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
“말세제, 말세!”
내가 점심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 막 자리에 앉으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최 주간 님? 2층 전통찻집인데요. 손님이 찾아오셨네요.”
“손님 누구?”
“여자 분이신데요.”
“…!?”
백주대낮에 웬 여자? 전화 바꿔 봐요, 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누구이면 무엇 하랴. 정년퇴직 날짜나 세고 있는 나에게 어차피 반가울 여자도, 미울 여자도 있을 리 없다.
7층에서 2층으로 내려가는 것은 잠깐이었다. 엘리베이터 벽면 거울 속 나의 얼굴이 그 앞의 실제 나에게 “됐네요, 됐어!” 하고 말했다.
아, 나는 아직도 거울 속의 나를 훔쳐보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한다. 이렇게 멀쩡한 나를 ‘정년’이란 이름으로 내치려 하다니, 망할노무(놈) 회사! 사장이란 작자는 지금도 멋진(?) 여자가 전통찻집까지 나를 만나러오는 것을 알기나 할까, 씨팔노무 세상!
찻집 문은 나의 손이 닿기 전에 안쪽에서 먼저 열렸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중년 여인이 보조개 위로 살포시 미소를 흘리며 걸어 나왔다. 설부화용(雪膚花容), 눈처럼 흰 살갗에다 꽃처럼 고운 얼굴이라니! 아~, 나는 감탄, 아니 감격했다.
“최 주간 님, 저 분이예요.”
찻집 여주인의 삼각 턱이 가리키는 것은 설부화용이 아니라,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는 양장 여인이었다. 멋지기는 고사하고 호박덩이 같이 투실투실 살이 오른 나이 든 여자가 나를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누구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참으로 설상가상(雪上加霜)이다. 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녀는 인상을 우거지상으로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에서 비명을 지르는 듯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최아무개 씨? 하이고, 참말로 최아무개 씨가 맞아요?”
“예, 내가 최아무개인데요.”
“어마나 세상에! 어쩌면 이럴 수가! 얼굴이 팍삭 상했네요! 쯧쯧…!”
이런 망발이라니! 나는 조금 전에도 거울 속의 나를 향해 “됐네요, 됐어!”라며 으쓱해 했는데…! 교양이라고는 서푼 어치도 없는 여자다.
찻집 여주인이 차 주문을 하면서 벌겋게 달아오른 나의 얼굴을 곁눈질하며 웃음을 삼키느라 덩달아 얼굴을 붉혔다.
“최아무개 씨, 내가 누구인지 알겠어요?”
“….”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떡였다. 여자 쪽에서 제 발로 찾아와 최아무개 씨 어쩌고 하는데, 차마 나는 너를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 여자로부터 아무런 기억의 연결고리 하나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참다못해 “너는 누구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잠을 자다가 남의 다리에 고약 붙이는 꼴은 아닌가? 이 여자가 내 이름을 들먹이기는 하지만,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은 아닐까? 날더러 “얼굴이 폭삭 상했다”고 한탄하는 여자! 아무리 뜯어보아도 잘난 얼굴은 절대로 아니고, 교양이나 정감이 가는 여자는 더욱 아니다. 학교 동기동창도, 고향 이웃사촌도 아니다. 취재를 하느라 만난 여자도, 산악회에서 어울렸던 여자 같지도 않다.
“최아무개 씨, 오늘 우리가 몇 년 만에 만났는지 알겠어요?”
“……허어?”
이 여자 말하는 것이 점입가경이다. 누구인지 기억조차 못 하는데, 어떻게 몇 년 만의 해후인지 짐작인들 하랴.
여자는 큰 입을 아주 벌려둔 채 나의 얼굴을 뜯어보느라 왕방울 같은 눈을 굴러댄다. 세상을 살다 보면 별일도 다 겪는다. 회사에 앉아있다 느닷없이 낯선 여자에게 불려나와 일방적으로 토해내는 비명인지 신음소리인지를 듣고 있어야 하다니!
그러고 보니 여자 얼굴이 유별나게 번들거린다. 눈을 닦고 보아도 매력이라고는 없는 이 여자, 그래도 졸부(猝富) 서방이라도 차고 있는 모양이다. 얼굴과 손에 귀금속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옷과 구두는 물론, 핸드백에서도 명품, 사치 냄새가 진동한다.
