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계 1장 1-3절
설교제목 : 하늘의 눈으로
깊이 반성해야할 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2024년을 마감하는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2024년 한 해도 부족한 가운데서도 지키시고 인도하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한해를 힘차게 출발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한 해의 끝 앞에 서 있습니다. 한 해를 시작할 때 이곳저곳에서 들리는 전쟁과 재난의 소식이 들리어 불온하다고 새해 첫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가장 복잡한 정치 사회적 혼돈의 한복판에 한국 사회가 있다는 것이 마음이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잘못을 반성하기보다는 권력 유지를 위해 혈안이 된 정치지도자와 그들을 비호하는 정당,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동조하는 지지 세력들의 모습을 보면서 답답함이 가시지 않습니다. 조금은 마음 편히 우리의 일상을 살아낼 날을 기도하게 됩니다. 며칠 전 성탄절에 대통령과 정치지도자들이 성탄예배를 드린 모습을 보면서, 저들은 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곱씹으며 뉴스를 보았습니다. 구약성서에서는 폭정을 행하며, 이방신을 섬기면서도 성전을 찾아가 예배했던 악한 왕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역사의 현장에는 권력의 이름으로 종교를 이용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자들은 결국 엄위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섰습니다. 그럼에도 그 시대를 이끌었던 왕의 범죄는 나라 전체의 죄악으로 이어져 연대의 책임을 짊어졌음을 기억할 때, 왕의 잘못은 결국 나라 전체를 도탄에 빠뜨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동일하게 경험하였다는 사실이 더욱 경각심을 갖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 전체의 중심원리가 병들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당실록》에 보면, 고대중국의 황제는 나라의 재난이 일어날 때, 스스로 그 모든 문제를 자신에게 돌리고, 도 안에 머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가뭄이 들면, 당나라의 통치자 고조는 스스로 가두고 나침반의 네 방위를 향하여 절을 하며 기도했다. 다른 황제들은 그들의 신하들이 궁정 정치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들은 본궁에서 떨어져서 음식 섭취를 줄였다. 음악 연회 없이 지냈고, 종들의 수를 천명으로 줄였다. 그들은 사냥매와 사냥개를 풀어주었고, 세금 면제를 공포했다. 죄인들을 사면하고, 강제 노역과 공공사업의 지속을 중단했다. 자선을 위해 기부하고, 감옥에 갇혀 있는 자들의 사례를 재고하고, 관리들의 일을 조사하였다. 서기 839년에 큰 가뭄이 들었을 때, 문종은 사흘 안에 비가 오지 않으면 보위에 오르는 것을 삼가겠다는 뜻을 밝혔다.”[Liu Guan Ying(1961) : “『당실록』에 나타난 특이한 자연현상과 그 해석Die ungewohnlichen Naturerscheinungen in den T’ang-Annalen und ihre Deutung”, In Symbolon: Jahrbuch fur Symbolforschung, Vol.2, Schwabe, pp.34–35.]
우리의 안과 밖에 전체 세계와 연결되고, 국민을 책임지고 자신을 깊이 반성하며, 책임질 줄 아는 그런 지도자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의 눈으로
오늘날 우리 세계는 마치 묵시록의 세계처럼 전쟁의 피로 얼룩져있고, 대중의 무의식적 권력 충동의 투사를 짊어지고 세계를 혼란스럽게 하는 자들이 다시 일어섰고 일어서려는 중입니다. 광포해지는 이 세계가 마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계시록의 장면과 닮아있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세계의 갈등과 위협 앞에서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생각해보자고 하면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이 나시나요? 아마 기억하시는 분이 없을 것입니다. 다시 요한계시록 1장을 꺼내어 우리는 한 해의 시작에서 무엇을 이야기했는지 곱씹고자 합니다.
1장 1절은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라고 시작합니다. 달리 번역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일들의 기록입니다.” 여기에서 ‘계시ἀποκάλυψις’라는 단어를 다른 말로 번역하면 ‘묵시’입니다. 그렇다면 계시 혹은 묵시는 어떤 의미일까요? “숨겨진 것을 밝히는 것” 또는 “미지의 진리에 대한 폭로 또는 현시”를 말합니다. 이런 묵시에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세계의 끝에 대한 이야기, 심판을 위한 메시야의 도래, 그리고 인간의 심판과 보상에 대한 내용이 폭넓게 나타납니다. 이런 묵시는 비밀스럽게 소개하는 형식의 계시를 담은 언어표현 속에, 보다 작은 형식으로 환상, 꿈, 현현, 천사와의 담론, 기도, 전설 등이 포괄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묵시를 일정한 체계 속에 담고 있는 글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명칭을 묵시문학(the apocalypse literature)이라고 합니다. 이런 계시 혹은 묵시는 하늘의 눈으로 땅을 보며, 숨겨진 하늘의 비밀을 밝히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사와 다가올 미래에 일어날 사건의 배후를 하늘의 관점으로 응시하는 것입니다.
