 9절에서 10절까지 봉독합니다.
[스가랴 9장]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이 스가랴서 부분이 다른 부분 다른 성경보다 번역들이 그렇게 편안하게 쉽게 되지 않았다는 말씀 드렸죠?
이것은 두단계 세단계가 되는데, 첫째는 영어로 번역하는 사람이 일차적으로 번역을 했는데, 그것도 그렇게 개운하지 않고,
또 우리 개역성경은 중국어 성경도 참고를 했는데, 중국어 성경도 역시 번역이 개운하지 않습니다.
번역하는 사람들 세계에서 잘못하면 ‘번역이 반역이 된다.’ 그런 말이 있어요.
번역이 어렵습니다.
그리고 난해하거나 상황 정황을 알았을 때와 그것을 모르고 번역할 때는 상당히 차이가 납니다.
스가랴서 뿐 아니라 요한계시록 같은 것도 어떻든 책 자체가 좀 어려운 책이 있어요.
그런 경우는 번역도 보면 그 내용을 정황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번역이 잘못된, 누가 봐도 잘못된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간과 다음 시간에 걸쳐서 스가랴 선지자가 일하던 그 시대적 배경을 좀 알아야 어느 정도 그 배경과 분위기를 알아야 번역도 제대로 할 수 있고, 번역이 잘못되었어도 이것은 번역이 매끄럽지 않구나 하는 것이 보이는데 쉽지 않습니다.
온 성도가 다 있을 때 이것을 이야기 해야 되는데, 수요일에 사람이 많이 안 나와서..
주일날 나눌 것인가 하다가 이 부분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지금 앞에 것은 조금 쉬웠습니다.
지금 9장부터 14장까지가 조금 어려워요.
그래서 그 시대적 배경을 다음 시간에 주일에 한번 더 되풀이 할셈 치고 소개하고 싶어요.
스가랴가 일할 당시에 처한 사회적 분위기, 정황이라는 것은,
첫째 현실이 너무 암담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현재 상황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죠?
돌아온지 1년 2개월 되는 즈음에 기공식을 했는데, 기공식 할 때까지 한 1년 동안에 자기들이 70년 동안 황무지가 되었던 폐허에 와서 자신들의 삶의 터전, 이를테면 방한칸 부엌 한칸이라도 마련해야 될 것 아녜요?
그것도 쉽지 않았겠죠?
집을 안 지어보니까 집 짓는게 얼마나 힘드는지 모르는 거야.
이 사람들이..
지금처럼 건재상 있고 돈 있으면 다 되는 때가 아니고, 거기 건재상이 어디 있겠어요?
70년만에 황무지가 되어있던 곳에 왔는데, 건재상이 어디 있으며 석수 목수가 어디 있겠어요? 지금 모두가 사람들 마다 집을 지어야 되는데, 그러면 한 가구당 목수가 있어야 되는데, 그게 됩니까?
석수 목수가.. 제가 볼 때 천명에 하나도 없거든..
그러니까 목수도 석수도 아닌 사람이 제멋대로 우물딱 쭈물딱 해서 집을 지어도 그게 집이냔 말이죠. 마굿난이나 움막이나 이렇게 해서 비나 이슬을 피할 정도, 그렇게 하는데 벌써 1년 걸렸어요.
그러면 건축한답시고 노력동원하는데 먹고 살아야 되는데, 뭘 먹고 살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쉽지 않잖아요.
먹고 사는 문제도 있고 성전공사를 하는데, 거기 노력동원도 가야 될텐데 그게 쉬웠겠습니까?
그런데 요세푸스의 기록으로 하면 그게 어느 정도 진행되다가 힘들자 공사가 중단된게 약 9년 된다고 기록되고 있거든요.
그러면 전체 시작한 날로부터 하면 BC535년부터 BC516년까지 하면 20년이죠.
20년 중에 그러면 공사를 한 4년간 하다가 중단된 거예요.
4년 정도하다가 되었다면 그러면 돌아와서 한 5-6년 동안에 나름대로 노력을 했단 말이죠. 그 성전 짓다가..
그렇게 중단된 채 9년 정도 지나가버리고, 그리고 학개 스가랴 나와서 지금 이야기 하는 분위기거든요.
그러면 돌아온지 하면 한 15년 동안 살아올 때 그 바벨론의 화려하고 잘 정돈되고 도시 문화가 완벽하게 구축된 그런 곳에서 살다가 예루살렘에 와서 거기 수도물이 나오겠어요? 뭐가 나오겠어요?
어디가서 물 길어다가 산다는게 정말 어려웠거든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스가랴가 와서 지금 일할 그 때가 현실적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고 낙심되고 당혹스럽고..