“최아무개 씨! 신문에 글 올리는 것 쭉 보며 잘 살고 있구나 하고 짐작은 했어요. 나도 그래, 우리집 아저씨 건설회사 하거든요.”
“…….”
“요새 사직동에 한 번 찾아갔는데, 하이고, 너무 많이 달라졌대요.”
“사직동?”
“최아무개 씨 집에 내가 한 번 갔었잖아요?”
사직동 집이라면 나의 총각 시절이다. 30년도 더 지난 까마득한 옛날이다. 이 여자가 나의 그 사직동 집에 왔었다니, 무슨 잠꼬대인가? 단칸방이나 다름없는 누추한 집이어서 여자는커녕 남자도 드나든 일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 사직동 우리 집은 외딴 곳에 쓸쓸하게 자리하여 옆집 순이도, 뒷집 옥이도 없었다. 그 집에 한 번 왔었다는 이 여자는 그렇다면 동네우물에 숨어산 처녀 귀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박 기사, 그거 이리 좀 갖고 와!”
그러나 귀신이 아닌,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들고 운전기사를 불렀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젊은이가 큰 보퉁이 하나를 내려놓고는 물러갔다.
“이거 저 멀리 모로코 여행 갔다가 사온 카피트에요. 그 때 내가 이불 호청(홑청)을 버려놓았다고 최아무개 씨 어머니한테 얼마나 야단을 맞았는지! 그 호청, 이 카피트로 갚아지려나 모르겠네!”
“뭐, 이불 호청이 어쨌다고?”
이번에는 나의 목구멍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자는 허리를 반쯤 일으키다 말고 엉거주춤 웅크린 채로 또 한 번 나의 얼굴에 쇳소리를 끼얹었다.
“최아무개 씨, 어쩌면 얼굴이 이렇게 폭삭 상했는지, 참 상상이 잘 안 되네요, 쯧쯧…!”
여자는 아주 긴 한숨까지 토해놓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탁자 위에 놓인 커다란 보퉁이, 모로코에서 사온 카피트, 그녀가 우리집 이불 홑청을 버려놓았던 것을 30년 만에 갚아주는 셈이란다.
아, 그 순간이다. 비로소 나의 머릿속에 언뜻 스치는 한 줄기 기억의 끈을 겨우 붙잡았다. 사직동 집에 살던 총각 시절, 못난 이 아들을 꾸짖던 어머니의 말 한 마디가 떠올랐다.
“말세제, 말세! 처이(처녀)가 나무(남) 집 이불 호청 다 배리(버려)놓고! 야, 이 경칠 놈아, 버스 안에서 만난 처이를 우짤라꼬(어쩌려고) 집에 데려와서 그랬노(그랬느냐)? 참 세상 말세제, 말세!”
나는 그제야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한숨을 토해냈다.
“아, 이 여자가 그 처이(처자)…?!”
저녁마다 포장마차를 순례하던 총각 시절, 골목길이며 공터며, 심지어 시내버스도 나에게는 ‘사랑의 보리밭’이었다. 된장인지 똥인지, 방인지 담벼락인지 가리지도 못한, 아, 나의 엉망진창 청춘이여!
“그래도 내가 그 처자 차버리기 잘 했네. 데리고 살았다면 이 여자도 폭삭 상했을 테니!”
<끝>
첫댓글 ㅋㅋㅋ 아, 나의 엉망진창 청춘이여!
엉망진창 청춘이 누군가에게는 큰 웃음을 안겨 주네요. ^^
멋진 청춘입니다. 재미있는 글입니다. ㅎ
아무래도 복 덩어리 놓친것 아입니꺼 ...ㅎㅎ 재미있는 꽁뜨 . 감사 합니다
아무데나 꽃밭이면 물을 준 보상 치고는 괜찮은 편이네요 ㅋㅋㅋ
와~~~ 재미 반전 단숨이 쭉 읽었네요 멀리서..
ㅎㅎ, 재밌네요. 고해성사 같아오.