결국 계시록을 통하여 우리는 하늘의 눈으로 세계의 모습을 보고, 초월적 관점으로 세계를 평가하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계시록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누가 이 세계의 주인인가? 역사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집단의식과 대중의 평가와 판단에 따라 자아는 모든 행동의 규범과 삶의 원칙을 규정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세적인 관점에만 치중하여 우리 앞에 곧 다가올 세계에 대한 큰 시선을 놓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아의 눈과 땅의 관점으로 세계를 주시는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하늘의 눈에 비친 이 세계와 우리 자신을 조망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것은 나 자신을 넘어 내 밖에 아르키메데스 점을 놓고 객관화하는 일입니다. 이 아르키메데스 점을 우리 신앙인들은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나의 숨은 동기조차도 평가하려고 하였습니다. 한국융연구원의 이부영원장님은 저에게 엽서를 보내주시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써주셨습니다. “우리가 모두 지혜롭지 못하니 새해에는 더욱 깊은 자기 통찰을 통하여 조금씩 지혜로워지도록 노력합시다.” 한 세기를 살아오신 분이 지혜롭지 못함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깊은 자기 통찰을 해나가자고 말씀하시는 것이 너무나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우리는 하늘의 눈으로, 보다 높은 시선과 깊은 관점으로 나와 이 세계를 바라보았는지 질문을 던집니다. 개인의 역사와 이 세계의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경험하며 살았는지 질문을 던집니다. 하늘의 눈으로 나와 이 세계를 보면서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의 일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계시의 전달자
요한계시록의 저자 문제에 있어서 전통적으로는 사도 요한이라는 주장이 있고, 요한 서신을 쓴 교회지도자로서 장로 요한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살아서 그때까지 환상을 보고 저술했을 것으로 보기보다는 요한서신을 쓴 장로 요한으로 저자를 상정하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계시록은 요한이란 권위자의 이름하에 기록된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계시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계시를 주시고, 그리스도는 자기의 천사를 보내어 자기의 종 요한에게 이 계시를 알리셨다(1)고 기록합니다. 계시록은 요한에게 보여주신 하늘의 비밀이며, 다가올 시간에 펼쳐질 그림을 상징언어를 통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2절부터 요한은 주체가 되어 자기가 본 것을 증언합니다. 요한은 계시의 중개자로서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하는 일을 감당합니다. 자신이 계시의 주체로서 말하지 않고, 자신을 묵시의 전달자로서 체험한 내용을 증언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한 개인이 엄청난 계시와 접속하게 되면 팽창되어 계시의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점유하려는 행태를 보일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신과 같은 예지력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려는 망상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 세계는 권력망상에 사로잡힌 자들로 인하여 더욱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여전히 러시아에서는 영원히 자신의 권력이 지속될거라는 믿고, 그것을 지키려고 정적자들을 죽이고, 외부의 적을 두어 자신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한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게엄선포를 마치 전쟁놀이 하듯이 선포하여 겁을 주려했다는 발상은 권력망상에 빠지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한 나라의 권력은 국민을 섬기하고 주신 것이지 다른 정적자들을 위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권력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능력이나 우리의 힘으로 축적된 자본도 영원할 수 없는 법입니다. 요한은 자신을 전달자로서 한계를 규정합니다. 마치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냥 의기양양하며 과시하려는 세상에서 한계를 규정하고 하늘의 소리의 전달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곧 닥칠 심판의 때
1장 3절의 말씀은 계시록의 결론인 22장 7절과 병행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과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읽고 듣고 그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그것을 삶의 언어로 번역하여 체화할 수 있는 자는 그 말씀이 그에게 새로운 힘과 능력이 될 것입니다. 그 계시의 말씀을 내 것으로 동화하는 자는 반드시 복있는 인생을 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그때가 가까이 왔다는 종말론적 시점에 더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 그 카이로스는 먼 미래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 미래의 투사된 것이 아닌 곧 가까운 때에 이 묵시의 말씀이 신속히 작용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때는 도적같이 갑작스럽게 찾아와 문을 두드릴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합니다.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은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말할 그 때에, 아기를 밴 여인에게 해산의 진통이 오는 것과 같이, 갑자기 멸망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니,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살전 5: 2-3).”
안일함으로 ‘평안하다’, ‘안전하다’ 외치며, 무의식의 관성으로 나태하거나, 두려움과 불안으로 삶의 모험을 감행하지 못하고 주저하여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다면, 심판은 밤의 도둑처럼 침투하여, 모든 에너지를 앗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가 바로 그 때가 될 수 있음을 알고 말씀을 부단히 실행하는 자는 오히려 그 심판의 때가 복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때가 가까이 와 있다는 이 말씀을 다시 붙들고, 우리에게 맡기신 삶과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과제를 안일함이 아닌 성실함으로 감당하며, 주님이 주신 복을 맛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