그러면 도대체 15년 씩이나 이렇게 건축이 완성이 안 되었거든요.
시작한지 공사가 중단된 것은 9년 되었다 쳐도..
공사가 중단된 채 9년 씩이나 가서 백성들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있었겠죠.
진짜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것 맞나? 그런 생각이 들겠죠?
하루 이틀도 아니고 9년이면 긴 시간이 아녜요?
9년 동안 아무 도움도 없이 성전은 그냥 방치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돕기는 뭘 도와?’
그래가지고 성전 공사가 중단된 이것 때문에 은근히 지도자들에 대해서 불신이 생기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사회가 지금 대통령을 믿고 하던 시대가 별로 없어요.
이승만 대통령때 처음에 일제압박 밑에 있다가 해방되어가지고 이승만 대통령이 오니까, 우리는 이승만이라는 사람이 하도 오래하고 하니까 저는 종신 대통령인줄 알았어요.
그리고 정말 존경할 수 있는 인물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순 독재자에다가 도대체가 귀가 멀어가지고 말이 안 들어가는 거예요.
국민들의 소리가 하나도..
그래서 밥을 못먹는다 하니까 고기 먹으면 될 것 아니냐 한다고..
그러니까 그 뒤에 윤보선 대통령 하다가 국군통수권자가 별 두개짜리 한테 밀려나가지고 박정희에게 18년 동안 오랫동안 했는데,
처음에 순수한 뜻으로 했다손쳐도 나중에 순 독재자에다가 유신헌법에다가, 유신헌법이 종신헌법이죠. 사실..
그러다가 총 맞아죽고 그 뒤에 전두환이 나와가지고 생사람 잡아다가 삼청교육대 보내고, 그 뒤에 노태우 김영삼..
우리 사회도 지금 점점 지도자에 대해서 신뢰가 깨어지는 것 같아요.
민족의 어른도 없고..
그래도 잘 살 잖아요. 아직은..
쇠고기 들어오면 문제가 될지 모르는데, 어떻든 지도자들에 대해서 신뢰가 깨어지니까 살 맛이 안 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오늘날도 지도자가 잘 하든 말든간에 속아도 속아서 사는 것이 편안해요. 사실..
이북 사람들 꽤 행복한 모양이야. 배는 고파도 속아서 사니까..
우리는 너무 지도자들에 대해서 속속히 아니까 안 행복하죠.
그래서 이 때에 지도자들에 대해서 신뢰가 깨어진 것은 첫째는 스룹바벨이 너무 추진력이 없다는 거예요.
제가 볼 때도 추진력이 없는게 맞는 것 같아요.
공사 시작한지 15년 정도 아무 것도 안 되고, 9년 씩이나 중단되어가지고..
한 5년 하다가 중단되어가지고 9년씩이나 아무 진전도 없고..
추진력 없는 거죠.
거기다가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이방 여자를 취해가지고 아내로 삼았죠.
이래가지고 지도층들이 신뢰를 받지 못합니다.
이게 참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 다음에 여전히 강대국들은 그냥 강대국으로 남아 있으니까 강대국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죠.
주변 열강들 강대국들 아니면 옆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공사를 중지시키고 훼방하고 이런 것도 은근히 부담스러운 그런 면이죠.
그리고 지금 현재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이 5만명 정도가 돌아왔는데, 그 사람들이 사는 삶의 소식이 그다지 희망스럽지 않고 또 어떤 활기 있어보이지도 않고 진척되는 것 같지도 않고 하니까, 2차 포로귀환도 안 되고 있어요.
그래서 이 스가랴서를 보면 바벨론에 있는 사람들을 빨리 돌아왔으면.. 우리끼리 너무 힘드니까 같이 많이 돌아왔으면 하는 마음이 여기 몇군데 있고,
하나님께서도 돌아오기를 독려하는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돌아오라는 거예요.
여기 괜찮으니까 돌아오라.
이런 것을 여러번 이야기 하거든, 왜 돌아오라 하겠어요?
안 돌아오니까..
안 오고 자꾸 거기에 눌러 붙을려고 하니까 돌아오라는 거야.
이런게 있어요. 나중에 짚어드릴께요.
하나님께서도 은근히 그 바벨론에 너무 정붙이지 말고 돌아오라는 얘기를 한다고.. 여러 번이나 그것도..
그러니까 지금 바벨론에서 1차 귀환과 2차 귀환 사이가 79년 차이가 난다니까..
79년이면 일반사람들 어릴 때에 와도 죽을 때 안 돌아오는 것 아녜요?
그냥 우리만 괜히 와가지고 우리만..
1차 오고 2차 달달이 줄줄이 올줄 알았는데 안 오고 아예 거기에서 사람들이 살다가 거기에서 죽어버리고 말이죠..
바벨론에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거야.
그 다음에, 거기다가 아까 얘기 했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거예요.
여러분 고난이나 역경이나 어려운 질곡의 날이나 어두운 터널같은 날이 길어지면 사람이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게 되고, 하나님도 계신가 마신가.. 하나님은 정말 우리와 함께 하시나 마시나? 함께 하기는 뭘 함께 해? 함께 하면 이 모양이냐 하고 그런 낙심이 되는 거예요.
이해가 되죠?
여러분 지금 스가랴서를 이해할려면 그런 스가랴가 일하던 그 시대를 이해해야 돼요.
그러니까 보통 신학적으로 유식한 말로 콘텍스트라고 해요.
성경이라는 텍스트가 이해될려면 콘텍스트 상황.
이 텍스트가 주어졌던 콘텍스트가 이해가 되어야 이것도 이해 됩니다.
그래서 제가 도움을 드릴려고 하는 거예요.
어떻든 사람이 거짓 소망이라도 소망이 있어야 돼요.
믿음도 있어야 되지만 소망이 있어야 돼요.
소망이 없으면 믿음도 흔들립니다.
농사짓는 사람이 내년에 또 흉년들값이라도 내년에는 잘 되겠지.. 이런 거짓소망이라도 있어야 된다니까.. 사실..
경기가 지금은 안 좋지만 앞으로 경기가 좋아지겠지..
이런 거짓소망이라도 있어야 되는데, 앞으로 봐도 뒤로 봐도 어디를 봐도 눈 뜨고 어떤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지 않고는 현실적으로 소망이 없는 거예요.
굉장히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여러분 키에르케고르라는 덴마크의 우수의 철학자 우울한 신학자가 쓴 책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이 있잖아요.
죽음에 이르는 병이 뭐냐 하면, 소망 없음이예요.
희망 없음 그 자체가 죽음이나 마찬가지다.
아무 곳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도 희망을 만들어 낼 수도 없게 되면 사람이 죽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한번 여러분 우리가 아무데서도 희망이 안 보인다 하면 살 수 없겠죠.
아직은 우리가 믿음이 있고 소망이 있으니까 경험을 못해봤죠.
도무지 돌이킬 수 없고 어떤 희망을 만들어낼 수 없다면 산다는 의미가 다 없어져 버려요.
제가 볼 때 스가랴와 학개 선지자가 외칠 때에 현실을 볼 때 아무 희망이 없어요.
여러분 이 이후에도 적어도 60년 가까이, 58년 지나서까지 2차 귀환이 안 이루어지거든요. 에스라가 돌아올 때까지..
그러니까 낙심 돼죠.
5만명 그것가지고 무슨 나라가 되겠어요?
그 다음에, 지도층 사람들이 이방여인과 결혼을 자꾸 해 가는데, 나중에 에스라가 와서 보니까 거의 다 했다고 하죠?
에스라서를 읽어보면 그 명단이 쭉 나오는데, 백성의 방백과 두령과 제사장들이 그 일에 앞장을 섰대. 이방여자를 취해서 아내를 삼는 거야.
왜냐하면 아내가 안 온 거야.
안 온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안 온게 아니고 대제사장 여호수아부터 시작해가지고 지도층 부인들이 더 안 온거야.
바벨론 생활에 익숙해져가지고 편안한 삶에 그냥 안주하고..
그리고 남자들이 독처하는게 좋지 못하거든요.
그러니까 결국은 이방여자를 취해서 아내를 삼고..
이게 한두명이 아니고 나중에 에스겔이 3개월 동안 조사하지 않습니까?
이것 때문에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느냐?
일반사람들은 말은 하지 않지만, ‘지도자들이 이 모양으로 하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기는 뭘 하겠나? 틀렸다. 완전히 틀렸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그 다음에, 자신들의 노력이 부질없어 보이는 거야.
노력을 안 할 수도 없고 하기는 하는데, 노력한게 무슨 일이 될 때 좀 빨리 빨리 진척이 되어야지, 진척이 안 되고 너무 지지부진하게 되면 ‘우리가 하는게 이게 다 부질없는 일이 아니냐?’ 그런 생각이 자꾸 드는 거죠.
그 다음에, 예언들이 너무 더디게 이루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예언이 더러 있거든요.
메시야가 온다든지 여러 예언들이 있는데, 도대체 캄캄하게 예언이 하나도 이루어지는 것 같지 않다.
그 다음에, 메시야 신앙까지 흔들리는 거야.
메시야가 올려면 이 어려울 때 와서 도와줘야지..
언제 올려고 지금까지 안 오고 하면서 항상 유대인들은 메시야 신앙, 유일한 신앙이 메시야 신앙인데, 전혀 메시야가 올 것 같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아까 스가랴서 9장에 ‘네 왕이 온다. 오는데 겸손하게 온다.’ 그런 얘기 하죠?
왜 그런 온다는 비젼을 보여주느냐 하면, 메시야 신앙이 흔들리니까 메시야 신앙을 불어넣는 거예요. 예언자가..
그게 흔들리면 다 흔들리죠.
오늘 우리가 예수님 재림의 신앙이 흔들리게 되면 이것은 근본문제죠.
그래서 스가랴서 안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 보여주는 계시를 볼 때, ‘아 메시야 신앙까지도 흔들리고 있었구나.’ 이런 것을 느낄 수 있어요.
그 다음에,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저 너무 지나치게 두려워만 하는 거야.
너무 두려워해..
여러분 사람이 너무 두려워하면 지혜고 뭐고 문을 닫아버려요.
하나님을 너무 겁없이 하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겁을 내는 것도 문제야.
그래서 스가랴에 보면 하나님을 너무 겁내지 말도록 은근히 위로하는 그런 말씀이 꽤 여러번 나와요.
그래서 전에 바벨론 포로 가기 전에 무슨 죄를 짓다가 나라가 망했는줄 알기 때문에 알면 알수록 하나님이 복은 고사하고 천벌 내리지 않으면 다행이다.
이렇게 두려워 하는데, 그래서 스가랴서에 보면 ‘하나님이 벌 줄 마음이 전혀 없다.’ 자꾸 그런 얘기를 해요.
‘지금은 내가 오히려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은혜 베풀고 복 줄 마음으로 충만해있다.’
그런 얘기를 자꾸 하는 거예요.
백성들이 너무 겁을 내고 너무 두려워하니까 그런 거예요.
그 다음에, 옛날에 성터가 없는데 와서 일을 한다면 전부 새롭게 하는데, 옛날 폐허는 보니까 폐허가 규모가 굉장하거든요.
굉장한 것에 비해서 성전 짓는 것도 초라하고 서글프고..
그런 재정적인 여유가 있어서 석공이나 건축기술자 불러서 집을 반듯하게 짓는게 아니라, 자기들 사는 집이나 성전이나 하나도 볼품있는 게 없으니까 하다가 낙심하는 거죠.
전에 있던 교회, 저는 항상 작은 예배당 작은 교회 섬기다보니까 큰 예배당 이런 것 엄두도 못내고 시골교회에 나는 조그맣게 지어, 우리 시골교회가 부흥은 고사하고 자꾸 줄어들텐데, 예배당 뭐하러 크게 짓겠느냐?
저는 믿음이 없어서 그러면 장로님도 그래요.
‘목사님 말씀 맞는데 그래도 우리는 평생에 다시 짓지 못할 텐데, 예배당 지어놓고 볼 때마다 기분 좋아야 되는데, 볼 때마다 서글프면 안 된다’는 거야.
빚을 내어서라도 볼만하게 짓는다는 거야.
그래서 사실 시골교회라도 전에 있던 무안교회는 반듯하게 지었죠?
짓고나서 보니까 장로님 말이 맞는 거야. 내 말은 틀린 것이고..
가만히 보니까 옆 교회에 경쟁심이 있는 거야. 속으로..
그 때 성도수가 경쟁하는 교회는 우리 배나 되는데, 그 교회 만큼 지어야 된다는 거야. 성도 수가 절반도 안 되면서..
그런데 나중에 그만큼 지었거든요.
그 경쟁심리 때문에 크게 지을려고 하는 거야.
그래도 힘은 들어도 역시 반듯하게 지으니까 사람들이 인정을 하는 거야.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외모를 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지만 세상 사람들은 외모를 보는 거야.
예배당도 너무 초라하고 하면 교회가 잘 안 돼요.
여간 무슨 특별한 능력과 은사가 있거나 그러면 몰라도 지금 개척교회 어디 2층이나 지하나 얻어가지고 초라하게 해봐.. 사람들이 안 오는 거야.
믿는 사람도 안 오는데, 안 믿는 사람이 오겠어요?
그러니까 일하던게 너무 초라하고 서글픈 거야.
그리고 새로운 삶에 대해서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
누가 딱부러지게 지도하는 사람이 없어. 그 때..
스룹바벨 해봤자 아시는 대로 워낙 신사이고 워낙 학자이기 때문에 느헤미야처럼 백성들 신칙하고 단속하고 이런 것 잘 안하거든.
내가 볼 때 스룹바벨도 저처럼 국민들을 거의 방목했지 않았나..
그저 네가 알아서 하라. 그냥..
그렇게 하는데, 거기에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이방여자 취해가지고..
그러니까 그 문제가 상당히 사회적 이슈예요.
그래서 왜 그 스가랴 3장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 이방 여자 취한 것은 하나님께서 크게 문제 안 삼는다.’ 하는 것을 보여주시느냐 하면, 백성들이 그것을 너무 크게 문제삼고 사탄이 그냥 두겠어요?
그러니까 그것을 일부러 그렇지만 여자가 안 와서 그런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넘어가거든..
그런 것을 보여주면서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낸 줄 알리라. 그런 말이 스가랴서에 나오는 겁니다.
백성들이 삶에 대해서, 지난번에 금식도 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누가 딱부러지게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야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혼자 해결이 안 되니까 물으러 왔죠?
‘4월과 5월 중에 재계하리이까’ 하면서..
어떤 원칙이 없어요.
그 다음에, 포로귀환 후에 후속적인 예언자의 어떤 음성이 없어요.
대제사장 여호수아나 스룹바벨이 뭘 가르치는 것은 아니고, 예언자가 와서 뭐라고 해야 되는데 아무도 없는 체 지금 포로귀환해온지 근 20년째 아무 예언도 없다가 학개 스가랴가 함께 나타난 거거든요.
그 때까지 예언자가 없으니까 교사도 없고 스룹바벨도 그리고 여호수아도 그렇고, 백성을 지도할만한 인물이 없으니까..
백성이 그야말로 사사기때처럼 각기 자기 소견대로 행동하는 거야.
그리고 장단기 계획, 가까운 데 혹은 멀리 어떤 비젼 목표 이런 것이 전혀 설정이 안 되었어요.
그 다음에, 주변 부족들의 위협과 훼방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그런 여러 정황들이 스가랴가 일하던 그 시대에 사람들의 사회적 분위기, 사람들 심리상태 이런 것을 우리가 어느 정도 알고 그러고나서 스가랴서를 보면 조금 더 쉽게 보이는 거야.
‘아 그래서 이런 말을 하셨구나.’ 알 수 있는거죠.
이제 9장 봅시다.
[스가랴 9장]
1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하드락 땅에 임하며,
‘하드락’은 수리아 지방의 북부에 있는 도성 이름입니다.
.. 다메섹에 머물리니 세상 사람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 봄이니라
2 그 접경된 하맛에도 임하겠고 두로와 시돈은 넓은 지혜가 있으니 그들에게도 임하리라
3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보장을 건축하며 은을 티끌같이, 정금을 거리의 진흙같이 쌓았은즉
두로가 배부르고 교만하고 잘나간다고 하지만, 에스겔서 26장 27장 28장에 있는 대로 ‘두로는 곧 망한다’ 하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사람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로를 겁을 내는 거야.
두로가 자기들의 든든한 보장, 보장이라는 것은 자기들을 보호하는 장벽 성을 가졌다고 큰소리 떵떵치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성도 시원찮으니까 겁이 나는 거죠.
이스라엘 백성이 겁나는 나라들을 하나님께서 언젠가 머지않아서 다 손봐줄 때가 있어. 염려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4 주께서 그를 쫓아내시며 그의 바다 권세를 치시리니 그가 불에 삼키울지라
이것은 알렉산더때에 이루어지는 거죠.
5 아스글론이 보고 무서워하며,
‘아스글론’은 블레셋의 한 성읍이죠.
.. 가사도 심히 아파할 것이며 에그론은 그 소망이 수치가 되므로 역시 그러하리라 가사에는 임금이 끊칠 것이며 아스글론에는 거민이 없을 것이며
6 아스돗에는 잡족이 거하리라 내가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고
7 그 입에서 그 피를, 그 잇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하리니 그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두목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같이 되리라
‘에그론’ 하는 것도 블레셋의 한 성읍이고, 여부스는 옛날에 예루살렘에 거하던 족속인데, 베나민 족속이 쫓아내지 못하고 다윗이 쫓아내고 다 노예로 삼았죠.
그런 것처럼 그 주변 나라들 겁낼 것 없이 망하든지 너희의 노예가 될테니까 두려워할 필요 없다. 그런 얘기예요. 이게..
그들이 주변 나라들 겁내고 있었다 하는 것을 알고 나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는 말씀 뜻을 이해하겠죠?
그 다음에,
8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왜 기뻐하라고 하는거죠?
기뻐하지 않으니까..
기쁨이 없고 염려와 근심과 탄식과 낙심과 좌절과 의기소침과 그런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다시 일깨우는 거야.
왜냐하면,
..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왕이 온다.
왕이 언제 오느냐? 우리는 왕이 없느냐? 메시야는 언제 오느냐? 이렇게 낙심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왕이면 좀 큰 것을 타고 오지 그래..
우리 생각에는 그럴지 몰라도 그런데 이 온다는게 언제 오느냐?
스가랴가 말한 날로부터 450년 500년 후에 오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예언을 가지고 너무 조급하게 생각했다가는 큰 코 다칩니다. 작은 코도 다치고..
속히 온다는게 보통 2000년 후에 오는 거야. 2000년..
왜냐하면 우리 수준과 하나님 수준이 달라요.
하나님 편에서 볼 때 2000년 해봐야 두 사람 평생밖에 안 돼.
옛날에 아담이라든지 노아 이런 사람은 900년 이상 살았잖아요.
2000년 해봐야 두 사람 평생밖에 안 돼요.
우리 개념과 다르다는 거죠.
그래서 10절에,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 되어가지고 그의 정권은,
..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여러분 그 왕권이 오늘 석전동까지 왔잖아요.
예수님의 왕권이 무학산 밑에까지 왔잖습니까?
11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12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
거기 줄을 그으세요.
이게 지금 바벨론에서 아직도 안 돌아오고 있다니까.. 속 썩이는 것들이..
그러니까 ‘소망을 품었던 갇혔던 자들아,’ 바벨론에 있는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죠.
‘너희는 보장으로..’ 하나님이 보호하는 장벽이 되어 줄테니까..
이 보장으로 요새로, 원수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쌓아놓은 요새, 하나님이 우리의 요새가 되니까, 돌아올지니라.
..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라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
‘갚아준다’는 것은 원수 갚는게 아니고 보상해 준다는 거죠.
배나 보상해 줄테니까 돌아오라..
왜 자꾸 돌아오라는 거예요? 안 돌아오니까..
여전히 바벨론에서 ‘여기가 좋다.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면서 안 돌아오니까 하는 거야.
아까 제가 배경을 말씀드렸으니까 쉽죠? 이 말이 무슨 말인지..
13 내가 유다로 당긴 활을 삼고 에브라임으로 먹인 살을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을 격동시켜 헬라 자식을 치게 하며 너로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여러분 유대인들을 하나님께서 마치 당긴 화살처럼 해가지고 헬라인까지 너희가 칠 수 있어.
그게 언제 이루어지느냐 하면, 마카비우스 때..
신구약 중간사 마카비우스 때에 헬라의 문화를 가지고 쳐들어왔던 헬라장군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이런 것 다 물리치잖아요.
그런 것을 이야기 하는 거죠.
14 여호와께서 그 위에 나타나서 그 살을 번개같이 쏘아 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리시며 남방 회리바람을 타고 행하실 것이라
15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거기 줄을 그으세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보장이 되어주시고 호위하시리니,’
..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매 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취한 것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
16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떼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면류관의 보석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여기 약속들이 상당히 고무적이죠? 희망적이고.. 그렇죠?
그 당시에 처한 현실이 너무 암담하기 때문에 이런 고무적이고 희망스러운 비젼을 보여주는 겁니다.
만약에 그 시대가 너무 잘살고 배부르고 교만하면 너희가 졸딱 망할 날이 온다. 그렇게 까불다가는.. 이렇게 될덴데..
너무 참담하기 때문에 이런 비젼을 불어넣는 거죠.
그런 예언서를 볼 때 항상 그 콘텍스트 그 당시 상황 그 시대적 배경 시대적 분위기.. 이런 것을 읽은 후에야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는 거예요.
17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소년은 곡식으로 강건하며 처녀는 새 포도주로 그러하리로다
그러니까 청년 남녀들이 먹을게 일단 곡식이 있어야 되고 포도주가 있어야 되죠.
그러니까 강건하게 될테니까 낙심하지 말라는 거야.
이것은 우리에게 하신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먹고 배불러서 이런 말이 무색하죠.
그 때는 너무 참담하고 암담하기 때문에 이런 희망의 말씀을 주신 거예요.
사실은 이런 복을 주셨고..
문제는 안 돌아온거야.
이렇게까지 말해도 그 아까 9장 12절에,
12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
하고 돌아오라 해도 안 돌아오고 있다가 에스더 시대에 끔찍한 사건을 당하는 거예요.
까딱하면 다 죽을뻔 했잖아요. 유대인들이..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에스라가 정신을 차리고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오는 거죠.
그래서 그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그 시대의 배경을 우리가 어느 정도 알면 여기 하나님 하시는 말씀과 또 그 심정과 그 시대의 지도자들의 어떤 입장 이런 것도 보이는 거죠.
조금 더 봅시다.
[스가랴 10장]
1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2 대저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치 않은 것을 보고 거짓꿈을 말한즉 그 위로함이 헛되므로 백성이 양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그러니까 드라빔이라든지 허탄한 우상같은 것은 항상 너희를 망하게 하는 것이니까 봄비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그 때 비가 안 온 것 같죠?
학개서에 보면 비가 안 왔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10섬 곡식더미에 가보니까 2섬 3섬밖에 안 나왔다. 왜 그러냐?
하나님의 집이 황무하였는데 너희는 각각 자기 집에 빨랐다는 거야.
그래서 책망할 일이 사실 많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그렇지만 책망은 여기 스가랴서에 안 나옵니다.
왜 안나오느냐 하면 지난번에 말씀드렸죠?
학개 선지자 같은 100살된 어른이 책망할 수 있는 것이지, 새파란 30살 짜리 젊은이가 책망을 해봐. 그러면 안 되거든..
그러니까 스가랴 선지지가 받은 메시지가 책망 보다는, 책망을 통해서 그들이 회개했기 때문에 위로가 필요한 거야.
위로와 소망이 필요한 거죠.
그래서 스가랴 전체의 내용은 위로와 소망을 쭉 이야기 하다가 끝에 가면 약간의 책망이라기 보다도 ‘잘못된 사람들은 심판이 있다.’ 그런 얘기도 몇군데 언급 됩니다.
3절입니다.
3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수염소들을 벌하리라,
그러니까 에스겔서 34장에 보면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고, 양들 중에서도 살찌고 힘센 양들을 심판한다. 그런 말씀이 있었죠?
다 까먹였죠? 보니까..
에스겔서 34장에 보면, 양과 양 사이에 내가 심판한다. 큰 양들이 풀을 먹고 나머지 짓밟아 버려서 딴 양이 못 먹게 하느냐?
이렇게 떠밀쳐내느냐? 이런 얘기도 나와요.
그래서 여기,
3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수염소들을 벌하리라,
수염소는 떠받는 거죠. 힘좀 있다고..
..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권고하여 그들로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
4 모퉁이 돌이 그에게로서, 말뚝이 그에게로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로서, 권세 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로서 나와서
5 싸울 때에 용사같이 거리의 진흙 중에 대적을 밟을 것이라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한즉 그들이 싸워 말 탄 자들로 부끄러워하게 하리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유다 족속이 지금 굉장히 약해보이죠.
그야말로 한 5만명 와서 나라 같지가 않아..
그런데 이들을 언젠가는 강하게 해서 주변 나라들을 이기게 할 것이다.
사실 그렇게 되거든요. 나중에 신구약 중간사에 가면..
물론 그들이 말라기때에 가서 하나님께 신앙도 없이 하다가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지는데,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 진노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고 헬라인들이 와서 할 때 여러번 이길 수 있게 했어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황인데 이기는 거예요.
6절입니다.
6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이 내게 내어 버리움이 없었음같이 되리라,
그러니까 바벨론에 쫓겨났던 사람들인데도 전혀 옛날을 생각할 필요없이 희망을 가지고 일할 수 있게 하겠다. 그런 얘기죠.
..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을 들으리라
그러니까 ‘듣는다’는 말은 받아준다는 뜻이죠.
7 에브라임이 용사 같아서 포도주를 마심같이 마음이 즐거울 것이요 그 자손은 보고 기뻐하며 여호와를 인하여 마음에 즐거워하리라
계속 희망적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8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 불어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같이 번성하리라
9 내가 그들을 열방에 뿌리려니와 그들이 원방에서 나를 기억하고 그들의 자녀와 함께 다 생존하여 돌아올지라
10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 돌아오며 그들을 앗수르에서부터 모으며 길르앗 땅과 레바논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리니 그 거할 곳이 부족하리라
지금 자꾸 돌아온다는 얘기를 하죠?
왜 이런 얘기를 하겠어요?
사람들이 왜 안 돌아오나 생각하니까..
왜 좀 우리만 돌아오고 우리만 고생이냐?
왜 그 바벨론에서 남아 있는 사람은 안 돌아오나? 하고 애를 태우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돌아온다. 돌아온다...
엄마 시장에 갔는데 안 오니까 누나가 자꾸 ‘온다 온다’ 하죠.
‘조금만 있으면 엄마 온다. 맛있는 것 사가지고 온다.’ 이렇게 하는 것처럼 그 시대에 안 돌아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이 너무 속이 상하는 거야.
그러니까 ‘왜 안 돌아와? 돌아온다.’ 그런 얘기를 하는 거죠.
오히려 그 거할 곳이 부족하리라.
아파트가 동이 나고 전세집도 못 얻게 될 것이다.
그런 당시 배경을 사람들의 분위기를 알면 이런 말들이 아하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온다 하지만, ‘곧’ 하고 ‘속히’ 하는 말은 불특정기간이 되어서 알 수가 없어요. 이게 얼마인지..
그래서 오래 참아야 돼요.
때로는 우리가 오래 참고 믿고 기다리고..
믿음 포기하고 소망도 포기하고 그러면 아무 것도 안 되죠.
.. 그들을 이끌어 가리니 그 거할 곳이 부족하리라
11 내가 그들로 고해를 지나게 하며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홀이 없어지리라
그러니까 여전히 앗수르 겁내고 또 애굽을 겁내고 하는데, 그 염려하지 말라 그것 말이죠.
12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케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을 받들어 왕래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자 이리 보세요.
아까 제가 배경, 분위기 설명을 하고 나서 보니까 조금 쉽죠?
그것 이야기 안 하고는 아무리 이야기 할려해도 이게 무슨 말인지 왜 이런 말을 해야 되는지 실감이 잘 안 납니다.
성경을 볼려면 그렇게 보면 성도님들이 좀 어렵죠.
왜냐하면 그 시대 배경을 종합적인 계속해서 바벨론 포로가기 이전에 가서 있을 때 폐허가 된 후에 돌아왔을 때 정황. 이런 것까지 연결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은 제가 저도 안 가봤습니다.
여기 왜 이런 말씀을 해야 되는가 생각해보니까 그 분위기가 생각이 나는 거예요. 떠올라요. 그럴 수 있겠다.
그러니까 자꾸 절망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암담해하고 이런 분위기는 참 힘들죠.
여러분 성도들도 마찬가지이고 사업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야.
여러분 사업한다는게, 저야 사업을 안해봐서 잘 모르는데, 해도 돈 버는 사업은 못해봤으니까..
지금 기업인들이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국민들의 여망에 부응할려면 기업에 투자를 해야 돼요. 그렇죠?
투자를 해야 되는데, 기업인들의 입장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쉽지 않습니다.
투자를 해가지고 무슨 제품이 나왔다. 막 나오는데 어디에서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벤처기업이 나와서 그것보다 더 좋고 값싼 것을 만들어봐.
그러면 내가 여태 시설 투자한 것 그냥 다 무효가 될 것 아녜요?
그러니까 엄청난 획기적 기술 그런 확신이 없으면 투자 잘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희망이나 소망이라든지 열심히 일하는 것도, 일할 때 어떤 소망이 보이고 가능성이 보이고 여지가 보이고 이런게 보여야 일을 하는 건데,
지금 현실적으로 학개 스가랴 시대의 사람들 눈에 너무 비젼이 안 보이는 거야.
현실을 볼 때 너무 참담한 거야.
그러니까 학개가 ‘하나님 잘못이 아니고 너희가 잘못했다.’ 하고 책망을 한 후에, 책망만 하고 말면 안 되잖아요.
학개는 조금 있으면 내가 천하만국을 진동시킬 것이고 만국의 보배가 갑자기 이를 것이다. 추상적으로 몇마디 하고 돌아가셨어요.
그 후속으로 일을 해야 될 사람이 스가랴라는 젊은 예언자인데, 젊은 선지자가 하나님께로부터 여러 이상을 보고 그 뜻을 전해서,
중요한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이 절대 낙심하거나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게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메시야가 올 때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사람으로 민족을 세워야 되니까, 그런 상황에서 이런 말씀이 주어진 겁니다.
조금 말씀드렸으니까 다시 집에 가서 한번 스가랴 서를 쭉 읽어보시면 제가 아까 이런 저런 분위기를 한 열댓가지를 이야기 했는데, 그런 것이 다시 보이면서 스가랴가 이렇게 말할 수 있고 또 이런 비젼을 보여주고자 했던 모든 것이, ‘그 시대의 소망과 위로와 소망의 비젼을 제시하는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11장은 다음시간에 보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하나님의 사람 스가랴가 젊어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지만, 연세 많은 학개 선지자는 먼저 하늘나라로 가고, 젊은 사람이 맡은 그 시대가 너무 암담하고 현실이 너무 불안하고 또 낙심될만한 그런 상황에서 그래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신실하게 증거하는 그런 모습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러한 때에 정말 어두운 때 어려운 때에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낙심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정말 역사가 저물어 해가 기울 때까지라도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힘차게 일하고 충성되이 일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